[기획칼럼 – ‘2028 대입제도’] 학교에서 입시 위주 교육은 어떻게 버젓해질 수 있게 됐나?

| 과거 학교에서는 입시 위주 수업을 쉬쉬하며 했었지만, 이제는 버젓이 한다. 지난 글에서 입시 위주 교육의 폐해를 이야기한 데 이어, 이번 글에서는 그런 ‘교육’이 거리낌 없이 자행될 수 있게 된 경위를 살펴보았다.
학교 교육을 개혁하고 발전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추진된 정책들이 정작 학교 교육을 말아먹었다는 사실을 정리했다. 좁고 짧은 생각으로 빚어질 수밖에 없는 ‘국정 과제’ 같은 것들이 결국 그런 불행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학교와 교육의 본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경박하고 즉흥적인 교육정책들이 그 본연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부터 들추고 바루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
지난 12월 22일에 교육부가 2022년 개정 교육과정을 확정해 발표했다. 11월에 시안이 행정예고된 후 논란이 꽤 격렬해서, 그 결말이 쉽게 날까 싶기도 했는데, 연말 시한을 넘기지 않고 매듭지었다. 확정되는 과정을 보며 정권이 바뀐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 정부에서 마련했던 개정안에는 없었던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새롭게 들어갔고, 이미 들어있던 ‘성평등’이나 ‘성소수자’ 같은 용어는 빠졌는데, 새로 들어선 정부의 이런 손질을 두고 여러 단체와 기관 그리고 정당들이 달려들어 서로 공박했다. 진영마다 고집하고 싶은 용어들을 두고 사납게 다투었다. 으레 그래왔듯 교육부는 예고했던 안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교육의 정치화를 견제할 기구라는 명분으로 출범한 국가교육위원회도 별달리 조율하지 않고 넘겼다. 예고됐던 안이 거의 바뀜 없이 확정안이 되었다. 2022년 교육과정 개정에서 핵심 쟁점은 ‘정치적으로 바른’ 용어가 뭐냐는 데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할 듯하다.
학교 교육을 진정 걱정한다면, 2022년 개정 교육과정 문서(총론)에는 깊게 들여다보아야 할 용어나 규정들이 숱하다. 이런 말은 사실 꺼내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고 마뜩잖은 일이다. 우리나라 모든 학교에서 무엇을 어느 정도로 어떻게 가르치고 평가해야 하는지 규정하는 문서인 만큼, 교육과정 개정에 대해서는 마땅히 조목조목 따져야 하고 흠들은 바로잡아야 할 터이다. 그런 당연한 일은 이번 개정에서도 무척 소홀히 됐다. 관심은 교과별로 개설되는 과목 수나 시간 배당 그리고 역사나 정치 서술의 이념적 지분 같은 것에만 두었다. 과목 집단들이나 정치 진영들이 눈독을 잿밥에만 두고 아귀다툼하는 데서만 치열했다. 정작 교육적으로 짚었어야 할 사안들은 논의 의제로도 떠오르지 못했다.1
그렇게 눈길 한 번 받아보지 못한 항목이나 언설이 숱한 가운데, 여기에서는 그동안 기획칼럼으로 주목해 온 문제(‘입시 위주 교육’)에 관련해서 하나만 끄집어내어 곱씹어 보려고 한다.
