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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1) – “미군정기의 교육개혁”

#1370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2025.09.17
미군정 하에서의 교육개혁을 바라볼 때 ‘무엇이 개혁되었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이 개혁되지 않고 유지되었는가’ 하는 점에도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를 살펴보지 않고는 한국의 현대교육사를 정직하게 풀어낼 수 없습니다.               

 

 

해방과 함께 되찾은 이름

 

담임인 니시하라(西原) 선생이 들어와 칠판에 커다랗게 李鍾煥이라고 한자로 판서를 하더니 이종환이라고 발음을 하고 나서 이것이 나의 이름이니 그리 알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각자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성을 대라고 하였다. 돌아가며 출석부 번호 순서대로 자기의 성명을 밝혔다. 이렇게 기이한 통성명을 통한 이름 찾기가 해방 이후 우리가 치른 첫 의식이었다.1(강조 인용자주)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해방 후 재개된 국민학교에서의 첫 기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러나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성’을 되찾은 것은 단지 해방의 시작일 뿐이었다. 일장기가 내려진 깃대에 어떤 깃발이 게양될 지, 어떤 나라의 국민으로 어떻게 불리게 될지는 소년 유종호도, 이천만이 넘는 조선인들 누구도 당시로서는 알지 못했다. 북위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했다. 조선총독부의 일장기가 내려진 후 미국의 성조기가 게양되었고 삼 년 간에 걸쳐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의 통치 하에서 우리 사회는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혁을 전개해야 했으며, 교육 개혁도 그 중요한 일부를 이루게 된다.

 

해방 이후 일본인 교사들은 다시는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각종 지위에서 축출되자 갑자기 수만 개의 관직, 전문직, 교직, 관리·사무직 자리가 비어버렸다. 1943년 당시 조선총독부의 관료 108,631명 중 59,290명이 일본인이었다. 이는 조선인 관료 49,333명을 능가하는 수치였다.2 교육 영역에서만도 1945년 4월에 초등교육 12,275명, 중등교육 3,807명, 고등교육 545명의 일본인 교사들이 있었다.3 “70만 명의 일본인들이 떠나자 한국인들의 머리 위 하늘에는 수만 개의 일자리가 번쩍이며 펼쳐졌다”.4 그 자리들을 누가 선점했을까.

 

1944년 5월 1일 당시의 조선인 학력 통계에 따르면, 남자 전체 12,521,173명 중 학교 학력을 취득한 사람은 대학 7,272명(0.05%), 전문학교 18,555명(0.14%), 중학교 162,111명(1.29%), 국민학교 1,322,192명(10.55%)이었다.5 여전히 남자 인구의 절대 다수인 67.3% 가량이 무학력이던 상태에서 소수의 학력 취득자들이 일본인들이 떠난 후 공석이 되어 있던 지위들을 선점하게 된다. 충원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학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지어 ‘위조졸업장’까지 횡행할 정도였다.6 사람들은 봇물이 터지듯 학력 경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예컨대 1947년 9월에 치러진 서울대 입학 경쟁에서는 정원 2,000명에 2만 명의 지원자가 몰렸으며, 미군정의 어느 문교 관료는 “내 생애에서 그렇게 교육에 강한 관심을 갖고 지독하게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7고 경탄하기까지 했다.

 

해방 당시 하기 방학 상태였던 학교들은 9월이 되자 다시 문을 열어 교육을 재개해야 했다. 일본어는 더 이상 교수용어일 수 없으며, 일본어로 쓰인 교과서들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교육을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개혁해야 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이후 경력, 사회적 배경 그리고 추구하는 이념과 미래에 대한 전망에 따라 다른 교육개혁 구상을 가진 여러 세력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중에는 미국 유학 출신의 지식인 집단도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조만간 미군이 진주할 것을 예상하여 ‘영어 능력’을 ‘봉사의 무기’8로 삼기로 다짐하며 영자신문 The Korea Times의 발간을 준비했다.9 해방 후 조선의 교육개혁에 대한 구상을 나누는 모임도 만들어졌다. 후에 ‘천연동모임’으로 알려지게 된 이 그룹의 성원들은 오천석, 유억겸, 김성수, 백낙준, 김활란 등이었다.10 학연과 지연 등으로 긴밀하게 얽혀있는 이들 미국 유학생 출신의 네트워크는 이후 미군정 하에서 가장 중요한 실권 그룹으로 활약하게 된다.

