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lowalk | 2019-11-06 13:54
1. 정답, 복수의 해답 그리고 열린 답
지난 번 교바사 칼럼1을 보고 평소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필자도 기초 기본 생활교양 공부를 하는 초중학교에서는 정답이 있는 공부를 ‘주로’ 하고, 분야별 진로별로 방향과 초점이 다른 심화 특수 전문 직업 공부로 접어드는 고교나 대학에 가서 점차 복수의 해답이 있는 공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성인의 본격적인 사회생활에서는 열린 물음과 열린 대답이 필요하다. 이것을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과정, 교과목으로 설명하면 더 실감이 날 것 같다.
인간의 생애발달주기로 볼 때 유아기 교육은 ‘건강한 생활과 즐거운 생활(건생과 즐생)’에서 출발한다. 그러다 잔소리로 들리는 생활지도를 통해 ‘바른 생활’로 틀과 자세가 잡히면, 그 다음부터 학교공부는 ‘슬기로운 생활(슬생)’에 집중한다. 슬생은 문이과 융합공부로 사회, 자연, 사물과 사건 속에서 슬기를 배우는 것이다. 사람은 슬생에서 배운 슬기로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간다. 아동 청소년기는 기억력이 좋고 그야말로 머리가 잘 돌아갈 때이므로 슬생 중에서도 엄밀하고 까다로운 수학 과학 기술 공학을 더 잘 배울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경험이 쌓이고 노안老眼이 오면 해당 분야를 넘어 종합하고 절충하여 사고하는 만물박사, 종합철학자가 되어 간다. 즉 젊은 때는 이과공부가 나이 들어서는 문과공부가 더 자연스럽다. 송해 선생이 ‘전국노래자랑’을 외치면 노년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건생과 즐생으로 되돌아가고 인생을 마무리한다.
강조할 바는, 어릴 때 정답을 배우는 것은 인간 형성상 매우 중요하다. 아동과 청소년기의 인지와 정서 및 도덕성 발달에서 ‘정직’을 배우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정답이 정직을 가르친다고 단언하기 어렵지만 그 상관도는 높을 것이다. 초중등학교에서 정답은 주로 수학, 과학, 실과(기술) 등에서 찾아질 수 있다. 특히 가장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며 정답이 있는 수학이 대표적이다. 수학 자체는 거짓이 끼어들 여지가 없지만 법학 정치학 사회학 등에는 주관적 반응과 이해관계가 개입되기 쉽다. 물론 수학의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하는 방법도 3백여 개나 있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수학 등에는 물음에 따라 정답과 해답이 있다. 배운 바로는 수학에서는 항상 올바른 질문 속에 반드시 올바른 답이 숨어 있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점차 수학이 더 필요함에도 대입시의 교차지원 등으로 수학을 점점 더 멀리하는 학교와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수학이 얼마나 실용적인 공부인가를 학교에서 맛보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학생들의 세상 살아갈 능력과 기회도 줄어든다. 무슨 말인가?