학교를 유혹했던 입시 위주 책략에 대적했던 정책 흔적
2022년 개정 교육과정 총론의 ‘교육과정 편성 및 운영 기준’에서 고등학교2 부분의 ‘학점 배당 기준’을 보면, 교과(군)별로 이수해야 하는 학점 수를 정리해놓은 표가 있고, 그 밑에는 표에 제시된 기준을 실지로 학교에서 적용할 때 유의할 점을 여덟 개 항목으로 정리해놓고 있다. ‘학점’과 같은 새로운 용어를 설명하기도 하고3, 편성/운영에서 지켜야 할 학점 수의 상한선이나 하한선을 그어 지시하기도 한다. 이런 항목들 가운데 여섯 번째 것이 좀 특이해 보이는데, 이렇게 적혀있다. “⑥ 국어, 수학, 영어 교과의 이수 학점 총합은 81학점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며, 교과 이수 학점이 174학점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초과 이수 학점의 50%를 넘지 않도록 한다.”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의 기준에 왜 이런 조건이 따라붙는지, 그리고 국어 수학 영어를 이수하는 학점 총합이 왜 하필 81학점을 초과하지 말아야 하는지 바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런 조항에는 역사가 있고, 그 역사(교육과정 논란)에 익숙하다면 그 뜻을 곧 짐작할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얘기하면, 그 조항은 국어 수학 영어에 편중해서 수업하면 안 된다고 규제하는 것이다. ‘고교학점제’에 따라 고등학생들에게 수업 선택권이 넓게 주어지고 또 학교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여 과목을 개설하게 된다. 이때 3년 과정을 통틀어 국어 수학 영어 과목을 수강한 학점이 전체 자율 이수 학점의 50%를 넘겨서는 안 된다고 제한하는 것이다.4
이런 조항의 취지는 바로 이전 교육과정 문서인 2015년 개정판에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거기에서도 교과별 배당 기준표 밑에 여섯 번째 주로 달려있는데, 이렇게 적혀있다. “⑥ 기초 교과 영역 이수 단위5 총합은 교과 총 이수 단위의 50%를 초과하지 않도록 한다.” 2022년 개정판의 기술에 비해 다소 느슨해 보이지만 그 뜻은 명료하다. 국어 수학 영어 등(여기에서는 ‘기초 교과 영역’)을 이수하는 단위의 양이 전체 수업 단위의 양 50%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개정에서도 학생 선택권을 넓혀 허용했었는데, 주요 입시 과목에 편중할 위험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제한했었다.
고등학교에서 교육과정을 국어 수학 영어에 편중하여 운영하지 못하도록 막는 조항이 왜 생겨났는지는 짐작할 수 있는 대로이다. 학교는 교육과정(수업)을 입시 위주로 운영해서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는(수능을 포함해서) 으레 ‘국영수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고등학교 수업이나 학습은 그 ‘도구 과목’들에 치중하여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학생에게 선택권을 부여하고 학교에 교육과정 편성의 재량을 부여할 때, 입시에 유리하게 국영수 위주로 편성하는 전략이 생겨나리라고 당연히 예상해야 했다. 그렇게 예상되는 ‘비정상화’를 막으려고 ⑥번 항목이 삽입되었다.
입시 위주의 편법을 교육과정 운영에 주목하여 문제 삼은 사례로 잘 알려진 것은 서울시의 ‘자사고 폐지’ 논란이다. 몇 년 전 서울시교육청은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들의 ‘운영 성과’를 평가하여 여덟 학교에 대해 ‘재지정 탈락’의 결정을 내렸다. 자율을 허용했더니 학교들이 “입시 위주 교육”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근거는 교육과정 편성 운영에서 찾았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6, 자사고의 “입시 과목 편중은 극심”했는데, 적지 않은 학교가 “교육과정[전체 수업의] 80% 넘게 입시 과목[으로] 편성”했다. “자사고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는 내내 수업의 절반 이상을 국•영•수만 들었다”고도 했다. 학교들이 그럴 엄두를 냈던 것은 당시에 제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나왔다. 앞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50%로 제한하는 조항은 2015년 개정(2018년부터 적용) 교육과정에 가서 삽입됐다.
적어도 문서에서는, 교육과정의 한 귀퉁이에 눈에 띄기 어렵게 붙어 있지만, 학교 교육이 입시 위주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살아 있는 셈이다. 입시 과목에 치중하는 교육과정 편성 운영(수업)에 대해서만 좁게 문제 삼고 있긴 하지만, ⑥번 항목이 학교 교육의 본연을 유념했던 전통의 편린임에는 틀림없다.