 

 

미군정과 한국인

 

미군이 왔다.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로 향하던 중 조선으로 뱃머리를 돌리라는 지령을 받게 된 미 24군단과 하지(John R. Hodge) 중장에게 남한 지역의 군정을 맡을 책임이 돌연 부여되었다. 그가 한국 통치와 관련하여 미국정부로부터 받은 지령은 1945년 9월 1일 「삼성조정위원회(SWNCC) 지령 176/3」이었고 그중 교육 관련 지령은 고작 몇 줄에 불과했다.

 

교육기관은 지속되고 가능한 한 조속히 재개되도록 허용될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민족주의와 침략을 지지했거나 군사점령의 목적에 지속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든 교사들은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제거되어야 하고 적절하며 자격 있는 한국인들에 의해 대치될 것이다. 이 지령이 적용되는 한정된 기간 안에 실현할 수 있는 정도에 비추어 귀관이 수용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모든 학교에 적용하고 일본의 영향을 제거하는 작업을 귀관은 확인해야 한다.11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1945년 9월 9일)

 

일본에서의 점령 교육정책에 비해 극히 개략적이고 소극적인 이 방침은 군정 실시 1년 후인 1946년 8월 1일에 보다 구체적인 지침이 「SWNCC 176/23」 지령으로 제시될 때까지 별다른 수정 없이 유지되었다.

 

북한에 소련군이 3만 명 가량의 조선 출신 소련인들과 함께 진주한 것12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어를 아는 요원조차 없었던 미군정은 영어를 아는 사람들부터 서둘러 찾기 시작했다. 미군의 남한 진주 다음 날인 9월 10일, 영어 아는 사람들은 조선호텔로 모이라는 통문이 서울 시내에 나돌았다. 그 ‘조선인유지초청간담회’에 기민하게 모여든 사람들은 주로 미국 유학생 출신들이었는데,13 그들 대부분이 곧바로 미군정에 통역, 비서, 고문 등의 자격으로 참여하게 된다.14

 

한편 하지 중장은 휘하 부대 안에서 교육 관련 경험이 있는 사람을 물색해 학무국장으로 임명했다. 입대 전에 ‘시카고의 한 초급대학 영어선생직’ 경험을 가진 육군 대위, 라카드(E.L. Lockard)가 한 나라의 문정을 책임지는 학무국장으로 급거 임명되었다. ‘한국을 하나의 미개국으로밖에 생각지 않았’던 그의 앞에 ‘자기보다 학력과 경력이 더불어 높은 미지의 코리언’,15 컬럼비아대학 교육학 박사 오천석이 강력한 조력자로 나타났다.

 

오천석은 라카드의 승인 하에 일종의 학정 자문기구로 ‘한국교육위원회’(the Korean Committee on Education: 1945.9.16-1946.5. 이하 위원회로 줄임)를 발족시켰고 앞서 말한 ‘천연동모임’의 다섯 사람 모두 위원이 되었다. 라카드의 증언에 따르면 이 위원회는 그가 직면했던 ‘미로들’, 즉 “언제 학교를 재개할지, 일본인 관료를 축출해야 할지, 누구를 임명해야 할지, 학무국을 어떻게 재조직해야 할지,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어떻게 할지 등의 문제를 돌파해나가도록 인도”16했다.

