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교육과 시민 교육
95%여 안녕?
지하철의 대형 광고전광판, 사립학교 교복을 입은 초등 5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플랫폼에 서 있고 그 위에 붉은 글씨로 “95%여 안녕!”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5% 아이들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지만, 나머지 아이들이 꾸는 꿈은 꿈에 머뭅니다. 5% 아이들이 가진 가능성은 미래를 열지만 나머지 아이들이 가진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입니다. 당신의 아이는 몇 %의 아이입니까?”, “상위 5%를 위한 총서”라는 문구도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한 대형 출판사가 일간지에도 했던 참고서 광고였다. 상위 5퍼센트를 위한 각종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니 이런 광고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5퍼센트를 꿈꾸는 사람들의 욕망을 한 발 먼저 읽고, 당대에는 못 이룰 꿈일지라도 자식 대에는 잘하면 이룰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불어넣으면서 책을 팔아먹으려는 상술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심기가 자못 불편했지만, 우리 사회 대다수 부모들의 욕망을 새삼 확인시켜준 광고였다. 사실 저 광고가 상위 5퍼센트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적어도 책 몇 권은 사줄 용의가 있는 이 땅의 대다수 부모들을 겨냥한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엘리트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은 자식이 설령 5퍼센트에는 못 들더라도 20퍼센트에는 들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노후자금까지 아이들 교육비에 쏟아 붓는다. 대한민국의 5퍼센트는 이미 국가보다 한 발 앞서 스스로 엘리트 교육을 해오고 있다. 그들의 자녀는 어려서부터 해외를 제 집 드나들듯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익힌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많은 중산층 부모들은 영어유치원에라도 아이를 보내려 안달한다.
영어유치원 주변에서는 꼬맹이들이 “스티브”, “제인” 하면서 서로의 영어식 이름을 부르며 재잘거리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유치원에서부터 영어로 친구들과 종알거리고, 국제중학교, 특목고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 3, 4학년부터 학원과 과외를 전전하는 그 삶이 과연 행복할까? 설령 행복하진 않더라도 정말 저들이 말하는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될까? 영어 좀 한다고 경쟁력이 저절로 생길 리는 없다. 죽어라고 해도 미국의 평범한 공립학교 졸업생만큼도 영어를 못할 게 뻔한데 말이다.
대학에서 수업을 영어로 하도록 강제하자 한 교수는 “영어로 강의하면 수업은 언제 하냐”고 푸념했다. 웬만큼 외국어에 능통해도 깊이 있는 대화를 외국어로 주고받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다양한 언어권의 실력 있는 번역가와 통역가를 길러내고, 일반인들은 모국어로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사고력과 창의력, 협상력을 기르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모든 아이들이 영어 학습에 시간을 바치도록 만드는 교육 정책은 진짜 엘리트 교육과도 한참 동떨어져 있다. 영어 좀 하는, 학벌 좋은 빈껍데기 엘리트들만 길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로벌 인재와 평민
엘리트(elite)는 대중(mass)에 대비되는 프랑스 말로, 어떤 분야에서 지도자 격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학력이 곧 능력으로 통하는 우리 사회에서 ‘엘리트’는 대체로 일류대학 출신을 일컫는 말이 되어, 엘리트 교육은 결국 명문대 진학률을 높이는 교육으로 통한다. 입시 위주 교육이 엘리트 교육처럼 인식되다 보니, 일각에서는 ‘리더십’ 또는 ‘글로벌 인재’를 기르는 교육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엘리트 교육을 논할 때 등장하는 애매한 교육학 용어가 있다. ‘수월성 교육’이라는 말이다.1 참여정부 시절 처음 교육부가 내놓은 ‘수월성 교육 종합대책’은 평준화 정책의 보완책으로 국가 차원에서 우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고민 끝에 내놓은 정책이었다. 소외계층의 영재를 발굴하는 리치아웃(reachout) 프로그램도 도입한 걸 보면 나름의 고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월성 교육의 실제 수혜자는 5퍼센트에 속하는 아이들이었다. 국제중학교가 소외계층을 위해 20퍼센트는 이들을 장학생을 뽑겠다고 했지만, 설령 그렇게 가난한 집 아이가 입학하게 되더라도 계층적 위화감을 버텨낼 만한 내공을 지닌 아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글로벌 인재 양성을 교육목표로 내건 학교들이 적지 않다. 세계화 시대에 국제 감각을 갖춘 인재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도 기업도 글로벌 인재를 찾는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이 선호하는 글로벌 인재는 국가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업의 이익을 높이는 길은 비용을 낮추는 데 있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은 대체로 비용 항목에 해당한다. 인건비가 싼 나라로 공장을 옮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건비를 되도록 낮추고자 할 것이고, 가능하다면 사람을 쓰기보다 파업을 하지 않는 자동화 시설 쪽을 택할 것이다.
