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2) – “해방 직후의 교육운동”

by gyobasaNPO | 2025-10-0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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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해방 직후 한국 교육계가 좌파의 조선교육자협회, 중도의 새교육운동, 우파의 민족주의 교육개혁 세력 등 세 흐름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향의 교육개혁을 추진했음을 보여줍니다.                                                              

 

 

세 교육개혁 세력들

 

이만규는 해방 이후 집필한 『조선교육사』(1947)의 말미에서 일제 시대의 조선인 교육자들을 다음과 같이 다섯 유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그 자신이 송도고등보통학교와 배화고등여학교에서 직접 가르치기도 했던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보고 들은 체험에 의거한 당대 교육계의 증언이기도 하다. 첫째는 ‘일인(日人)의 제도에 굴복하는 것을 허하지 아니하여 … 교육계를 떠난 이들’, 둘째는 ‘기회가 닿으면 … 민족적 의식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해 ‘법망에 걸린 이들’, 셋째는 ‘배일사상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일경(日警)의 요시찰(要視察)’이 되어 ‘간신히 교원 생활을 지속한 이들’, 넷째는 ‘양심이 있기는 하나 극히 미약하고 극히 타협적’이며 ‘아무 교육적 이념도 없고 양심의 발로도 없이 지난 이들’, 다섯째는 ‘적극적 친일적 경향을 가지고 … 자진하여 아첨한 이들’이다.1

 

1945년 해방 당시 남한에는 초등교사 13,782명, 중등교사 833명, 고등교육 교원 261명 등이 존재했다는 통계가 있다.2 이만규는 다섯 가지 유형 중 첫째와 다섯째는 소수였고 둘째와 셋째도 상당히 많았으나 다수가 넷째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각 유형의 규모를 확인할 길은 없으며 분류 기준 자체도 애매하고 모호하다. 어쨌건 만 오천에 달하는 교육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한의 교육계에 남아 있었고, 그들은 조만간 교육개혁 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어느 유형에 속해 있던 간에 이들 모두에게 1945년 8월의 해방은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직후 미군정 치하에서 그들은 어떤 ‘새로운 교육’을 꿈꾸었고 어떤 교육개혁 운동을 전개했을까.

 

기존 교육사가들의 공통된 견해에 따르면, 해방 직후의 교육개혁 운동은 크게 세 세력에 의해 시도되었다.3 첫째는 ‘조선교육자협회’를 중심으로 했던 진보적인 좌파 교육개혁 세력, 둘째는 ‘새교육운동’으로 포괄되는 아동중심·생활중심 교육을 추구했던 중도적인 교육개혁 세력, 끝으로 반소·반미 노선을 공개적인 기치로 내세우며 민족주의적인 방향의 교육 재편을 추구했던 보수적인 우파 교육개혁 세력이다. 각 세력의 대표 인물로는 이만규, 오천석, 안호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교육개혁운동

 

먼저 진보적인 좌파 교육 세력의 개혁 구상을 살펴보자. 그들은 1946년 2월 17일에 창립한 ‘조선교육자협회’(이하 ‘협회’로 줄임)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협회는 미군정청에 등록하던 창립 당시의 회원 수가 280명이었으나, 1947년 6월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신청 시에는 9,210명으로 급속하게 세력이 성장했다. 회원의 규모만이 아니라 조직의 내용을 보더라도 각급 학교 단위 조직과 전국 조직을 갖춘 최대의 진보적 교육단체였다.4

 

미군정청 학무국 내의 ‘한국교육위원회’가 친일 교육세력을 재등용하는 인사 정책을 추진하는 데 반대하며 교육계에서의 친일 세력 청산을 주요 목적으로 내거는 대중적인 교원 조직들이 등장했다. 예컨대 1945년 9월의 중등교원 중심의 조선임시중등교육협회, 10월의 초등교원 중심의 조선교육혁신동맹 등이 그것들인데 이들이 모태가 되어 이듬해 2월에 조선교육자협회가 결성되었고 지방의 여타 교육자협회와 연결되어 단기간에 전국에 회원을 갖춘 대규모 교원단체로 성장했다. 앞서 언급한 이만규가 창립 초기부터 1946년 8월까지 주요 지도자로 협회를 이끌었고, 여기에 당시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였던 김택원, 이준하 등 좌파 교육학자들도 지도 인물로 동참했다.

