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담론(5): 사람은 왜 특별하고 존엄한가?

by slowalk | 2019-05-15 10:24

Views: 1,053

인공지능 시대에는 시민권, 그리고 그 시민권에 따라 기대되는 품성인 민주시민성을 새로이 따지고 규정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시민이 아닌 더 근본적인 문제, 바로 사람의 문제에 부딪쳤다. 근대 민주주의는 시민의 자격으로 공동체 영역 안에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경우에는 시민이 되기 위해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만, 그 나라 안에서 태어났다면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시민’임을 인정받으려면 ‘사람됨’이라는 것에 어떤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

 

이 문제는 인공지능 등장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는 문제였다. 사람이 지구상의 유일한 지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보다 더 유능하고 지적인 인공지능의 등장이 현재진행형으로 바뀐 이상 이 문제는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1960-70년대 ‘철완소년 아톰’ 같은 만화에서나 문제거리가 되었던 인공지능을 가진 인간형 로봇의 시민권 문제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되고 로봇은 안되는 시민의 자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람만의 무엇을 규정하던가, 아니면 로봇도 시민으로 받아들이던가 해야 한다.

 

이때 지적인 존재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 혹은 지식을 다루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보다 더 고차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적인 존재란 지식을 획득하고 창조할 수 있는 존재 즉, ‘학습’할 수 있는 존재다. 이미 프로그램 된 대로만 행동하고, 이미 저장된 지식의 범위 안에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지식을 찾고, 만들어냄으로써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만약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지적인 존재는 이를 학습을 통해 해결한다. 이 학습은 외부에서 누군가가 시켜야만 할 수 있는 훈련과는 다르다. 지적인 존재는 필요한 학습을 스스로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오직 사람만이 이런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람만이 지적인 존재였으며, 이를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으로 규정했다. 현생인류의 학명 자체가 지적인 능력을 기본으로 하는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인 까닭도 이것이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사람이 지구상의 유일한 지적 존재라는 믿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우선 침팬지, 고릴라, 보노보 같은 영장류의 다른 동물들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지적이라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이들 역시 본능이나 습성을 넘어선 학습을 통해 새로운 행동방식을 만들어내고 서로 간의 학습을 통해 이를 공유한다. 특히 이들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큰 규모의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고도로 복잡한 상호작용의 규칙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침팬지, 고릴라, 보노보가 이루는 집단은 개나 늑대 같은 다른 사회성 동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지되고 움직인다. 개, 늑대 등의 다른 사회성 동물은 집단 내의 연대감, 충성심, 그리고 철저한 서열에의 복종심이라는 감정에 근거한 무리 생활을 한다. 이들이 집단을 유지하는 동력은 동료들 간의 사랑(옥시토신의 분비)과 외집단에 대한 분노, 공포(아드레날린의 분비)다.

 

반면 침팬지 등의 영장류는 집단 내에서 개체들이 각자의 개성을 파악하고, 관계를 조정하며, 그때 그때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맥락을 파악해 가면서 사회생활을 한다. 이들이 사회를 유지하고 움직이는 동력에는 감정 뿐 아니라 상호 간의 암묵적인 합의와 규칙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령 침팬지 사회에서의 서열은 개나 늑대 무리와 같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치밀한 정치와 협상의 동적 균형으로 나타난다. 만약 어느 최고 서열의 침팬지가 힘만으로 동료들을 지배하려 들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동료에게 난폭하게만 군다면 그 집단 내에서 작당하는 무리들이 생길 것이다. 이들은 지배자 몰래 모의하여 기습적인 쿠데타 혹은 혁명을 일으키면서 난폭한 지배자를 죽이거나 축출한다. 만약 우두머리의 인기가 떨어지면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차기 경쟁자의 정치가 시작되기도 한다. 따라서 침팬지 무리에서 우두머리가 되려면, 또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단지 힘만 세어서는 되지 않는다. 평소에 관계망 관리를 통해 평판과 세력을 충분히 형성해야 한다. 즉 이들은 사람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능의 존재가 아니라 지적인 존재라 불러도 될만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자연환경 뿐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도 적응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면 지적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영장류 집단에는 고유의 문화도 있다. 같은 종에 속하는 무리들도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행동 양태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가령 바닷가에 사는 어느 원숭이 무리는 바닷물을 이용하여 감자에 묻은 오물을 털어내고 먹는데,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어떤 무리도, 심지어는 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바닷가에 사는 무리도 그와 같은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무리 중에 누군가가 우연히 바닷물에 감자 씻는 법을 발견하고 그것을 동료들에게 가르쳐 주어 확산시킨 것이다. 즉 그 무리 고유의 문화인 것이다. 사람이 불을 사용하게 된 과정도 사실 이와 비슷하다.

 

물론 사람 이외의 영장류 무리의 지적인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애초에 대뇌 자체가 사람의 1/3에 불과한 데다가 추상적인 사고에 필요한 신피질의 용적은 그보다 더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과 다른 영장류와의 차이가 지적인 능력의 유무에 따른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그 능력의 양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지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지적인 존재로 취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비인간적인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나찌 치하의 우생학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지만, ‘전범’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생각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은 원래 있던 영장류뿐 아니라 스스로 지적인 존재를 만들어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딥 러닝 단계까지 발전한 인공지능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자료를 주는 대로 학습하지 않는다. 알파고 2.0은 인간의 기보들을 참고하지 않고, 스스로 수천만 번의 대국을 두어 가며 바둑의 새로운 정석들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최강의 바둑 기사들을 상대로 60전 전승을 거두었다. 물론 아직은 바둑과 같은 제한된 영역 안에서의 학습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특히 일상 생활이 이루어지는 영역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자율 자동차 역시 인간의 요청에 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자율 자동차보다는 자동 자동차(?)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만약 자율 자동차가 스스로 이동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리고 술집에 가려는 승객의 건강을 걱정하여 병원으로 가거나 귀가할 것을 설득하려 든다면 이 경우에는 진정한 자율 자동차라 할 수 있다. 이때 이 자율 자동차를 지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근거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이 자동차는 사람인가?

 

혹은 알파고가 바둑이라는 게임에서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스스로 저장된 정보를 지운다거나, 바둑의 규칙을 바꾸어 새로운 게임을 창안하려 한다면 이 역시 지적인 존재다. 그렇다면 이 프로그램은 사람인가? 먼 훗날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현재 보여주고 있는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이러한 상황이 의외로 빠른 시일 안에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지적인 존재라는 것을 내세워서 사람의 특별한 지위를 요구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사실 세계 곳곳에서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대중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하는 모습들을 보면 사람이 인공지능 앞에서 지적인 존재라고 뻐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지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다수결이 사실은 무의식에 빠진 다수의 맹목적 선택에 불과하다면 그 다수의 뜻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각 후보자들에 대한 빅데이터와 공약들을 인공 지능에게 분석하도록 하여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하는 것이 사람 유권자들의 선택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각종 정책이나 법률안을 국회의원 대신 인공지능에게 충분한 자료를 주고 선택하도록 하면 신문과 뉴스를 더럽히는 각종 정치적 추문과 갈등없이 합리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지적인 존재라는 이유로 인공지능까지 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면 지적인 존재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시민은 고사하고, 사람으로서의 자격도 의심받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런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근대 민주정치는 시민의 자격이 오직 ‘사람’이라는 것 외에 요구하지 않는 그런 정치체제다. 그런데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그 정당성이 의외로 취약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지적인 존재라는 것만으로 사람만의 특별한 권리를 주장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무엇이 사람을 규정하고 다른 존재에 비해 특별한 존엄함을 부여하는가?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Source URL: https://21erick.org/column/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