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정의(正義)를 가르치는 지식인으로 우뚝 서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정의(正義)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사회적 지위와 권리, 재화와 서비스 등 다양한 사회적·경제적 가치가 필요하지만, 모두의 욕구를 만족할 만큼 충분하지 못하므로 사회적 갈등은 필연적인 탓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개인이 지켜야 하고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덕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정의는 국가나 사회제도를 유지하는 최고의 덕목
통상 정의는 분배정의를 가리킨다. 동양의 유교에서는 의로움, 즉 옮음을 정의로 이해하였고, 서양은 고전적 의미에서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을 정의라고 여겼다. 서양에서의 정의라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은 정의 그 자체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도시국가는 하나의 전사공동체였으므로 어떻게 하면 강력한 국가로 만들 수 있는가에 있었다. 즉 전사공동체는 타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거나 노예가 되거나 둘 중 하나의 운명밖에 없었으므로 구성원들은 약탈물, 명예, 공직의 분배에 극도로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고 공동체 안에서 주어지는 명예와 인정에 대한 기준과 과정은 중요한 사회적 절차였기에 정의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사실,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오래전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원전 12세기에 활동했던 호메로스에 의해 최초로 묘사되었고, 기원전 4세기에 활동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답을 제시했다고 봐야 한다.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 《일리야드》에는 아킬레스와 아가멤논 사이에 여자 포로를 누가 차지해서 데리고 갈 것인가를 둘러싼 갈등이 나온다. 이 사건은 단순하지 않고 그리스군 전체를 패망으로 이끌 뻔했다. 사건의 줄거리를 보면 그리스 원정군 대장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란 여자 포로를 차지하고, 아킬레스는 트로이의 왕녀 브리제이스를 차지한다. 그런데 그리스 군대 안에서 전염병이 돌았고, 신관은 크리세이스를 트로이로 돌려보내야만 전염병이 사라진다는 신탁을 전한다. 그러자 아가멤논은 어쩔 수 없이 크리세이스를 트로이에 돌려보내지만 내심으로는 신탁에 수긍하지 않았으며 불공정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는 아킬레스에게 “아킬레스 때문에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냈다.”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자신에게 브리제이스를 달라고 요구하며 결국 빼앗는다. 아킬레스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런 처사를 불공정하다고 불평하면서 트로이와의 전투를 보이콧한다.
아킬레스와 아가멤논의 갈등을 겉으로 보면 둘 다 철이 없거나, 옹졸하거나, 여색을 밝혀 벌어진 일이라고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서로 단결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사공동체에서 분배받은 약탈물은 전사의 가치와 명예를 상징하며 약탈물의 포기는 상대에 대한 굴복이자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먹칠을 가하는 행위였다. 요컨대 정의는 국가나 사회제도가 유지되려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기본적 덕목이었다.
정의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없어
정의에 대한 관점 또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며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받고 공정하게 자기의 몫을 분배받는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일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응분의 몫을 정하는, 즉 정의를 실현하는 기준으로 업적, 능력, 필요, 절차나 과정 등 다양한 요소가 있고 사회 성원은 처한 계급과 계층에 따라 주관적으로 유리한 기준을 제시하므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예컨대 새로 등장한, 지지하는 계급과 계층의 성향이 다른 윤석렬 당선인 정부의 공정관 또는 정의관과 현재의 문재인 정부의 공정관 또는 정의관이 다를 수 있고, 더 나아가 지위, 부, 명예, 권력 등 사회적 가치를 분배하는 시스템이나 분배 결과도 대립적일 수 있다. 즉 한 쪽에서 공정한 절차가 다른 쪽에서는 불공정한 절차로 역전되며, 정의로운 분배라고 칭찬해왔던 몫의 분배도 다른 쪽에서는 불공정한 분배였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교육에 대한 시선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정의롭다고 받아들였거나 추진되었던 교육제도나 교육정책이 새 정부에서는 오히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등 부당하다고 재평가될 수 있으며,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교육목표나 교육과정의 변화로 인해 지방선거로 새로 선출되는 17개 시·도 교육감과의 갈등도 벌어질 수 있다.
