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2-12-14 17:34
[기획칼럼 – ‘2028 대입제도’]
이 기획칼럼은 ‘2028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을 다루며, 격주로 연재합니다. 구태에 갇힌 ‘개편’ 담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공론의 길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교육을 ‘술책의 게임’으로 전락시켜 온 대입제도를 되짚으며, 학교와 교육의 의미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 [요약]
‘입시 위주 교육’이 학생들에게 실지로 어떤 교육이 되는지 간략히 정리했다. 지난 글에서 그런 교육의 문제에 대해 운을 뗀 데 이은 부연이다. 입시 위주 교육에서는 대학 진학 엄두를 내기 어려운 학생들을 배려할 수 없으며, ‘중하위권’ 학생들을 버리고, 상위권 학생들마저 ‘엘리트 싸가지’로 크도록 방치할 수밖에 없다고 서술했다. 그 결과로 우리 사회는 구성원의 정체성과 연대 의식을 지탱하지 못하고, 부서지고 흩어지리라 비관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역사를 되돌아보고 성찰해야 하리라고 논의를 넘겨두었다. |
우리나라 고등학생은 공부 시간 대부분을 시험 대비에 들이고 있다.1 고등학생들이 모두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게으른 학생도 있을 터이고 ‘노는’ 학생도 있을 터이다. 다만, ‘공부한다’고 하면 그것은 필경 시험 준비일 것이다. 매 학기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같은 ‘내신 평가’를 위한 시험이나 대입을 위한 수능을 준비하는 게 학교 교육을 받는 과업의 중핵이다.
시험 준비라는 것은 대체로 기출문제나 예상 문제를 풀거나 그것들을 풀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풀어야 할 문제들은 다양한 참고서나 기출 문제집에 있고, 특히 수능 대비를 위해서라면 EBS ‘수능 연계’ 교재에 들어있는 것들을 빼놓을 수 없다. 시험공부 외에 다른 ‘활동’을 한다면(수행평가까지 포함해서), 필경 학생부에 기록될 ‘스펙’ 또는 ‘세특’(학생부의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 항목)을 염두에 두는 것들이다. 요컨대, 공부든 활동이든, 대입 준비가 학교 교육과 생활의 대종이다.
진학하지 않을 학생들, 교육 가시권 밖으로 밀려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이야기에 인이 박였을 것이다. 읽으면서 누구나 다 아는 현실을 새삼스럽게 꺼낸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물론 새삼스럽지만, ‘입시 위주 교육’ 현실에 대해서는 조금 더 들여다볼 이유가 있다. 우선, ‘모든 학생’이 대입에 매달린다는 흔한 말부터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대입 지향’의 대세에서 소외되어 있다. 고등학교는 으레 대입 준비차 다니는 학교라고 전제하지만, 대입을 당연한 선택지로 여기지 못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
최근 몇 년을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비율은 대략 70%이다. 안전하게 추측해서 20~30% 학생은 대학 진학을 준비하지 않으리라(못 하리라) 볼 수 있다.2 물론 이 경우에 드는 학생들도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대입 준비를 할지 모른다. 70%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단지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일 뿐일 수 있다. 그렇지만 준비했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준비는 대학에 결국 진학한 학생들과 비교할 때 성질이 다를 것이다. 성적도 나쁘지 않고, 가정이나 주변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기본이라 여기고, 가능한 한 ‘좋은’ 대학에 진학하도록 투자를 아끼지 않는 여건에서, 그들의 형편은 멀리 있을 것이다. ‘배경’ 원인이든 개인적인 원인이든, 그들은 대입에 매달릴 형편이 아닌 상황에서, 대입을 준비했더라도, 준비 태세는 막연했을 것이다.
대학 진학이란 선택지가 현실적이지 않은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다. 학교 수업이나 활동에 참여할 기초도 없고 동기도 없다. 그렇다고 이 학생들에게 애초에 뜻이나 꿈이 없고 흥미가 없었던 게 결코 아니다. 그들도 불안한 가운데 미래로 가는 길이 확연해지길 바라고 모색한다. 미래로의 가이드를 누구보다도 원할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대입 컨설팅’에 능한 ‘진로상담’ 교사는 있을지언정, 그들을 위한 가이드는 없다. ‘직업반’이란 것을 두어, ‘현장’에 나가도록 해줄 테니 직접 가서 길을 찾아보라고 하는 정도가 주요 정책이다.