국가공동체보다 자신이 속한 기업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글로벌 인재를 공교육이 길러낸다면 사실상 자멸적인 행위를 하는 셈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살을 깎아 다국적 기업의 배를 불리는 사람은 기업에게는 ‘인재(人材)’일지 모르지만 공동체 입장에서는 ‘인재(人災)’다. 공교육의 역할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평범한 시민들을 길러내는 것이다.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선뜻 나설 줄 아는 사람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할 줄 아는 사람이 엘리트다. 장정일이 우치다 타츠루의 말을 빌어 엘리트 교육에 대해 한 말에 귀 기울여볼 만하다.
엘리트는 ‘장소’와 긴밀하게 연관된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지휘했던 남명 조식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때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결집했던 예비역과 한인 유학생들이 엘리트다. … 풀뿌리 지역 활동가들, 혹은 지역 경제를 잠식하는 가맹점 가입을 거부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구멍가게를 연 사람들, 그들이 엘리트다. (한국일보 2016. 12. 30.)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엘리트’라는 말을 ‘시민’으로 바꿔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엘리트의 대중화와 연결된다. 자신의 삶이 공동체와 긴밀하게 엮여 있음을 자각하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평범한 시민들이야말로 민주사회를 이루는 핵심이다. 풀무학교에서 오랫동안 써온 ‘위대한 평민’이란 말은 엘리트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개교 50주년을 맞아 ‘위대한 평민’이란 말 대신 ‘더불어 사는 평민’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맥이 닿는 변화일 것이다. 평민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풀무학교 같은 곳을 선택하지 않겠지만, 이 나라를 구한 이들은 언제나 평민들이었다.
엘리트와 시민
‘20대 80 사회’, ‘우리가 99%다’2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은 80퍼센트 또는 99퍼센트의 사람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과학기술 영역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선도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현실이지만, 그들이 두각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절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이다. 빙산의 일각이 물 위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 물 아래 있는 거대한 빙산 덕분이듯이.
한때 나의 꿈은 ‘삼류’ 기타리스트였다. 기타 연주곡을 즐겨 듣고 기타를 잘 치고 싶었지만 일류 기타리스트는 꿈도 꿀 수 없으니 삼류 정도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음악에 소질은 없지만 좋은 소리에 대한 욕심은 있어 지인을 통해 수제 기타를 장만해서는 틈틈이 연습했다. 하지만 마음은 저만치 앞서 있고 손은 따라주지 않으니 금세 지쳤다. ‘틈틈이’의 틈이 점점 벌어지다 아주 멀어지기를 몇 차례 되풀이하다 보니 십여 년이 흘렀다. 이런 게으른 기타 애호가들 덕분에 기타 제작업체도 살고 기타 연주가의 저변이 넓어진다.
3류 기타리스트를 꿈꾸는 어중이들이 많아질 때 군계일학 같은 아티스트가 등장하는 법이다. 골목마다 피아노 교습소가 들어서고 웬만한 아이들은 모두 체르니 정도는 칠 줄 알게 되면서 조성진 같은 피아니스트도 등장하게 된다. 수많은 씨앗들 속에서 몇 개의 씨앗이 싹을 틔우듯이, 거품이 일면 그 속에서 군계일학처럼, 혜성처럼 누군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마을마다 내로라하는 기타리스트가 있을 때 로드리고 같은 연주자가 태어나고 ‘알함브라의 궁전’ 같은 명곡이 탄생한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대중문화는 함께 자란다. 피아노 교습소가 골목마다 생겨나지 않았다면 피아노는 아직도 클래식의 골방에 갇혀 호사가들의 후원을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권력과 재력, 인기는 거의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이기에 점점 그 순환이 빨라지는 방향으로 세상이 바뀌어왔다. 권력도 돈도 유행도 돌고 도는 것이 현대 사회의 모습이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근대화는 표준화를 통해 유동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대체가능한 것들이 늘어날수록 유동성은 높아진다. 표준화가 높인 유동성은 또 다른 한편으로 평준화로 이어져 그 결과 역설적으로 유동성을 떨어트린다. 하지만 유동성이 떨어져 사회가 정체되기 시작하면 새로운 유행이 등장하여 에너지 낙차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는 신상품으로, 대중문화는 새로운 장르로, 민주주의는 새로운 권력으로 끊임없이 에너지 낙차를 만들어냄으로써 유동성을 다시 높인다. 현대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돌고 도는 원리다.
