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2-07-06 15:15
3년 넘게 교바사 저널에 칼럼을 집필해주신 박제원 선생님께서 당분간 재충전을 위한 휴식을 갖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동안 선생님의 칼럼이 휴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독자분들께서 응원하시는 만큼, 박제원 선생님께서 재충전을 통해 더욱 멋진 글과 함께 돌아오시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동안 의미 있는 멋진 내용의 칼럼을 집필해주신 데에 편집자이자 독자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Ⅰ.서론
교육은 학생들이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뭔가 배우도록 가르치는 일이고, 이런 의미에서 가르치는 일은 학생들의 환대와 수용이 없으면 완성될 수 없다. 즉 교육은 두 당사자, 교사와 학생 간의 파트너쉽이 전제되어야만 배움이 실제로 일어난다. 그래서 광주교대 박남기 교수는 “가르침은 교수자와 학습자의 만남이다.”라고 정의한다. 그것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각자 가진 재능과 경험 등을 서로 나누는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 가르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 학생들이 타자에게 자신의 몫을 잘 나누도록 하게 하는 의도적인 작업이며 그러다 보니, 자기 본위적이고 경쟁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르침은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작업으로 보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교사들에게 쉬운 문제인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실제는 매우 다르다. 독일의 교육학자 클라우스 몰렌하우어도 그의 저서 《가르치기 힘든 시대의 교육》에서 “오늘날 공교육 교사들은 가르치기 힘든 시대를 살아간다.”라고 했다. 즉 교사는 학생과 좋은 만남을 갖고 각자의 것을 서로 나누는 행위가 배움의 과정에서 나타나기를 기대하지만 녹녹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교사에게 가르치는 일은 왜 이렇게 점차 힘들어지는가?” 심지어 “현실에서 공교육 교사의 권위는 점점 추락하고 있으며, 학교 교육과 학교 밖 교육 사이의 경계도 희미해지고 있고, 이러다 보니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전처럼 자명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다양하고 경쟁하는 여러 교육 활동 속에서 교사들은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가르침 등 교육적 실천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마저도 확신하지 못하거나 자책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교사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가르침이 압박으로 변질되는 현실에서 벗어나 가르침의 본질인 만남과 나눔의 미덕을 즐기며 이를 사회 곳곳으로 퍼뜨릴 수 있는가?”
Ⅱ.본론
기술적인 최고의 교수법은 존재할 수 없다
교사가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 답은 무척 많고 다양하겠지만 “교육에 대해 끝없이 성찰해야 한다.”라는 점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으리라 본다. 특히 교사에게 수업은 필수적인 활동이므로 “수업과 관련된 성찰이 중요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따라서 교사는 무엇보다도 수업을 수업시간표로 정해진 일련의 절차를 따르는 기계적인 교육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즉 교사는 수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계획된 교육과정만이 아니라 학생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교수 방법, 평가, 학생의 특성 등 다양한 요소를 성찰함으로써 계획한 내용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결정을 수시로 내려야 한다. 또한 교수법은 실제로 다양하다. ‘거꾸로 학습’, ‘하브루타 교육법’, ‘교육과정- 수업- 평가-기록의 일체화’, ‘주제 중심 통합수업’, ‘백워드 설계’, ‘직접 교수법’, ‘문제 기반 학습’, ‘인지주의(뇌 과학)학습’ 등 여러 방식이 있다. 그러므로 교사의 성찰을 전제하면 교사는 모든 상황에 적합한 단일한 교수 방법에 집착하거나 유행을 추구하기보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배움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사뭇 다르다. 특정한 교수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교육의 목적인 자아실현을 이루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특정한 교수법이 유행하면 기존에 통용되던 교수법들은 모두 구식이거나 反교육적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예컨대 미래 교육, 미래 학력(역량)을 기치로 학생 주도, 활동 중심 학습법이 유행하면서 교사 주도, 강의 중심 교수법은 주입식으로 오도되었으며 혁신 교육과 관련된 책이나 혁신 교육을 한다고 하는 교사들의 경험담을 보면 심지어 수업에서 교사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쓰여있거나 교실에서 교사가 아예 불필요하다고 보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교육에서 가르치는 교사보다는 학생에게 배움이 일어나고 깊어지게 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배우는 학생, 배움이 일어나는 교실, 전인적 인간으로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학생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가르치는 선생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수확이다. 