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lowalk | 2019-03-18 10:42
‘SKY 캐슬’에 비친 우리의 학교
‘SKY 캐슬’이 교육에 대한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정작 학교를 그리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SKY 캐슬’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학교 안의 사태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믑니다. 학교의 내막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그리고 그렇게 드러내진 학교 모습에서 무엇을 느끼게 되는지, 이야기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적어도 인터넷에서(언론이 주목하여 다룬 경우를 포함해서) 찾아볼 수 있는 한에서는 그렇습니다. 아마도 학교 안에서보다는 밖에서(‘캐슬’이나 ‘코디’의 사무실 등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훨씬 더 강렬하고 ‘드라마틱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만큼 ‘SKY 캐슬’에 투영된 학교 모습에는 시청자의 이목을 끌만한 게 없었다는 뜻이겠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학교 에피소드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길 만한 것들이어서 특별하게 거론할 거리가 되지 못했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SKY 캐슬’이 묘사한 우리나라 학교의 모습에서 특별히 놀랄 만한 게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 중대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워서 문제로 여겨지지도 않는 한국의 학교 모습이 사실은 중병에 걸린 징후라면, 문제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닙니다.
‘SKY 캐슬’에 그려진, 우리에게는 새로울 것 없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학교의 모습 두 개만 여기에 옮겨보겠습니다.
먼저, ‘SKY 캐슬’의 자녀들이 다니는 ‘명문 신아고등학교’의 한국사 수업 시간의 장면입니다.
교사: 한국사야 니들한테 힐링 주는 과목이지 뭐. 모평이든 수능이든, 한국인이라면 가져야 될 기본 소양을 평이하게 출제하는 게 한국사의 기본 원칙인 거 알지? 자, 그런 의미에서, 선행은 다 했을 테니까… 어, 여긴 넘어가고. 어, 여기, 통일신라와 발해는 이거 인강으로 듣자.
혜나: 또 인강이에요? 3월부터 현재까지 주 3회 총 31회 수업 중에 17회를 인강으로 때우셨거든요?
교사: 헤, 허. 야 내신대비 인강이잖아. 시험문제 여기서 낸다니까?
혜나: 질문도 안 받으시고, 수업하기 힘드시죠? 그래서 인강으로 때우는 거 아니에요?
[중략]
예서: 야, 김혜나, 뭐가 문제야? 시험문제 인강에서 내신다잖아!
혜나: 넌 빠져. 어치피 넌 딴 공부 하니까 상관없잖아!
[중략]
혜나: 선생님은 월급 왜 받으세요?
교사: 뭐, 월급?
혜나: 일한 대가로 받는 게 월급이잖아요.
교사: 너 당장 따라와!(교실 나간다.)
예서: 얘, 개쩐다, 김혜나. 수업태도도 수행평가에 들어가는데, 어쩌냐?
혜나: 니 수업 태돈 좋구? 한국사 시간에 수학 문제나 푸는 주제에…
다음에는, 위에서 부딪쳤던 학생(‘혜나’)과 교사가 다른 맥락에서 다시 부딪치는 장면입니다. 학생이 학생회장에 출마하려고 하는데, 교사가 못마땅해 하는 상황입니다.
교사: 너 정말 열일한다. 공부하랴, 어머니 간병하랴… 어흐 그 욕심에 뽕나무도 흔들겠다?
혜나: 욕심이 아니라,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출마하는 거예요.
교사: 오~ 넌 뭘 하고 싶은데?
혜나: 특별반 폐지요.
교사: 뭐? 아이 참, 얘가 또 큰일 날 소리 하네. 우리 학교에 특별반이 어디 있다 그래?
혜나: 이름만 정독반이지 사실 특별반이잖아요. 성적, 빽, 다 갖춘 애들만 모아서 특별반 만들어 놓고 걔들한테만 스펙 몰아주는 거, 애들이 모르는 줄 아세요? 교내 경시대회 정보도 걔들한테만 미리 알려주고 상도 몰아주고, 나머지 애들은 들러린가요? 아무리 학교가 입시 공장이 돼 버렸다지만, 눈앞에서 대놓고 반칙하는 거 참을 수가 없어서요.
위에 옮긴 두 장면의 대화에는 물론 과장이 없지 않습니다. 자신의 수업을 반 이상 ‘인강’(인터넷 강의)으로 때우는 교사 행태가 ‘일반적일’ 리 없을 테고,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혜나’처럼 이의를 제기할 학생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특별반’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면서 학생회장에 출마하려는 학생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드라마에서나 만들 이야기려니 하고 넘길 수 있는 과장된 묘사가 없지 않지만, 대화들의 바탕을 이루는 소재는 결코 터무니없다고 일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수업을 인강으로 대체하면서 시험 문제를 인강 내용에서 출제하겠다고 말하는 교사가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전혀 ‘비정상’이 아닐 것이고, 한국사 시간에 다른 과목 공부하는(그래도 수행평가에서 고득점할) 학생이 충분히 많을 것이며, 학생이 교사에게 대들면 수행평가에서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학생들의 대학 진학 성적을 높이려고 애쓰는 고등학교에서, 감사에 걸리지 않을 만한(‘정독반’ 같은) 이름을 내걸고, ‘특별반’을 편성해서 ‘우수한’ 학생들만 돌보는 경우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SKY 캐슬’의 학교 묘사에는 우리나라 학교의 전형적인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들입니다.
