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1-05-18 15:53

사또 마나부는 “교사가 학교 교육을 공부에서 배움으로 전환하려면 수업에서 다음의 세 가지를 따라야 한다.”고 한다. 첫째, 만남을 중시하는 활동적 배움이 필요하다. 교과서의 지식은 사실적 지식이든 개념적 지식이든 지식의 그림자(허상)에 불과하므로 실체적 지식(경험적 지식, 절차적 지식, 태도)을 배울 수 있도록 체험학습을 해야 한다. 둘째, 학교에서 위기란 배움에서 협력이 없는 위기로 학생들이 협동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기 주도 학습을 하지만 서로 간에 아이디어를 상호 교환하며 협력적으로 배우도록 해야 한다. 셋째, 지식이나 기능을 축적하기보다 실천하고 공유하며 성찰하는 배움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만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교사는 모든 것을 알고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학생들은 오직 듣고만 있어야 할 수동적 존재로 배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교사는 국정교과서나 검정교과서 등에 실린 지식을 그대로 가르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활동 중심으로 재구성하여 학생 스스로가 실천하고 반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인적 삶의 경험이 반영되었는가 여부는 교육제도의 한계와 실증적 자료를 고려해야
사또 마나부의 교육관은 프레이리 교육관의 복사판이다. 프레이리는 교육의 본질을 문제제기식 교육에 두고 이를 교사의 직무이자 과제라고 본다. 따라서 교사들은 수업에서 설교자로서 학생들의 삶의 경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주제를 강의하는 은행예금식 교육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즉 “교사의 강의는 말의 공허한 울림만 전달될 뿐이지 학생의 삶을 바꾸는 힘이 되지 못한다. 이를테면 교사가 ‘4×4=16’,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라고 가르치는 교수학습방식은 지식(헛된 지식)이 현실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학생들에게 그저 공책에 베껴 쓰게 하고 암기하기에 여념이 없도록 하는 무용한 교육이다.”란 의미이다. 또 교사가 지식의 생성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교육의 사회적 책임을 방치하는 교사관이 문제라고 본다. 교사는 학생들을 빈 그릇으로 간주하고, 이 그릇들을 완전히 가득 채울 때 훌륭한 교사이고 가득 채워 달라고 공손하게 자신을 내맡기면 훌륭한 학생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는 학교에서 예탁자이고 학생들은 예탁소로서 수업은 예탁행위가 될 뿐이란 것이다. 요컨대 “은행예금식 교육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주제(예탁계좌)를 정하고 학생과 의사소통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교육 내용(예탁금)을 주입하는 교육이다. 또 학생들은 이를 받아들여 기억하고 반복하는 교육이고 학습은 이를 채워 넣고 보관하는 행위이며, 창조력, 변혁 의지, 참된 지식도 없는 사람이 될 뿐이다.”란 의미이다.
프레이리의 교육관이 한국 사회경제적 현실을 반영하거나 반영할 수 있으면 사또 마나부의 교육철학에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과정이나 교과서 등이 대체로 삶의 경험을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보여주거나 강의식 수업 방식이 유효하다면 초·중·고의 학습관으로 수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인간의 의식은 외부 세계에 따라 형성되지만 개인 간의 의식은 같지 않다. 이를테면 계급차별이 없다고 알려진 사회주의에서도 개인 간에 신체적이거나 유전적 차이로 인해 외부를 다르게 인식한다. 즉 사회체제가 어떤 형태든 개인의 삶을 모두 담아내는 제도를 마련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의 삶이 개별적이고 특수하더라도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행위를 무시할 수 없으며 이를 반영한 제도를 설립해야 하며 교육제도도 이러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개인적 삶의 경험이 교육과정, 교과서, 교사의 직무, 학생의 역할 등과 관련된 교육제도로 수용될 경우에 그 범위는 애매하고 모호하며, 윤리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려한 사회적 통념을 따를 수밖에 없으며, 교육과정이 개인의 보편적인 경험으로 구성되었는가는 오직 교과서 등 교재에 실린 교육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다.