 

위원회의 주도로 학교들이 재개되었고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진다. 그런데 위원회가 서둘러 추진한 인사정책은 이후 교육계에 심각한 파란을 야기했다. 예컨대 미군정 학무국에 의해 9월에 충주중학교 교장 그리고 곧바로 10월에 충청북도 학무국장으로 임명된 인물이 고광만(高光萬)17이었다. “조선인 학부형이 찾아오면 그 학부형의 자녀 학생에게 통역을 시키고 일본 말로 대화했으며 집에서도 하오리 하카마를 입었다는 전설적인 친일 인물”18이었던 그는 도학무국장이 되자 자신을 비롯하여 친일 경력을 가진 교장을 문제 삼는 도내의 교사들을 해임시켰다.19

 

이 사건을 계기로 발발한 학생 맹휴에 대해 당시의 군정장관 러치(A.L. Lerch)는 ‘일제의 사범교육’을 받은 자들이 ‘팟쇼적 교육방침’을 취하는 데는 반대하지만, ‘정치 문제에 학생이 관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애매한 양비론을 전개하여 실질적으로 고광만의 입지를 보호했다.20 학력과 식민지 시기의 경력을 기준으로 서둘러 추진된 미군정청 학무국의 인사정책은 결과적으로 친일 활동에 관여한 교육자들을 ‘승진’ 배치함으로써 교육에서의 식민잔재 청산과 민주적 교육개혁의 시도를 어렵게 만들었다.

 

한편, 오천석은 본격적인 교육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위원회보다 더 대표성이 있고 조직적인 공식 위원회 구성을 라카드에게 제안했다. 그 결과 성립한 것이 ‘조선교육심의회’(the National Committee on Educational Planning 1945.11.6-1946.3.7. 이하 심의회로 줄임)다. 이 심의회는 10개 분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약 70여 명의 한국인 위원과 10명의 미국인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1년도 되지 않아 폐지되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100회의 분과회의와 20회의 전체회의를 통해 교육이념, 6-3-3-4 학제, 의무교육 실시 계획, 교육과정 개편, 한자 폐지 등 전반적 교육개혁안을 논의했다. “학무국이 했던 일들 중에서 그 민주적인 절차, 공적인 참여, 장기적인 계획 수립 등의 면에서 조선교육심의회 사업에 필적하는 것은 없다”21고 할 만큼, 미군정기 교육개혁의 핵심을 이루는 단체였다. 그러나 심의회의 다양한 제안들 중 미군정기에 제도적으로 입법화된 것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그 개혁 시도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미국의 대한교육정보조사단

 

미군정이 한국인 위원회의 활동에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다. 46년 초 미군정은 심의회의 제안에 따라 미국 정부에 교육원조와 교육사절단의 한국 파견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 중이어서 소련을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고, 사절단의 한국파견은 통일정부 수립까지 연기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들며 미연합군 총사령부의 맥아더가 이에 반대했다. 결국 사절단 파견은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 발표 이후 미국의 정책이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으로 변경될 때까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해방 직후 교육개혁의 결정적 시기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절단의 공식 명칭은 ‘대한교육정보조사단’(The Educational and Informational Survey Mission to Korea)이었다. 5인의 미국인 교육가들이 1947년 6월 3일 한국에 파견되어 보름 남짓 활동한 후 보고서를 남겼다. 「대한교육정보조사단보고서」(Report of Educational and Informational Survey Mission to Korea」(1947.6.20.)라는 제목의 영문 55쪽 보고서였다. 그런데 그 내용은 한국 교육의 전면적인 개혁 구상을 담고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빈약하고 지엽적이었다. 그 내용의 절반은 ‘공보’와 관련된 것이었고 교육개혁 관련 제안도 단편적이었다. 다만 눈에 띠는 것으로는 성급한 ‘한국화’ 정책의 문제 지적―총 12년에 이르는 6-3-3 학제 구상 및 ‘의무교육제’ 도입의 조급성, ‘사회생활과’ 운영의 부실함 등―, 교육행정 지방분권화를 위한 훈련의 필요성, ‘보다 다양한 정치적 대표자들로 교육관료를 충원할 필요성’, 당시의 극우 청년조직인 ‘조선민족청년단’의 정치적 위험성에 대한 경고, 중등학교에서의 남녀공학 권고, 보급품과 인적자원 지원의 필요성, 교육재정 확충을 위한 교육위원회 제도 도입의 필요성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뿐이다.22