고등학교가 대학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풍토에서는, 대입 경로(일반고)에만 정신 팔려, 고등학교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직업교육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 직업교육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대입 정책은 그것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직업교육에 미칠 영향을 감안해서 대입제도를 고친다는 건 우리나라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는 특성화(‘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이유 자체가 직업교육을 받으려는 것과 무관할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마저도 대입에 관련해서만 이해하려 든다. 이를테면, 졸업 후에 취업하려고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 게 아니라, 일반고에 진학할 수 없어서(대입 경쟁에서 밀려서)라고 지레짐작하기도 하고, 특성화고 진학을 대학 진학 전략의 하나로 단정하기까지 한다.3 특성화고 졸업생만을 위한 특별전형을 노리거나 내신이 좋아질(작은 연못에서 큰 개구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노리는 전략이라 예단하는 것이다.
직업교육이 실속을 갖추도록 정책을 추구한다면 대입 경쟁이나 대학 서열화를 완화해 갈 수도 있을 테지만,4 입시 위주 풍토에서는 그런 깊이의 정책은 싹 자체가 틀 수 없다. 직업교육을 의식하고 특성화고를 배려하는 대입 정책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특별전형의 문을 빼꼼 열어두는 수준에 그친다. 이런 유의 정책은 사실 직업교육의 본령을 강화하기보다 오히려 약화시키고 왜곡하는 것이다. 특성화고 졸업생을 위한 대입 기회를 만든다면, ‘특별’ 통로로 입학해서 일반고 학생들을 위한 고등교육에 빌붙도록 만들 일이 아니다. 특성화고 졸업생이 ‘일반’ 전형으로 입학해서 고등 직업교육을 정곡으로 받게 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5 이런 측면의 가능성은 고등학교 과정을 대입에 붙여서만 논의하는 맥락에서 의제로도 떠오르지 못한다. 직업교육과 특성화고 학생은 ‘없는 것처럼’ 취급된다.
‘중하위권’ 학생, 들러리로 겉돌며 ‘○포자’ 낙인찍혀
대학에 진학하는 70% 정도의 학생을 두고 보더라도, 그들의 대입 준비(즉, 학교 교육을 겪는) 양상은 한결같지 않다. 학생부의 ‘활동’ 기록에 신경 쓸 이유를 가진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기 마련이다. 기록의 세부 내용을 중시하는 학생부종합전형은 대체로 이른바 상위권 대학이 채택하기 때문이다. 그런 대학을 겨냥할 형편이 안되는 학생은 학생부 기록에 크게 연연할 이유가 없다. 이런 학생들이어도 이론상으로는 활동이 아닌 ‘교과’ 시험에는 신경 쓸 여지가 있다. ‘종합전형’은 포기하더라도 학생부교과전형의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교과 기회에 대해서도 많은 학생은 곧 비관하게 된다.
학생부 전형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려는 전략은 부담이 너무 크다고 흔히 이야기한다. 3년 내내 내신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번의 시험이라도 망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다고 여기는 게 보통이다. 이런 통념에서 보면, 학생부교과전형을 노리는 전략에 낙관할 수 있는 학생은 상대적으로 소수일 수밖에 없다. 성적은 낮아도 중상위권은 되어야 할 것이고, 나름의 수준에서 3년 동안 시험을 망쳤던 때가 거의 없었다고 여길 수 있는 학생들이나 교과 전형을 노릴 만하다고 계산할 텐데, 그런 학생이 많을 수는 없는 것이다. 고등학생 절대다수가 내신이 부족하다거나 ‘내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내신을 포기하고 수능에 ‘올인’하겠다고 전략을 수정한다. 수능에서 선택할 과목들 외 다른 과목들을 버리기 시작하고, 극단적으로는(가정에서도 지원해줄 수 있으면), 학교를 버리고 수능 대비에 유리하다는 학원으로 ‘교육’의 장을 옮기기도 한다. 수업일수를 채우기(졸업하기) 위해 학교에 나가지만, 수업 시간에는 종종 잔다.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과목 수업에서 자고, 학원에서 또렷이 수업받기 위해 학교에서는 자 둔다.