유동성이 높아지는 것이 반드시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근대화의 피치 못할 결과이므로 거부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고립된 삶을 자초하는 길이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이 대다수 인간들에게 더 힘든 삶을 안겨주었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다. 고립되면 아미시 공동체처럼 퇴행하기 마련이다.3 근대화의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이상 부작용을 줄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시민혁명 또한 산업혁명과 나란히 진행되는 역사적 필연이다.
시민교육은 어떤 의미에서 엘리트교육이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사회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갖고 공동체를 지키는 데 앞장서도록 부추겨야 한다. 5퍼센트의 엘리트가 세상의 변화를 리드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은 95퍼센트가 세상을 받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눈에 보이는 엘리트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언뜻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쓸모 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쓸모 있는 것만 취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을 놓치게 된다. 모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저가’ 엘리트
배움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효율성을 추구한다며 당장 필요한 것만 습득하려는 자세는 정작 원하는 그것도 놓치게 만든다. 연결지점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수학의 개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제곱근 개념은 무한소수, 함수 개념으로 이어진다. 시험에 대비해 제곱근 문제만 죽어라 푸는 학생보다 전체의 맥락 속에서 여러 개념들을 연결지으며 생각할 줄 아는 학생이 진짜 수학을 잘하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긴밀한 맥락 속에 엮여 있듯이 우리 뇌 역시 맥락 속에서 작동한다. 시냅스가 어떻게 연결되느냐가 이해력과 창의력을 좌우한다.
미국으로 간 한국인 조기 유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대학에 들어가서는 죽을 쑤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죽어라 문제풀이만 한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면서 문제를 찾아내고 만들어낼 줄 모른다. 진짜 공부는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찾아낼 줄 아는 것이다. 주어진 문제를 정해진 공식대로 푸는 훈련만 해서는 첨단 학문을 따라갈 수 없다. 경제학자 홍기빈은 이런 문제풀이 엘리트를 ‘필요한 원자재에다 시간만 투입하면 생산이 늘어난다’는 개발도상국의 논리가 만들어낸 ‘중저가 엘리트’라고 정의한다.
노동(학생의 머리)과 토지(학교와 학원의 교실)라는 기본 요소를 놓고 거기에 시간만 때려박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생산물(학력과 명문대 입학률)을 얻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이 시대의 지배적인 교육 패러다임이 된 셈이다. 물론 삽질 혹은 ‘공구리’ 치던 가락을 살려 무작정 학생들을 건축현장 원자재처럼 이리저리 ‘조져’대는 일이 벌어지면, 원하는 교육은 성취되지 않고 대신 학생들의 머리만 실제로 ‘공구리’처럼 단단해질 공산이 크다. (홍기빈, ‘엘리트교육의 허와 실’, 《민들레》 통권 59호)
수학문제 잘 풀고 영어 좀 할 줄 아는 엘리트가 아니라, 독자적인 사유 능력을 갖춘 진정한 엘리트를 기르는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 수학 국제올림피아드에서 1등을 해도 수학을 즐길 줄 모르면 수학자가 되기는 힘들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청소년들은 수학 올림피아드에서는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지만 수학을 좋아하는지를 묻는 설문에서는 아니라는 답변이 우세하다. “한국에서는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자는 나올 수 있어도 훌륭한 수학자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한 외국 수학자의 말은 뼈아픈 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학교 교육과정이란 것은 어디나 비슷해서 미국의 학교라고 수학을 즐기는 교육을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기유학생들의 이야기로는 미국의 수학교육 역시 문제풀이에 치중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되고, 아주 소수의 학생들만 수학탐구자(스스로 연구하고 깨우치면서 수학을 즐기는 친구들)가 되는 것 같다고 한다. 표준화된 학교교육은 비슷하지만 탐구자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커리큘럼 때문이 아니라 성적에 대한 압박이 적고 자유로운 탐구가 가능한 사회 분위기 덕분이 아닐까 짐작된다.