한국 자본주의는 천박하지는 않지만 성숙한 복지국가로 보기는 어려워
한국 사회가 계급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어떤 국가도 자본의 축적과 노동의 소외를 고려하면 계급사회일 수밖에 없고 차별적 지배는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 자본주의 분석에서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억압의 질적 차이는 분명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한국 자본주의가 노동자에 대한 억압의 정도가 극심한 천박한 자본주의의 단계에 있을 수 있지만, 사회복지제도의 확충으로 상대적으로 완화된 자본주의일 수 있다. 한국경제를 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등장하고 난 후에 복지국가로 자본주의 변신은 비교적 빠르고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등장하고 성숙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한국 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만큼 복지제도의 도입이나 정착도 속도 면에서 매우 빨랐다. 물론 국내총생산이 2,000조 원이나 되지만, 하위소득 20% 계층의 소득 점유율은 6% 수준이고 노인 빈곤율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며, 전체 인구의 상대적 빈곤율도 16.3%로 OECD 주요 국가들 중에서 가장 나쁘다. 우리 주변에서 삶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과 여성, 노인들의 구체적인 삶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조세 및 사회보장 급여를 포함한 정부의 각종 재분배 정책으로 인한 지니계수의 개선 정도를 살펴보면, OECD 국가들의 평균이 32.8%이고, 독일과 스웨덴은 각각 41.8%, 44.2%나 되는데, 우리나라는 12.6%로 매우 낮다. 다시 말해, 국가가 소득 재분배와 양극화 해소 등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 등 고령층의 공적 이전소득은 OECD 평균이 57.1%인데, 우리나라는 25.0%에 불과하다. 노인 빈곤율이 1위인 이유다. OECD 국가들의 평균 사회임금과 기업 임금 간의 구성비가 40.7% 대 59.3%인데, 우리나라는 12.9% 대 87.1%로 OECD 평균과 비교하면 사회임금의 비중이 31.7% 수준에 불과하다. 국가가 국방과 치안, 방역뿐만 아니라 국민의 삶을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은 당연하게 개선되어야 하며 프레이리의 문제의식인 ‘학교에서 삶의 경험과는 무관한 교육이 이루어지는가’를 판단하는 주요 지표가 될 수 있다.
은행예금식 교육과 보편적 지식 교육을 동일시할 수 없어
사또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 철학》이나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에서 비판하듯이 한국 소득분배 현황을 보면 초·중·고 교육이 삶의 경험과 무관한 내용으로 되어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소득의 불평등을 개선해야 하며 교육이 부응해야 한다고 본다. 다만 지금 한국 교육이 겪고 있는 학습 격차나 학생과 학생 간, 교사와 학생 간 갈등 등 교육 갈등을 온통 계급적 대립 구도로만 받아들이는 시각은 이해할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계급 간에 경제적 격차가 줄어들었지만, 학습 격차가 커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인간의 보편적인 삶에 필요한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셈하기’ 등 사실적이고 개념적인 지식 격차가 커진 것이며, 이 지식 또한 경제적 약자에게도 필수 불가결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삶의 경험과 무관한 지식을 배제하겠다는 교육철학에서 역설적으로 삶에 필수적인 지식이 배제되었으며, 지금 한국 교육의 위기는 사또 마나부나 프레이리가 제창한 은행예금식을 벗어나야 한다는 교육 방향과 전혀 맥락이 다르다. 은행예금식 교육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이나 지배를 정당화하는 지식 교육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지, 지식의 보편적 형식이나 내용마저 부정하자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은 언어를 통해 드러나며, 개념적 정의는 맥락적 정의에 앞서서 학습되어야 한다. 학생이 고유한 삶의 경험에 따른 지식을 학습하려면 먼저 지식의 보편적 의미를 받아들이고 이를 개별적으로 특수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배울 때 계급에 따라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만 어떤 계급에 속하든 우선 민주주의의 ‘내포적 정의’나 ‘일반적 특징’을 제대로 기억해야만 자신의 상황에 맞는 특수 지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게다가 학생이 주관적 지식으로 만들었어도 반복 학습을 통해 장기기억으로 저장해야만 필요에 따라 특수한 상황에서 끄집어내서 쓸 수 있다. 비고츠키 철학을 잘 계승했다고 여겨지는 세계적인 교육 석학 바실리 수호믈린스키(Vasily Sukhomlinsky)는 보편적 지식의 필요성과 효과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한다.
“지식은 기본적인 진리(사실, 규칙, 여러 가지 설명, 의존성, 상호 관계, 정의)를 일상적으로 기억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지식은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쓰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지식을 이용할 수 없고 필요할 때 자기의 기억 속에서 찾아내지 못하면 앞으로 학습이나 지적 발달, 지적 노동을 할 수 없다. 또 지식은 인간이 반드시 기억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축적된 지식을 잘 이용할 줄 아는 기술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억과 기술은 서로 연관되면서 구별되는 지식의 두 측면이다.”