 

대한교육정보조사단의 활동은 여러 가지 점에서 전후 일본에서 전개된 미국교육사절단의 활동과 대조적이었다. 일본에서 미국교육사절단은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교육개혁과 혁명적 재편을 위한 청사진을 제공했으며 그에 기반하여 교육법제와 학제, 교육정책 등이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그 교육사적 의미는 매우 컸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 조사단의 활동 내용은 질적으로도 빈약했다. 양적으로 보더라도 한국의 조사단과 일본의 사절단은 일단 규모(전자 5인 대 후자 27인), 활동기간(전자 18일 대 후자 27일)이 달랐다. 파견 시기에서도 일본은 1946년 3월 초였으나 한국은 1947년 6월 초여서 일본에 비해 일년 남짓 늦었다.23

 

보다 중요한 점은 사절단 혹은 조사단의 활동의 질과 그것의 교육사적 영향이 크게 달랐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본과 남한에서의 미군정은 개혁과 관련된 기본적 태도에서 매우 달랐다. 존 다우어(John Dower)는 일본에서 미군정24에 의해 추진된 전후 개혁 정책들이 “자유주의적인 뉴딜주의, 노동운동에 기반한 사회개량주의, 미국에서는 반박(혹은 무시)되기 시작하던 권리장전 류의 이상주의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들이며, “당시 미국에서 제출되었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비난에 직면했을 ‘민주화’의 비전”이 일본에서 진행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25 이런 성격은 교육개혁의 경우 더욱 뚜렷했다.

 

일본에서의 사절단 보고서, 「제1차 미국교육사절단보고서」(Report of the United States Education Mission to Japan, 1946.3.30)는 전전(戰前) 교육의 ‘내용’이 지닌 문제점으로 군국주의와 초국가주의적 요소를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의 ‘형식’에서도 중앙집권적 국가제도, 관료독선적 교육행정, 특권자를 위한 학교제도, 획일적 교육과정 등 많은 치명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26 보고서는 일본 교육이 추구해야 할 정신을 이렇게 단언했다.

 

교사이건 교육행정가이건 불문하고 교육자들이 하는 일에 대해 교훈으로 삼을 것이 있다. 교사의 최선의 역량은 오로지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만 충분히 발현된다. 이 공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행정가의 일이며, 그 반대의 공기를 만들어내서는 안 된다. 아동들이 가진 헤아릴 수 없는 자질은 오로지 자유주의라는 햇빛 아래에서만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다. 이 자유주의의 빛을 주는 것이 교사의 일이며, 그 반대의 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27

 

메이지유신 이래 중앙집권적인 국가주의 교육체제에 순응하고 그것을 유지해 온 일본의 교육자들에게 이 메시지는 가히 혁명적으로 느껴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의 조사단 보고서에서는 이런 메시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일본의 경우 사절단은 일리노이대학 총장 스토다드(George D. Stoddard)를 단장으로 하는 등 당시 미국 내 일급의 교육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사 활동을 도울 목적으로 미국사절단 규모와 거의 동수로 이른바 ‘일본측 교육가 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들 역시 도쿄제국대학의 전후 초대 직선 총장 난바라 시게루(南原繁)를 단장으로 하는 등 일본 내의 일급 교육지도자들이었다. 사절단이 보고서를 남기고 귀국한 후 이 ‘일본측 교육가 위원회’는 ‘교육쇄신위원회’로 확대 개편되어, 보고서의 정신에 기반하여 그것을 제도화하고 입법화하는 개혁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는데, 그 최대의 성과가 1947년 3월 말에 제정 발포된, 일본의 교육헌법으로도 일컬어지는 「교육기본법」 그리고 「학교교육법」이었음은 물론이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의 조사단 구성과 활동 및 이후의 후속 조치는 매우 빈약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사단 활동 이후 한국인에게 개혁을 지속해 나갈 권한이 부여되지도 않았다. 다만, 조사단의 제언 중에 주목할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육위원회 제도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제언에 따라 미군정청의 마지막 군정장관 딘(W.F. Dean) 소장은 한국에서 교육위원회 제도의 도입을 추진했다. 그가 교육위원회의 제도화를 강조한 데에는 나름의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의 교육적 숙원은 무엇보다도 의무교육제도의 조속한 도입이었고 이는 미군정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를 위한 재정기반은 취약했다. 딘은 의무교육비 재정 부담을 한국인에게 지우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교육적 의사결정에 민간인을 참여시킬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딘은 일본 군정청으로부터 미군 교육 전문가를 초빙하여 교육위원회 관련 법률을 입안시켰다.28 그것은 국민학교 재정 확보 기구로서의 ‘교육구’ 설치와 주민직선에 의한 의결기구로서의 교육위원회 제도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사흘 전인 1948년 8월 12일에 「교육구설치법」, 「교육구회설치법」, 「공립학교재정경리법」 등, 딘 소장이 ‘내 한민족을 위하여 선물을 하나 남긴다’29며 공포했다는 이 세 법률은 미군정기에 제정된 유일한 교육 관련 법률들이었다.