나아가 교사의 가르침이 없더라도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다양하고 놀랄만한 방식으로 배운다는 사실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교사들이 강의실, 실험실, 야외학습장, 실험실, 전자 교실 등 공식적인 교육 장소에서 학생들이 많은 것을 배우도록 교육 여건을 창조하고 있으며 교육은 어떤 점에서 학생들에게 그런 조건을 창조하는 의도적인 행위라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교수법 각각은 장점과 한계가 있는 하나의 기법일 뿐 만능 교수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배움의 주체가 학생이고, 학생 중심 교수법이라고 하더라도 배움이 일어나게 하려면 배움의 안내자나 촉진자로서의 교사 역할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교수법이 좋은가 하는 것은 교사 특성, 학생 특성, 교육내용, 학교 환경 등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하며 기술적인 최고의 교수법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교사가 현실적으로 모든 교수법에 정통하기는 어려우며 설령 정통하더라도 교수법만으로 가르침의 본질을 깨달아 우리 아이들이 타인을 만날 때 나누는 존재로서 성숙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일 수밖에 없다. 즉 가르침의 본질은 가르침의 기법에 항상 우선하며 가르치는 기법, 즉 교수법은 잘 가르치기 위한 필요조건에서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우선 가르침의 본질을 늘 성찰하고, 만나는 학생들에게 배움을 일깨우고 높여주려는 애정을 버리지 않아야 하며, 적합한 교수법을 찾으려고 쉼 없이 노력할 때 최선의 교수법을 갖춘 최고의 교사가 될 수 있다.
성찰은 본성을 깨치는 근본적 수단이다
성찰(省察)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속으로 깊이 반성하여 살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지나왔던 삶의 길을 깊이 되돌아봄으로써 ‘나는 누구인지를 알고자 하는 과정’이다. 성찰은 자아 성찰과 유사하지만, 차이가 있다. 자아 성찰은 자신의 마음, 즉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반성하는 것이지만, 성찰은 마음과 행동 모두를 아울러 살피는 일이다.
삶에서 성찰하는 사람들은 드물며 성찰하려고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아는 잠재력이 있는 반면에 무한히 신축적이지는 않으므로 외부를 쉽게 수용하지 않으며, 뇌 속성상 타자에 대해 원래 배타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수는 삶의 문제에 마주할 때 나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조건 타자의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이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면 그런 태도로는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더 나빠지기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사가 가르침이 힘들어질 때 자신의 외부인 타 교사, 교육 당국, 학생, 학부모, 교육제도 등에서만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면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다고 본다. 이 점에서 노자가 도를 깨닫기 위한 자세로 내적 성찰을 강조한 《도덕경》 33장은 가르침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교사들의 마음에 새길만 하다.
| 知人者智,自知者明 (지인자지, 자지자명) 타인을 아는 자는 똑똑하지만, 자신을 아는 자는 밝다. 勝人者有力,自勝者強 (승인자유력 자승자강) 타인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지만, 자신을 이기는 자는 강하다. |
노자는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이라고 했다. 남을 안다는 것은 자신과 구별되는 타자의 욕망, 능력, 사회적 배경, 관점 등을 안다는 것이다. 즉 지혜로움은 나와 타자의 차이를 아는 분별적 능력이다. 그러므로 타자를 아는 일은 쉽지 않다.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며, 그와 교류하고, 소통하는 등 상당한 경험이 필요하다. 나아가 그렇게 했지만 내가 그가 아니므로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의 외모를 정확하게 그릴 수 있고, 일부 습관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의 내면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즉 나는 근본적으로 그가 될 수 없으므로 내가 아는 그의 내면은 내 생각으로 짐작하는 그의 내면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自知(자지)는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요소들을 안다는 것인데 신체적 특징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정신의 주체인 자아를 알려면 성찰해야 하는 탓이다. 즉 자아는 신체적 특징, 경제적이거나 사회적 배경, 정신건강, 태도, 관점 등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온전하게 자신을 알려면 신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개별적 요소들을 통합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노자에 따르면 자아를 안다는 것은 만물의 본성이 공존이나 공생이며 자신이 지향할 삶의 방향이 공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自知者明(자지자명)은 자아에 내재된 인간의 본성인 공존과 공생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으로 성찰은 본성을 깨치는 대체할 수 없는 근본적 수단이다.