분배 절차나 분배 결과 모두를 만족하는 고전적 정의론은 없어
고전적 정의론에는 벤담이나 밀의 공리주의 결과적 정의론과 칸트의 과정적 정의론, 즉 의무주의 정의론이 있다. 공리주의 정의론은 실용주의 정의론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하거나 이를 결과로 낳는 행위가 정의로운 행위라고 규정한다. 또한 현실에서 가장 강력하게 위력을 보이는 정의론이기도 하다. 반면에 칸트의 의무주의 정의론은 양심의 법이나 의무를 따르는 행위가 정의로운 행위라고 주장한다. 즉 “네 의지가 따라야 할 법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을 만드는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원리를 따르는 행위만이 정의롭다고 본다.
공리주의 정의론의 한계는 분명하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도덕적인 규칙이나 의무를 무시할 수 있으며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 예컨대 장애인만 이용하는 전용도로를 폐지하면 다수의 통행자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소수자로서 장애인의 인권은 보장될 수 없다. 극단적이지만 배가 난파되어 승객 5인이 4인용 구명보트에 타야 한다면 한 명은 탈 수 없게 되고 버려져야 하는데 이를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의무주의 정의론도 약점을 갖는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따라야 할 의무들을 지키는 것이 정의이지만 서로 충돌할 때 어떤 의무를 따라야 하는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즉 칸트를 비롯한 의무론자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따라야 할 의무를 직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지만, 보편적 의무가 충돌할 때 사람마다 직관이 다르다면 무엇이 정의이며 어떤 의무를 따라야 할지는 모호하다. 예컨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할 의무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무고한 사람이 죽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충돌할 경우에 어떤 의무를 따르는 것이 옳은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며 직관으로 한 판단을 보편적으로 옳다고 할 수도 없다.
이처럼 고전적 정의론인 공리주의의 결과적 정의론이나 의무주의의 과정적 정의론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즉 사회적 가치를 분배할 때 절차도 정의롭고, 결과도 동시에 정의로울 수 있다면 바람직하지만, 현실적 상황은 대부분 하나를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해야만 한다. 예컨대 가난한 자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결과를 위해서는 부자에게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 어떤 점에서는 부당한 절차가 현실에서 시행되어야만 한다. 나아가 국가가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부당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정치인이든 학자든 일반인이든 정의로운 절차와 정의로운 결과를 구분하고 상대와 마주 앉아야만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 다만 현대의 정의론은 최대의 공리라는 결과를 위해 무고한 자를 해롭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므로 밴담 류의 결과적 정의론에 주목하지 않고 정의로운 절차를 중시한다. 즉 개인이 따라야 하는 여러 의무를 알 수 있으며, 자유로운 선택이 보장되고, 다수를 구실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지 않는 정의론만이 결과가 평등하든 불평등하든 정의롭다고 본다. 그러므로 정의론에서 정의에 대한 논란은 정의로운 절차와 관련된 여러 관점을 둘러싼 차이 탓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정의론, 특정 분배기준이나 결과보다는 분배 절차를 중요하게 여겨
정의로운 절차를 중시하는 정의관으로는 자유주의적 정의관과 공동체주의적 정의관이 있다. 자유주의는 개인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천부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자유는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라고 보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면 국가나 타인은 개인에게 특정한 가치나 삶의 방식, 희생을 강제할 수 없으며 이것이 곧 자유주의적 정의관의 토대이다. 즉 정의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소유권과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해야만 실현된다는 것이다.
개인에게 자유를 보장하는 것만으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에 대하여 자유주의 간의 의견은 다르다. 자유 지상주의자인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개인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 즉 기회의 평등이 주어지면 분배 결과로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정당하다.”라고 본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소유물을 취득하거나 양도받았을 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정의로운 절차이며 분배 결과 또한 평등하든 불평등하든 무조건 정의로우며 소유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도 그의 선택에 맡겨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국가가 개인의 몫에 개입하는 재분배 정책을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부정의한 행위라 본다. 반면에 자유주의자이지만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중요하게 보는 존 롤스(John Rawls)의 의견은 다르다. “모든 사람은 소유권 등 기본적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어떤 직책이나 직위에 오를 기회가 실제로 평등하게 개방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래야만 분배 결과는 평등하든 불평등하든 정의롭다”고 본다. 그러므로 사회적·경제적으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최소 수혜자인 사회적 약자에게 최대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도록 몫이 분배되어야만 결과적 불평등은 정의롭다고 보았다. 롤스가 이런 전제를 제시한 것엔 까닭이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며 무한정 추구하려고 하므로 현실에서 결과적 불평등은 불가피하지만 이를 자연 상태로 보고 방치하면 지배자 이외에는 자유를 누릴 수 없으며 절차적으로 정의로운 분배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 현실에서 권력이나 부 등 사회적 가치의 분배는 과거로부터 누적된 자연적, 사회적 우연성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즉 운이 몫의 분배과정에서 작용하므로 정의의 원리는 이러한 우연과 행운을 배제하는 절차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어떤 개인이든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능력, 재능, 가치관 등을 전혀 알 수 없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쓰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진정한 기회균등이며,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손해를 보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 원초적 상황에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해야만 정의로운 절차를 따른다고 보았다.