2. 최고지식인들이 수학을 배운 서구와 이를 외면한 동양의 차이
주지하듯이 서양은 고대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산술과 기하학과 천문학을 처음부터 가르쳤다. 아카데미아 교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는 구호를 새겼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엄밀한 공부를 요구했고 추구했다. 이처럼 서양의 최고지식인들은 지난 2500여 년간 수학을 가르치고 배워왔다. 중세시대에도 서양에서는 ‘7자유과’라는 이름으로 대학 예과에서는 ‘문법 수사학 논리학’ 등 마음의 질서를 공부하는 문과 공부인 3학을 가르쳤고, 더 높은 본과에서는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 이과 공부인 4과를 가르쳤다. 그리고 사회로 나가기 직전에는 당대 지배층에게 필요한 공부였던 신학, 법학, 문학 등을 가르쳤다. 이것들은 오늘날 법학, 경영학, 의학, 공학 등 실용적 전문대학원(professional school)의 중세 판이었다. 당시는 문과 공부가 기본이자 최고봉이었지만 이과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렇게 배운 자유인인 소수 지배층은 노동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말하고 글을 지어 내보내면서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초점은 서구인들이 수학, 과학, 기술공학 등의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과 공부는 상대적으로 정답과 더 맞는 최선답도 있고, 답이 틀렸는지도 분명하다. 우길 수 없는 정직을 가르친다. 이들 공부에서는 논거와 증거를 대어 논리적 순서와 절차를 거쳐서 증명해내야 하므로 매우 논리절차적(algorithm)이다. 이런 역사를 거치면서 서구인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뉴튼의 만유인력 등 과학혁명을 일으켰다. 이로써 일반인들의 마음속에 실험 관찰 조사를 거치는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를 깊이 새겨 넣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거짓이 적다. 잠시 틀릴 수도 있고, 일부를 속일 수는 있어도 사실과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 대항해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고 지동설이 천동설을 이겼지 않은가? 그런 그들이기에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시민혁명 산업혁명을 거쳐 사람 살만한 자유민주정을 꽃피웠고, 오늘날 디지털혁명을 선도하고 있다.
반면, 동양의 공자학당은 그렇지 않았다. 최고지식인들은 수학과 과학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것들은 문과(대과) 과거 시험과목도 아니었다. 이들의 지식과 세계관은 왕조 신분제 가부장 사회에서 지배층의 다스림과 피지배층의 순응을 위주로 사고하고 논쟁하면서 형성되었고, 그 결과를 후대에 전수하였다. 즉 어문을 기반으로 한 문과 공부가 주된 것이었다. 인격을 닦고 학문을 연마해 관료로 선발되어 공복으로 섬긴 것은 잘한 것이다. 다만 최고지식인들 사이에 실학적‧경험적‧실증적‧탐구적 전통이 소홀했다는 점이다.
좀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문과 공부는 인간(흔히 지배층, 지식층)의 건전한 상식과 중요한 경험을 체계화한 것이다! 가령 지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120년 전에는 자연연령과 정신연령의 비율인 지능지수로 나타냈고, 그 후에도 일반과 특수의 2요인으로, 3차원이 교차하는 120개의 요소로, 30년 전부터 누구는 분석‧종합‧실행 혹은 입법‧사법‧행정의 3원지능론을, 누구는 재능으로서 8-9개의 다중지능론을 주장해왔다. 최근에도 성공, 사회정서, 감성 등 수식어를 붙여 온갖 지능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음 사람은 지능에 대해 또 뭐라고 할 것인가? 어느 것도 틀리지 않았다.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다. 누가 그것을 정하는가?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고, 시대와 그 요구에 따라 다르게 응할 수밖에 없다. 조국사태는 시비를 계속할 수 있겠지만 황우석의 과학연구는 진위가 가려진다. 즉 언젠가는 검증과 반증이 가능한 이과 공부에서는 그럴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9×9=81이고 F=ma이며 E=mc2이다.