 

그러나 좌파 진영 내에서 여운영 계열과 박헌영 계열 간의 정치적 갈등이 점차 심화되고, 또 한편으로 분단이 점차 고착화되어 북한에 김일성대학이 창설되자 월북하는 교육자들이 늘어나면서 협회의 구성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특히 남조선노동당(속칭 남로당) 창당 이후 협회의 주도권을 그들이 장악하면서, 이만규를 비롯한 중도좌파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지 않는 중도적 인사들이 협회를 탈퇴하게 된다. 이러한 내적 분열에 더하여 한편에서 보수적인 교육 관료들을 중심으로 조선교육연합회(이후 대한교육연합회로 개칭)가 결성되자 교육계는 더욱 분열되었다. 무엇보다도 1947년 5월 이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U.S.-Soviet Joint Commission)가 결렬되면서 한반도 단일정부 수립이 좌절되었고 이후 미군정은 남한 내에서의 좌익세력 대검거에 착수하면서 협회는 위기를 맞이했다. 세력이 급격히 약화된 협회는 남로당의 지하단체로 위축되었고 교육개혁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그들이 추구한 교육개혁의 내용을 살펴보자. 협회는 47년 6월에 “① 교육에서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제거한다. ② 민주적이고 과학적인 교육 체계를 수립한다. ③ 민주주의 교육을 통해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적 발달을 장려한다. ④ 교육의 과학화와 실천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을 개선한다”는 등의 네 강령을 내걸었다. 이어서 7월에는 24개 조항에 달하는 보다 구체적인 교육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그 안에는 ‘교육기관의 근로대중에 대한 해방’, ‘초등교육을 생산적 근로와 결합’ 등 좌파적인 내용과 함께 ‘교육계에서의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팟쇼분자의 급속한 숙청’, ‘교육경영에서 최대한도의 지방분권주의의 수립’, ‘학생의 자치제 실현(초등 아동의 자치제 훈련을 가합(加合)함)’, ‘교육자의 의사가 교육에 완전히 반영될 수 있는 학원의 민주주의화’, ‘남녀공학의 점진적 실시’, ‘교육상 남녀의 평등을 위한 대책의 실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5 하지만 협회 회원들은 미군정에 참여할 수 없어 외부에서 개혁을 제안하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개혁 방안들 대부분은 미군정의 교육정책으로 현실화되지 못했고, 결국은 ‘좌절된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오천석의 교육개혁론

 

해방 후 남한에서 한국인의 교육개혁 시도는 미군정청의 협력 혹은 최소한 승인이나 방조 없이는 순조롭게 전개될 수 없었고, 조선교육자협회의 실질적인 궤멸이 그런 제도적 한계를 잘 보여주었다. 한국인이 교육개혁을 펼칠 수 있는 무대 자체가 크게 기울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교육자협회와는 권력구조 내의 위치나 이념 면에서 대조적인 지점에 자리했던 중도적 교육개혁 세력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미군정과의 협력체제 속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개혁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이 전개한 교육개혁운동이 이른바 후에 ‘새교육운동’으로 통칭되는 운동이며 그 주된 지도자의 일인이 오천석이었다.

 

