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3-02-16 11:02

| 그것도 교육이라 부른다면, 우리 학교 교육은 ‘시험 위주 교육’이다. 그 현실을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했고, 그 연장에서, 논술형이니 국제바칼로레아니 하는 ‘미래형’ 시험을 들여와 교육을 개선하려는 생각에 대해 비판했다. 시험 위주로는 학교가 결국 가식적인 사람을 키울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그것은 ‘반(反)교육’이라고 썼다. |
익숙해진 시험 위주 현실
우리 사회에서 시험은 ‘교육’의 시작이고 끝이다. 시험을 위해 교육하고 시험 점수로 교육 효과를 헤아린다. 우리 교육은 시험 위주이다. 그러나 시험 위주로는 참된 교육을 할 수 없다. 교육의 본연을 회복하려면 시험 위주 관성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그 관성으로 교육을 규정하고 있다. 시험 위주에서 헤어나야 한다는 자각마저도 이제는 흐려졌다.
교육이 시험 위주로 가면 안 된다고 경계하는 것이 상식이었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시험 위주 교육’은 ‘주입식’이고, 단편적인 ‘지식’ 암기만 부추겨 ‘심층적인 사고력’을 길러주지 못하며, 궁극적으로 ‘전인교육’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적어도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험이(특히 입시가) 교육을 망치고 있다고 종종 개탄했다. 그런 개탄을 사회가 수긍했고, ‘교육개혁’이 따라 이어지곤 했다.1
오늘날 학교 교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험 위주 교육의 주동력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은, 역설적이지만, 교육이 시험 위주로 가는 경향을 막기 위해 개발되었다. 야심적인 교육개혁(대학입시 개혁)의 소산이었다. 교육을 바르게 이끌 시험이 필요하다고 ‘교육개혁심의회’가 공식적으로 제안한 게 1986년의 일이고, 그 연장에서 수능이 만들어져 처음 시행된 해가 1993년(1994학년도 적용)이니, 7년 가까이 공들여 만든 시험인 셈이다. 적용되기 전 2년에 걸쳐서는 ‘실험 평가’도 일곱 번이나 거쳤다. 우리나라 입시제도 역사에 이런 정도로 신중하게 만들어냈던 입시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수능의 수명은 다른 어떤 입시보다도 길다. 지금도 시행되고 있으니, 30년 가까이 살아내고 있다.2
‘대학수학능력시험 20년사’는 수능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3
… 이전의 국가고사이던 대학입학학력고사는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모든 교과목을 대상으로 단편적 지식을 측정함으로써 암기 위주의 획일화된 입시 교육을 강화시킨 주범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수능은 교과목을 뛰어넘는 고차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라는 측면에서 학력고사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수능은 과연 개발 취지에 맞게 시험 위주 교육을 누그려 왔는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수능은 학교 교육을 사로잡고 있다. 수능을 벼리로 하는 다양한 시험(수능 모의고사, 전국연합학력평가, 중간·기말고사, 학원 입시 등)의 그물이 우리 교육을 완강하게 포획하고 있다. 시험 위주 경향을 누그러뜨리려고 도입한 시험이 그 경향을 오히려 굳혀 왔다.4
수능이 학교 교육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는 사실 잘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교육과정을 학교 스스로 편성해 운영하도록 허용하면 학교들은 ‘국영수’ 위주로 시간표를 짜려고 한다. 그 과목들이 수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정부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아서, 편성권을 줄 때면 으레 과목 편중을 규제하는 지침도 함께 내린다. 그런 지침이 교과 시간표의 치우침을 막을지 모르지만, 수업 자체가 시험 위주로 흐르는 것을 막진 못한다. 수능이 수업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도 잘 알려져 있다. 학생들은 수능 과목이면 수업에 참여하고, 아니면 그 시간에 자거나 ‘필요한’ 다른 과목을 자습한다. 교사도 그런 행태를 묵인한다. 학생들이 참여한대도 수업은 결국 시험을 겨냥하기 마련이다. 대놓고 유사 문제 풀이를 하거나, 적어도, 시험에 대해 ‘족집게’ 가이드를 해보려는 수업이 이루어진다.
