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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공동체 철학을 겉으로 보지 않고 과학과 합리를 통해 깊게 보려고 해야

#622 박제원, 전주 완산고등학교 교사 2021.03.31

필자는 본 칼럼을 통해 사또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 철학≫을 3회에 걸쳐 비판적으로 성찰하려고 한다. 다수 교육청은 교육 문제를 해결하고 교육 발전을 추구하겠다고 2015년 이후 본격적으로 ≪새로운 학력≫을 주도적 학력관으로 편성하고 운영하였지만, 공적과 과실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새로운 학력의 기반은 단연코 배움의 공동체 철학이었고, 이런 엇갈린 평가에서도 교육청 교육과정에서의 중심 지위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다. 이 시리즈 첫 칼럼에서는 필자의 문제의식, 배움의 공동체 철학 원리 및 프레이리의 교육관의 핵심을 밝히고, 배움의 공동체 철학을 이해하려면 들뢰즈를 깊게 들여다봐야 할 필연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독일의 근대 역사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법철학』 서문에서 역사가 뚜렷하게 발전하는 순간을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날아오른다.”라는 메타포에 빗대었다. 어미 닭에서 부화한 유정란이 병아리(닭)로 되어가듯이 역사는 절대정신(자유)이 자신을 완성하는 과정이지만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 시기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절대정신이 진리임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갈등과 혼란의 시대일수록 참된 지식을 얻고 지혜가 생겨나기를 더욱 열망하지만 잘 알지 못하다가 최고 수준에 달해야만 원인, 과정, 결과 등의 실상을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도 절대정신이 역사의 실체이며 스스로 모습을 보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지만, 이때 중요한 이야기를 꺼낸다. 절대정신은 반드시 역사발전을 위해 당대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한 인간을 도구로 쓴다는 것이다.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과학이든 객관적 진리라고 하더라도 단박에 그 사실을 보여주거나 수긍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지동설만 봐도 승인되기까지는 박해와 고통이 뒤따랐다. 연구자가 객관적인 자료를 보여줘도 천동설을 숭배하던 세속적 왕과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 미신이라고 취급받으며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과학적 소견을 증명할 기회를 박탈당하였고 그에 부화뇌동하며 천동설을 맹신하는 관료와 추종자들에 의해 소외되었다.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신부였던 브루너(Giordano Bruno, 1548-1600)는 화형을 당했으며 갈릴레이는 법정에서 삶을 위협받으며 지동설 철회를 강요받았다. 갈릴레이는 어쩔 수 없이 지동설을 부정하고 법정에서 나오는 중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을 읊조렸고 실제로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교사가 수업에서 배움을 일으킬 때 지켜야 할 3원칙

 

지난 10년 동안 초·중·고 교육에서 “지식 위주의 학력을 극복하라”라는 격동과 혼란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다수 교육감은 역량(배움)의 도구이자 후원자가 되었고 사또 마나부는 관계를 중시하는 새로운 학력관의 전도사로 쓰였다.

 

사또 마나부는 공부와 배움을 구분하고 공부를 낡음으로 배움을 새로움으로 전파했다. 그에 의하면 “공부는 무엇과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대화도 없이 수행되는 노력이다. 반면 배움은 교재나 교구 등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과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이다.” 배움의 목적은 무엇이 있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누가 어떤 상황에 있든 나와는 관계없는 허무주의(사또 마나부는 허무주의라고 표현하지만 이기주의로 해석하는 것이 옳음)가 현대사회를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배움 중심의 수업에서의 중심과제는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싸워 이기주의를 극복하려는 실천이다. 그러니 수업에서 상대의 정서나 감정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반드시 집단적으로 과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각자의 이해방식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친구와 공유하고 서로 감상하고 성찰하는 활동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배움의 과정은 3단계의 순환과정이다. ‘주변 사물과 만나고 대화하여 세계 만들기’, ‘타자와 만나고 대화하여 친구 만들기’, ‘자신과 만나 대화하여 자기 만들기’가 삼위일체로 의미와 관계를 엮어가는 영속적 순환이다.