문제풀이에 능숙한 아이보다 소수(素數)의 신비를 곱씹으며 수를 갖고 놀 줄 아는 아이가 창의적인 수학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수학자가 될 필요는 없으며, 소수 따위는 몰라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지만, 그런 아이들이 나올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수학 공부가 그렇듯이 맥락 속에서 사고할 줄 알 때 독창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것들 사이에서 연결지점을 발견하는 능력이 창의력의 핵심이다. 그런 창의성을 발휘하는 학생은 드물겠지만, 그렇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은 모든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이는 커리큘럼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수포자들과 소수의 문제풀이 기계를 길러내는 지금의 학교교육을 개혁하는 길은 커리큘럼의 개선에 있지 않다. 8차 교육과정이 나온들 달라지긴 힘들 것이다. 진짜 엘리트는 길러내지 못하고 기껏 글로벌 기업의 머슴들과 대량의 낙오자만 양산하는 교육문제의 뿌리는 공교육의 근본 방향이 시민교육을 지향하고 있지 않은 데 있다. 우등생이 아니라 시민을 기르는 교육을 지향할 때 소모적인 입시경쟁도 완화되고, 아이들이 뭔가에 몰입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날 것이다. 국가교육이 국가경쟁력의 주술에 걸려 또는 부모들의 욕망에 부화뇌동하여 입시에 올인하는 것은 아이들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앞날도 그르치는 길이다.
인재 양성과 등용 방식
국가운영을 책임질 수 있는 엘리트를 길러내는 일은 예로부터 고등교육의 역할이었다. 조선시대 인재 등용 방식에는 나름 합리적인 면이 있었다. 경세제민을 위해 실무는 중인계급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고4 지배계급은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시야를 기르는 공부를 했다. 양반 자제들을 교육하는 성균관, 서원 같은 곳이 고등교육기관의 역할을 한 것이다. 역할이 신분으로 고착되면서 혁신의 에너지가 만들어지지 못한 것이 한계로 작용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5백 년에 걸친 왕조가 가능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한편 일제시대에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읽기와 셈하기 정도만 배울 수 있었다. 고등교육이라 해도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실무자를 기르는 교육에 그쳤다. 반면 일본의 자국민 엘리트들에게는 수학과 과학, 철학과 인문학 등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했다. 독자적인 사유 능력을 갖춘 엘리트를 기르고자 한 것이다. 일본이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부터 ‘난학(蘭學)’이 융성하면서 수학과 과학의 토대를 닦은 덕분이다.5
교육은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 속에서 저마다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게 돕는 일을 한다. 그 역할에는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각각의 전문 분야 일도 있지만,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시행하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엘리트의 역할이다. 그 일은 인문학적 통찰력과 사회과학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고시 공부만 해서는 그런 능력을 기를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인재 양성과 등용 방식을 근본적으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취업학원이 되다시피 한 대학과 지금의 고시제도로는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인재를 기대하긴 힘들다.
교육철학부터 바로 세우고, 제도를 하나하나 바꿔나가야 한다. 사법고시는 폐지되었지만 사법개혁은 아직 요원하다. 고시제도 하나 바꾼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멀리 내다보고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 부단히 개혁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최근 총리를 역임한 민주당의 한 대선 후보는 행정고시를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신분 상승 사다리를 걷어찬다는 비판도 있지만 고시가 개천 출신 용들의 등용문 기능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시험 한 번으로 20년의 경력을 뛰어넘게 해주는 고시제도와 나이에 따른 연공서열제를 개혁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 중 하나다.
교사 양성과 임용제도에 대한 재고도 필요하다. 임용고시가 교사의 자질과 역량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시험을 준비하느라 그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정작 교사에게 필요한 역량을 갖출 수 있게 돕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6 시험 잘 보는 사람을 뽑아서 시험 잘 보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이라고 믿는다면 지금의 임용고시제도가 최선이겠지만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사의 교육관과 자질을 살피는 면접과 실무 경험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임용제도를 바꿔야 한다.