내신을 포기하고 수능으로 전략을 바꾸는 학생이라면 공부깨나 하는 학생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누적된 ‘학습 결손’을 채우는 게 막막한 학생들도 수능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여기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은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대체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게 된다. 바야흐로 대입 경쟁의 전선에 들어선다고 적어도 초기에는 긴장하게 되고, 이제부터는 열심히 공부하리라 마음먹게 된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기대하고 그런 변화를 응원한다. 이런 세태 속에서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은 어쩌면 태어나서 가장 열심히 첫 중간고사를 준비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대부분 학생에게는 실망이기 십상이다. 중학교 때까지 받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성적표를 받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학생들은 나름대로 모두 열심히 했기(그래서 전체 학생들의 성적이 평행으로 움직였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고등학교 단계에 이르면(‘기초’에서의 차이가 이미 어느 정도 굳어져 있어서) 하나의 코호트 안에서 성적 순위가 크게 바뀌지도 않는다. 그렇게 실망하게 되는 학생들도 또한 내신을 포기하고 수능을 겨냥하는 대열에 합류한다.
이렇게 ‘수능파’가 된 학생들에게, 학교는 기댈 곳이 되지 못한다. 학생들은 수능 문제 풀이에 바로 돌입할 토대를 갖추지 못한 상태이지만, 학교는 그 토대를 갖출 때까지 기다려 줄 수도 없고, 그런 토대를 뒤늦게라도 마련해 줄 여유도 없다. 학교가 본디 모든 학생을 똑같게 취급하는 관성을 지니기도 했지만, 특히 고등학교는 수능 전쟁을 향한 문제 풀이 훈련에 끊임없이 바빠야 할 것으로 전제된다. 이런 전제에서 벗어나는 고등학교가 있다면 필경 스캔들의 대상이 될 것이다. 고등학교라면 모름지기 한눈팔지 말고 문제 풀이를 이어가야 하고, 기초가 부족한 학생들은 따라가든 낙오하든 ‘알아서’ 해야 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뒤처져 있던 학생들은 십중팔구 그렇게 ‘진로’의 길을 잃게 된다. 내신과 수능 어디에서도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이런 학생들을 흔히 무슨 무슨 ‘포자’(포기자)라고 지칭하지만, 그들에게는 스스로 포기할 ‘주도성’의 여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학교가(정책이) 그들을 버렸을 뿐이다.
‘상위권’ 학생, 떠받들리며 타락하고 피폐해져
이제까지 이야기를 놓고 보면, 고등학교는 결국 상위권 대학 진학을 노릴 수 있는 학생들만 배려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우수한’ 학생들은 좋은 교육을 받는 셈인가? 그리고 졸업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인가? 짐작하겠지만, 물론 아니다. 우리가 무심히 흘리고 있지만, 입시 위주 교육의 병폐는 어쩌면 그들에게 더욱 고스란히 가해지고 있을지 모른다.
2023학년도 수능의 한 만점자는 ‘비결’을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6 다른 학생들과 다른 게 있다면 “문제집을 많이 푼 정도였다.” “틀린 문제를 반복해서 풀었고… 새로운 유형, 다양한 문제를 찾아서 풀었다.” 또 다른 만점자는, “굳이 말하자면 꾸준히 공부한 것 정도다. 고교 3년 내내 자습실에 거의 빠지지 않고 나왔다.” “고교 입학 후에는 영어학원을 조금 다녔을 뿐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 30분까지 학교에 머물렀다. … 학교 수업과 방과후학교, 야간자습에 충실했다.”