‘사교육 없는 학교’와 ‘EBS-수능 연계’라는 책략의 전도(顚倒)
한편, 교육과정 문서를 벗어나 다른 교육시책이나 학교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입시 위주 교육에 대한 전통적인 경계심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런 ‘교육’은 학교가 나서서 제공해야 할 공적인 ‘서비스’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생각의 전도는 놀랍고 납득하기 어렵지만, 입시 위주로 수업하는 것은 이제 지극히 ‘정상적인’ 학교 일상이 되었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 두 개의 정책 에피소드로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2009년 5월 13일 교육부(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사교육 없는 학교’ 지원사업 본격 착수”라는 보도자료를 냈다. 사교육 없는 학교는 “사교육 수요의 대부분을 학교 교육으로 충족시켜주는 학교”라고 정의했다. 이런 학교에 대해서는 ‘자율학교’로 지정하여 매년 1억 원이 넘는 예산을 지원해 줄 뿐만 아니라, 교육과정과 교원인사에 대해서도 교장 재량을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수업 내용 구성이나 시간을 학교가 나름대로 조정해서라도, 그리고 필요하면 교원을 새롭게 고용해서라도, 학생들의 사교육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라고 주문한 것이다.
이 정책은 “사교육 수요를 학교로 흡수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나왔던 것인데, 그 취지를 뒤집어 보면, 학교가 입시 위주 교육에 발 벗고 나서라는 유인책이었다. ‘사교육 수요’라면 으레 입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인데, 그런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학교는 당연히 입시 위주 전략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사교육 없는 학교는 곧 입시 위주 서비스를 해야 하는 학교이어야 되는 셈이다. 어이없게도, ‘사교육 없는 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사교육에 매진해야 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정책을 발표하기 얼마 전에 당시 대통령은 사교육 없는 학교의 ‘모범 사례’라는 학교를 방문했다. 정책 발표를 위한 변죽을 울린 셈인데, 그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고 교사들도 그때까지 근무하며, “통합논술, 심층면접팀 운영을 통한 ‘맞춤형 지도’” 같은 서비스도 해준다고 소개됐다. “7년간 서울대 합격생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다 지난해는[입시 위주 서비스를 한 결과로] 세 명이나 합격시켰다”고도 보도됐다.7 해당 기사는 이 학교를 두고 “공교육 살리기 모델”이라고 추켜세웠고, 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대통령은 “다른 학교도 따라왔으면 좋겠고, 또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고도 전했다.8
위와 같은 정책은, 담백하게 사실 그대로를 두고 보면, 학교가 ‘사교육 없는 학교’라는 간판을 달고, 사교육 시장에서 판매되는 주요 서비스를 ‘학원’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팔도록 지원하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교육부 보도자료의 표현대로, 사교육 시장의 상품들을 그대로 “학교로 흡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학교를 가리켜 언론이 ‘공교육을 살렸다’고 칭송하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모든 학교의 모범이라고 격려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런 사태에 함축된 ‘학교 교육’은 어떤 것인가? ‘공교육의 모범’이기 위해서 사교육 서비스를 학원 못지않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면, 학교 교육과 사교육(입시 위주) 서비스업은 이제 구분되지 않는다.
교육부 보도자료가 제시한 ‘사교육 없는 학교’의 정의를 다시 들여다보자. 위에서 보았듯, “사교육 수요의 대부분을 학교 교육으로 충족시켜주는 학교”라고 했다. 교육부는 ‘학교 교육’으로 “사교육 수요의 대부분을 충족”시키는 일이 가능하고, 또 합당하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전까지, 그런 생각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모순이었다. ‘사교육 수요의 대부분을 충족시키는 것’(곧, 입시 위주 서비스를 하는 것)은 이미 ‘학교 교육’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교육 수요를 학교 교육으로 충족시킨다는 명제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사교육 없는 학교를 정의하면서 교육부는 그런 명제의 모순을 해제시켰다. 아울러(필경, 의식하지도 못한 채), 학교 교육의 정의도 바꾸어버렸다. 이제 학교 교육은 입시 위주 서비스를 중요한 요소로 포괄하게 되었다. 이런 반전을 겪은 후에도 교육과정 ⑥번 항목과 같은 게 남아 있는 것은 비극적으로 희극적이다.