결국 노직과 롤스의 정의관의 차이는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중에 어떤 자유로 해석하느냐에서 비롯된다. 즉 노직은 자유를 개인에게 외부로부터의 강제나 방해가 없는 상태인 소극적 자유로, 롤스는 자유를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목적을 정하고 실현 가능한 상태인 적극적 자유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롤스가 사회적·경제적인 불평등한 분배를 정의롭다고 보려면 개인에게 기회의 균등이 주어졌다는 이외에 추가적인 전제를 제시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즉 국가는 제도나 정책을 통해 분배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적극적 자유를 보장해야 하며, 그래야만 모든 개인은 소극적 자유인 기본적 자유를 실제로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흔한 오해와는 다르게 노직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역시 기본적 자유를 누리려면 실제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빈부격차의 축소가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개인의 자발적 자선 행위를 통해 빈부격차를 줄여야만 하는 것이지, 국가의 개입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간섭으로 부정의하다고 본 것이다.
노직의 정의관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받는다. 첫째,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한 결과를 그대로 분배받는 것이 정의롭다고 했지만 순수한 능력이 과연 존재하느냐의 문제이다. 흔히 재능 있는 사람은 그의 능력을 발휘해서 얻은 결과는 모두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시대적 배경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육체와 정신을 소모하여 얻는 순수한 결과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를 둘러싼 다수의 사람의 희생과 공헌이 기여된 것이다. 둘째, 어떤 몫이 설령 그의 육체와 정신을 소모한 결과라 해도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만약 개인의 육체와 정신으로 인한 결과를 모두 인정한다면 부당한 절차를 거친 것도 인정해야 하므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셋째, 칸트에 의하면 개개인의 자유에 의한 것이라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행위를 요청하는 타율적인 가언 명령이 아니라 목적 자체를 위해 행위가 요청되는 자율적인 정언 명령이 되어야 하므로 가언 명령에 의한 몫이라면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롤스의 정의론 또한 다른 자유주의자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는다. 대표적인 것은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이라는 ‘차등의 평등’에서 차등이 평등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또 다른 문제는 본래 능력이 배제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차별인지, 차이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나아가 타고난 천부적 능력을 균질하게 대하는 것을 차별이라고 볼 수 없더라도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또한 타고난 재능이 분배기준이 아니라면 사후의 노력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즉 롤스는 타고난 재능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이유로 능력으로 해석하지 않지만 후천적인 노력은 능력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선천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재능을 쉽게 구분할 수 없으며 현실적으로 구분되는 경우가 없다. 한마디로 어떤 결과를 성취할 때 두 가지 조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공동체주의는 인간의 삶이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공동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공동체를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특정한 공동체 안에서 태어났고 사회화를 통해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 바람직한 역할을 배우며 살아가는 연고적 자아이다. 즉 공동체는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적 역할을 정해주는 나침반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이나 추구하는 가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또한 공동체 구성원들은 서로에 관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각자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며,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유리한 공공의 이익, 즉 공공선을 실현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여긴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는 개인에게 책무를 일깨워줌으로써 개인이 공동체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행복과 사회의 발전을 추구하도록 장려한다.
공동체주의적 정의론자로는 마이클 왈처(Michael Walzer)를 들 수 있다. 왈처는 사회적 가치는 각 공동체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소산으로 공동체 안에는 범주가 다른 다양한 사회적 가치들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리고 모든 사회에서 똑같이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가치는 없으므로 공동체의 문화적 특성과 차이에 따라 사회적 가치를 다르게 분배해야 한다고 보았다. 예컨대 정치권력은 토론과 민주주의에 따라, 돈과 상품은 자유교환에 따라, 안전과 복지는 필요에 따라, 공직은 자격과 기회의 공정성에 따라, 교육은 사회적 특수성과 평등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가 정치영역에 속하는 권력에 영향을 주면 옳지 않다고 본다. 즉 그는 이를 사회적 가치를 독점과 지배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한 영역에서의 독점은 용인하지만 다른 영역을 침해하는 지배는 막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부자라고 해서 공직이나 권력의 획득 등 다른 영역에까지 지배하겠다는 것은 부정의한 일이며 정의는 오직 복합평등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왈츠의 정의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소유한 사람들이 다른 사회적 가치를 지배하게 되는 일이 흔하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즉 부자가 학력이나 정치권력을 돈으로 사거나 기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일상적이기도 하다.