학생 쪽에서의 공부는(교육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터이다. 수능 과목이 아닌 교과는 소홀히 하거나 아예 제치고, 가능한 한 많은 문제를 풀어보되, 특히 기출문제나 EBS 수능 강의 교재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변형 문제까지 풀기를 반복 훈련한다. 2022학년도 수능 만점자는, 어떻게 공부했느냐는 질문에, “기출문제를 위주로 공부”했고 “한 문제라도 확실하게 풀자”는 마음으로 공부했다고 말했다. 2023학년도 만점자이자 ‘최고 득점자’도 같은 얘기를 했다.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최대한 다양한 문제를 많이 풀어 봐야 된다”고 조언했다. 수능은 시험 위주 경향을 누그러뜨리기보다 오히려 시험 위주가 되도록 부추겨 왔다. 적어도 고등학교 교육은 이제 철저하게 ‘수능 위주’이고, 이렇게 된 지는 꽤 오래다.5
수능이 교육을 이끄는 사태에서 수능 점수는 당연히 ‘교육받은’ 지표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계층’을 가른다면, 유력한 가름 기준 가운데 하나는 수능 점수일 것이라는, 웃어넘기기 어려운 농담도 있다. 대학생들이 같은 대학에 다니면서도 수능 점수가 낮은 친구들을 벌레(‘蟲’) 취급한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공공연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의 일상 심리 안에서, 시험 점수는 교육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유력한 기준이 되어 있다. 수능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시험들에까지 비추어보면, 이런 점은 더더욱 확연해진다. 높은 관료가 되고 의사가 되고 법관이 되려고 해도, 교사가 되고 중계사가 되고 대기업 사원이 되려고 해도, 시험 위주로 준비해야 한다. 대학들도 그런 시험 위주로 교육과정을 구성한다.
시험 위주로 가서는 교육에 이를 수 없는 이유
시험 위주로 갈 때 교육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면 고리타분하다고 등 돌릴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입시 위주 교육은 막아야 한다는 타령을 해왔고, 그래서 별별 대책을 다 동원해 본 결과 지금에 이르렀는데, 다시 그 타령이냐고 헛웃음 칠 듯하다. 우리의 습성에서는 이제 교육이 시험 위주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문제에 익숙해져 버리면 그것은 고질(痼疾)이 된다. 습성을 털고 상식을 깨지 않으면 문제 자체가 감지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시험 위주로는 왜 진정한 교육이 되지 못하는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시험은 정답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시험에서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정답을 찾거나 적어야 한다. 따라서 시험 위주 교육은 학생들이 정답을 찾거나 작성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 된다. 당연히 학생들은 정답을 그저 ‘받아들이는’ 자리에 머물게 된다. 자기만의 ‘답’(가설)을 굴리며 개정해 가는 학생이 없지 않겠지만 매우 예외적일 테고, 그런 수업 태도는 정답을 익히는 데 비효율적이어서 으레 제지당하기 마련이다. 학생 쪽에서 보면, 교육이 자기 ‘밖’에 있는 정답을 이해하고 기억해 두는 데서 매듭 돼 버린다. 교육은 그렇게 완성될 수 없다.
다양하게 정의되긴 하지만, 교육이라면 적어도 ‘인격을 함양하는 과업’이란 성질을 품어야 할 것이다. 실제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목적상 학교 교육은 학생의 자아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려고 애써야 한다. 정답을 댈 수 있게 만드는 데 주력하는 시험 위주 행태가 교육이 못 되는 것은 자아 변화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밖에 있는 정답을 넣어주며 그대로 받아 저장하게 만드는 것으로는 학생의 내면에 일차적인 동요마저도 일으키기 어렵다. 자아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먼저 기존의 믿음이 흔들려야 하고, 흔들린 믿음은 한 발 나아간 새로운 믿음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 점은 교육을 가리켜 ‘끊임없는 경험의 재구성’(Dewey)이라고 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6 학교 교육은 정답보다 의문(동요)을 겨냥해야 한다.