또 하나 기이한 조치는 사교육 없는 학교 정책이 발표된 이듬해에 이루어졌다. 이름하여 ‘EBS-수능 연계 방침’인데, 2011학년도 수능에서부터는 그 연계율을 70%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EBS에서 방영하는 수능 강의의 교재가 수능 출제의 핵심 교본이 되도록 만든 결정이었다. 당시 교육부(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EBS만 보면 달리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만들겠다고 했고, 학교에서도 방과 후 시간은 물론 정규수업에서까지 EBS 교재를 채택해서 ‘입시 위주 문제 풀이식 교습’을 버젓이 할 수 있게 유도했다. 오늘날까지 고등학교 교실에서는 EBS 수능 교재 문제 풀기가 변함없이 성행하고 있다. 그동안 굳어진 관성으로, 이제는 고등학교에서 EBS 교재나 다른 기출 또는 예상 문제집을 가지고 수업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오늘날 학생이나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은 그런 수업이 없는 고등학교 ‘교육’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 이야기의 상식을 뒤엎은 교육정책사
1966년 1월 28일 교육부(당시 문교부)는 “편중된 입시 준비교육과 아동 및 학부형의 과중한 부담을 없애기” 위해 “파격적인 교육 정상화 시책”을 내놓았다.9 그 내용 가운데는 “학교는 어떤 명목으로도 일체의 과외 수업을 하지 말 것”,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부독본이나 참고서 또는 수련장[문제집]을 학교 안에서 사용하지 [못함]” 등의 지시가 들어 있다. 학교 교육이 입시 위주 교습(과외, 사교육)으로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는 포고였다. 학교 교육에 대한 이런 암묵적인 관념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오래된 것이다. 심지어 일제 식민지기의 신문 기사에서도 학교에서의 과외(‘입시 준비교육’)를 엄금한다는 시책이 때때로 발표되었던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과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교육적 견제는 1980년 이른바 7.30 교육개혁에서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이란 이름으로 나왔던 당시 개혁안에서는 중고등학교 재학생의 과외 교습을 ‘전면 금지’했다. “학교 교육의 새로운 방향과 건전한 교육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학교는 입시 위주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되며, 사회적으로도 과외 행태는 건전한 교육 풍토를 해치는 것이라고 보는 게 상식이라고 천명한 셈이다.
과거의 입시 위주 교육 관련 정책들이나 그것에 함축된 학교 교육관을 오늘날 일반화된 정책이나 관점과 비교해 보면 어마어마한 격세지감이 든다. 입시 문제집을 푸는 수업은 학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게 상식이었던 시절에서, 오늘날 고등학교가 그런 수업이나 훈련 또는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공교육’ 책무를 저버리는 행태라고 비난받게 되는 형국에 이르게 된, 그 반전의 역사는 기이하게까지 여겨진다. 2022년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살아남은 ⑥번 조항은(‘국수영/입시 위주’로 교육과정을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 조항)은 마치 아득한 옛날 학교 교육의 고고학적 유물처럼 느껴진다.
불과 2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만, 학교 교육에 대한 우리의 상식은 모순적이고도 극단적인 전도를 보였다. 결과를 놓고 보면 그 뒤바뀜이 우리가 거의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듯 느껴지겠지만, 결코 은밀하게 음지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때마다 조금씩, 정부가 공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개혁’의 이름으로, 그런 역사를 구축해 왔다. 여기에서 그 정책사를 상세히 정리해 보일 형편은 안 되지만, 굵게 볼 때 2000년 즈음이 통념 변화의 분수령을 이룬다. 이 시기에 사교육 수요를 ‘학교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제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10, 그런 대안들은 급기야 사교육 시장의 입시 대비 강의나 컨설팅 서비스를 학교에 들여놓기 위한 정책으로 수렴해 왔다. 그 과정에 연루된 당시 정책 용어들을 열거해 보면 그 흐름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다.
