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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학교 사건에 대한 대응, 속도보다 깊이가 관건

#1218 강태중,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25.02.20
사회의 시선이 몰리는 사건이 터지면, ‘신속한 대책 마련’과 ‘재발 방지’를 들먹이면서, 정책 결정자들이 바삐 과장된 몸짓으로 움직인다. 졸속인 대책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개인이 저지른 사건이라고 해서 원인이 개인에게만 있지 않다. 행위는 문화와 제도로 조형되는 바 크다. 대책을 바로 세우려면 문화와 제도를 얽는 ‘구조’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학교에 다시 참담한 사건, 여전한 정책 결정자들의 ‘웃픈’ 호들갑

 

정부가 정책을 새롭게 세우게 되는 계기로 흔히 세 가지를 든다. ① 정권이 바뀌거나, ② 특정한 통계치 또는 ‘트렌드’가 부각하거나, ③ 경악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 학교 교육과 관련해 우리가 보아 온 정부의 행태도 이런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대통령이 들어섰을 때를 떠올려 보자. 대선 캠페인 중에 ‘이렇게 바꾸겠다!’ 외쳤던 구호들이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정과제’라는 탈을 쓴다. 그 과제 완수의 이름으로, 집권 기간 안에 시행하고야 말겠다는 새로운 정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세’나 ‘숫자’에 굴종하는 행태도 늘 있다. ‘제3의 물결’ 이야기가 뜨면 그런 물결을 타고, ‘제4차산업혁명’이란 유행어가 뜨면 그런 소란의 ‘밴드웨건’에 정책을 올린다. 요즘은 ‘AI’가 유행이다. 정책마다 AI란 관형을 씌우고 있다. 출산율이 위험한 분수령을 넘어섰다고 교육을 포함해 온갖 분야에서 대책 찾는다고 부산 떠는 모습도 같은 꼴이다.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한 일이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학교는 충격적인 사건과 다시 맞닥뜨렸다. 어린이가 학교에서 목숨을 잃었다. 교사가 저지른 일로 밝혀지고 있다. 다른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교직 일상의 압박에서 벗어나려 스스로 세상을 뜬 지 2년도 안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 등, 즉, 정책 결정자들은 으레 ‘신속한 대책 마련’을 되뇌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사건에 따라 대응 대상만 바꿀 뿐, 호들갑스럽긴 예나 지금이나 다른 데가 없다.

 

지난 17일, 여당과 정부는 부랴부랴 국회 본관에 모였다. “학교 안전 강화를 위한 당정협의회”라는 큼직한 현수막을 배경에 걸고 대책을 논의했다. “유사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총력을 다하기로” 했고, “가칭 ‘하늘이 법’을 신속히 추진”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국회의원들도, 여야 할 것 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사고의 재발을 막을 법안을 발의한다고 앞다퉈 발표하고 있다. 얼마 없어, 제정이든 개정이든, 교직에 관련된 법률에 제법 큰 변화가 올 것이다.

 

 

‘신속한’ 정치적 제스처들, 문제를 해결할 뜻은 있는지

 

정책이 새롭게 입안되는 전형적인 경우로 세 가지를 꼽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사실 ‘사건이 일어난 경우’라는 한 범주로 묶어도 내용상 크게 소실되는 게 없다. 정권이 바뀌든, 놀랄 만한 통계치가 나오든, 끔찍한 사건이 터지든, ‘정치’는 사회가 관심 기울일 만한 ‘사건’을 기화로 움직인다. 정부도 당도 정치인들도, 사건이 크게 터져야 보도 카메라의 ‘줌인’을 기대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응급으로 입안되는 정책이나 제도들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리는 만무하다. 그것들은 당장 이는 비난이나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나 기능한다. 사건에 따라 나오는 수많은 정치적 ‘몸짓’들은 어쩌면 문제 해결에 뜻을 두고 있지 않을지 모른다. 정부가 국민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시늉하거나,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다음 선거에서 나를 뽑아달라고(또는 요직에 발탁해 달라고) ‘캠페인’의 수를 구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응급의 조치가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효험을 가질 리 없다는 점은 쉬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더욱이, 역사가 증언하는, 수많은 제도나 정책의 실패가 이미 그런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재빠른 조치는 물론 필요하다. 한 학교에서 사건으로 불거졌다면, 다른 학교들에서도 비슷한 사건의 요인이 곪아 터질 위기에 있기 십상이다. 빠르고 효과적인 예방이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대응은 시작이어야 할 뿐 끝이 아니어야 하고, 지침이나 법률 등을 보강해 규제나 벌의 강도를 조이는 데로만 쏠려서도 안 된다. 하지만 정치적인 움직임들은 한결같이 그런 모양새이다.