[표1]을 보면 국가 간 비교에서 한국 교육은 사또 마나부나 프레이리가 보는 것처럼 극심하게 불평등하거나 불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 [표1]은 국가 간에 부모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이 학생의 읽기 수준에 끼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PISA 경제‧사회‧문화지위지표(PISA Index of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Status, ESCS)이다. 이 지표는 교육에서 공정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분산 비율은 8.0퍼센트로 OECD 평균인 12퍼센트보다 낮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학생들의 읽기 성취도는 OECD 평균보다 높고 ‘엄마 찬스’나 ‘아빠 찬스’를 쓸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의미다. 심지어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읽기능력에 끼치는 정도도 핀란드에 비해 낮으며 스위스는 대략 15.5퍼센트, 독일은 17퍼센트로 우리나라의 두 배 이상으로 교육적으로 불평등했다. 참고로 독일과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을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비슷하다.
[표1] 참여국의 읽기 성취도와 형평성 수준

* PISA Index of ESCS: 부모 직업, 교육 수준, 자산 등을 통해 산출
아무튼 파울로 프레이리나 사또 마나부가 교사가 삶의 경험과 무관한 주제를 설교식으로 강의한다는 맥락은 교육과정이나 교과서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데도 이를 따르는 교사의 수업 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즉 다수 학생이 빈곤한 가정에 있으며 이러한 사회 현실에 따라 학생들의 의식이 형성되어 있는데도 교과서는 불평등한 현실을 왜곡하여 보여주거나, 교사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내적 의지를 키우게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교과서나 교재의 내용을 주입받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교육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지식을 교육하던 불행한 시절을 겪었다. 1970∼1980년대만 하더라도 당시 권위주의 정권이 교과서에 경제 성장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국민의 보편적 인권인 자유권 등의 기본권을 억압할 수 있다거나 식민지 시절에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문인이나 화가의 작품이 위대하다는 내용을 싣기도 했다. 김영삼 정권에 들어와서야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보편적 기본권이 강조되고 소극적이지만 노동자의 삶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들어오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 시민 교육을 받을 권리, 노동자의 권리는 사회적으로 보다 확장되었고 교육과정과 교과서에도 이런 흐름이 더욱 반영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교과서는 암울했던 시절과 분명 다르다. 인간의 기본권을 해치거나 부당한 정권을 미화하는 등 상식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은 없고 생명, 인권, 환경 등 보편적인 가치를 잘 담아내고 있다. 설령 교과서 각 영역에 실린 지식의 양, 수준, 사례 등에 이견이 있을 수 있어도 크게 시비를 걸 정도는 아니다. 이념적 시선에서 떨어져 있는 수학, 과학은 물론 역사, 사회, 철학 등에서도 논쟁적인 주제일수록 관련된 사례를 균형 있게 제시함으로써 편향성 시비에서 벗어나 있다. 다음은 고등학교 1학년 『통합사회』 교과서의 ‘자본주의 발달과 시장경제’ 단원에 실린 내용으로 이념적으로 대립되는 주제이지만 각자의 입장에 따라 자유롭게 토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자본주의 전개 과정을 두 경제사상가의 가상 대담으로 살펴볼까?
• 사회자: 케인스 씨, 그리고 하이에크 씨! 각각 수정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을 대표하는 두 분께서 주장하시는 주요 내용은 무엇입니까?
[토론주제] |
사또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 교육철학 저변에 깔려있듯이 초·중·고 학생들이 삶의 맥락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주제나 교육 내용을 일방적으로 강의받고 있다고 보기에는 성급하고 지나치다. 그처럼 판단하고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이라고 인정받으려면 교과서나 교육과정을 실증적으로 깊이 관찰하거나 분석해서 내린 결론이어야 하고 지식이 변혁의 도구로서 실천의 자양분이 되려면 어떻게 학습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보편과 특수는 분리될 수 없다. 특수는 보편을 통해 나타나며 특수만 추구하면 맹목적이고 보편만 있고 특수를 고려하지 않으면 공허하다. 또 개별적인 삶의 경험을 드러내는 지식도 보편적인 지식과 조화로워야 하고, 보편적 지식은 개별적인 삶에서 다양하게 구현될 때만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으로서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도 교과서 등 교재를 실증적으로 검토하지 않고서 보편적 경험을 반영하는 지식 교육을 학생들의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제나 내용이라고 하거나 편향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오히려 지식의 생성이나 학습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학습 능력이 발달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일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중학교는 진로탐색활동을 지원하고 자유학기제의 정착 및 확산 편성을 위해 운영하도록 했으며, 고등학교는 학생의 진로와 전공을 고려하여 과목 선택권을 늘렸다. 