이를테면,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전에 금지했던 학교에서의 ‘보충 수업’(‘과외’ 성격을 지닌 수업)을 현실상 용인(‘양성화’)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제법 두드러지기 시작했었는데, 1980년 7.30의 ‘엄금’ 지시로 그런 움직임은 눌리어졌었다. 그 엄금의 효과가 1990년대 말까지는 그럭저럭 유지되었지만, 아래 ‘주 10)’에서 간략히 설명한 것처럼, 2000년에 그 금지의 둑은 무너졌다. 이후 다양한 ‘사교육’ 프로그램을 학교에 들여오는 대안들이 시행되는데, ‘방과후 활동’, ‘방과후 학급’, ‘방과후 학교’ 등이 그런 시책의 이름들이었다. 이름만 보아도 학교에서의 사교육 ‘공간’이 (‘활동’→‘학급’→‘학교’로) 확장해 왔던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11 그리고 결국에는, 앞에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사교육 없는 학교’나 ‘EBS-수능 연계’와 같은 정책을 통해 입시 위주 교육은 학교 정규수업에까지 잠입하기에 이르렀다.
학교의 정규수업 자체가 입시 위주로 흘러가고 있고, 그런 사실을 정부가 나서서 공적으로 용인하는 게 현실인 마당에, 교육과정 문서에는 ⑥번 조항과 같은 ‘금지’ 팻말이 아직 남아 있다. 기묘한 모습이다. 학교 시간표만 입시 위주로 짜지 않는다면, 교실 안에서 수업이 입시 위주가 되든 ‘취침’ 위주가 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국가교육과정의 공식 입장인 셈이다. 곱씹어볼수록 부조리한 일이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늘 한 치 앞에 놓이기 마련인 ‘국정 과제’의 해악
입시 위주 교육에 대한 우리 인식이 어떻게 그렇게 물구나무서듯 뒤바뀔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입시 위주 교육을 비판하거나 척결하려는 뜻에서만 제기할 게 아니다. 입시 위주 교육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든, 교육정책과 학교의 현실을 이해하려면 답을 찾아보아야 할 질문이다. 교육정책은 아무리 사소한 현안을 다루는 것이라 하더라도 학교나 교육에 대한 모종의 정의(定義)를 그 안에 품게 마련이다. 그런 정책들이 모이고 서로 짜이고 누적되면서 한 사회의 교육관(교육의 정의)은 바뀌고 굳어지게 된다.
두말할 나위 없지만, 교육과정 문서에서 인간상을 그럴듯하게 수사하고 교육목표를 유행에 맞게 언명한다고 해서 학교나 교육의 실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교육의 실질은 사회가 속 깊이 품은 교육관을 따른다. 이 암묵적인 관점의 흐름을 살피고 바루지 않으면 교육정책이나 교육은 엉뚱한 길을 가게 된다.
입시 위주 교육에 대해서는 물론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입시 위주 교육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부터 연상하는 게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그런 ‘교육’이 좋으냐 나쁘냐에 대해서도 다른 증거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이 글에서 이제까지 정리한 내용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할 여지는 차고도 넘칠 것이다. 그러나 입시 위주 교육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 지난 20년간의 정책을 따라 극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서로 인정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더 나아가서, 과거 하나하나의 정책을 논의하고 입안할 때는, 당시 방안들이 극적인 인식 변화에 한몫하리라는 것을 의식하며 대처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서로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되돌아보면, 사교육 부담을 줄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부든 한결같이 최우선 과제로 받아들였고, 그런 ‘국정 과제’를 해결할 대안을 궁리할 때 대책에 따라올 부작용까지 걱정할 여유는 없었을 듯하다. 바로 눈앞 문제에 골몰할 때, 아이디어는 편협하고 단기적인 시야로 제한되기 마련이다. 그 상황에서 ‘큰 그림’이나 비전을 운위한다면 물정 모르고 한가하게 꿈만 좇는다고 놀림 받기 십상이다. 더욱이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타협하기 어려울 만큼 의견들이 갈릴 테고, 옳다 그르다 이견을 정리해 줄 물증이 있을 리도 없다.