물론 수능 만점이나 그 가까이 받을 정도의 학생들에게도 노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공부 아닌 다른 활동에도 꽤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수한 학생들이 오직 공부에 들인 노력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비중이고, 그 대종이 문제 푸는 연습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모든 욕구와 기회를 희생시키고 오직 시험 대비에 들인 노력의 결과로 그들은 누구나 선망하는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보람을 느낄 것이고, 교육을 잘 받았다고 칭송되기도 할 것이다. 대학에서 이어질 학업에 필요한 기초도 탄탄하게 다졌을지 모른다.7 한편, 도덕성이나 인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은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 전통적으로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학업 성적이 뛰어나고 품행이 방정하며 타의 모범이 되므로” 표창되어 왔다. 실지로 일상에서 우리는 모범이 되는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본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사례도 만만찮고, 그들의 속마음은 보기와 다를지 모른다.
대학 사회에서 동료 학생들을 벌레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지균충’, ‘기균충’, ‘수시충’, ‘편입충’, ‘분캠충’ 같은 것이 그 ‘벌레’ 이름들이다. 제법 알려져 있듯이, 지역균형전형, 기회균등전형, 수시전형, 편입시험 등을 거쳐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지방’ 분교에 재학하는 학생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수능 점수로 일반전형을 통과하지 않았다면(또는, 낮은 커트라인을 통과한 경우라면), 사람(학생)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행태는 특히 소위 명문대에서 주로 생겨난다. 밖으로 보도되기까지 했듯이, 작년 고려대학교(서울)에서는 고려대 세종캠퍼스의 한 학생이 대학 총학생회 활동을 하게 되는 데 대해 격한 반발이 일었었다. “고려대 학생 흉내 낸다.” “분수에 맞게 행동하라”는 식의 비난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들썩였다고 한다. 분캠충이 감히 고려대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려 드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학생이 그런 욕지거리에 가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차별하고 멸시하는 데서 부당함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행태들이었다.
대학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등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듣는다. 이를테면, 학교에는 교사들이 ‘엘리트 싸가지’라고 부르는 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사교육을 많이 받으면서 학교 수업은 ‘우습고’ 교사들의 수준은 ‘같잖[아]’” 하는 학생이며, “서울대 갈 아이, 학교를 빛낼 아이”라서, 약한 학생들을 ‘벌레’ 보듯 따돌려도 학교가 나서서 엄호하는 학생이다. 게다가 부모들도 ‘영향력’이 있어서 교사들이 어쩌지 못하는 학생들이다.8 소위 ‘일진’이 싸움만 잘하고 공부에는 담쌓은 아이들이라는 말은 옛말이라고도 한다. 점수가 모든 가치를 잡아먹는 현실에서, 비행에 대해서마저 그들은 가정의 비호를 받으며, 학교에서도 견제되지 않고 심지어 받들리기까지 한다는 이야기다.
입시 위주 교육이 양성한 ‘엘리트’, 사회를 좀먹어
엘리트 싸가지는 본디 그런 아이들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가 교육을 통해서, 특히 학교 교육을 통해서 그런 엘리트를 양성하고 있다. 수능에서 뛰어난 점수를 얻어내고 학생부의 스펙까지 ‘넘사벽’으로 갖추어 내는 성과는 막대한 노력의 소산이다. 그 노력의 과정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만큼 지난했던 것일 터이다. 그런 노력으로 얻어낸 고득점의 위업(대입 성공)을 두고 학생들이 배타적이고도 도덕적인 우위와 권리를 주장하는 데는 충분히 ‘심리적’ 일리가 있다. “어떻게 얻어낸 것인데, 나만큼 노력하지도 않은 자들이 그 기회를 공유하려고 넘보느냐”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성적 못 내는(‘대입 실패자’) 급우들을 ‘찌질하다’고 다른 ‘등급’으로 왕따를 시키고 멸시하게 될 수 있다. 그들 눈에는 실패하는 학생들이 능력 없을 뿐만 아니라 게으르고 부도덕한 학생들로 보일 것이다.