 

교사는 학교 교육을 공부에서 배움으로 전환하려면 수업에서 세 가지를 따라야 한다. 첫째, 만남을 중시하는 활동적 배움이다. 교과서의 지식은 사실적 지식이든 개념적 지식이든 지식의 실체가 아닌 그림자(허상)에 불과하므로 아이들이 서로 만나 현실 세계의 지식(경험적 지식, 절차적 지식, 태도)을 배울 수 있도록 주위를 체험하여 학습하게 해야 한다. 둘째, 학교에서 위기란 배움에서 협력이 없는 학생들의 위기로 타자와 만나 협동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공부하는 자기 주도형 학습은 개인주의적으로 좋은 배움이 아니며 집단주의적 배움을 추구해야 한다. 시대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공생하는 사회라면 자신이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친구에게 제공하고 타자의 아이디어로부터 겸허하게 서로 배우는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물론 자기 주도와 협력은 대립적이지 않으며 반드시 협력을 바탕으로 자기 주도형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지식이나 기능을 축적하기보다 실천하고 공유하며 성찰하는 배움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지식이나 기능을 축적하는 교육은 파울로 프레이리가 지적한 은행 예금식 교육으로 교사가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학생들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만들어가는 교육이다. 즉 교사는 모든 것을 알고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학생들은 오직 듣고 있어야 한다. 교사는 지식의 권위를 직업상의 권위로 혼동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교육 내용을 선택하여 가르치며 학생은 순응해야만 한다. 그러니 사또 마나부에 의하면 국가에 의해 이미 교과서로 만들어지고 교사가 그대로 받아들여 교과서에 실린 지식이나 기능의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는 교육은 옳지 않고 활동 중심으로 재구성하여 실천하고 반성하도록 해야 한다.

 

 

배움의 공동체 계보에서 할아버지는 파울로 프레이리, 아버지는 질 들뢰즈

 

사또 마나부의 교육철학을 얼핏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만남, 대화, 협동, 성찰, 이기주의 극복 등 도덕적 가치로 꽉 차 있다. 그가 말하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인류, 특히 동양 문화에서 추구했던 고귀한 가치로 사회 전반적으로 추구해 온 가치이다.

 

그런데 왜 사또 마나부의 교육적 도덕관은 일본에서조차 변방의 교육철학이고 수많은 교육관 중 하나인데도 한국에서 독점적 지위가 주어지고 주목받게 되었을까? 사또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 철학이 교육 전반을 지배하고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육 이상(교육이념), 교육 목표, 이에 따라 요구되는 수단과 방법과 조건을 교육과정에서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서일까?

 

만약 사또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 철학이 비과학적인데도 교육청 등 지배 권력이 선택한 지식으로 근본적으로 교육 신화에 불과하다면 이제라도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지금 겪는 학습격차 등 여러 교육문제가 지난 10년 동안 사또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 철학에 대한 일방적 맹신 때문이라면 어떻게 벗어나 배움을 재건할 수 있을까?

 

먼저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를 밝혀야겠다. 단연코 파울로 프레이리, 질 들뢰즈, 사또 마나부의 문제의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문제의식을 빌려오면서 실제로는 초·중·고 교육이 교조적으로 경직되게 운영되었다는 점이고 교육청에서 일부 관료들이 철저하게 순응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단 한 명의 아이라도 행복한 교육을 하겠다는 장밋빛 구호는 소수 권력자가 억눌린 교사, 학생, 학부모의 고통을 벗어나려는 환호로 열리게 된 과실을 독점하도록 쓰였다는 것이다. 결국 프레이리도 들뢰즈도 사또 마나부도 없는 소수 그들만의 끼리끼리 공감과 협력이 넘쳐났으며 권력을 둘러싼 갈등만 횡횡했다는 것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적 개념의 기원과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동시에 역사를 통해, 왜 허무주의가 지배적인 사상이 되어버렸는지 의문을 던지면서 추적하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해법을 다각도로 모색하듯이 해야 한다.