우리의 학교 모습을 제3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으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SKY 캐슬’의 장면들에 대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처럼 모두 태연할지 의문입니다. 아마도 많은 외국인들이 놀랄 것입니다. 학교에서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경악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는 많은 학부모들이 표준적인(standardized) 시험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거나 그런 시험 대비에 수업을 ‘올인’시키는 데에 반대합니다. 시민단체까지 만들어가며 반대 운동을 하고 있고, 모의시험 문제를 만들어 시험 전에 연습하게 하는 교사를 고발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교사는 “교육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 말입니다. 핀란드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칠 때까지 학생들이 국가 수준의 표준적인 시험을 칠 일이 없습니다. 학부모들은(정부에서도) 교사들이 각자 전문적으로 아이들의 학습 진척을 진단하고 적절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문화와 상식을 지니고 사는 학부모들이라면 한국의 고등학교 교실을 보면 경악할 것입니다. 학생들을 상대평가하기 위한 시험 문제를 수업에서 다루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데 대해 경악할 것이고, 그런 인강으로 수업을 대체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는(특히, 시험 문제를 거기서 낸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인식에 대해서도 경악할 것입니다. 교사 스스로 자신이 가르치는 교과의 가치를 대입 시험에 비추어 규정하는 데 대해서는 더욱 경악할 것이고, 우수한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학교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에 젖어 사는 우리들에게는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우리 학교 모습은 사실은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 학교 현실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때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들’(The Smartest Kids in the World)이라는 책에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왔던 학생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한국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국제비교에서 늘 우수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 책의 저자는 미국 교환학생의 한국 학교 경험을 통해 그 비결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이 한국 고등학교 교실에서 본 가장 놀라운 것은, 수업 시간에 학생의 1/3 이상이 거리낌 하나 없이 너무도 태연하게 자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교사도 그런 상황에 전혀 동요함 없이 수업을 계속해서 더욱 놀랐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고3 수업 풍경입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시험 점수를 올리는 데 관계없는 과목의 수업 시간에 자거나 다른 ‘도구’ 과목을 공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됐습니다. ‘SKY 캐슬’의 에피소드에서처럼, 학교에서 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이 한국사 시간에 수학 문제를 푸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학교가 대학진학 성적을 높이기 위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관리하며 그들에게 특혜를 몰아주는 것도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점수 숭배’의 제물이 된 학교
현재와 같은 학교나 교실 상황을 우리라고 늘 당연하게 여겼던 것은 아닙니다. 웬만한 교육자들은 다 아는 것처럼, 시험 준비만을 위한 수업은 수업이 아니라고, 우리 사회에서도 오랫동안 외쳤었고, 성적 높은 학생들 위주로 학사를 운영하는 행태도 ‘부정과 비리’라고 성토하며 금하고 처벌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문제 제기는 크게 잦아들었습니다. 그런 문제를 제기하면 뭘 새삼스럽게 고리타분한 문제를 들추느냐고 주변에서 눈총받기 십상입니다. 그런 게 문제라는 건 모르는 바 아닌데, 달리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은 지금, 그런 현상은 피할 수 없는 부작용 정도로 보아 넘길 때가 됐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이제는 지배적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지배적인 인식은 매우 그릇된 것이며, 사교적(邪敎的) 맹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문화적 바탕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자학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자포자기 행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 기이한 사회적 최면 상태는 ‘점수주의’에 빠진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교육에 관련해서, 우리 사회가 이제는 기정사실로(‘민족적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맹신하는 게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교육의 성패는 누구에게든 대입 결과에 달려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입 당락은 어떻든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조적 믿음 위에서, 우리의 ‘교육열’은 치열한 대입 경쟁으로 식을 줄 모르게 되고, 우리의 여론은 ‘단판의 시험’이 가장 공정한 대입전형 방식이란 쪽으로 수렴하게 됩니다. ‘객관적인’(‘객관식 시험’의) 점수가 아니면(‘주관’이 개입되므로) 편파적인 부정과 비리가 끼어들기 마련이고, 여러 가지 요소를 감안하게 되면(전형이 복잡해지면서) ‘아는’ 사람들이나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해지기 마련이라고 반대합니다. 결국, 오늘날 보게 되는 것처럼, 대입전형 논란은 늘 “수능이 상책”이라는 결론으로 회귀하곤 합니다.