오천석은 1901년에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조선인 감리교 목사 일세대에 속하는 오기선(吳基善)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북 출신의 기독교인이라는 출생 배경은 이후 그의 교육과 사상, 활동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는 부친의 국제적인 개신교 인맥의 도움으로 1919년에 일본의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중등부에서 중등교육을 받았고, 그 2년 후인 1921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코넬대학(Cornell College) 학사, 노스웨스턴대학(Northwestern University) 석사 학위 취득 후 1929년에 아이비리그의 명문 컬럼비아대학(Columbia University) 티처스칼리지에 진학했다. 1931년에 한국인 최초의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후, 김성수가 이끄는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식민지 시기의 미국 박사가 대체로 그러했던 것처럼 교육계의 주류 지도자로 활약할 기회는 부여받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중국 상해로 넘어간 그는 국내의 황민화운동에 휩쓸리지 않았고, 따라서 친일 활동 연루라는 어두운 과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해방 당시 오천석만큼 미국 사회와 교육을 가장 잘 알고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비전을 펼쳐보일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는 점에서 그가 미군정청 초대 학무국장 라카드 대위의 자문이 된 것은 자연스럽고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남한의 미군정은 개혁을 스스로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데에는 소극적이었으나 정책 결정에 한국의 실정과 의향을 반영하는 이른바 ‘한국화’(Koreanization) 방침을 취했는데, 이는 오천석의 활동 반경을 보다 넓히고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미군정의 재가를 얻어 그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두 한국인 위원회, 즉 학무국장의 비공식적 자문기구였던 ‘한국교육위원회’(the Korean Committee on Education 1945.9.16〜1946.5.)와 보다 대규모의 공식 교육개혁 위원회인 ‘조선교육심의회’(the National Committee on Educational Planning 1945.11.6.〜1946.3.7.)6에서 논의되고 제안된 교육개혁 방안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정책 결정에 단초를 제공했다. 미군정 3년간의 활동 결과, 오천석은 중앙 및 지방 교육행정의 복원, 한국인 교사 충원을 포함한 학교교육의 정상화, 한글 교과서 발행 등의 시급한 응급조치를 이뤄냈을 뿐 아니라, 고등교육 영역에서는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를 이끌고, 초등 의무교육제 및 6-3-3-4 단선형 학제 등의 개혁 제안을 주도했다. 다만, 이러한 적극적인 개혁안들이 결국 입법화·제도화되지는 못한 채 미군정이 종식되었고, 그것들은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의 과제로 이월되었다.

 

오천석은 민간 부문에서 전개된 교육개혁운동, 즉 ‘새교육운동’에도 지도적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7년에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이라는 저작을 발표하여 자신의 교육개혁론 및 그 바탕을 이루는 민주주의를 일반에 소개함으로써 해방 후 교육개혁운동에 이념적 이정표를 제공하였다. 해방 직후의 민주적 교육개혁론을 이해하는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문헌인 이 저작에 기초하여 그의 교육개혁론의 주요 내용과 특질을 검토해 보자.

 

그는 먼저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이 어떤 의미의 사건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자신의 입론을 시작한다. “이것은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는 전제주의에 대한, 사람의 가치를 지상가치로 하는 민주주의의 개선(凱旋)이다”7라는 언명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해방을 곧 ‘전제주의의 패배’이자 ‘민주주의의 승리’로 규정한다. 이로서 그가 추구하는 바가 일본식 민족주의를 한국식 민족주의로 단순히 대치하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 사회의 형성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민주주의 사회란 곧 “그 국가를 구성한 인민 전체가 아무런 외적 구속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이성으로 그 국가의 온갖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활동을 운전하는 데 간여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과 자아실현을 전제로 하는 만큼 “자유민의 교육은 개인으로 하여금 그 생활 전반에 걸친 자유롭고 무제한한 자아실현에 의해, 인간 천부의 권리인 풍유한 생활, 만족한 생활, 창조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지식과 기능을 주고, 이상과 태도를 닦는 교육을 의미하는 것”8이라 하여 자유민을 기르는 교육이 민주주의 사회 실현의 전제라고 보았다.

 

동시에 오천석은 민주주의 교육이 ‘내용’의 문제일 뿐 아니라 ‘형식’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민주주의 교육은 먼저 우리 생활에서의 일본적 잔재의 청소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이는 일본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함께 극단으로 비민주주의적인 까닭이다.”9 그렇다면 민주주의 교육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과 형식을 지녀야 하는가.

 

그의 저작에서 전개되는 민주교육론에서 교육의 ‘형식’을 이야기할 때의 주요 키워드는 ‘생활’, ‘경험’, ‘아동’이었다. 국가권력과 학교교육 간의 관계, 국가교육과정 결정에서의 국가와 민의 관계, 교육행정에서의 중앙 정부와 지방 교육기구 간의 관계, 교육행정기구와 일선 학교 간의 관계, 일선 학교에서의 교장과 교사의 관계, 교원노조 등 교사단체 결성과 행동의 문제, 교사의 교권과 자율성 문제 등 이른바 ‘교육의 민주화’와 관련되어 마땅히 제기될 만한 주제들은 교육에서의 아동관, 지식관의 문제만큼 중시되지는 않았다.