 

니체처럼 사또 마나부 철학의 계보를 추적해야 한다. 이 추적은 진리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믿음의 기원을 밝혀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또 철학의 계보를 추적하면 반드시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와 포스트 모더니스트인 질 들뢰즈와 만나게 되는데 유전에 빗대면 프레이리의 ≪억눌린자를 위한 교육≫과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이 배움의 공동체 철학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격이 되기 때문이다.

 

사또 마나부는 교육에서 무엇을 의도했기에 프레이리의 교육관과 들뢰즈의 철학을 받아들이려고 했을까? 사또 마나부의 배움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배움은 타자와 만나 대화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반면 좋은 가치는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또 마나부는 만남과 대화를 매개로 들뢰즈, 프레이리와 맞닿아 있다.

 

프레이리에게 인간의 숙명은 세계는 끊없이 변하기 때문에 자기 세계를 새롭게 각성하고 변혁하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 또는 동시에 타자와 함께 완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따라서 교사는 아직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주의(공산주의)에 이르도록 역사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억압받는 자들조차 기술의 진보를 받아들이더라도 현존하는 계급 질서를 부정하는 사회관을 갖도록 해야 하고 이를 가장 중요한 교육 목표라고 보았다. 그래서 교과서로 대표되는 지식을 축적하고 저장하는 은행 예금식 교육을 비판한다.

 

그 수단이 만남과 대화이며 적절하게 쓰이면 민중(民衆) 스스로 계급 질서를 따랐던 자신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고 스스로 현실의 억압에 대해 저항할 수 있다. 교육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이 낡고 권위주의적으로 뿌리박힌 학교에서 일방적이고 강제적이며 지배적인 교사와 억압적이고 특정한 지식만 강요받으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학생 사이의 관계는 극복된다. 또 학생들은 어지간하게 품성이 좋거나 기술적으로 교수학습에만 매달리는 교사보다는 억압받는 자들과 만나게 됨으로써 효과적으로 완전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권력자에 의해 가려지고 포장된 현실의 억압을 드러낼 수 있다. 권력자의 언어와는 다르게 사건에 대해 새롭게 이름을 붙여가게 되면서 자신이 공동체적으로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서 잠재능력을 발견하는 수단이 된다. 즉 언어를 통해 스스로 자신이 누구이며 세계와 자신이 어떤 관계인가를 알게 되며 현실의 계급적 억압을 타파하는 실천의 주역으로 나서게 한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세상을 다시 보게 되어 그에 감춰져 있던 억압과 착취의 현실을 제대로 보게 된다. 그래서 교사는 학교 교육으로 학생들을 문맹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며 억압을 가리는 현실을 폭로할 수 있도록 문해력을 높이도록 교육해야 한다. 결국 국가든 교육청이든 학교든 중립을 지키는 교육과정이란 근본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교육은 학생을 현 제도의 논리 속에 흡수하여 거기에 순응하도록 하는 도구이거나 자유의 실천인 현실에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대응해서 자신의 삶을 바꾸는 방법을 찾게 해주는 수단이자 역할만 할 뿐이다.

 

 

배움의 공동체 철학에서 도덕성만 받아들였고 역동성을 지워버려

 