또한 노자는 “남을 이기는 것은 힘이 있고 자기를 이기는 자는 강하다.”라고 하였다. ‘남을 이긴다’의 의미는 상대방을 누르고 우위를 차지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물리적 힘이나 정신적 힘이 상대적으로 우월해야 한다. 즉 “자신이 타인보다 신체적으로 뛰어나며, 자신을 보존하고 발달을 추구하는 자립 능력,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능력, 사물을 다루는 기술 등에서 우월하다는 것이 바로 ‘남을 이기는 힘이 있다”라는 뜻이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나 속에 ‘진정한 나’가 ‘껍데기인 나’를 이긴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나는 인간의 본성인 공존하고 공생하려는 의지를 갖춘 나이다. 반면에 허울인 나는 감각적으로나 인지적으로 호불호(好不好), 쾌불쾌(快不快), 편불편(便不便) 등으로 대상을 구분하고 호, 쾌, 편 등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나를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이김, 즉 극기(克己)는 이기적 욕망을 누르고 본성인 공존 공생의 마음을 찾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자기를 이기려는 사람은 자기부정(自己否定)을 통해 ‘종족과 생명 보전을 위한 생리적 욕구’,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치욕’, ‘남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는 친애욕’, ‘세상을 알고 싶어하는 탐구욕’ 등에서 벗어나 변함없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무위(無爲)의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공감하며, 공존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또한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나는 독립적인 나이기도 하지만 원래 모습인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했던 나로 복원하게 된다. 즉 성찰은 세계의 다른 존재와 더불어 우리로서 존재했던 나를 찾는 수단으로 세속적 소유나 공명심에 빠져있는 현재나 과거의 나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려고 함으로써 자기 인격을 완성하는 길이다.
가르침은 자신의 영혼에 거울을 들이대는 행위이다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에 대해 잘 가르치는 교사라고 여긴다. 그러나 가르치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순간들도 많다. 어느 순간에 교실은 너무나 생기 없고,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공간으로 바뀌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기력하게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고, 이런 상황에서 교사라는 나의 자부심은 속 들여다보이는 거짓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탐험가가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듯이 나와 내 학생들이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새로운 삶의 영역을 탐구할 때 그때는 교직이 나의 천직임을 자부(自負)하면서 기뻐한다. 그러므로 잘 가르치는 교사로서 살려면 진정한 행위는 인간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므로 가르침에 대한 외부적 평판이 좋든, 나쁘든 깊이 성찰해야 한다. 예컨대 교사의 가르침에 대해 학생과 학부모의 찬사와 환호가 끊이지 않고, 동료들로부터 교수법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해도 그런 현상이 실체적 진실인지를 살펴보려고 해야 한다.
다음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유명한 그림인 《금지된 재현, 1937》이다.