 

“진정한 교육은 생활을 위하여, 생활을 교재로, 생활의 방법을 통하여 행하여지는 것이다. 생활을 위한 생활에 의한 교육이야말로 참된 교육인 것이다. … 실생활을 떠난 지식은 죽은 지식이요, 값없는 지식이다.”10

 

일제 시대의 교육을 포함한 구래의 교육이 ‘실생활을 떠난 지식’의 일방적, 획일적인 전달에 치중하였다면, 새교육은 ‘생활을 위한, 생활에 의한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 동시에 ‘아동의 천성, 아동의 능력, 아동의 취미, 아동의 경험이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결정하는 가장 중대한 요인’11이라는 점이 거듭 강조되었다. “재래의 천편일률식의 교육을 청산하고 개인을 군중에서 구출하여 그 개성의 요구에 순응하는 교육을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12라는 언설에서 전제가 되는 개혁 대상은 국가주의적·전체주의적 교육 형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탈정치화된 ‘천편일률식의 교육 형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개성 중심, 아동 중심 교육을 정당화하는 사상으로 그는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을 설정하여 번역13 등의 작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오천석의 민주교육론은 교육철학적으로 볼 때 존 듀이로 대표되는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사상에 경도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민주교육론은 ‘교육방법론’ 차원의 담론으로 전환됨으로써, 교육제도와 체제의 비민주적 형식에 대한 저항의 측면이 희석되거나 약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림 1] 조선어학회로부터 새국어사전을 받는 오천석 미군정 문교부장(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1948년 2월 27일)

 

바꿔 말해 오천석의 민주교육론은 교육의 장에서 ‘국가의 통제와 간섭’에 맞서서 ‘사상과 학문의 자유’ 및 ‘개인의 개성 발현’을 지켜내기 위한 저항 담론으로 발현되고 작동하기보다는, 단지 ‘일제식 교육’, ‘교과서 중심 교육’, ‘지식 중심 교육’을 비판하고 방법론적 대안을 모색하는 일종의 ‘교수법적 담론’으로 국부화, 왜소화되고, 심지어 탈정치화될 여지조차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교원단체에 대한 그의 인식과 조치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오천석이 미군정청에서 문교부장14으로 실질적인 최고 권한을 발휘하던 1947년 말, 그는 ‘조선교육연합회’(1947년 11월 23일 창립. 정부 수립 이후 ‘대한교육연합회’로 개칭되어 1989년까지 지속되었다)라는 교원단체를 탄생시켰다. 교원 복지 및 자질 향상을 위한 단체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연합회 창설을 주도한15 그가 모델로 삼은 교원단체는 바로 ‘조선교육회’였다. 그것은 일제 시대의 대표적인 반관반민적 어용 교원단체였다.16 결과적으로 연합회는 식민지기의 조선교육회와 마찬가지로 교육행정관료와 교장 중심으로 운영되고, 그 재정을 문교부의 지원금 및 아동 대상 부교재(이른바 방학책으로 통칭된 ‘학습장’)의 강매에 의존하는 등 비민주적 성격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연합회는 평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중앙집권적 교육 통제와 대결하는 교원단체로 작동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었는데, 그 산파가 오천석이었던 셈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오천석의 민주교육론이 지닌 특질들은 1945년 전후 일본에서 전개된 교육개혁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질들과 선명한 대조를 보였다. 전후 일본에서도 ‘듀이’ 등의 아동·경험 중심 교육론이 소개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교육운동의 주류를 이룬 적은 없었다. 교육개혁운동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교화시키는 수단으로 작용해 온 전전(戰前) 교육체제 자체의 민주화와 지방분권화, 교육제도의 계층적 불평등 해소, 학교교육에 대한 국가권력의 부당한 지배와 간섭 배제, 국정교과서제도 폐지, 교원노조의 결성, 학교교육에서의 교육자와 민의 교육권 회복 등 고도로 정치적이며 제도적인 어젠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새교육운동

 