3. 이과 공부보다 문과 공부에 치중하는 우리나라 학교교육
필자가 2015개정 교육과정 기준 문서에서 초등 3학년부터 고교 1학년까지 공통 교육과정의 시간배당을 계산해봤더니 국어 외국어 사회와 같은 말글을 주로 가르치는 문과 공부 시간이 47%이고, 수학 과학 기술 등 이과공부 시간은 30%에 불과하며, 나머지 23%는 체육과 예술 시간이다. 이전 교육과정도 유사했으니 이렇게 계속된다면 우리나라 교육은 개인이나 국가 사회에 재변이 된다. 과학혁명, 산업혁명, 디지털혁명의 시대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시간비중의 50% 정도는 이과공부를 시키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다시 수학 공부로 돌아가자. 근대 서양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면서 우리나라는 수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2500년을 굶었으니 허겁지겁 먹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래서 공식을 대입하여 문제‘풀이’ 방식으로 수학을 가르친다. 가령 초등학교 6학년 수학교과서를 보면 [인구밀도=인구수/㎢]로 공식을 먼저 보여주고, 이를 응용해서 문제‘풀이연습’을 시킨다. 기실 이는 단위 공간(평면 혹은 입체) 속에 개체가 얼마나 빽빽하게 혹은 성글게 들어 있는가의 밀도나 농도의 문제일 것이다. 나눗셈을 배운 상당수 학생은 끈질기게 ‘궁리’하면 만들어 낼 수 있는 공식임에도, 미리 알려주고 틀리지 않는 연습을 많이 시킨다. 현상이나 주변을 보고 문제를 발굴하고 만들어 내는 절차를 가르치지 않고 정답을 내라는 것은 ‘요령’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100분 안에 30문항을 푸는 식의 수능수학을 언제까지 강요할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정직한 공부의 으뜸인 수학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예비교사들의 90%가 문과 출신이라는 교대가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고교 때부터 벌써 수학 과학 기술 공학을 멀리하던 교사가 초등학생들의 롤 모델이 되는 것은 개인이나 국가의 장래에 매우 좋지 않다. 당장 교‧사대 시험에서 고교 이과 출신에게 가산점을 주어 교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이과가 없는 융합교육이라고 하지만 일반고에 가보면 장차 경제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여학생의 절반 이상이 문과다. 고교에는 사회교사가 6명이면 과학교사는 4명밖에 안 된다. 이공계 대학교수들도 학생들이 고교 때 수학 물리 화학 등 바탕학습을 제대로 안 해서 1-2학년 과목만 듣다가 졸업하고 실업자가 되는 경우가 늘어난다고 한탄한다. 어느 장기인력수요추계에서도 문과 출신이 더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다. 실업자들은 모교 유리창에 벽돌을 던진다.
4. 문과 공부에 치중한 대가
문과 공부는 그 시대와 사회의 건전한 상식과 경험을 교리, 이념, 법, 제도, 정책을 거치면서 체계화한 것이다. 여기에는 정답과 해답이 없고, 더욱 심각한 것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정답과 해답이 다르다는 점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이 문과 공부의 특징이다. 남한에서 사람 사는 도리와 북한에서 그것은 판이하게 다르다. 문과 공부가 만들어내는 이념과 체제,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의 질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지도층이 이념과 체제, 법과 제도를 바꾸면 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운명과 온 생애가 달라진다. 이는 근본적으로 믿기 어려운 인간의 가변성, 불안정성,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맹목성 등에 근거한다. 그러니 깨인 시민들은 사람답게 사는 이치와 선의가 작동하도록 그들의 행태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문과 공부를 많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공부한다는 것인가? 이는 살아가면서 경험으로 알게 될 것을 미리 당겨서 공부하는 면이 많다. 심지어 세뇌와 강요를 하는 면도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 등의 정치 사회 세뇌교육을 보라. 이들 나라에서 개인은 이념의 소모품이다. 세뇌를 교육으로 포장‧강요하기보다 차라리 자습(자기주도학습)과 운동과 휴식이 학생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이념 편향성 교육을 노골적으로 자행하는 초중등학교 교사들도 있다고 보도된다. 큰일이다.
우리 헌법 31조 4항의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강조에 이어, 국가공무원법 제65조는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공무원의 정치운동을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하물며 미성년자를 교육하는 교원은 교육기본법 제6조(교육의 중립성) “①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정치적·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또한 아동복지법 제17조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유해한 교육내용을 전달하여 “5. 아동의 정신건강 및 발달에 해를 끼치는 정서적 학대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초중등학교 교실에서 누구나 잘 볼 수 있는 곳에 큼지막하게 반드시 붙여 둘 만한 법규이다.