 

 

미군정기 교육개혁의 성격

 

이차대전 패전국이었던 일본에서 미군정의 교육개혁은 ‘군국주의 및 초국가주의의 근절’과 일본인의 ‘재교육’을 목표로 했다. 간접통치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미군정은 매우 적극적이고도 강력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일본 교육을 발본적으로 개혁했으며 그만큼 일본인의 영향력은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미군정은 교육개혁을 위한 준비도, 계획도, 의지도 없었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육개혁 과정에서 조선인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율성’의 여지는 일본에 비해 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율성’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미군정에 기용되거나 참여한 한국인들은 일단 편향된 집단이었다. 그들은 ‘옷을 잘 차려입고, 온화하며, 서구적인 예의범절과 방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일본인보다는 미국인을 더 닮은 조선인’, 즉 소수의 ‘극단적 보수주의자(ultra-conservative group)’들이었다.30 따라서 진보적인 한국인 교육 세력은 애초부터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한국 교육을 개혁하기 위한 적극적인 플랜을 제시하거나 추진하지는 않았지만, 특정 세력을 선호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교육개혁의 내용과 성격을 ‘제한’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참여는 ‘상대적’으로만 ‘자율적’이었다.

 

미군정에 참여한 한국인들의 교육개혁 시도 자체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해방 직후의 시급한 당면 과제였던 각급 학교의 재개와 정상화, 결원이 되거나 부족한 교원들의 신속한 충원, 교육기회 확대 등 쉽지 않은 문제에 즉각적으로 대처하였고, 경험과 자재의 부족 등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한국의 언어와 문자를 비롯해 한국 역사, 한국 문화의 교육적 복원을 실현했다.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아시아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쉽게 실현될 수 없었던 과제들이었다. 그러나 개혁에는 이러한 ‘빛’과 함께 ‘그늘’도 있었다.

 

미군정 교육고문 워드(R. Werth)는 “심의회의 미국인 위원들은 학교 체제의 재건에 대한 실제적인 고려에 보다 적극적이었던 반면, 한국인 위원들은 민족주의의 부활을 지지하는 원리들에 만족해 했다”31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내용’으로서의 민족주의의 부활을 지향하는 교육의 ‘형식’은 일제시대의 식민교육에서 유산처럼 물려받은 것들이었으며, 그 형식과 방법들이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림 1-3]에서 볼 수 있듯이, 해방 이후 학교의 조회에서 게양되는 국기는 히노마루(日の丸)에서 태극기로 달라졌고, 노래되는 국가는 기미가요(君が代)에서 애국가로 달라졌을지라도, 학생들이 군대식으로 대열을 이루어 치르는 조회라는 형식 자체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교육 형식에 대한 한국인 위원들의 현상유지적 태도에 대해 미군정은 기본적으로 방조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사실상 그것을 허용했다.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1945년 11월 2일)