오천석이 주장한 민주교육개혁론은 이상과 같이 생활·아동·경험 중심 교육으로 일선 교사들 사이에서 빠르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새교육운동에의 참여를 촉진하는 정책적 요인도 있었다. 미군정청은 해방 후 학교교육을 재개하면서 일본어와 수신 등 대표적인 식민지주의적 교과를 폐지하는 한편, 그것을 대치하는 교과로 ‘사회생활과’를 도입했고 1946년 9월 1일부터 이 교과의 교육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생소한 명칭의 교과에 대해 당시의 교육자들은 무지했고, 학교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당시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민주주의 교육’을 기치로 내세우면서 교실에서 학생들의 사전 조사와 발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교사의 설명 위주 운영 방식을 고쳐 분단식 교육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6명 단위로 한 분단을 만들고 책상과 좌석도 서로 마주볼 수 있도록 ㄷ자형으로 배치하였다. … 분단식 수업이라고 해서 사전 조사와 발표를 강조했지만 도무지 눈감고 아웅 하는 짓거리였다. 학교에 도서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읍내에 도서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책을 소장한 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무엇을 가지고 조사를 하며 발표를 한단 말인가? … 잘못 끼운 첫 단추였다.17

 

당시로서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사회과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조사하고 조별로 발표하게 하는 형식의 이 ‘사회생활과’ 교육은 교사 중심, 교과서 중심의 일제식 수업에 익숙해 있던 교사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것을 ‘새교육’으로 느낀 일선 교사들 사이에서는 이 새로운 교수법과 교육철학에 대한 학습과 수용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결과 새교육과 관련된 강습회, 연구회 등이 곳곳에서 개최되었고 많은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거기에 참여했다.

 

해방 직후 남한에는 새교육과 관련하여 오천석을 중심으로 한 ‘새교육협회’, 백낙준을 중심으로 한 ‘교육문화협회’, 심태진과 김기서를 중심으로 한 ‘아동교육연구회’, 그리고 안호상을 중심으로 한 ‘민주교육연구회’ 등 4개 연구단체가 있었다. 이들 단체가 강연회나 잡지(예컨대 『새교육』 및 『조선교육』)를 통해 소개하고 전파시킨 아동중심주의·생활중심주의 교육사상 및 그들의 글과 저작을 읽고 각 지역에서의 연구발표회 및 강습에 참여한 교육자들에 의해 전개된 교수법 학습·연구·실험 운동이 다름 아닌 ‘새교육운동’이었던 셈이다.18 새교육운동 관련 강습회에 일반 교육자들이 보인 관심과 참여는 대단한 것이어서 1946년 11월 8일부터 3일간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주교육연구강습회’에는 무려 전국 각지에서 1천여 명의 초·중등교원이 운집하기도 했으며19, 그 외에도 청주, 대구, 진주, 전주, 공주 등에서 새교육 관련 연구발표회가 열렸다.20

 

새교육운동 참여자들이 새로운 교수 방법을 학습하고 연구하고 실험하는 시도는 식민교육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일환이었음은 분명하나 동시에 그것이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다. 식민교육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한국인 교육자들이 속죄나 반성, 지위의 변동과 같은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변신을 모색할 수 있는 절호의 무대를 새교육운동에서 찾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교사 중심 교육이 아닌 아동 중심 교육, 지식 중심 교육이 아닌 생활 중심 교육을 주장하고 동시에 그것을 서구의 저명한 사상가들의 교육이론을 곁들여 주창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일은 그들이 식민교육 복무라는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의 교육을 추구하고 있으며, 전문성 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유리했다.

 

