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 “이 글에서는 흔히 공부를 잘한다, 못한다 할 때의 공부의 의미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려고 할 때, 그리고 뒤늦게 공부를 하고자 하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짚어본다.” (본문 발췌) |
배움-학습-공부
배움, 학습, 공부는 어떻게 다를까? 배움이 실제 인물이든 책 속의 인물이든 누군가로부터 또는 어떤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뭔가를 알게 되는 것이라면, 학습은 배우고(學) 익히는(習) 과정을 아우르는 말이다. 익힘은 배운 것을 온전히 소화하는 과정으로, 주로 혼자 하는 활동이다. 공부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할 수 있다. ‘혼자 이 악물고 하는 공부’처럼. 학습 방식이 다양하고, 배움과 익힘 과정을 명확히 나누기가 어려우므로 언어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는 힘들다.
영어 단어 learning은 배움 또는 학습으로 번역된다. study는 공부 또는 학습으로 번역된다. 일상적인 용례를 보자면, 학습이 배움과 공부 양쪽에 걸쳐 있는 모양새로, 배움-학습-공부가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공부(工夫)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주로 몸을 써서 배우고 익히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1 우리말에서는 주로 책상머리 공부를 가리킨다. ‘학습’은 가장 폭넓게 쓰이는 낱말로, 공부와 배움의 뜻까지 두루 포괄한다. 한자어인 ‘학습’은 복합명사를 이루어 ‘학습법’ ‘자율학습’ 등 다양하게 의미가 확장되기도 하는 반면 ‘배움’은 확장성이 떨어져 학술용어로 쓰기에는 불편하다.2
배움은 우연한 계기로 저절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학습이나 공부는 작정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이 분명한 활동이다. 그래서 학습노동이라는 말도 있다. 일하면서 배우고 놀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공부는 그러기가 힘들다. 주경야독처럼 밭을 다 갈고 나서 책을 읽지, 밭을 갈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상머리 공부는 주로 뇌의 활동이어서 에너지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가 힘들고 지속적인 에너지 조달도 어렵다.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몰입 상태에서 하는 활동은 공부가 아니라 연구 활동이다. 목표가 있지만, 연구 활동 자체에서 생겨나는 에너지가 있다.
공부처럼 목표지향적인 활동은 쉽게 지친다. 공부가 힘든 이유다.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한 공부를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 글의 제목을 학습론, 배움론이 아닌 ‘공부론’이라 한 것은 목표지향적인 공부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하기 위함이다. 공부는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흔히 공부를 잘한다, 못한다 할 때의 공부의 의미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려고 할 때, 그리고 뒤늦게 뭔가에 꽂혀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짚어본다.
공부, 머리 아닌 몸으로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할 때 흔히 동기부여가 안 되어 그렇다고 말한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안 한다는 논리다. 목표가 뚜렷하고 의지가 굳으면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동기부여도 환경이 받쳐줘야 되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설령 된다 해도 목표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의 에너지는 오래 가기 힘들다. 행위와 목적은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지 않다. 굳은 결심도 흔히 ‘작심삼일’이 되는 까닭은 어떤 목적을 위한 행동에는 에너지가 자체 조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은 바다에 이르기 ‘위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다. 물길이 바뀌는 것은 주변의 지형과 중력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진정한 변화는 ‘의하여’ 일어나지 결코 ‘위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둘러싼 환경, 맥락이 바뀌어야 아이가 바뀐다. 교육에서 흔히 ‘동기부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어떤 동기가 아이를 변화시키기는 힘들다. 동기는 목표의식을 불어넣어 줘서 시동을 거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시동이 걸리면 가속 페달을 밟아 일정 속도 이상을 유지해 줘야 한다. 그러자면 에너지가 끊이지 않고 공급되어야 한다.
에너지는 관성이든 중력이든 ‘의하여’ 작동하지 ‘위하여’ 작동하지 않는다. 입시교육이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게 만드는 데 비해, 진짜 공부는 배우는 것이 좋아서 배우고 익히기를 즐기는 것이다. 공자의 호학(好學)이다. 어미가 자식을 안고 기뻐하듯이(好)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위하여 공부’는 공부 그 자체에서 에너지를 얻지 못하는 반면 ‘의하여 공부’는 자체 에너지로 앞으로 나아간다. ‘위하여’가 심리의 세계라면 ‘의하여’는 물리의 세계다. 심리는 물리를 넘어설 수 없다. 나무는 하늘과 땅의 에너지에 의하여 성장하지, 하늘 높이 자라기 위하여 성장하지 않는다.