붓을 든 철학자로 불리는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벨기에 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마그리트는 주변에 있는 대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뒤 이런 사실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요소, 즉 허구를 작품 안에 배치하는 방식인 데페이지망(depaysement)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이 그림에서 남자는 그의 얼굴을 보려고 거울 앞에 섰지만, 거울은 그의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남자를 관찰하면 자신을 둘러싼 암갈색 그림자 한가운데 서서 마치 말과 생각을 멈춘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남자가 멈춘 것은 일상적인 말과 생각일 뿐이며 그는 거울 앞에서 평소에 보지 못하였던 그의 내면을 성찰하고 있으며 거울에 비춰지는 모습도 혹시 남자의 내면이 아닐까”라고…
가르침은 자신의 영혼에 거울을 들이대는 행위이다. 그래서 교사는 가르칠 때 교사 자신, 교과, 나와 학생이 함께 엮어지는 방식 등에 성찰해야 한다. 또한 교사는 성찰하면서 보여지는 풍경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면 학생과 학과를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교사 자신을 알 수 있다. 즉 교사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교사가 성찰해야 하는 이유는 한두 개가 아니다. 교사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모른다면 자신의 선입관이나 편견으로 색칠한 검은 안경을 쓰고 늘 학생들을 보게 되므로 그가 가르치는 학생이 누구인지, 즉 학생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따라서 학생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므로 그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다. 교과도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을 모른다면 나는 교과와 분리된 존재로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되고 교과를 추상적으로만 이해함에 따라 교과 내용은 구체적인 현실과는 동떨어진 개념 덩어리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교사가 자기 자신을 아는 성찰은 결코 이기적이거나 나르시스적인 작업이 아니다. 우리를, 나를 진정한 교사로 만드는 일이며 교사 자신뿐 아니라 학생과 교과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어떤 교사에게 가르침을 들여다보라고 충고하는 일은 엉뚱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보통 교사들이 일상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건, 간단한 요령 등을 말해주는 것이 더 실용적일 수 있다. 그러나 교사가 성찰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면 갈수록 가르침과 교사로서의 삶은 더욱 굳건해진다. 내면을 보려고 하는 교사는 자의식의 정문 앞에서 늘 보초를 서면서 교사의 초심과 사명을 상기하면서 어려움을 헤쳐 나가므로 교사의 정체성에 위배되는 것은 물리치고, 합당한 것은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사의 성찰은 학생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교육은 자아의 내부에서 지혜의 핵심을 뽑아내게 하는 활동’이다. 학생들은 이 지혜의 힘으로 거짓을 물리치는 힘을 갖게 되고, 또 진리의 빛 속에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노력을 할 때 외부적인 규범이나 유혹, 내적 충동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반성적인 자기 결단으로 행동하게 됨으로써 좋은 삶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사가 내면을 봄으로써 교사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교사만이 아니라 학생을 지혜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래서 성찰은 모든 가치 있는 교육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교사들이 지향해야 할 최상의 자세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떻게 해야 성찰을 할 수 있을까? 고독, 침묵, 명상적인 독서, 숲속 산책, 일기 쓰기,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 찾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즉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여러 방법을 많이 찾아내고 그 방법을 통해 교사로서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홀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외모에 이상이 없는지를 수시로 확인하듯이 “가르침의 권위를 어떻게 확립할 수 있을까?”, “교실과 내 인생에 작용하는 복잡한 힘들의 한 가운데 서는 능력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를 학생과 만나고 대화할 때 새기고 실천하려고 해야 한다. 이럴 때만이 교사는 내적 자아와 적극적으로 대화함에 따라 교사로서의 정체성과 성실성을 회복하며, 희미해졌던 교사로서의 소명 의식이 상기됨으로써 교사의 권위를 회복하고 가르침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나아가 지성과 감성과 영혼이 모두 모이며 인간의 자아를 만들어 내는 장소가 곧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교사 스스로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돌아봄으로써 교수법은 교육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며 이를 실천할 때에 여러 교수법 중에 최고의 교수법이 무엇인가라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Ⅲ.결론
잘 가르치는 교사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교사, 학생, 학부모들은 각자의 신념이나 역할에 따라서 잘 가르치는 교사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학생이 전인적으로 발달하고, 내적 잠재력을 계발하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교사를 잘 가르치는 교사라고 하는 것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즉 교사가 가르칠 때 교육의 목적과 가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교사라면 잘 가르치는 교사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교육의 목적을 구현하는 활동인 가르침에 대해 늘 성찰하려고 해야 한다. 가르침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학생과 제대로 된 만남을 기대할 수 없으며, 나눔을 통한 공존의 지혜를 그들에게 깨닫게 할 수도 없다. 교수법 또한 교육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는 것에 있으므로 가르침의 본질인 만남과 나눔을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르칠 때 학생의 인지적, 정의적 특성과 사회적 배경 등을 고려해야 하며, 같은 설명을 하더라도 학생들은 사전지식과 경험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지식을 구성할 수 있으므로 교사는 고정된 교수법에 매몰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Source URL: https://21erick.org/column/8427/
Copyright ©2026 교육을바꾸는사람들 unless otherwise no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