 

어떤 문제가 사건으로 터져 나온 사태에서 그 사건 자체는 피상(皮相)의 현상이다. 비유컨대, 피부 위의 ‘탈’로 드러난 것이다. 당장 ‘빨간약’으로 감염을 막거나, 심하다면 수술로 헤집어진 살을 봉합해야 할 것이다.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상처를 아물리는 조치만으로 문제가 제대로 다뤄지긴 어렵다. 사건의 원인은 필경 살갗 속 깊은 곳에 있을 터이다. 세밀한 검진이 필요하고,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처방이 요구된다.

 

이번 사건을 두고 정책 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면, 아니나 다를까, 살갗의 ‘트러블’ 정도를 다루는 모양새다. 교사 개개인을 엄밀하게 검사하겠다, 심리적인 문제를 가진 교사가 교실에 발을 디딜 수 없게 하겠다는 식으로 대책을 찾고 있다. 교사들의 반발을 의식해서는, ‘교원 심리 상담 지원’도 잊지 않겠다는 정도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와 같은 대응은 기본적으로 사건(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두고 있고 또 심리적인 ‘병’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피상적이다.

 

 

개인 이전의 ‘구조’ 문제 깊이 살펴야

 

교사가 학생을 해치는 사건에서 교사 개인의 요인(책임)이 개재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러나 이때 ‘개인’ 문제는 개인의 것만인지 사회(제도, 구조)에서도 오는지 명료하게 구분할 수 없거니와, 개인의 문제 소지를 크게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유일하고 결정적인 요인이라 단정하기도 어렵다. ‘신속한 조치’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정부나 국회는, 교사가 ‘범인’이라는 드러난 사실에 근거해서, 앞으로 재발이 우려되는 ‘유사 문제’에 대해, 교사 개개인을 잠재적 용의선상에 올리고 있다. 학교와 교사 그리고 학생과 학부모 등의 움직임을 크게 구속하는, 행정이나 법률 체제 그리고 사회적인 통념이나 버릇 등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우리는 모두 제도와 법률과 관습 등에 크게 지배된다. 교사의 심리나 복무 행위도 그것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이다. 이렇게 평이하고도 명백해 보이는 ‘구조적’ 현실이 학교 사건을 다루는 정책 행위에서는 흔히 무시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교육 경쟁이 치열하고, 학교 수업과 활동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이 상급학교 진학에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아울러, ‘수요자 중심’이고 대중 영합적인 정책이 오래 지속되면서, 학교/교사에 대한 학부모의 요구는 감당해 내기 어려울 정도로 세차고 또 날 세워 가고 있다. 학생이 교사로부터 받는 ‘서비스’나 학생부 기록, 학생들 사이의 ‘학폭’ 등을 두고, 학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갈등과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교직 문화도 ‘개인주의’로 치달으며 교원 사이의 연대도 무너졌다고 들린다. 이렇게, 법과 제도 그리고 우리의 전통과 관습이 빚어내는 교육 현실이 교사의 심리와 행위를 ‘사건’의 기폭으로 잇는데 무관하리라 보기는 어렵다. 이번 사건처럼, 경악스럽고 참담한 일들의 원인과 책임을 교사 ‘개인’에게만 돌려서는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없다.

 

교사를 탓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교사는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번영에, 그리고 지구촌의 생존에 큰 책임을 맡은 존재이다. 그 책임 이행의 사명이 엄중한 만큼, 사명의 궤에서 벗어나는 모든 행위에 대해 단호히 벌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당위를 핑계로 교사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고, 보이지 않는다고, 문제의 근원에 대해서는 흐지부지 넘겨선 안 된다.

 

무엇보다도 정부와 국회는 스스로 만들어 온 정책과 제도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우리 교육 문화를 직조한다. 교사들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의 교육적 사고와 행위는 그 문화의 규율에 걸려 있다. 문제를 해결한다고 내놓았던 정책과 제도 자체가 문제의 원흉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 점을 떠올려 볼 때, 정책 결정자들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으레 보이는 닳고 닳은 ‘제스처’들이 무지(無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자신의 부끄러운 정책 결정의 행적을 가리고 의혹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려는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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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강태중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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