 

미군정의 한국인 교육 세력들이 개혁을 위해 의식하고 참조했던 유력한 모델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 교육 모델도, 서구 유럽의 다른 교육 모델도 개혁 논의 선상에서 본격적으로 참고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후 일본의 교육개혁 모델이 의식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식민지 교육의 내용을 민족적인 것으로 대치하는 데 주력했으며 그런 작업이 시급했던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관행으로 굳어져 있어 학교 현장에서 거의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교육의 형식, ‘신민’ 만들기의 형식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신민’ 만들기의 형식은 새로운 ‘국민’ 만들기의 형식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이 교육과 관련된 정책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그것을 위로부터 모든 학교에 시달하는 틀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지는 않았다. 즉, 식민지 교육체제의 ‘형식’을 적지 않게 ‘복제’하면서 그 ‘내용’을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새롭게 ‘환치’시키는 식으로 개혁이 전개된 것이다. 전후 미군정기 교육개혁의 ‘상대적 자율성’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미군정 하에서의 교육개혁을 바라볼 때 ‘무엇이 개혁되었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이 개혁되지 않고 유지되었는가’, 혹은 ‘무엇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이 개혁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교육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 ‘형식’에도 주목해야 한다. 교육에서 어떤 언어, 어떤 문화, 어떤 역사를 가르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시공간에서 어떤 규율을 통해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가르치는가가 길러지는 인간형을 크게 결정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의 학교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일제 시대에 고쿠민각코(國民學校)에서 ‘신민’ 만들기에 종사했던 니시하라 센세는 해방 이후 이종환 선생님이 되어 국민학교에서 ‘국민’ 만들기에 여전히 종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해방 후 이종환 선생님의 교육은 일제시대 니시하라 센세의 그것과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가 아동을 또는 학부모를 대하는 시선과 태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또 교사인 그를 대하는 학교장 및 교육행정당국, 나아가 국가권력의 시선과 태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에 대한 그의 반응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혹 달라지지 않고 45년 이전의 니시하라 센세의 그것들과 여전히 동일하게 지속된 것들은 없었을까. 이들 질문에 답하지 않고는 한국의 현대교육사를 정직하게 풀어낼 수 없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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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유종호 (2004),『나의 해방전후, 1940∼1949』, 민음사, 111-112쪽.
  2. 南朝鮮過渡政府 (1948), 『朝鮮統計年鑑(西紀1943年)』, 南朝鮮過渡政府.
  3.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Department of Education (1946), “History of Bureau of Education from 11 September 1945 to 28 February 1946”, p.143. in 鄭泰秀 編 (1992), 『美軍政期 韓國敎育史資料集(上) 1945-1948』, 弘芝苑.
  4. 헨더슨, 그레고리 (2000), 박행웅, 이종삼 역,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아카데미, 333-334쪽.
  5. 朝鮮總督府 (1945), 『人口調査結果報告 昭和十九年五月一日』, 朝鮮總督府.
  6. 예컨대 원폭 투하로 잿더미가 된 히로시마에 위치했던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의 위조 졸업장이 당시 횡행했는데, 한 보도에 따르면 히로시마고등사범 위조졸업장을 사용하는 사람이 1949년 당시 8천 명에 달할 정도였다(「橫行하는 僞造履歷書」 『東亞日報』 1949.7.8.(2).).
  7. Eversull, Frank L. (1948), “Korea-Russia and the United States in the Orient-Positive Foreign Policy to Curb Russian Expansion Necessary”, Vital Speeches of the Day, 14(9), Feb. 15, p.276.
  8. 吳天錫 (1975), 『외로운 城主 吳天錫敎育思想文集 10권』, 光明出版社, 80쪽.
  9. 신문에는 편집위원 명단으로 김영희(편집장. 예일대 박사). 이묘묵(보스턴대 박사). 하경덕(하버드대 박사). 오천석(컬럼비아대 박사). 백낙준(예일대 박사). 유형기(하버드대 석사) 등 6인의 이름이 ‘대학명 그리고 학위와 함께’ 게재되어 있었다.