한편 당시 교사들이 학습하고 연구하던 새교육 이론을 보면 그 안에서 이른바 1920년대 다이쇼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라는 당시 일본에서 모색되던 교육개혁운동과 흡사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해방 후 한국의 새교육운동에서 참조했던 모델 중에는 미국의 파커스트(H. Parkhurst)에 의한 ‘달턴 플랜(Dalton Plan)’21 혹은 킬패트릭(W. H. Kilpatrick)에 의한 ‘프로젝트 메소드(Project Method)’22로 불리는 것들이 있었는데,23 이들은 1920년대에 일본 교육계에 이미 번역 소개되었던 것들이고 그와 관련된 일본어 번역서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새교육운동 참여자들 중 일부는 이들 서적에 의거하여 새교육을 모색했다. 일본 근대교육에 이미 이십여 년 전에 소개된 바 있던 서구의 특이한 교수법들은 교육제도의 개혁과 결합되지 못한 채 이념적으로만 래디컬한 주장의 차원에 그침으로써 일본의 교육 현실을 바꿀 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다. 그와 동일한 운명을 해방 이후 한국인 교육자들에 의해 전개된 새교육운동이 겪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학생과 학부모, 민들은 새교육운동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인구의 대다수가 학교의 문턱을 밟지 못한 채 이른바 ‘문맹’ 상태에 놓여 있어 무엇보다도 학교교육의 기회 자체를 대대적으로 확충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로 간주되었다. 교사 중심이니 아동 중심이니, 교과 중심이니 생활 중심이니를 따지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한가한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문맹에서 벗어나는 것,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숙원과 같았다. 운좋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해도 또 다른 절실한 과제는 극도로 좁은 문을 뚫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일제 시기에 중등 이상의 교육 기회가 식민지배 말기까지 절대적으로 제한되어 왔고 그 결과로 입시경쟁은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식민지 말기 조선인의 중등학교 입학경쟁률을 보면, 1939년에는 고등보통학교 경쟁률은 5.8 대 1, 실업학교 경쟁률은 6.8 대 1이어서 지원자 다섯 중 한 사람도 입학하기 힘든 격렬한 경쟁 상황이었다.24이런 사정은 해방 이후에 더욱 심각해졌다. 식민지 시기에 중등학교 입학 시험과 관련된 참고서가 동아일보 광고에 실릴 정도로 상품화되었듯이([그림 5]), 해방 이후에도 그러한 현실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그림 6]에 보이듯이 식민지 시기와 마찬가지로 해방 후에도 여전히 신문에는 중학 입시를 위한 참고서가 광고로 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교육 방식이 이른바 ‘새교육’으로 주창된다 한들 그것이 학교 현장에 뿌리를 내리거나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하기는 난망했다.

 

애초에 오천석은 새교육운동을 포함한 민주적 개혁의 미래에 대해 반드시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일본은 착착 일본적인 전비(前非)를 버리고 새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도리어 일본적인 과오를 고수하며, 구시대에 답보를 계속하고 있을 우려가 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5년 후 혹은 10년 후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겨볼 때, 이 땅에 오히려 구일본적인 것이 한층 더 많이 남아 있음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25

 

민주적 교육개혁이 좌초할 가능성도 있다는 1947년 시점에서의 오천석의 불길한 예감은 1960년 무렵의 그의 저술에서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탄식으로 이어졌다.

 

아동의 자유와 흥미와 창의는 몰각되고, 억압과 통제로 팟쇼식 교육을 행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동의 개성과 개인차는 멸시를 받고 획일적 교육의 실행자는 되고 있지 않은가, 교실내에서는 정숙과 부동의 태세만이 요구되고, 운동장에서는 프러시아식 행진이 강요되고 있지 않은가, 벌의 위협과 호령의 위엄만이 아동지도의 요체가 되어 있지 않은가?26

 

해방으로부터 15년이 흐른 시점에서도 여전히 한국의 학교교육 안에 식민지 시대의 ‘팟쇼식 교육’의 관행이 완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포스트콜로니얼(post-colonial)한 식민지적 유산의 지속을 오천석을 비롯한 새교육운동 참여자들의 불철저한 현실 인식과 개혁 역량의 부족, 개혁 노력의 미비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천석이 다른 이천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직면했던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자체가 지녔던 역사적 한계가 민주적 개혁을 지난하게 만들었다. 한국에는 서구의 데모크라시는커녕 일본에서와 같은 불완전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선례도, 보통선거의 경험도 없었고,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낯설고 생소했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대부분이 학교교육 경험이 없는 문맹 상태였던 것이다. 본디 1945년 8월 시점에서 국가와 교육의 개혁을 위한 재출발의 조건 자체가 한국은 일본과 달랐다. 기존의 강성 천황제 국가를 연성화하고, 문해 능력을 갖춘 천황의 신민(臣民)을 공화국의 국민으로 재교육한다고 하는 일본의 과제와,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와 그 국민을 새롭게 만들어내야만 했던 한국의 과제가 동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보다도 국가 형성을 우선해야 한다고 믿는 교육세력도 물론 있었다.