교육은 정답을 얻었다며 안주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교육은 의문에서 의문으로 이어가게 이끄는 과정이어야 한다. 인류 역사는 이런 교육의 본질을 거듭 확인해 왔다. 모른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더 궁구해야 할 물음을 지니게 되는 것이 교육받은 징표라는 말(Socrates)이나, 질문 없이는 어떤 경험도 할 수 없다는 말(Gadamer) 등이 모두 그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른바 경험론이 얘기하듯이, 밖에 있는 ‘객관적인’ 것들이 감각되는 대로 자아에 영향을 줄 ‘의미’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합리론이 얘기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면 알게 되지도 않는다. 밖에 있는 것은 안에 있는 ‘마음’으로 포착되어야 비로소 우리에게 의미가 되고, 자아를 새롭게 구성할 요소가 된다. 이때 포착은 오감이 작동하면 곧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마음이 술렁이는 의문이 우선 일어야 하고, 그것을 해소하려는 마음의 조율이 시작되어야 한다.7
자연이나 사회에는 사상(事象)들이 무한히 널려있고 또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그것들은 형태가 없으며 정의되어 있지도 않다. 말하자면 ‘이름’ 붙여지기 전 상태에 있다. 우리 마음이 붙잡아 내었을 때 사상은 비로소 형체(이름)를 얻고 의미를 지니게 된다. 앎의 과정에 들어오게 된다. 이런 앎(교육)의 과정은 책을 읽는 것에 빗대어 볼 수 있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가 언어 구조를 내면에 지니고 있어야 하고, 그 구조를 적용해서 책을 읽게 된다.8 알다시피 이때 책은 독자마다 다르게 읽힌다. 심지어 한 독자에게도 읽을 때마다 다른 의미를 안긴다. 여기에서 차이나 변화는 책(사상)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책을 읽고 해석하는 마음(안목)이 달라서 오는 것이다. 교육은 바로 이 안목을 키우는 것이고, 그 일은 학생에게 정답을 주입해서 되는 게 아니다. 학생으로 하여금 정답을 의심하게 이끌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이유를 지니게 만들어야 비로소 교육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정답이 왜 정답인지, 정답을 골라내려면 어떤 용어나 공식을 익히고 적용해야 하는지 설명 듣는 수업에 익숙하다. 학교 교육 장면으로는 으레 그런 수업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반문할지 모른다. 교과서의 개념이나 명제들을 학생들이 알아듣게 소상히 풀어 이야기해 주면, 그 이해의 토대 위에서 학생들이 안목을 키우지 않겠느냐고, 더 나아가 문제를 주고 정답 찾는 훈련까지 시키면 안목은 더욱 세련돼지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털끝만큼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교사의 설명이 학생이 이미 구축해 지닌 안목과 충돌하여 의문을 일으키고, 안목을 새롭게 조정하지 않을 수 없게 자극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성과는 의도한 교육이 이루어 낸 것이 아니다. 우연히 그럴 소지가 있었기에 어쩌다 얻어걸린 횡재일 뿐이다.9
교육에서 교육내용은 학생들이 삼키기만 하면 되도록 ‘암죽’을 쑤어야 할 재료가 아니다. 학생들이 내용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걸음을 스스로 떼도록 의심(마음의 동요)을 일으키고, 궁극적으로 내용 너머까지 탐험해야 할 이유를 품게 만드는 데 쓸 연장이다. 교육은 교과 내용을 해설하고 그 해설을 제대로 소화했는지 시험으로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교육의 본연은 학생들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물음을 지니도록 이끄는 데 있다. 진정한 교육에서 교사는 명제를 풀어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질문으로 뒤엎는 사람이다(이홍우). 삶의 세계라는 실타래를 풀어나갈 실마리(질문)가 보일락 말락 하게 제시하며 학생을 유도하는, 그래서 기어이 스스로 눈을 틔우고 답을 찾는 여정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미래형’ 시험으로 교육을 이끌자?