정의론자 중에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로 구분하기 어려운 정의론자도 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이 대표적으로 공동체에서의 공동선이나 미덕의 선을 지지하기 때문에 공화주의적 정의론자라고 할 수 있다. 즉 정의는 기본적으로 공동선을 실천하는 좋은 삶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가 이러한 공동선을 강조한 것은 노직이나 롤스의 자유주의 인간을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무연고적 자아나 추상적 자아라고 비판하며, 인간은 공동체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역할 수행을 통해 자아를 실현해가는 존재인 관계적 자아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동선을 중시하며 구성원 간의 연대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정의관은 과정의 정의뿐만 아니라 결과적 정의도 만족해야 하고 이러한 정의는 단순한 다수 인민에게 선택된 것이 아니라 시민의식이 있는 시민에게 선택되어진 것이다. 더 나아가 샌델은 사회가 오늘날 너무나 다양화되어 소득, 권력, 기회를 가시적인 단일 절차나 기준으로 분배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소득, 권력, 기회의 분배를 공정한 절차를 통해 분배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삶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대신에 비실제적인 가치인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며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이견을 미덕을 통해 해결하며 아름다운 삶에 접근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의 정의관이나 평등관은 자유를 강조하는 보장적 평등도 아니며 결과를 획일적으로 나누는 평등도 아닌 과정의 평등에 가깝다. 왜냐하면 샌델이 주장하는 정의는 기회와 차등이 조화된 비실제적인 도덕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노직의 절차적 평등에서 출발하여 롤스의 결과적 불평등에 삶의 도덕성과 아름다움을 적용한 인간적 삶의 가치를 첨가하는 비실제적인 정의를 제시한 것이다.
샌델이 인간의 삶에서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고 실제적인 가치보다는 공동선을 추구하려는 비실제적인 가치를 제시하며 획일적인 삶보다는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현대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잘 어울리지만,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가 제시하는 본질적인 도덕적 선의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나아가 절대적인 도덕적 선은 누가 어떻게 언제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강제하는 도덕적 의무의 주체적인 입안자’라는 사회 계약적 사고방식을 제시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것이 실재하며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가도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샌델의 이론이 증명되려면 경제적 후진국이면서 정치적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국가가 존재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적 정의는 분배 결과 측면에서 논의할 수 없어
자유주의자에서 공동체주의자 또는 샌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이 있지만, 정의의 문제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정해져 있기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회적 합의 내지는 사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적절한 정의관을 취사선택해야 하는 문제라고 봐야 한다. 특히 교육에서 정의의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느냐는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교육을 통해 얻은 결과인 지식과 역량을 개인이 타인에게 분배한다고 해서 자신이 소유한 지식과 역량의 총량이 줄어들거나 지식과 정보를 교육받을 기회를 얻는다고 해서 타인의 학습 기회를 반드시 제한하지도 않는다. 즉 교육은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의 특성을 갖춘 공공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지식과 역량은 타인과 공유될수록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창출함에 따라서 사회적 총량은 늘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의 몫인 지식과 역량을 희소성을 지닌 사회적 가치라고 볼 수 없으며 분배정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교육에 정의의 개념을 적용할 수도 있다.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기회가 누구에게든 평등하게 주어졌냐는 문제이다.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지식과 정보의 분배과정에서 수용자 간에 불평등 현상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교육에서 정의란 한편으로 기회의 평등을 위해 사회적 약자에게 부모의 재산 등 비 능력적 요소를 보전하기 위한 기회의 차등, 즉 정의로운 차등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한 분배를 정당화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물론 정의로운 차등, 즉 용인 가능한 불평등의 조건이 어느 수준인가는 모호하다. 즉 교육이 추구해야 할 정의라고 하고 헌법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경제적 배경, 성 인종, 장애 등과 같은 주어진 여건 때문에 인간의 존엄이 훼손당할 위험을 최소화하도록 되어 있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평등한 자원으로 출발하여 스스로의 삶을 자율적으로 영위해 나가더라도 역차별의 위험은 존재한다. 다만 능력에는 부나 문화적 배경과 같이 많은 비능력적 요소가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고,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공평한 기회를 담보하기 어려우며,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즉 능력은 본질적으로 사회제도와 구조의 영향을 크게 받는 환경적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 온전히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란 환상으로만 존재한다.