 

 

민족주의 교육 세력의 대두

 

미군정기에는 진보적인 좌파 교육개혁 세력과 새교육운동에 참여한 중도적인 교육개혁 세력 외에 또 다른 우파적 교육개혁 세력이 존재했는데, 안호상이 이끄는 ‘민족주의 교육개혁’ 세력이 그것이다. 그가 중심이 되어 1946년 8월 결성한 교육개혁 조직인 ‘민주교육연구회’는 곧바로 12월에 명칭에서 ‘민주’라는 말을 빼고 그것을 ‘조선’으로 대치한 것에서 엿볼 수 있듯이 ‘민주’보다도 ‘민족’을 우선하는 보수적 우파적인 이념 지향성이 강했다. 이 조선교육연구회에는 그리고 그의 주위로는 사범학교 출신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중에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사공환(司空桓)도 있었다. 그는 조선교육연구회의 기관지 격인 『조선교육』27에 다음과 같은 권두언을 기고하여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이 건전치 못한 심신과 변태적인 군정으로 말미암아, 시기상조인 민주주의와 파괴적인 공산주의 바람에 미친놈(美親派)과 소경놈(蘇敬派) 급성환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 세병(世病)을 급치하여야만 갱생할 수 있는 처지인 만큼 부득이 교육처방을 달리하여 전체주의 약방이나 민주주의 약 방에서 가장 필요한 당재(唐材)를 모아사 청심보명단(淸心保命丹)이나 활명수(活命水)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 나치스 독일의 교육상 지도정신과 사범교육의 혁신운동을 한번 살펴 보는 것도 무가치한 일은 아닐 것이다. … 나치스가 국민에게 요구하는 국민교육의 지향은 자명하다. 즉 독일청소년 교육에 대한 최대요구는 국가적 관념 및 민족적 정신의 함양과 규율 및 단결에 대한 훈련이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극도로 배격되고 독일국가, 독일민족을 제일의적으로 강조하였다.28

 

그는 미군정에 협력한 한국인을 친미 세력이라 하여 ‘미친놈(美親派)’ 그리고 소군정에 협력한 사람들을 친소 세력이라 하여 ‘소경놈(蘇敬派)’으로 비하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급기야 해방 이후 교육개혁에서의 유력한 참조 대상으로 전체주의 체제의 대명사인 나치 독일의 파시스트 교육정책을 내세울 정도로 노골적으로 우파적이고 민족주의적이었다. 이런 입장은 조선교육연구회의 지도자, 안호상의 국수주의적이기까지 한 민족주의 이념과 이어지고 있었다.29 그들은 미군정 하에서 주류가 되어 교육 권력을 차지할 기회는 갖지 못했으나 군정의 밖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며 자신들의 기관지를 통해 교육이념을 선전하고, 또 교육자 대상 강연회를 열어 세력을 확장하며 새로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조만간 찾아오게 된다.

 

해방 이후 짧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미군정기의 3년간 우리 사회가 직면했던 과제와 관련하여 오천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해방 직후 우리 지도자들에게 부과되었던 과업은 독립국가로서의 조국의 재건과 민주사회로의 국가발전이었다. 이 두 시대적 요청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조국재건이라는 거창한 과업의 두 지주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30

 