공부를 꾸준히 하려면 동기의 힘보다 습관의 힘을 빌 필요가 있다. 습관은 관성의 힘을 생성해서 공부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자리 잡고 공부를 함으로써 몸과 뇌가 그 패턴에 적응하여 저절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습관이 들면 목표지향적인 ‘위하여’ 공부가 습관에 의한 ‘의하여’ 공부로 바뀐다. 에너지 조달이 수월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마감 시한에 가까워서야 글을 쓰기 시작해 탈고를 하게 되는 것도 ‘위하여’ 에너지보다 ‘의하여’ 에너지가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문을 담당했던,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강원국 작가는 ‘루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첫 문장을 쓰는 일은 막막한 법이다. 그는 아침 산책을 하고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것을 정해진 의식 행하듯 하다 보면 여하튼 글이 써진다고 말한다. 뇌가 ‘이젠 꼼짝없이 글을 써야 하는구나’ 하고 인식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몸의 힘을 빌어 뇌를 길들이는 방법이다. 동기나 목적의식보다 습관의 힘이 더 세다.
습관은 뇌가 몸의 말을 듣게 만드는 과정이다. 마라토너가 어느 시점에서 느끼게 된다는 러너스-하이 같은 상태는 뇌가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뇌를 통제하는 단계다. 무아지경에 가까운 몰입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운동이든 악기 연주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럴 때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해온 몸은 자체의 지성을 갖추고 있다. 40년 넘게 합기도를 수련해온 우치다 타츠루는 이를 신체지(身體智)라 명명한다. 뇌를 거치지 않고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습관 들이기는 익힘의 과정이기도 하다. 습관(習慣)은 뭔가를 하고 또 해서 관성의 힘이 작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배운(學) 것을 틈틈이 익히는(習) 것이 학습의 요체이듯, 좋은 마음과 태도를 몸에 배게 하는 것은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 학습과 교육에서 습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좋은 습을 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습은 몸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몸으로 하는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는 공부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흔히 어른들이 애들에게 그런 말을 할 때는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시기에 공부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사회활동을 시작할 나이가 되면 공부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더욱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만학도가 학문의 세계에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서머힐 학생 중에는 12살에 읽기를 시작해 문학박사가 된 사례가 있지만, 이는 만학도가 아니라 배움에 발동이 늦게 걸린 경우라고 봐야 한다.
공부의 때를 ‘타이밍’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교육과정은 아이들의 발달단계에 맞아야 한다. 뇌과학은 인지과정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5-6세 이후에 읽기 학습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 이전에는 몸놀이로 균형 잡힌 성장을 도모하고 책을 읽기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력을 키우는 것이 나중에의 지적 성장에도 더 도움이 된다. 공교육에서 초등 4학년부터 수학의 도형을 공부하는 것도 추상적 사고력이 발달하는 시기에 맞춘 것이다.
발달단계를 건너뛸 수 없듯이 공부도 중간단계를 건너뛸 수 없다. 수학 같은 경우는 특히 그렇다. 사칙연산을 모르면 방정식을 이해할 수 없고, 방정식을 모르면 함수를 이해할 수 없다.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야 하듯이 때 맞춰 공부를 해야 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전두엽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기 시작하므로 그즈음에는 본격적인 인지학습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 시기에 (일반 중고등학교처럼) 시험공부만 하거나 (대안학교처럼) 지식교육에 소홀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은 흐름을 타는 것이기도 하다. 인생의 시기도 흐름이 있지만 공부나 일도 흐름을 타는 것이 중요하다. 비인가 대안학교 학생들과 홈스쿨러들 중에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를 통해 일 년 만에 패스하는 경우가 흔하다. 저마다의 속도를 존중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아이들이 자기 속도를 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아이들은 스스로 시동을 걸고 알아서 달리지만, 대부분의 많은 아이들은 시동조차 걸지 못한 채 멍하니 있다. 교사가 이를 방관한다면 제 역할을 못하는 셈이다.
공부는 쉬엄쉬엄 하기보다 적절한 긴장 상태에서 몰아붙여 하는 편이 낫다. 발동이 걸리면 시동이 꺼지지 않게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길이다. 진도를 맞춘다면서 허접한 교과서 한 권을 일 년 동안 질질 끌면 아이들도 맥이 빠진다. 번번이 시동을 거느라 에너지가 낭비된다. 한 과목을 매일 2시간씩 몇 주 동안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발도르프학교의 주기집중수업3이 일 년 동안 찔금찔금 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학습법인 이유다. 에너지 흐름을 인위적으로 끊으면 관성의 힘, 가속도의 힘을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
40~50분 단위로 과목을 바꿔가며 수업을 할 경우 겨우 시동을 걸어 조금 움직일 만하면 또 종이 울린다. 이는 아이들보다 강의식 수업을 하는 교사에게 맞춰진 것이다. 칠판에 뭔가를 쓰면서 혼자 떠드는 일을 40~50분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앞만 쳐다보고 가만히 앉아 40~50분을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토론식 수업이나 모둠식 협력학습 수업은 2시간을 계속해도 아이들도 교사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
교육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적절한 때를 놓치지 않고 흐름을 타야 한다. 교사가 개입할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배움 역시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씨를 뿌릴 때, 김을 매야 할 때, 거둘 때를 아는 것이 농사의 기술이듯 삶의 기술은 결국 ‘때를 아는 것’이다. 10대 시절은 신체와 정신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기초를 잘 닦지 않으면 튼튼한 집을 짓기가 힘들다. 지성과 감성, 신체가 균형 잡힌 성장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이 시기 교육의 역할이다.