어느 나라에서든, 그런 깊이의 문제를 잡고 늘어질 수 있으려면 정책의 전통 안에 일관된 심지가 있어야 하고, 논의의 줄기를 잡아줄 만큼 지혜로운 ‘교육 이야기’들이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 이야기는 오늘도 입시 전략을 캐고 나누는 데 몰입해 있다. 길어야 5년의 시한을 가진 정부도 코앞에 닥친 문제를(업적으로 남길 기회를) 두고 ‘백년대계’를 추구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현실과 실용의 이름으로 오직 한 치 앞의 문제에만 치중하면, 교육의 총체적인 정합성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마저도 간과하게 된다. 입시 위주 교육을 보는 시선이 뒤집힌 것은 아마도 정책의 시야를 한 치 앞에 고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의 본연을 갉아먹는 교육정책
학교에서 입시 위주로 수업해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버리고, 학교가 입시 위주 서비스를 본령의 업으로 삼아야 한다고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게 된 데는, 국민의 사교육 부담을 덜려는 정치적인 선의(善意)가 작용했을 터다. 사교육 부담은 아직도 버거운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한다면 역사에 남을 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선의에서 비롯되기는 했지만, 정책들을 만들면서는 학교가 어떤 기관이고 교육은 어떤 과업인지 살펴보지 못했다. 만들고 있는 정책이 어떤 교육관을 전제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할 이유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대책을 마련하는 게 화급한 일이어서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그런 정책이 성공할 리 없고, 실패를 거듭할수록 대안 찾는 일은 더욱 다급해졌을 터이다. 그런 와중에 학교 교육에 대해 근본적으로 멀리 보며 정책의 지도를 그릴 염두가 생겨날 여지는 없다.
다급하게 꾸려졌던 정책들은 뜻밖의 효과를 가져왔다. 우리 사회가 학교에 거는 기대는 20년여 전과 비교하여 말 그대로 180도 바뀌었다.12 이런 역사적인 반전을 가져온 선의가 그것이 악의가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적어도 국가 정책인 한, 선의는 표방했던 목표만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책의 선의는 정책 결과가 공동선에 부합할 때라야 비로소 선의로 인정될 수 있다. 입시 위주 교육(또는, 학교 교육)에 대한 통념을 뒤집어 놓은 결과가 공동선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더 논의해 보아야 할 데가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거 정책 과정에서 간과했다는 점은 통렬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책이 설사 바람직한 효과를 냈다 하더라도, 정책 과정에서 학교 교육의 본연에 대해 고심하지 않았다면, 그 정책은 그 사실만으로 그른 것이다. 바람직한 효과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정책이 바른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니라 우연이 가져다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입시 위주 교육의 사안만 놓고 보더라도 교육정책의 경박함과 즉흥성의 위험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교육 발전’을 표방하는 교육정책이 정작 교육의 본연 자체를 변질시킬 수 있다. 자칫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치명적인 잘못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교육정책은 교육 현실을 깊이 보고 미래를 멀리 내다보며 마련해야 한다. 어쩌면 정권마다 실적을 늘리고 과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정부 부처나 관료들은 존재 이유를 내보이기 위해서, 정책들을 짧은 주기로 다급하게 내놓는다. 