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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교육 30년지대계 (12) – 대입전형의 미래를 위한 제언(3): 대입 경쟁의 완화

#141 강태중,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15.05.06

※ 본 글의 내용은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이 개최한 ‘학교교육과 평가, 그 미래방향을 모색한다’ 토론회의 발제문에 게재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제시된 3개의 제언 각각을 3회에 걸쳐 게재할 예정입니다. 그 세 번째 제언으로 ‘대입 경쟁의 완화’를 소개합니다.


 

한국 대입전형에서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는 과도한 경쟁 사태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대입전형의 역사는 줄기차게 이 이 과제에 매달려 왔다. 잘 알듯이 문제 해결에 진전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이 문제는 고질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는 과제 자체를 불가항력의 것으로 단정하여 아예 의제에 올리지도 않는 지경이 되었다. ‘구조적인’ 문제는 어디 한 곳을 건드려 해결될 리 만무하고, 더욱이 ‘상부구조’인 교육의 부문에서 구조적인 변화를 겨냥한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소치라고 받아들여진다.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이 과제를 우회해서 대입전형의 미래를 생각할 수는 없다.

 

‘과도한’ 경쟁의 문제에 새롭게 접근하기 위해서 우선 이 문제의 성질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이 문제는 대학 서열이 빚어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열이 있으니 높은 서열을 차지하려는 상대적인 경쟁은 무한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한 경쟁을 해소하려면 서열을 없애거나 서열이 무의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해결 대안의 주종이었다. 서울대 폐지니 국립대학 통합이니 하는 대안이 전자에 속하는 것이었고, 학력 중심의 고용 관행을 척결해야 한다는 대안이 후자에 속하는 것이었다. 방향은 다르지만 두 접근 모두 현실성이 약하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이런 대안에 비견할 새 대안을 찾는 것이라면,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대학의 서열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대학 서열을 없애거나 무력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고 인정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서열을 인정하면, 사회 정책의 역할은 그 서열을 부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서열에 바른 가치와 기능을 부여하는 데 있게 된다. 서열이 있어야 한다면 거품 없이 실질적이게 세워지게 하고 그 사회적 기능도 타당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대학 서열은 과도하게 세밀하다. 수백 개의 대학을 한 줄로 세울 정도로 대학들을 구분해 인식한다. 그러나 순전히 입학생들의 학업 성적으로만 대학을 서열화한다 하더라도 서열의 경계는 크게 중첩된다. 대학별로 합격 커트라인이 다르더라도, 그 다른 두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은 적지 않게 같은 수준의 실력을 가지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이 사실인 만큼, 커트라인을 선명하게 긋는 전형은 허구이고, 그런 커트라인에 빗대는 ‘정밀한’ 대학 서열도 허구이다. 대입전형 정책은 이 허구를 깨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대학 서열 문제에도 접근해야 할 것이다.

 

입학 경쟁이 있는 모든 대학에서 많은 입학 지원자들은 커트라인 근처에 몰려 있기 마련이다. 이들 사이에 당락은 사실 ‘운’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갈린다. 소위 객관적으로는 커트라인 위 아래로 갈리는 것으로 판명나지만, 그 위아래 점수 차이는 당락을 가를 정도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같은 전형을 수차례 반복한다면 그때마다 당락자의 구성이 작지 않게 바뀌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사실이 이런데도 굳이 커트라인을 긋고 그 선으로 대학 서열을 구분하도록 두는 것은 온당치 않다. 교육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런 전형의 관성은 부당하고 해롭다. 같은 실력의 지원자들에게 같은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비교육적이고 정의롭지도 않으며, 타당하지 않은 커트라인을 부각시켜 대학 서열을 과장하고 학벌주의를 온존시키는 것은 반사회적이다.

 

허구적이고 과장된 대학 서열의 통념을 깨기 위해서, 그리고 커트라인 사정의 신화를 깨기 위해서는 마땅하면서도 극적인 대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형에 추첨 수단을 가미하는 것이다. 추첨을 활용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쉽게는 소위 우선선발과 일반선발을 구분하듯 활용할 수 있다. 엄격한 합격 요건을 출중하게 충족시키고 있는 지원자들은 우선 실력에 부합되게 합격시키고, 다음으로, 합격 요건은 갖추었지만 지원자들 사이의 우열을 구분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무리인 경우, 이 집단에 대해서는 추첨으로 당락을 결정할 수 있다.