이쯤에서 흔히 나오는 반론은 시험이 좋아지면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시험 위주 문제의 해결책이었던 수능이 실패했고 이제 부작용도 심각하다면, ‘미래형’ 시험으로 바꾸면 될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창의적이고 심층적인 사고를 자극할 문제를 출제하도록 하고, 입학시험도 그런 문제로 구성하면 시험 위주 교육의 문제는 해소되리라고들 본다. 구체적으로 ‘서·논술형’이니 ‘국제바칼로레아(IB)’니 하는 시험들을 대안으로 들먹인다.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근에 그런 얘기들이 부쩍 자주 나오고 있다. 장관을 포함해서 교육부 관료들도 그런 운을 띄우고 있고,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도 얼마 전에 ‘미래 수능은 논술형’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어떤 ‘혁신 전문가’는 ‘정답 없는 시험’이라며 국제바칼로레아(IB) 도입을 부추겼다고 하고, 도입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나선 국회의원도 있다고 한다.
시험 문제가 좋아지면, 적어도 문제가 나빴던 때에 비해 상황이 나아지긴 할 것이다. 학생들이 ‘단편 지식’을 암기만 하지 않고, 이해하고 분석하며 적용하는 연습도 하게 될지 모른다. 논술형에 대비하는 시험공부(수업)에서는 학생들의 질문도 많아지고 나름의 논리를 구축하려는 고심도 커지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행위들은 여전히 ‘내심’과 관계없이 ‘정답’을 준비해 두려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변화는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시험 위주라는 ‘종류’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교육에 관한 한, 시험 위주는 여전히 말 앞에 수레를 놓는 격이다. 교육의 본질은 시험을 바꾸어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험을 바꾸어서 시험 위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심지어 ‘정답 없는 시험’이라는 모순적인 말까지 만들어내며 시험으로 진정한 교육을 이룰 수 있다고 소리 높이지만, 채점이 전제되는 한, 시험에 정답이 없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실감하기 쉽게, 대학입시(수능)와 같이 이해(利害)의 몫이 엄청나게 걸린 시험을 가정해 보자. 그런 시험에서 정답을 겨냥하지 않고 오직 창의적으로 답안을 작성할 엄두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런 시험을 위주로 하는 교육(‘공부’, 훈련)에서 높은 점수의 기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시험이든, 채점에는 이른바 ‘루브릭(rubric)’이 적용되기 마련이다. 체계적인 시험일수록, 답안이 어떨 때 어느 정도의 점수를 줄지 사전에 철저히 계획하기 마련이고, 채점에서는 그 계획을 엄밀하게 적용하게 된다. 설사 ‘채점 기준’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채점자의 머릿속에는 안목이나 ‘전문성’으로라도 들어있기 마련이다. 시험 위주 교육은 정답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답의 구속에 관련하여 특히 두 가지 점을 주목할 만하다.10 하나는, 이제까지 얘기해 온 대로, 정답이 밖으로부터 주입되는 것이어서 학생의 내면을 의미 있게 건드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정답 주입이 내면에 영향을 미치는 바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식이 아닌 정보라도 주입되면 내면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기본적으로 수동적이다. 밖의 힘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런 주입으로 내면(자아)의 변화가 이루어지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학교 수업에서 ‘내재적인 동기’가 키워지지 못하고, 고득점 교과이어도 학생들이 정작 좋아하지는 않는 현실이 주입(시험 위주)의 폐해를 방증한다.
정답의 구속으로 인한 또 다른(사실은 겹치는) 문제는 도덕적이다. 인품에 관련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시험에 대한 답안은 내면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데, 이 점은 바꾸어 말하면 가식(假飾)이 된다는 것이다. 시험 위주로 배워 익히게 되는 것은 정답(채점 기준)을 겨냥한 ‘마음에 없는 말’이 된다. 시험 상황에서(선다형이든 논술형이든 면접형이든) 수험생이 마음에 품은 그대로 답을 할 리 없다. 문제가(또는 출제자나 면접관이) 전제하는 정답에 (미루어 짐작해서라도) 가능한 한 근접하게 붙도록 계산된 답을 하는 게 당연하다. 시험 위주 교육은 바로 그런 ‘계산’과 전략을 전수하는 것이다. 무섭게도, 그런 ‘교육’은 ‘마음에 없는 짓’도 서슴지 말도록 가르치는 일이 된다. ‘반(反)교육’이다.