교사는 지식인이며 부정할 수 없어
정의는 까다롭고 예민한 문제이다. 나아가 현실이 사회적 가치가 시장을 중심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한다면 내 글은 불편하거나 논점은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시장은 항상 양면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롤스나 샌델처럼 정의를 실현하는 전제인 기회의 실질적 평등을 위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늘리려면 세금이든 기부금이든 복지 재원을 조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적정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장은 세수가 늘고 복지지출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사회적 저항에 직면하거나 자본의 경제적 유출이나 근로의욕 저하 등 다른 경제적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즉 A라는 절차적 정의가 B라는 절차적 정의에 비해 좋은가, 나쁜가는 A를 선택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와 B를 선택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를 과학적이고 효율적으로 비교해야 한다. 하지만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은 자신의 권력과 지위 유지와 매표를 우선 기준으로 더 좋아하기도 하므로 이런 원리는 자주 무시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개인주의자들은 샌델이 말하는 것처럼 “좋은 시민, 훌륭한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 미덕과 윤리에 관한 정답을 공동체가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즉 시장 바깥에 공정성 혹은 분배정의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지 않으며 이런 개인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이처럼 교육이든 교육 이외의 사회적 영역이든 정의를 논하기는 쉽지 않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고 논란인 것은 한두 가지 이유로 인한 것이 아닐 것이다. 샌델처럼 우리 사회 성원들이 공동선을 추구하려는 소양이나 특히 권력자나 부자들이 겸손한 태도가 부족했을 수 있다. 롤스처럼 기회에서 실질적 평등이 주어지지 않는 절차적 부정의 탓일 수도 있다. 노직처럼 권력이나 지위를 소유한 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부족하거나, 왈처처럼 사회 각 영역에서 구분되어 적용되어야 사회적 가치의 분배기준을 분명하게 제도화하지 않거나 제도화했다고 하더라도 지키지 않는 탓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교육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제도나 사회구조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며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를 구현하려면 교육에서 적극적 자유, 민주주의,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 경제적 성장은 강조되어야 한다. 또한 지식과 역량은 협동적, 경험적, 비판적, 실천적이어야 하며 학생들이 불의한 상황과 불행한 상황을 혼동하지 않고 구분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즉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정의의 출발점을 어디에서 시작하며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에 대하여 애매하거나 모호할 수 있지만, 우리 또한 과거인들처럼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며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많은 지식과 역량을 학습하고 활동하며 배운다. 그리고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 복지국가를 살펴보면 그럴 때 보편적으로 정의로운 국가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교사의 역할은 누구보다 중요하다. 교사는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정의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중요하게 배운다면 정의가 무엇이고, 정의를 실현하려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이 어떻게 변화할 필요가 있으며, 자신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어떻게 사고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등에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교사의 교육 밖에서의 역할도 중요하다. 교사는 사회의 계층, 성, 인종, 기타 영역에서의 차별과 억압 그리고 불의에 대해 침묵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부끄럼 없이 똑바로 가르칠 수 있도록 학교 안이든 밖이든 사회 정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교사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아닌 ‘갈리아의 수탉’으로 존재할 수 있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이다. 미네르바는 항상 부엉이와 함께 다닌다. 그래서 부엉이는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 됐다. 독일 철학자 헤겔(Friedrich Hegel)은 1821년 발간한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든 뒤에야 날아오른다.’고 적었다. 모든 현상과 사건들은 처음 발생한 때가 아니라 그 현상이나 사건이 마무리될 무렵이 돼야 정확하게 그 실체를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헤겔의 이 지적은 ‘지식인의 자세 또는 고뇌’를 설명하는 말로 이해되지만 교사에게 권할 태도는 아니다. 어떤 지식인이 사회적 현상을 접하는데 있어 가장 뜨겁고 치열할 때는 뒤로 한 발 물러서 있다가, 힘들고 어려운 것이 다 해결된 이후 뒤늦게 나타나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마르크스(Karl Marx)가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비판하면서 차용한 개념인 ‘갈리아의 수탉’이 바람직하다. 갈리아는 프랑스의 옛 지명으로 마르크스는 당시 프랑스 대혁명이 독일 해방을 촉진할 것이라면서 “독일 부활의 날은 갈리아의 수탉의 울음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잘 알 듯, 수탉은 이른 새벽에 남보다 앞서 운다. 결국 지식인은 부엉이처럼 뒤늦게 행동하면 안 되고, 남보다 앞서 새로운 날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런데 교사는 지식인이며 이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즉 정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정의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여는 열쇠이며 사회적 가치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지렛대로 작용하며, 정의에 대한 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예탁결제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사회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 교육청 사회문화 집필 위원, KDI 경제교육교재 집필 위원,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충남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출제위원, 전북 및 전남 교육연수원 강사, 전북대학교 교사 연수 강사, <새전북신문>, <열린 전북>, <전북교육신문>, 인문 웹진 <아홉시>, 네이버 비즈니즈 블로그 <인터비즈>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지금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교육저널인 「교육 제4의 길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미래 교육의 불편한 진실, EBS, 2021>,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을 출간했다.