그러나 그런 정책들은 인류 역사를 이어가는 교육이라는 다리의 교각을 물밑에서 드러나지 않게 갉고 있을지 모른다. 교육의 본연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려면 정책의 ‘물밑’을 늘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시작은 우선 현재 정책들에 숨겨진(정책 결정 과정에서 인지되지도 않았을 수 있는) ‘교육’의 정체를 들추는 데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2023년에는 다시 ‘교육개혁’이 일어난단다.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정부의 ‘개혁’은 학교와 교육을 낫게 만들기보다 나빠지게 만들기 십상이다. 이전에 2028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에 대해서 예상했던 것처럼, 앞으로 정부가 추진한다는 개혁에 대해서도 진정한 개혁이기는 이미 틀렸다고 외람되이 예상한다.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이 다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겠다. 정부가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채 개혁안에 숨겨 놓을 ‘본질 훼손의 발톱’을 들춰 뽑아내야 할 것이다. 건투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 시대 변화에 맞춘다는 명분으로 2007년부터는 교육과정을 ‘수시’ 개정하기 시작했다. 이후 개정의 빈도는 부쩍 잦아졌고 그 경향은 정치적 유행을 좇아 중심 없이 흔들렸다. 교육과정 문서의 틀만은 이전에(특히, 제7차 교육과정으로) 굳어진 대로 답습했다. 그 틀이란 것은, ‘추구하는 인간상’을 제시하여(마치 그 인간상에서 타당하게 추론된다는 듯이) ‘교육목표’로 연결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과적으로 검증된 교육내용과 방식을 구성한다는 듯이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기준을 제시하는 양식이다. 조금만 되새겨보면 알아챌 수 있듯이, 인간상과 교육목표가 (채택한 인간상을 구현하려면 설정된 교육목표를 지향하는 게 마땅한 것처럼) 실증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연결될 리 없다. 교육목표와 교과 편성 운영 기준 역시 그 연계가 (설정된 목표에 다가가려면 제시된 기준으로 교과를 편성 운영해야 할 것처럼) 규범적으로든 사실적으로든 정당화될 길 없다. 교육과정 문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하는 학자나 관료들도 기존의(인간상이나 목표를 내걸고 그것에 맞춰 교육내용을 선정 조직한다는 식의) 틀이 공허하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꾸준히 오늘까지도 그런 틀을 받들고 있다. 시대가 변화했기에 교육을 이끌 인간상을 바꾸어야 하고, 그에 따라 교육목표를 바꾸어야 하는 게 철칙이나 되는 것처럼, 개정 때마다 되뇌고 문서에 적는다. 누구도 믿지 않을 허구 내용과 논리로 이루어졌지만, 그래서 그 문서의 표방이 실제 교육에 적절할 리도 만무하지만, 교육과정은 늘 무의미하게 판을 바꾸며 재생산되어 왔다. 가물 때 기우제 지내면 비가 온다고 믿는 부족이 기우제에 매달리듯이, ‘시대’가 바뀔 때마다 의례처럼 교육과정을 개정해오고 있다. 이런 맥락에 갇혀서는 실질적인(패러다임을 바꾸는) 교육과정 개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 고작 이루어지는 것은, 그때그때 유행하는(창의, 역량, 포용, 주도성과 같은) 언어로 개정 이유나 추구하는 인간상을 덧칠하며 수식하고, 그때그때 당면 과제라고 부각한(되짚어보면, 영어, 한국사, 안정, 정보, 인공지능과 같은) 주제나 내용에 시간을 늘려 배정하는 정도일 뿐이다.
- 일반 고등학교와 특수 목적 고등학교(산업수요 맞춤형 고등학교, 이른바 ‘마이스터고등학교’는 제외)에 해당하는 것이다. 특성화 고등학교와 산업수요 맞춤형 고등학교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
- 2022년 개정으로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서, ‘학점’이란 용어를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처음 쓰이게 됐다.