  10. ‘천연동모임’으로 불린 이유는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던 김활란의 지인의 집에서 다섯 사람이 몇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가진 데서 비롯된다. 이 모임에서 김성수는 6-3-3-4 학제 실시 등을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吳天錫 (1964), 『韓國新敎育史』, 現代敎育叢書出版社, 404쪽.
  11. SWNCC 176/3 “Basic Initial Directive to the Commander in Chief U.S. Army Forces in the Pacific for the Administration of Civil Affairs in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1 September 1945.
  12. Lauterbach, Richard E. (1947), “Hodge’s Korea”, Virginia Quarterly Review, 23(3), Summer. p.356.
  13. 鄭泰秀 (1995), 『광복3년 韓國敎育法制史』, 叡智閣, 82-83쪽.
  14. 예컨대 시라큐스대, 하버드대, 그리고 보스턴대 박사 출신 이묘묵李卯默은 간담회 직후 하지의 개인비서로 임명되었고 이른바 ‘통역관정부’의 상징이 되었다.
  15. 吳天錫 (1975), 앞의 책, 81-82쪽. 오천석은 1901년 평안남도 강서군의 개신교 집안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감리교 목사였고, 그 인연으로 일본의 기독교계 사립학교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중학부에 유학했으며, 후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코넬대 학사, 노스웨스턴대 석사, 콜럼비아대 박사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해방 직전에는 상하이에 체류하여 조선총독부의 황민화정책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다. 덧붙여 말하면 라카드와의 만남을 오천석은 지기인 이묘묵의 주선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16.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Department of Education (1946), op. cit., p.42.
  17. 해방 전에 그는 다카미네 게이코高峰啓光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나오고 해주고보 등의 교사로 18년간 근무했고 조선총독부학무국 시학관으로 일했다. 충주중학교 교유로 해방을 맞이하여 해방 직후 교장으로 승진했고, 곧이어 도학무국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출세일로를 달려 서울대 사범대학 학장, 1957년에 문교부차관 그리고 1963년 14대 문교부장관에까지 올랐다. 이러한 승진가도에는 그의 개인적인 처세술만이 아니라 히로시마고등사범의 학연, 그리고 그의 전공이었던 영문학 등이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08년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18. 유종호 (2004), 앞의 책, 123-124쪽.
  19. 『解放日報』 1946.3.7. 당시 청주제일중학교 교장 이완용은 고광만처럼 조선총독부 시학관 출신이었고 둘은 중학교 동창 관계였다.
  20. 『漢城日報』 1946.3.13.
  21.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Department of Education (1946), op. cit., p.45.
  22.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1947), “Report of Korean Commission for Educational and Technological Assistance from America”, Headquarters,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Office of the Military Governor, Secretary of Korean Civil Service. 20 June, 1947.
  23. 阿部洋 (1988), 「米軍政下におけるアメリカの対韓教育政策」, 『韓』, 111號. 참조.
  24. 일본에서 미군정은 1945년 9월 2일 항복문서 조인에서 시작해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정식 명칭은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조인까지 약 7년간 계속되었다.
  25. 다우어, 존 (2009), 최은석(역), 『패배를 껴안고-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민음사, 20-21쪽.
  26. 大田堯(編) (1978), 『戰後日本敎育史』, 東京: 岩波書店, 77쪽.
  27. 渡邊彰(編) (1946). Report of the United States Education Mission to Japan, 東京: 目黑書店. p.XII.
  28. 이에 관한 상세한 검토는 鄭泰秀 (1995), 앞의 책, 제3장 제4절 참조.
  29. 李浩盛 (1954), 『敎育自治制와 그 運營』, 文敎社, 2-3쪽.
  30. Lauterbach, Richard E. (1947), op. cit., p.354.
  31. Werth, Richard (1949), “Educational Developments under the South Korea Interim Government”, School and Society, Vol.69, April 30. p.306.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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