학생인권이 강화되면서 교권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전에 비해 학생들의 교사에 대한 존경이 낮아진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교사가 정의를 가르치는 지식인의 모습을 갖춘다면, 학생들의 교사를 향한 존경심도 높아질 것이고, 이러한 학생들의 교사를 존경하는 마음이 교권을 높여주고 교사를 정의를 가르치는 지식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작점이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정의가 자유의 간극, 즉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 간의 딜레마, 또한 정의가 기회의 평등과 결과적 평등의 차이를 좁히는 중요한 고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의란 올곧음이며 사변이라고 할 수 없으며, 불의함이란 칸트의 말처럼 직관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정의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시대의 등불로서 살 때만이 설령 인공 지능이 물적 기반이 되는 세상이 온다고 해도 존엄한 존재로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봅니다. 꾸벅.
항상 박제원 선생님의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지식인으로서의 교사의 정의. 많은 단상이 떠오르게 되는 단어입니다. 요즘처럼 다변화하는 시대의 교육환경에서 교사로서 정의에 부합하면서 살고 있는지 고민에 들게 됩니다.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소고로서 요즘 학교의 교육이 어떤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합니다. 가령, 이찬승 선생님께서 연재해주시는 잘 가르치기 위한 ‘학습이론’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요사이 학교에서 ‘잘 가르치기’ 위한 수업을 고민하는가? 생활기록부에 기재될 내용을 화려하고 효과있도록 기재하기 위한 수업에만 골몰하고 있지는 않은가? 각종 새로운 정책이 들어오게 되면 ‘정보비대칭’성으로 인하여 또 그 틈을 파고들어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각종 유료 연수에 유료 강의에…그것이 과연 시험으로만 윽박지르던 소위 적폐시하는 교육에 비하여 더 나은 점이 무엇일지 교사로서 또 생각하게 합니다.
늘 부족한 글인데 읽어주신다니 감사하고 고마운 말씀입니다. 저도 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저는 보수냐, 진보냐 또는 지식이냐 역량이냐, 이런 이야기를 하기보다 이찬승 선생님처럼 “아이들이 실제적 학습을 위해 교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무협지 읽기와 바둑을 좋아하는데요. 이를 통해 배운 것이 있습니다. “고수는 정석에 능하고 한 수(기법, 초식)라도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수 많은 변화와 기법을 펼치더라도 결국 이기는 힘은 하나라도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경우더군요. 제가 최근 10년 정도 교육풍토를 보고 느낀 점은 외부적 변화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수업을 칠판에 백묵으로 한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칠판과 백묵을 멀티미디어기기로 바꾸는 것이 수업혁신이 아니라 과거에 칠판과 백묵으로 수업을 했을 때 잘못했던 부분을 고쳐나가 새롭게 하는 것, 그것이 배움의 출발이라고 봅니다. 꾸벅.. 고맙습니다.
정의를 다루어주시니 반갑습니다. 아직도 학교나 공공기관에서 정의를 언급하면 왠지 긴장하고 불편해하는 분위기를 마주합니다. 갑갑하고 한심하고 화가 납니다. 교사들이 초등학교부터 학생 수준에 맞게, 그리고 교과목에 관계없이 학생에게 행하는 모든 교육행위에서 정의에 대해 성찰하면서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으로 임용될 때까지 능력주의에 적응해서 나아온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 균형 잡힌 지식과 교육적 신념을 갖도록 하려면 무엇이 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