- 새롭게 도입되는 고교학점제 아래에서, 고등학교 3년간 이수해야 할 교과의 학점은 모두 합하여 최소한 174학점이 되어야 한다(여기에 ‘창의적 체험활동’ 18학점을 합하면, 이수에 필요한 학점이 192학점이 된다). 교과 이수 학점 가운데는 ‘필수 이수’에 해당하는 것과 ‘자율 이수’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각각 84학점, 90학점이다.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교과들은 대체로 1학년에 개설될 만한 ‘공통 과목’인데, 국어 수학 영어는 여기에 속하고, 각 8학점씩 모두 24학점을 차지한다. 2학년에서도(이때는 ‘필수’가 아닌 ‘자율’이지만) 1학년 때와 같은 분량으로 세 과목을 이수한다고 가정하면, 평균 잡아 한 학생이 국어 수학 영어를 48학점 이수하게 된다. 한편, 자율 이수에 해당하는 총 90학점 가운데서 2학년 국어 영어 수학 이수에 해당한다고 평균으로 가정한(자율적으로 이수한다고 가정한) 24학점을 빼면 66학점이 남는다. 이만큼은 국어 수학 영어를 포함한 다양한 과목들을 이수(개설)하는 데 쓰일 수 있는데, 국어 수학 영어에 몰아 이수하면 안 되고, 하더라도 그 절반인 33학점 이내로 이수해야 한다는 것이 ⑥번 조항의 지시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1학년과 2학년 합해서(24+24) 국어 수학 영어는 48학점 정도를 이수하는 게 적절하다고 가정했을 때, 이 48학점에 33학점을(자율 이수 학점의 50%를) 더하면 81학점이란 상한선이 나온다. 요컨대, 국어 영어 수학을 자율로 선택해 이수(개설)하더라도, 자율 이수 학점 총합의 반을 넘기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 2022년 개정에서 ‘학점제’를 도입하기 전까지, 교과 이수의 양은 ‘단위’를 기준으로 기술했다. 1단위는 “50분을 기준으로 하여 17회를 이수하는 수업량”이다. ‘학점’으로 단위가 바뀌면서 그 양은 “50분을 기준으로 하여 16회를 이수하는 수업량”으로 살짝 줄었다.
- 경향신문 2019년 7월 10일 기사. https://m.khan.co.kr/national/education/article/201907102145015#c2b
- 중앙일보, 2009년 2월 4일 1면.
- 한국일보, 2009년 2월 13일 6면.
- 이때는 중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 위주 교육이 현안이었다. 학교급이 다르지만, 학교 교육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정상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느냐는 측면에서, 대입과 관련된 현재의 양상과 대조해 볼 수 있다. 인용되는 내용들은 조선일보 1966년 1월 29일 1면 참조.
- 2000년 4월에 “과외에 관한 포괄적인 금지”는 위헌이라고 법원 판결이 나왔다. ‘과외 전면 금지’와 같은 시책에 반기를 든 소송의 결과였다. 이 판결로, 7.30 개혁을 포함해서, 이전까지 사교육 정책에서 흔히 채택했던 ‘금지’의 대안은 용납될 수 없게 되었다. 사교육 시장(학원)을 직접 억누를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사교육을 제어하려면, 이제 남은 수단은 학교밖에 없게 됐다. 결국 이후 사교육 정책은 ‘사교육 수요 충족’의 책임을 학교에(때로는 공영인 EBS도 동원해서) 거듭 떠넘기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 ‘방과 후 활동’은 낱개 활동을 가리켰다. 예술 체육 분야의 특별활동 시간처럼 운영됐다. ‘방과후 학급’이나 ‘방과후 학교’처럼, 수강 학생들이 학년 집단에 소속하여 시간표를 따라 교습을 받을 만큼의 규모나 구조를 갖추진 않은 상태였다.
-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과거에도 학교가 입시 준비를 시켜주길 기대한 정도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기대가 과거에는 버젓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학교가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내 아이를 위해서는 그런 서비스를 해주면 좋겠다’는 정도의 숨은 바람이었다. 지금은 그런 기대가 공인되어 있다. 학교가 입시 준비에 소홀하면, 학생이나 학부모가 버젓하게 학교를 비난하며 노력을 촉구할 수 있게 됐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