엘리트 싸가지들은 성취에 따라오는 모든 권리와 이익을 자신의 고유한 능력과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라 여기게 된다. 그것들에 대해 자신은 불가침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그것들을 마음껏 누리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정당하다고 여긴다. 이런 윤리의식과 인생관을 지니게 되는 학생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훗날(‘고시’ 같은 제도들이 유지된다면) 거듭되는 시험을 통과해서(그 과정에서 자신의 지적 도덕적 우월감을 더욱 완고하게 키워서) 우리 사회를 다스리는 지위에 오르게도 될 것이다. 이런 엘리트들에게서 겸손이나 관용 또는 배려의 미덕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사실 대입 위주 상황에서 성공은 개인 고유의 능력과 노력으로만 얻어지는 게 아니다. 태어나면서 다르기 마련인 생물학적 차이(성, 건강, 외모, 장애 등)를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부모를 만나 어떤 지역에서 어떤 친구들과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미래를 꿈꾸며 자라게 되는지, 개인에게 선택할 여지는 없다. 선천적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이 직접 발휘한 인내와 노력에 대해서는,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근성이나 생각, 습관 등도 지능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과 엉켜 있다. 흔히 유전과 환경을 분리해서 인간의 행위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 여겨왔지만,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최근 연구들은 그런 구분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거듭 확인하고 있다.9
설사 오롯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점수와 스펙을 갖추어 ‘능력’을 입증했다고 하더라도, 그 능력으로 얻게 되는 보상에 대해 도덕적으로까지 향유 자격을 주장할 수는 없다. 그 능력이란 것은 마침 ‘운 좋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쓸모 있다’고’ 여겨지게 됨으로써 ‘능력’이라고 점지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돈이나 지위 등으로 보상받는 개인의 능력 가운데 시대나 사회의 우연(contingencies) 덕을 보지 않는 것은 없다. 능력에 대한 보상의 크기는 그것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사회의 관습이나 제도가 그 정도 가치로 용인하고 값을 매겨주는 것일 뿐이다. 10 누구든 능력을 인정받아 보상을 얻게 된다면, 그 사태의 우연성을 깨닫고 겸손해야 할 것이고, 보상의 향유가 공동선에 어그러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서, 우리나라 수능 만점자가 핀란드에 태어났어도 같은 성취를 이루고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지 상상해보자. 그런 학생은 핀란드에서도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명문대에 입학한 프리미엄이 심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우리나라에서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 원초적으로 상상해본다면, 수렵 채취의 생활 양식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부족에서 태어났다면 그들의 ‘만점’ 능력은 어떤 대우를 받을까?
수능 만점이나 명문대 입학의 성취가 물론 사소한 게 아니지만, 그런 성취에 자만하고 그런 성취를 이루지 못한 학생들을 경멸해도 되는 도덕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게 우월감에 도취한 우수 학생들이 생겨나는 만큼, 입시 위주 교육은 이른바 엘리트들마저 타락시키고 있고, 우리 사회 전체 구성원의 연대와 협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소통이니 통합이니 상생이니 하는 말들이 비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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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제도가 묵인하고 조장하기까지 해 온 우리 학교 교육의 실상을 조금 더 세밀하게 그려보았다. 묘사한 대로, 학교 교육이 타락해 온 데는 그런 흐름을 타락으로 여기지 못할 만큼 둔감해지는 우리 통념의 변화가 동반했다. 그 변화는 정부가 정책으로 이끈 점도 있고, 세속의 인식과 기대에 부화뇌동하며 부추긴 점도 있다. 앞선 글들에서 누누이 얘기했듯이, 이런 양상은 2028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을 주도하고 있는 현재 정부에서도 달라진 게 없다.
교육 정책이 사회적으로 용납될 때 비로소 도입된다고 보면, 지난 수십 년 사이 빈번했던 ‘교육개혁’들과 그 안에 담겼던 ‘대입제도 개편안’들은 우리 사회의 통념 변화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그런 통념을 고착시켜 왔다. 입시 위주 교육을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었고, 학교를 사회 구성원들의 ‘등급 변별 기계’로 바꾸어 놓았으며,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안녕과 복지를 보이지 않게 그리고 크게 훼손해왔을 터이다. 이 역사를 들여다보고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Source URL: https://21erick.org/column/9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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