사또 마나부에게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프레이리 자신이 “페다고지(억눌린자를 위한 교육)는 구체적인 브라질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자신이 행한 교육 실천에서 관찰한 사실을 기록했다.”라고 밝힌 것에 대한 새로운 보완 철학의 역할을 한다. 그 까닭은 프레이리가 경험했던 1950년대∼1970년대의 제 3 세계인 여러 남미국가와 브라질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두었던 소비에트(소련)가 1991년에 붕괴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 소련이 붕괴되었어도 자본주의의 계급 억압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에서 새로운 사유체계와 이론적 뒷받침이 없이는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民衆)이 자본의 억압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세계의 실상은 차이로서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받아들일 때만이 새롭고 더 나은 차이인 생성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차이의 철학을 받아들여 프레이리의 교육관을 유지하면서 현실적으로 붕괴한 구 소련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니 사또 마나부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들뢰즈의 철학을 꼼꼼하고 송두리째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떻게 한국 교육에서 사또 마나부가 독보적이며 신화적 지위를 갖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는 배움의 공동체 철학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필자도 그럴 의도가 전혀 없다. 다만 아버지 격인 들뢰즈의 유전자인 비판적 사고를 따라 배움의 공동체가 추구하는 이론과 한국 교육 현실의 격차를 극복하여 교육의 새길을 열려고 한다.

 

들뢰즈 철학을 꼼꼼하게 봐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 다수 교육청은 배움의 공동체 철학을 좋은 배움관으로 정해 교육 지침으로 삼고 학교에 전파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을 받아들인 사또 마나부의 교육 철학을 수용했지만, 문제의식으로 아버지 지위만 주목했을 뿐이지 아버지의 역할이 현실의 여러 문제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라는 역동성은 사라지고 오직 푸코가 지식론에서 말하듯이 권력을 뒷받침하는 지배 지식으로만 작용했다. 다시 말하면 아들이 아버지의 유전자 물려받았어도 성장 과정에서 여러 환경적 요인을 고려했어야만 유전자의 형질이 정상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데도 권력에 의해 찬미되어 교사나 학부모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었고 아직 도달하지 않은, 아니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이 모두 선하다는 가정, 모두가 선하고 단 한 아이도 배움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만이 확고한 진리처럼 교육 주변을 맴돌게 했다.

 

이 폐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교사나 학부모들이 사또의 배움의 공동체 철학이 아버지인 들뢰즈의 유전자를 물려받거나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선, 협력, 경청, 공감이라는 언어 관념에만 환호하도록 하였으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과학의 원리마저 망각하도록 했다. 결국 시간이 점점 흘러가면서 들뢰즈는 그만두더라도 사또 마나부의 문제의식마저 지워져 버렸고 교수학습에서 과학을 따르지 않는 만남과 대화는 아이들에게 현실 문제를 각성하게 하기는커녕 기술적인 학습 능력도 높이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교사들이나 교육청 관료들은 배움의 공동체 철학을 겉으로만 보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최소한 아버지인 들뢰즈로부터 사유해야만 배움의 공동체 철학의 실체와 시사점을 이해할 수 있고 무턱대고 환호한 교육 혁신 파티의 끝 무렵에 남긴 온갖 쓰레기를 치워낼 수 있다. 즉 더 늘어난 사교육비, 더 깊어진 학습격차, 더 늘어난 학업 중단율, 점점 더 확산 중인 문해력 저하, 더 심화되고 넓어진 이기주의, 끊이지 않는 학생폭력 증가라는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교육청이 이것들을 소홀하게 다뤄서는 안 되는 까닭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새로운 학력’과 ‘교육과정-수업-평가-기록의 일체화’라는 도식을 만들어 수업 혁신을 해왔기 때문이다.

 