 

흔히 추첨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도구로 인식된다. 의사 결정을 추첨에 맡기는 것은 책무를 방기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그러나 추첨은 그 조건을 어떻게 구안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출 수 있다. 시험 성적이든 학생부 평정 점수이든, 대입전형의 자료들은 근본적으로 부분적이며 불안전하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매우 미세하게 사정하는 것이 결코 타당하거나 공정하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타당하고 공정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지점까지만 지원자들을 평정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전적으로 편견을 배제하는 결정 방식을 취하는 것이 정직하고 공평한 처사이다. 이 후자의 방식이 추첨일 수 있다.

 

추첨 도입은 한국 교육과 사회 맥락에 적어도 세 가지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 우선, 입학전형이나 학생 평가가 자로 길이 재듯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인식을 사회적으로 키울 수 있다. 이런 인식은 교육적으로 매우 긴요하고,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늘 지적되듯이, 우리 교육은 평가 만능과 점수 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학생들은 다면적이고도 종합적으로 키워지고 또 평가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며, 평가는 늘 한계를 지니는 것이어서 그 결과로 학생을 전면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추첨 제도가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이익은 이른바 절대평가의 철학을 일상화해 줄 수 있으리라는 데 있다. 추첨을 도입하면 백해무익한 커트라인 개념이 사그라질 수 있다. 전형(평가)은 입학 요건이라는 절대 준거에 따라 이루어지고, 그 준거를 만족시키는 일군의 지원자에게는 동일한 기회(입학 가능성)가 주어진다. 상대적인 순위를 매겨 어떻게든 커트라인 밑 정원초과 인원을 쳐내려는 무리한 과정을 밟지 않는다. 대입을 준비하면서도 입학 경쟁자들을 추월하려고 무한으로 애써야 하는 사태가 사라진다. 누구와 경쟁하느냐에 관계없이 오직 입학 요건(성취 준거)을 갖추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교육 관성이 자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추첨제는 대학 서열에 대한 통념을 약화시켜 줄 수도 있다. 대학 진학 기회가 적지 않게 추첨에 따라 배분될 수 있다는 사실은 대학 서열에 대해 새로운 자각을 키울 수 있다. 대학에 서열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무시하게 되지는 않지만, 그 서열에 관해 개개 대학별로 예민하게 반응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적어도 서열에 관한 한, 한 무리의 대학 가운데서는 어느 대학에 입학하든 같은 성과라는 인식이 번져갈 수 있다.

 

대입과 같은 어마어마한 사안에 추첨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도구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는 웃음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제안은 대입 당락을 그냥 동전 던져 결정하듯이 결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당락 결정에서 사람의 이성으로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을 때, 그래도 어떻게든 사람(전문가)들이 생각을 짜내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정의롭고 타당한 일인지 재고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일차 전형에서 우열을 가리지 못했을 때 다른 자료들을 더 활용하여 처음에 드러나지 않았던 우열을 포착할 수 있다. 이를테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동일한 성적대(등급)에 속하는 지원자들에 대해서 학생부 기록을 추가로 검토하여 우열을 더 가를 수 있다. 그러나 동원 가능한 자료를 모두 활용해서도 우열을 가를 수 없다면 어떻게 당락을 결정해야 하는가? 일반 대입전형에서는 흔히 ‘동점자 처리 기준’이라는 것을 두어 적용하거나, 아니면 해당되는 지원자 모두를 학생을 합격시키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추첨은 이런 방식의 하나이지만 그 철학에서는 범주를 확연히 달리한다.

 

추첨은 이성적인 판단이 유보되어 마땅하다고 인정되는 상황에서 제안되는 것이다. ‘수능 위주 전형’을 예로 들어 보자. 커트라인이 300점인 모집 단위에서 298점과 302점 사이에 입학정원 2배의 지원자가 몰려 있다고 가정해보자(실지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정이다). 이제까지 대입전형에서는 점수 순서대로 당락을 갈랐고 동점자는 사전에 정한 원칙대로 적용해서 처리했다. 이런 전형은 타당하고 정의로운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측정 오류를 감안한다면 298점과 302점의 차이는 오류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 차이는 실력 차이가 아니라 운에 따른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논술 전형이나 학생부 전형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숫자의 점수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차이에 근거한 전형은 ‘측정 오차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오류일 가능성을 항상 지닌다. 진실이 이런데도 현재와 같은 미봉의 전형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달리 처리하는 데 따르는 다양한 성가심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편의를 쯪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추첨을 도입하자는 것은, 자기 기만적인 ‘이성’을 굳이 발휘하지 말고 정직해지자는 것이고, 공적으로도 이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여 건강한 사회 상식과 습관을 키우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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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강태중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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