젊은 시절을 다 바쳐 시험공부에 올인해 고시를 통과해서는 기득권 집단에 안주하는 이들이 엘리트 집단이 되는 사회는 정체되기 마련이다. 서울대를 나와 9수 끝에 사법고시를 통과해 검사가 된 사람이 최근에 보여주는 몰상식함이 이를 말해준다. 개인의 성취를 위해 고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자신이 기여할 바를 찾아 공무를 담당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안전한 직장으로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사의 길을 택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선순환의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사회도 진보할 수 있다. 교육의 역할은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 수월성 교육에서 ‘수월성(秀越性)’은 순우리말인 ‘수월하다’와는 전혀 뜻이 다른 말이다. 한자로 ‘빼어나다’, ‘높이 솟다’를 뜻하는 수(秀)와 ‘앞지르다’, ‘건너다’라는 뜻의 월(越)의 합성어이다. 영어로는 excellence에 해당한다. ‘탁월성’ 또는 ‘우수성’이라고 하면 뜻이 더 선명해질 텐데 수월성이라는 애매모호한 신조어를 만든 것은 왜일까? 평준화를 둘러싼 논쟁을 피해 가려는 의도에서일까? 교육부는 수월성 교육을 정의하기를 “영재 교육이나 엘리트 교육과는 다른 개념으로, 평준화의 틀을 유지하면서 잠재력이 뛰어난 학생의 잠재성을 극대화시킨다는 뜻에서 보편성 교육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2004년에 교육부가 발표한 ‘수월성 교육 종합대책’은 ‘영재’라는 단어로 도배되어 있고, 사실상 5퍼센트를 위한 ‘엘리트 교육 종합대책’이었다.
- 금융자본의 횡포에 맞서 월가 점령 시위 때 나온 구호. 2011년 10월 15일에는 전 세계 4백여 도시에서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에 연대하는 집회가 열려 “1퍼센트 부자에게 세금을! 99퍼센트에게 일자리와 복지를!”을 외쳤다
- 기독교 재새례파 계통의 종교공동체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지역 여러 곳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현대문명을 거부한 채 마차를 타고 다니고 농사를 지으며 산다. 근친강간 등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지만 공동체 내부 문제로 치부되고 만다.
- 중인 관원을 선발하는 잡과는 오늘날의 판검사, 의사, 동시통역사, 회계사, 기상청 관리에 해당하는 전문직 공무원을 뽑는 시험으로, 역과(통역), 율과(법률), 의과(의료), 음양과(천문지리), 산과(세무) 등이 있었다.
- 난학은 네덜란드, 곧 홀랜드(Holland)의 일어식 표기 ‘오란다(和蘭)’의 학문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의 난학자들은 17세기부터 네덜란드와 직접 교류하면서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익혀 유클리드 『원론』, 해부학 서적 등 다양한 학술서들을 직접 번역 출판했다. 지난 80여 년 동안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60명 가운데 중국인과 한국인은 한 명도 없는 반면 일본인이 3명이나 되는 것 또한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 사범대 졸업생의 임용고시 합격률은 10% 정도다. 경쟁률이 높고 문제 난이도가 높아 순간의 실수로 당락이 결정된다. 시험에서 탈락한 사람은 기간제 교사가 되거나 학원 강사가 되지만 그것도 50%를 넘지 않는다.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
선생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교사들에게 ‘공부를 잘하고 시험을 잘 쳐서 교사가 되서 그런지 공부가 어려운 학생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많이들 하곤 합니다. 또한 엘리트란 용어도 기존의 기득권으로 있던 사람들이 인성, 도덕성 등에서 많은 문제를 보이면서 오염된 언어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부터도 ‘엘리트’ 하면 인성이 메마른 사람이란 선입견을 갖게 됩니다.
뜻하지 않은 경험으로 초등학교 6학년에 학업을 포기했고 2019년부터 유학을 위해 학습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다른언어를 공부하다보니 여러가지 사회문제가 자연스럽게 다가왔습니다. 그중에 교육은 정말 문제를 많이 안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남겨봅니다. 공교육에 철학도입이 시급합니다. 연극수업도 의무로 들었으면 좋겠어요. 연극의 이론과 실습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이점이 우리나라에서도 부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