다음 글은 본격적으로 프레이리가 교육의 본질로 삼은 ‘대화론’과 들뢰즈의 역작인 ‘차이의 철학’을 설명하고 이를 물려받은 사또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 철학의 교육적 한계를 보려고 한다. 사또는 교사가 수업에서 배움이 일어나게 하려면 ‘타자와의 만남’, ‘대화’, ‘집단적인 협동 학습’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여기에 숨어 있는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비과학적인 미신을 속속 드러내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역사의 발전은 현실에서 인간의 삶이 나아지는 변화이며 주도면밀한 절차와 실천을 보장하는 과학적 이론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기계적으로만 현실을 재단하고 처방하여 독단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지난 1980~90년대 사회과학 출판사 풀빛에서 펴낸 책들에는 속지 맨 앞에 잎이 풍성한 나무 그림과 함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 뜻은 영원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푸른 생명의 나무라는 것이다. 푸른 생명의 나무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삶 속에 녹아있는 고통과 꿈, 그리고 사랑이며 이런 것들이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삶과 유리된 이론은 아무리 화려하고 생생하게 보여도 의미가 없으며 회색일 뿐이고 말라비틀어진 것이며 어떤 이론이든 단지 현실을 반영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발전단계, 현실을 바꾸려는 주체적 동력, 주변을 둘러싼 여러 객관적 상황을 고려할 때만이 현실 변혁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니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겠다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기꺼이 수용하고 ‘학습이 만남과 대화’라고 해도 지난 10년의 수업 혁신으로 보편적으로 학생이 전인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면 원인과 쓰였던 절차적 문제점을 샅샅이 밝히는 것은 무척 중요하고 빼놓을 수 없는 과제이다. 예를 들어 인간 인식의 한계, 이론과 실천의 관계, 이론과 철학에 대한 태도, 교육 실천가로서의 자세, 협동에서 집단주의에 대해 깊게 성찰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이 배경에는 교육에서 2022 교육과정 개정에 대한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고 이에 따라 지역 교육과정이 달라지는데 더 나은 교육 방향을 모색하려면 과거와 지금의 교육 현실을 찬찬히 되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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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완산고등학교 교사 박제원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예탁결제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사회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 교육청 사회문화 집필 위원, KDI 경제교육교재 집필 위원,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충남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출제위원, 전북 및 전남 교육연수원 강사, 전북대학교 교사 연수 강사, <새전북신문>, <열린 전북>, <전북교육신문>, 인문 웹진 <아홉시>, 네이버 비즈니즈 블로그 <인터비즈>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지금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교육저널인 「교육 제4의 길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미래 교육의 불편한 진실, EBS, 2021>,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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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1. 김태균 수정 삭제

    박제원 선생님의 비판적인 글을 통해 보다 단단한 교육적 철학의 기반이 마련되어 이것이 바람직한 교육정책으로 연결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교사들이나 교육청 관료들이 배움의 공동체 철학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는 성찰을 통해 더 나은 교육, 학교를 만들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의 글도 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박제원 수정 삭제

      고맙습니디. 제 글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한국 교육의 모습에 기여한다면 무척 좋은 일이라고 여깁니다. 나머지 2회의 글도 주의깊게 쓰겠습니다.

  2. 노대현 수정 삭제

    교육을 낡음, 배음을 새로운으로 만남을 중시하는 협동활동적 배움을 강조하는 사또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에 프레이리의 은행예급식 지식 축적의 교육에서 차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문제의식, 질 들뢰즈의 차의이 철학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믈 살피며 배움 중심 수업이 긱계적 교조적으로 적용되어 억압과 차별을 해결하려는 문제의식이나 기술적인 학습능력 신장이 되어지지 않았다는 진단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근본은 단어(용어)를 아무렇게나 가져다 씀으로써 의미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배움은 배우다, 배다를 바탕으로 한다고 볼 때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활동 내지 그 결과로 파악한다면 어떨까요?
    교육은 ‘가르다, 치다, 기르다’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본다면 누군가의 도움(이끔)이 전제되어요.
    존재하는 것은 대개 선유조건이 있고, 선유조건이 성립되었을 때 온전한 존재성을 드러낸다고 볼 때 선유조건에 얼마나 부합되느냐, 잘 조화되고 주고 받는 작용이 원활하냐에 따라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 달라집니다.
    학교에서나 교육 당국에서 고민 없이 빌려쓰는 개념들을 차제에 그 바탕 뜻을 살펴서 의미나 가치가 드러나도록 하는 데 힘을 쏟는 것이 우선되어야 기초가 잡힐 것 같습니다. 일본이 만든 한자말인 ‘교육, 행복,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 우리 한국말로 한국인의 정서와 의식 구조에 잘 스며들지 못하고 개념의 혼돈에 빠진 것 같은 부분이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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