점수주의에 빠진 상태에서는 학교교육이 기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점수라는 것은 특정한 측면에만 국한하여 성취도를 표시하게 마련인 성질을 가졌습니다. 점수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는 학교교육이(학생의 공부가) 점수만을 겨냥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때는 점수가 드러내주지 않는 다른 측면은 당연히 무시하게 됩니다. 공부나 교육이 편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인교육’이라는 이상은 무의미해집니다. 우리는 윤리 과목 점수가 높은 학생이 도덕적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고, 사법고시 수석 합격자가 가장 정의로운 법조인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같은 이치로, 수능 점수로 대학 입학 자격을 총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점수가 보여주는 한 학생의 됨됨이가 매우 제한적인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객관적이고 투명하다는 이유로 점수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결정을 점수로 내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이 수능과 내신 대비 수험 훈련으로 전락한지 오래인데도 점수주의를 맹신하는 사교적 행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패할 마련인 학교
점수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학교교육은 왜곡되고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이 점은 ‘법칙’으로 인정될 만큼, 여러 나라 사례나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서, 교육의 맥락에서만 아니라 복지나 경제 등의 맥락에서까지, 두루 입증되어 왔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주로 ‘Goodhart의 법칙’이라고 인용합니다. 이 법칙은 “어떤 측정치가 일단 목표로 규정되면 그 측정치는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현행 대입제도에 빗대어 풀어보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점수가 하나의 획득 목표가 돼버린 상황에서는, ‘대학수학능력’을 표시해주게 되어 있는 그 점수의 본연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실은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깊은 연구와 다양한 실험을 거쳐 대학수학능력을 제대로 잴 수 있는 측정도구(‘수능’)를 만들었다고 가정합니다. 이런 가정 아래에서는, 어떤 보상이나 벌도 전제되지 않은 담백한 실험 상태에서라면, 그 도구를 이용하여 학생들의 대학수학능력을 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측정치(점수)가 막대한 보상이나 불이익을 배분하는 기준으로 채택되는 순간, 그 도구의 타당성(대학수학능력을 잰다는 본질)은 훼손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그 도구에 대응하는 전략이 더 개발될수록) 그 도구의 타당도는 더욱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교육과 같은(수능 점수를 얻는 게 지상목표가 돼버린) 상황에서는, 말 그대로 대학수학능력을 교육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온당한 방식으로 키워가려는 순진한(수능 정책이 기대하는) 행위는 자취를 감춰가고, 과정이야 어떻건 쉽고 빠르게 점수를 올릴 수 있다면 그 전략을 사는 사행적(邪行的)인 행위들이 만연하게 됩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 많은 고등학생들은 EBS 수능 강의 교재의 지문을 무조건 암기하는 방식으로 영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데 문제가 없는 최고 수준의 학생이어도, 수능을 위해서는 지문을 암기하는 식의 준비를 거듭해야만 합니다. 수능 점수는 대학수학능력을 타당하게 변별하지 못하게 전락할 뿐만 아니라, 영어 교육(공부) 자체를 비본질적이게 변질시키게 됩니다.
사회 변화나 정책 또는 교육 프로그램 등의 효과를 다루는 분야에서는, Goodhart의 법칙과 같은 원리로 ‘Campbell의 법칙’을 주로 인용합니다. Campbell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판단을 위해 계량적인 지표를 많이 사용할수록 그 판단은 더 어지럽혀질 가능성이 커지고, 그 지표로 바로잡으려고 했던 사회적 과정은 더 왜곡되고 부패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수능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이 법칙이 시사하는 것은, 수능 점수로 이루어지는 대입 당락 결정은 그 자체의 타당성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수능 점수를 교육(학습)의 표적으로 삼도록 함으로써 학교교육의 과정 자체를 비틀고 부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사는, 앞에서 ‘SKY 캐슬’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 교육 현실에서 이미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셈입니다.
개혁의 시작은
우리 사회는 학교교육이 점수위주로 돌아가는 현실에 대해 체념하고 있는 듯합니다. 달리 방도도 없고, 그나마 점수위주 방식이 최선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남아 있는 게 있다면, 좀 더 나은 평가방식을 고안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생각 정도인 것 같습니다. 평가방식은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고, 발전된 평가 방식으로는 교육적으로도 타당한 점수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합니다. 물론,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전보다 나은 평가도구(시험)를 고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소개했던 ‘법칙’들은 도구의 질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점수(도구)와 당락 결정을 ‘묶는’ 행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도구를 얻게 된다고 해도, 그 도구의 교육적 효용은 대입에 이용되는 순간 증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SKY 캐슬’을 보고나서 우리는 ‘코디’란 게 정말 있겠구나 하고 깨닫고, ‘스터디 큐브’라는 책상을 주문하는 게 나을지 고민합니다. ‘SKY 캐슬’은 경악할 만한 학교교육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비정상적인 교육이 ‘정상’인 것이 돼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비정상이 정상이 돼버린 현실에서 학교교육에 대한 개혁 논의는 의미를 잃게 됩니다. ‘객관적이고 투명한 점수’를 불가결한 것으로 전제하는 ‘프레임’에서, 점수가 학교교육의 종교가 돼버린 사태에서, ‘개혁’은 개혁일 수 없습니다. 그때 개혁은 학교를 더욱 부패하고 타락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가 ‘SKY 캐슬’의 학교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는 우리 자신에 대해 놀라는 데서, 개혁은 비로소 시작할 수 있습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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