교과서도 이런 준칙을 받아들여 국정·검정·인정을 가리지 않고 기초적 소양을 학습하고 학생 개개인의 꿈과 끼를 키워주는 맞춤형 수업이 이루어지도록 개발되었고, 교육 내용도 초·중·고를 관통하여 교과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여줄 수 있도록 핵심개념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식·기능·태도로 배치했다. 교과서에 학생들의 잠재력을 높이는 지식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에 결코 쓸모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꼭 배워야 할 학습자료이며 이에 대한 학습만으로도 ‘지성’, ‘감성’, ‘시민성’, ‘신체적 활동성’ 등을 모두 높일 수 있다. 교과서에 실린 개념적 지식은 메타인지를 높이는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다. 초·중·고에서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늘어나고 전반적으로 학력이 낮아지는 원인은 학생들이 개념적 지식인 내포적 정의를 깊게 학습하지 않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교사가 수업에서 포괄적인 학습 능력과 밀접한 내포적 정의에 주목하지 않고 예시, 부연 등 주변 지식을 가르치는 데 매달리고 학생들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학습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사람, 상품, 정보 등의 교류가 활발해진 현실에서 내포적 정의는 더욱 중요하다. 국가마다 어떤 개념에 대한 표현은 다소 다르더라도 내포적 정의는 같으므로 타자와 의사소통을 할 때 유리하게 쓸 수 있다. 이를테면 전 세계적으로 비유법 중 하나인 ‘은유’, 경제체제 중 하나인 ‘자본주의’, 생명현상 중 하나인 ‘항상성’에 대한 내포적 정의는 다르지 않다.
개인적 삶의 경험은 보편적 지식과 조화로울 때 유용한 삶의 지식이 될 수 있어
교사는 프레이리가 추구하고 사또 마나부가 이어 말하려는 더 평등한 사회,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교육의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럴 때 현실을 보다 인간적 사회로 바꾸려는 의식적이고 실천적 인간으로 학생들을 성장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교육제도나 교육과정을 은행예금식 교육으로 규정하여 교사가 학생의 삶의 경험과 무관한 주제나 교육 내용을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으로 한다고 예단하고 이를 바꾸는 일이 혁신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은 몹시 위험하며 흑백논리의 오류에 쉽게 빠질 수 있다. 특히 교사든 교육 혁신가든 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을 하면 억눌린 자가 없는 사회로 당장 도달하게 된다는 확신은 단순한 기대이거나 개인적 열정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와 현실태의 관계처럼 병아리로 거듭나고 싶은 유정란의 욕망은 실현되어야 하지만 언제나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유정란이 부화하여 병아리가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며, 적절한 외부적 부화 조건이 동반될 때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교육 혁신을 하겠다면 외부적 상황이나 현실을 더 인간다운 사회로 바꾸기 위하여 차근차근 국민적 지지를 통해 나아가야 하고, 이를 고려하지 않은 교육 진단은 자의적일 뿐이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학생들을 합리적인 시민으로 성장하게 할 수 없다. 수업에서 강의식 교육이 무용하다거나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 현실의 불평등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않는 한 국민을 설득할 수 없고 공감받을 수도 없다. 또 교육에서 개인적 삶의 경험이라는 특수한 지식과 사회적 소통을 위한 보편적 지식에 위계를 두고 대립한다고 보는 태도도 지식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를 고려하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교육과 지식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려면 고유한 사회적 특수성을 반영해야 하지만 보편적 지식에 대한 교육마저 불필요하다고 보는 태도는 결코 현실을 바꿀 수 없으며 어떤 지식이든 교육이든 객관적으로 현실을 이해하고 문제를 찾아낼 때만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도 실효적이다. 프레이리처럼 문제제기식 교육을 중요하게 보는 교육 방향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지금의 한국 교육을 은행예금식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은행예금식 교육의 문제제기는 형식이 교사의 설교식 강의에 있다가 아니라 주제나 교육 내용이 다수가 억압된 교육 현실을 바꿀 수 없도록 구성되어 있는 데 있기 때문이다. 또 학교에서 학습과학에 따른 수업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배움이 일어나고 누적된다. 교육적 인간상을 민주시민에 둔다고 해도 민주시민이 어떤 시민인가는 애매모호하고 이에 대해 학생들이 대화나 토론을 통해 합의하려면 보편적 지식을 갖춘 이성적 시민이 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학습은 필수적이다. 한국 초·중·고 교육에서 교육과정이나 교과서가 모든 학생의 삶의 경험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은행 예금식 틀안에서 이해하는 배움의 공동체 철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교육철학이라 할 수 없으며, 교수학습방식도 충분하다고 할 수 없으며, 바람직한 인성을 갖춘 창의융합적 인재든, 성숙한 민주시민이든 교육적 성과 측면에서도 기대한 만큼 도달케 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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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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