사실 문과 공부도 더 멀리 더 넓게 보면 더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공통적인 최선의 답이 있다. 가령 19세기까지 동양사, 20세기부터는 세계사, 세계 정세의 발전 속에서 우리 역사를 보면 상대적 해석과 이론(異論)의 여지는 현저히 줄어든다. 사람 사는 이치가 뻔히 보이는 데에도 괜한 논란을 불러오는 것이 오늘날 사회과나 한국 근현대사 공부이다. 자신과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 때문에 단견을 고집하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후대를 자신들 편에 묶어 두려고 한다. 시장에서도 종종 저울추를 속이지만 역사적으로도 권력과 금력을 좇아 곡학아세(曲學阿世), 교언영색(巧言令色),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일삼은 간신배나 탐관오리들은 주로 문과(?) 출신들이었다.
5. 문이과 융합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이과 공부시간을 더 늘리자
이제 실질적 대안을 찾아보자. 최근 강조되는 문이과 융합교육은 올바른 방향이다. 특히 고교에서 문과생이라고 하여 이과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고, 이과생이라고 하여도 문과 공부를 외면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과 공부에서 문과 공부로는 가역적이나 그 역은 비가역적인 편이다.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학교에서 이과 공부의 비중을 더 늘려야 한다. 어느 쪽을 편중하자는 것이 아니라 적정화하는 방식으로 비중과 정도의 관점에서 이과 공부를 늘리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다수 학생들은 대학까지 이과 공부를 더 비중 있게 공부하여 시장과 사회에 나가게 해야 실업자도 대폭 줄어든다. 기술 있는 사람이 굶어죽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학생은 누구나 진로에 따라 수준 범위 심도는 좀 달라도 고교 3년간 수학 과학 등을 배우도록 해야 디지털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 미래에는 이과 쪽 기회의 문은 더 열리고 문과 쪽은 점점 더 좁은 문이 될 것이다. 수학, 과학, 기술공학 공부의 비중을 더 늘리되, 산업사회에 중요했던 어렵고 불필요한 수학은 더 줄이고 AI수학은 더 늘려야 하며, 내연기관 공부는 더 줄이고 2차 전지 공부는 더 늘려야 할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학교에서는 해당 분야 책 몇 권 읽어 알 수 있는 문과 공부는 상대적으로 더 줄여야 한다. 심지어 학교에서 바른생활, 정직한 생활 태도를 많이 배우더라도, 본래 이기적인 인간 본성을 따라 스스로 세상사는 이치를 찾아 나선다. 눈치도 매우 빠르다. 거의 가르칠 필요도 없다. 누가 가르쳐서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이 되는가? 중세에 흑사병으로 죽은 성직자의 빈자리를 차지한 질 낮은 성직자들 중에 사기꾼 수탈자 압제자가 얼마나 많았는가? 학교공부가 부족해서 그렇다기보다, 사회의 법규를 분명히 하고 준법과 위‧탈‧불‧편법에 대해 신상필벌을 분명히 하면 사람들의 행동과 사회의 질서는 잡힌다.
대항해시대 지리상의 발견과 시민혁명을 거쳤고, 세계화를 거치면서 지능정보기기의 도움을 받는데 사회 국어 외국어 공부는 더 적정화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사람답게 기르고 나라를 나라답게 가꾸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문과 공부는 사람 사는 도리를 정답과 최선의 답으로 가르치고 사회 법규와 국가 및 세계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공유하는데 꼭 필요하다.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에서 20세기 중반 유럽의 주변으로 주저 않은 영국에 대해 C. P. Snow는 그 원인을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공계 공부를 소홀히 하고 문과 공부에 치중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시대에 맞지 않는 치우침은 조선선비의 문약(文弱)을 떠올리게 한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에 이은 디지털혁명기에 학교에서는 바탕학습 없이는 책을 읽어도 알 수 없는 이과 공부를 더 비중 있게 가르쳐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과 공부는 정답과 해답을 주고 덤으로 정직과 살아갈 능력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 된다.
그러므로 초중등학교 문이과 교과목과 수업시수, 대학입시, 교사양성과 임용, 대학의 학과와 전공, 공무원 시험이나 입사시험 등에서 지능정보사회에 부응하는 총체적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학생들의 장래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차기 교육과정 개정에서는 문이과 공부의 불균형은 반드시 교정해야 할 시대적 과업이라고 본다. 이에 대한 독자님들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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