긴장과 이완
공교육의 문제 중 하나는 아이들이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종소리와 함께 관심사를 바꾸는 훈련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몇 년을 하다 보면 몰입할 수 있는 능력에 손상을 입기 마련이다. 드물게 시험공부에 몰입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 몰입은 더 넓은 세계로 이어지는 창조적인 몰입이 아니다. 그나마 그런 몰입이라도 경험해 본 아이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그럭저럭 제자리를 찾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에너지가 풀어진 상태로 시간만 흘려보내기 십상이다.
창조적인 몰입은 몸이 경직되지 않은 기분 좋은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뭔가에 몰입해 있으면서 동시에 안테나가 넓게 펼쳐져 있는 상태다. 목과 어깨가 경직된 채 뭔가에 몰입해 있으면 좋지 않은 긴장 상태라고 봐야 한다. 게임에 몰입하고 있는 아이들의 자세가 대체로 그렇다. 바둑 고수는 명상에 든 것처럼 몰입한다. 뛰어난 투수는 힘을 빼고 던진다. 속이 빈 피리처럼 에너지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선동열 선수는 힘을 빼고 공을 던질 수 있게 되기까지 십 년이 걸렸다고 한다. 사실상 모든 운동은 위치에너지의 변환이자 무게중심의 이동이다. 힘을 빼고 던지는 것은 팔 힘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힘이 내 몸을 통과하여 공을 밀어내는 것이다. 힘을 빼고 걸으면 중력가속도의 힘과 관성의 힘을 이용할 수 있어 오래 걸어도 힘들지 않다. 내 힘이 아닌 지구의 힘으로 걷기 때문이다, 이는 곧 에너지의 흐름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 에너지 흐름에 몸을 맡긴 상태는 이완된 긴장 상태다.
‘이완된 긴장’, 모순된 이 말 속에 삶의 비밀이 숨어 있다. 이완은 맥이 풀린 것과는 다르다.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은 이완된 게 아니라 맥이 풀린 것이다. 잘못된 긴장의 결과다. 경직된 긴장이 지속되면 몸과 마음에 병이 든다. 팽팽하게 긴장된 인대가 쉽게 끊어지는 것과 같다. 요즘 아이들에게 병리적인 현상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일지 모른다. 아이들을 쓸데없이 긴장시키니 경직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맥이 풀려버린다. 이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무의식적인 생존전략일 수 있다.
아이들에게 건강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교육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잠을 충분히 잘 수 있게 해야 한다. 잠이 부족하면 공부는 물론 어떤 일에도 제대로 집중하기 힘들다. 70년대에 한때 수험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4당5락’4은 중간고사 같은 단기전에서 벼락치기로 성적을 올리고자 할 때나 먹히는 전술이다. 장기전에서는 잠을 잘 자고, 근력과 지구력을 길러 긴장을 감당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인터넷의 대부로 알려진 전길남 박사는 등반가이기도 한데, 연구원을 뽑을 때 주말 등산을 조건으로 걸었다고 한다.
소설가 하루키는 날마다 10km를 달린다고 한다.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라고 말하는 하루키는 자신이 하루도 달리기를 빼먹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5 창작도 연구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장기전이다.
학교를 때 맞춰 가야 할 이유는 적고 지각이나 결석을 할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학교를 가는 것은 그 적은 이유를 붙들고 단련하기 위함이다. 물론 무조건 책상 앞에 앉아 있는다고 공부가 되는 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민감한 상태에서 긴밀하게 상호작용할 때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10대 시절은 신체가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이고 이때 만들어진 몸이 평생을 간다. 균형 잡힌 식사와 운동 습관을 들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성장기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른 많은 일들은 그 습관에 연동되어 저절로 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 일본어에서는 우리말로 공부(工夫)에 해당하는 勉強(벵쿄)와 기예를 배우고 익히는 工夫(쿠후)를 구분해서 쓴다. 學習(각슈)는 우리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다. 중국어 ‘쿵푸(功夫)’는 쿠후와 비슷한 말이지만 공력을 쌓는 신체 및 정신 수련을 뜻한다.
- 영어의 learning이 플립러닝(flipped learning), 블렌디드러닝(blended learning)처럼 폭넓은 확장성을 갖고 있는 데 비하면 아쉬운 지점이다.
- 에포크 수업이라고도 한다. 언어(외국어)와 예술을 제외한 수학, 역사, 지리, 과학 등 주요 과목을 그렇게 학습한다. 한 과목이 끝나면 다른 과목을 선택해 또 몇 주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 4시간 자면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뜻. 이 말을 ‘4시간 자면 당연히 떨어지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라며 돌려 까기도 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임홍빈 옮김, 문학사상, 116쪽.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