그가 말하는 수레의 두 바퀴 중 하나인 ‘독립국가로서의 조국의 재건’을 가장 우선시하는 이념이 민족주의라면 또 다른 바퀴인 ‘민주사회로의 국가발전’을 추동하는 이념은 민주주의인 셈이다. 그런데 해방 직후 3년간의 미군정기 동안 수레의 그 두 바퀴는 균형을 이루며 안정적으로 우리 사회를 끌어가지 못했다. 이 수레에 한국현대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여보자. 수레에 장착된 민주주의라는 바퀴가 취약하나마 균형을 맞추려 힘겹게 애쓰는 동안, 다른 한 쪽에 장착된 민족주의라는 바퀴는 점차 비대해지며 홀로 폭주하려 하고 있었다. 그 수레는 그렇게 삐걱대고 비틀거리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시기로 달려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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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1) – “미군정기의 교육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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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李萬珪 (1949), 『朝鮮敎育史(下)』, 乙酉文化社, 399-400쪽.
  2. Werth, Richard (1949), “Educational Developments under the South Korea Interim Government”, School and Society, Vol.69, April 30, p.305.
  3. 홍웅선 (1991), 『광복 후의 신교육운동 1946-1949―조선교육연구회를 중심으로』, 大韓敎科書株式會社.; 강일국 (2002), 「새교육운동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박사학위논문.; 박종무 (2011), 「미군정기 조선교육자협회의 교육이념과 활동」. 『역사교육연구』, 13, 115-162쪽. 참조.
  4. 박종무 (2011), 앞의 논문, 125-126쪽.
  5. 박종무 (2011), 앞의 논문, 143-144쪽.
  6. 위원회는 70여 명의 한국인 위원과 10명의 미국인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0개 분과에서 모두 100회의 분과회의와 20회의 전체회의를 개최하며, 교육이념, 학제, 의무교육제 등과 관련된 주요 교육개혁 방안을 심의하였다. 회의는 모두 한국어로 진행되었다.
  7. 吳天錫 (1947), 󰡔民主主義敎育의 建設󰡕, 吳天錫敎育思想文集 1(1975년 복간), 光明出版社, 4쪽.
  8. 吳天錫 (1947), 앞의 책, 23쪽.
  9. 吳天錫 (1947), 앞의 책, 8쪽.
  10. 吳天錫 (1947), 앞의 책, 50쪽.
  11. 吳天錫 (1947), 앞의 책, 53쪽.
  12. 吳天錫 (1947), 앞의 책, 57쪽.
  13. 뜌이, 짠 (1948), 吳天錫(역), 『民主主義와 敎育―敎育哲學槪論』, 國際文化館[Dewey, John (1916), Democracy and Education-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Education, New York: Macmillan.]
  14. 1947년 5월 미군정 하에서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된 이후 종전의 학무국을 개편하여 문교부가 신설되고 초대 문교부장에 유억겸이 그리고 문교차장에 오천석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유억겸이 11월에 급서하자 이어서 오천석이 문교부장이 되어 미군정 내 최고의 한국인 교육정책 결정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15. 吳天錫 (1975), 『외로운 城主』, 吳天錫敎育思想文集 10, 光明出版社, 110쪽.
  16. 김성학 (2004), 「해방직후 교원단체의 등장과정과 활동을 통해 본 식민지 교육경험의 지속과 변동」, 『교육사회학연구』, 14(2), 46쪽.
  17. 유종호 (2004), 『나의 해방전후, 1940∼1949』, 민음사, 152-153쪽.
  18. 다만, 이 네 단체 중에서 ‘새교육협회’와 ‘교육문화협회’는 미군정청에 참여한 한국인 교육세력이 중심이어서 새교육운동의 주체이자 지도적 역할을 자임한 반면, ‘아동교육연구회’와 ‘민주교육연구회’의 이념성향은 반드시 단일하지는 않아 그 안에는 친미적인 새교육운동 주창자만이 아니라 민족주의 교육론자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19. 沈泰鎭 외 (1994), 『師友文選』, 교문사, 15쪽.
  20. 강일국 (2002), 앞의 책, 28-29쪽.
  21. 파커스트에 의해 1900년대 초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달턴에서 시도된 실험적 교육방식이다. 교사의 일률 강의 대신에 학습자가 스스로 학습 계약을 짜서 학습 속도를 조절하여 학습하고 과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22. 1918년에 킬패트릭에 의해 체계화된 교수학습 방법으로서, 학생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프로젝트를 설정하여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자료를 수집, 분석하며 그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는 교육방식이다.
  23. 홍웅선 (1991), 앞의 책, Ⅳ장 참조.
  24. 1939년 당시 고등보통학교의 합격률은 18.5%(지원자 39,831명, 입학자 7,350명), 실업학교의 합격률은 17.2%(지원자 33,923명, 입학자 5,820명)이었다(朝鮮總督府學務局 (1941), 『祕 朝鮮ニ於ケル敎育ノ槪況』, 京城: 朝鮮總督府.).
  25. 吳天錫 (1947), 앞의 책, 8-9쪽.
  26. 吳天錫 (1960), 앞의 책, 323쪽.
  27. 『조선교육』은 안호상이 이끄는 조선교육연구회의 기관지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으나 여기에 실린 글들 중에는 새교육운동 관련 이론이나 학설을 소개하는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이 잡지의 이념적 성격을 한 가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28. 司空桓 (1948), 「更生의 길」, 『朝鮮敎育』, 2(7), 1-2쪽.
  29. 예컨대 심태진의 증언에 따르면 안호상은 미군정청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심지어 공개강연회에서도 ‘…미국X들은 물러나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沈泰鎭 외 (1994), 앞의 책, 15쪽.).
  30. 吳天錫 (1975), 앞의 책,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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