교육이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아를 끊임없이 쇄신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누구에게든 이 과정은 쇄신을 욕망하게 이끄는 자문(自問)에서 동력을 얻어야 할 것이고, 이어지는 성찰과 더 나아간 질문으로 거듭 윤회해야 할 것이다. 시험 위주로는 이런 조건이 갖추어질 리 없다.
시험 말고 달리 길이 있을까?
이제까지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을 독자가 적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특히 두 가지 예상했어야 하는 반문을 해소하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이 크리라 짐작한다. 하나는 ‘교육에서 시험을 없애자는 말이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험을 바꾸는 방도 외에 달리 길이 있기는 하냐?’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앞으로 더 길게 논의할 수 있길 기대하면서, 그 여지를 살리는 뜻에서 간략한 맺음말로 갈음한다.
우리 학교 교육 현실에서 시험을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시행 금지’ 같은 대처로 시험에 대해 맹목적으로 아득바득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가르치는 사람은 학생들이 어떻게 따라오고 있는지 꾸준히 여러 방도로 확인해야 한다. 시험은 그런 방도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엄격하게 검증받아 온 게 아닐까 싶다. 교사는 시험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다만 교육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교육적으로’라는 말은, 앞에서 시사했듯이, 학생이 시험에서 가식으로 대답하게 속박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며, 아울러 시험으로 학생의 마음을 흔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점수에 ‘큰 배당’을 걸지 말아야 하며, 내재적 동기가 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험은 학생을 규정하고 분류하기 위한 것이기 전에 학생을 이해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호기심을(마음의 동요를) 누를 수 없어서 스스로 공부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가르치는 사람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회(문화)와 제도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
점수에 따른 배당이 크게 걸릴 수밖에 없는 수능 같은 시험은 모두 없애야 하는가?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험을 피할 길이 없다면 거기서 나오는 점수에 결정적인 ‘몫’을 걸지 말아야 한다. 어떤 시험에서 산출된 것이든, 점수는 여러 활용 자료 가운데 하나로 취급해야 한다. 시험 점수만으로, 더욱이 총점만으로 입학이나 배치 같은 결정을 내리면 편파적이고 불공정할 수밖에 없다. 시험 점수는 수험생의 일면만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수험생을 제대로 알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여러 측면의 자료를 갖추고 그 자료들을 종합하여, 교육적으로는 물론 윤리적으로도 온당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이런 전문가로 가장 마땅한 후보는 학생을 직접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만약 아니라면, 선생님을 그렇게 키워 내야 할 것이다.)
시험 위주에서 벗어나려면(곧 교육 그 자체를 위해서는) 학생을 직접 가르치는 사람에게 기대야 한다. 그들의 ‘질(質)’에 기대는 길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 교육받은 증거로 오직 시험 점수만이 믿을만하다고 고집하는 한, 우리 교육은 점수 경쟁에 휘말려 시험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는 훌륭한 스승이어도 ‘훌륭한’ 교사로 여겨질 수 없다. ‘일타강사’라야 훌륭한 교사로 대우받을 것이다(‘공부의 신’이라 칭할 때 ‘공부’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우리는 교육 아닌 교육을 교육이려니 여기며 살게 될 것이다.
교육이 본연을 회복하는 데는 우리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선생님이 필요하다. 그런 선생님을 얻으려면 교육을 통해 키워내야 하고, 아울러(어쩌면 그 이전에) 교사와 학교에 믿음을 두는 풍토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사마저 시험 위주로 뽑고 있고, ‘점수의 칼자루’를 쥔 교사들을 감시하느라 눈에 불을 켜고 있다. 그렇게 우리가 반(反)교육에 젖어 있는 동안에는 미래 진정한 선생님이 될 재목들은 말라 비틀리고, 학교의 교사들은 교육자가 아닌 평가 기술자 구실에 매여야 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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