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병원’을 닮은 학교에서 ‘버려지는 아이들’

by slowalk | 2019-03-06 11:32

필자는 종종 현 한국 학교교육의 모습을 “학교는 이상한 병원과 같다. 멀쩡한 환자만 돌보고 진짜 돌봄이 필요한 환자는 내팽개치고 있다.”라는 말로 빗댄다. 이런 학교교육은 인간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못하다. 지금 한국에는 이런 ‘이상한 병원’을 닮은 학교가 너무 많다. 매일 이 병원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 수업에서 일상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출산률 저조로 생산가능인구 부족을 걱정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나아놓은 아이들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이고 엄청난 사회적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이런 아이들을 수업 중 잠자는 아이들, 떠드는 아이들, 학포자(학업 학포자), 수포자(수학 포기자), 영포자(영어 포기자), 수업 훼방꾼 등으로 온갖 낙인을 찍는다.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이 정당할까? 이들은 수업내용이 자신들에게 의미가 없어 수업을 거부하고 있거나 배우고 싶어도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다. 우리는 이런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교실 수업에서 일상적으로 배제되는(버려지는) 아이들이 발생하는 원인과 그에 대한 대책을 살펴보기로 한다.

 

 

학포자가 아니라 수업을 거부하는 것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문제 해결에 매우 중요하다. 가령 이들을 수업 태도 불량자, 학포자 등으로 본다면 해법은 나오기 어렵다. 수업 태도 불량자로 보는 시각은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전적으로 학생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또 학포자라는 용어는 학생이 스스로 학업을 포기했다는 시각이다. 이들을 ‘수업 거부자’로 부르면 어떨까? 이들은 학습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기보다 시스템과 교수법이 학습을 포기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업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업을 거부하는 아이들’이란 시각은 “왜 아이들은 수업을 거부할까?”라는 질문을 떠올리기 때문에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일방적으로 아이들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수업 내용이 아이들에게 의미가 없어서 일까?” 아니면 “가르치는 내용이 너무 어렵거나 가르치는 방식이 너무 재미가 없기 때문일까?”, “‘교사와 부모가 이미 너는 어떻게 해도 안 돼’와 같은 낙인을 찍었기 때문은 아닐까?”와 같은 성찰적 질문을 하게 만든다. 아마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의 원인을 조사해본다면 다양할 것이다. “배우는 내용이 나중에 사회에 나왔을 때 소용이 없기 때문”, “수업 내용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기 때문”, “수업 방식이 너무 고리타분해서 주의를 집중시킬 수 없기 때문”, “교사가 평소 ‘너는 아무리 해도 안 돼’라고 각인을 시켜주었기 때문”, “선천적 학습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 등. 현재 한국 학교교실에서의 수업 거부는 자의든 타의든 이 5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런 원인분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사람들 중에는 학습부진을 가정 배경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학습부진의 원인으로 가정 배경의 영향이 크다는 점은 관련 연구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스템 요인, 학교 요인, 교사 요인 등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의 경우를 보자. 흑인과 히스패닉 자녀들의 비중이 80%가 넘는 학교임에도 몇 년간의 특별한 노력 끝에 학업 성취도가 급상승하고 이 수준을 유지하는 학교들(turnaround schools)이 얼마든지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개인 수준에서만 봐도 그렇다. 특히 초등 저학년 때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가 아동의 성장과 성취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제 학습부진에 대해 가정배경 탓, 학생 개인 탓에서 시스템의 탓, 학교 분위기의 탓, 교육과정의 탓, 교수법의 탓, 평가의 탓, 교사의 탓(예: 학생 각자의 이해 속도를 무시하고 혼자 진도 나가기)으로 초점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학습부진과 학교 부적응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대신 시스템과 환경의 문제이며, 교육과정의 무능 탓이라는 쪽으로 의식이 크게 바뀌어야 한다(Universal Design for Learning in the Classroom, 2012, 4p).

 

한국이 특히 그렇다고 생각된다. 한국은 학생이 공부를 못하거나 품행에 문제가 있으면 이를 학생 탓으로 돌리는 문화가 너무 강하다.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이와 관련하여 뇌기반 교육의 세계적 대가인 에릭 젠슨은 자신의 저서(Engaging Students with Poverty in Mind, 2013)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실패하는 학생은 없다. 우리의 아동, 청소년을 실패하게 만드는 학교가 있을 뿐이다. 동기가 없는 학생은 없다. 놀라울 정도로 지루하고, (학생들의 욕구에) 무관심하며, (내용이) 학습자의 삶과 무관한 수업을 하는 교사들이 있을 뿐이다.”

 

학습 불참에 대한 이런 인식은 기존의 교사 연수에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앞으로는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까?”에서 “어떻게 하면 ‘모든 아이들’을 수업에 참여시킬 수 있을까?”로 연수의 초점을 바꾸어야 한다.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brain works)에 대한 기본 이해를 바탕으로 개별화 지도(differentiated instruction)를 잘 할 수 있다면 버려지는 아이들 수를 대폭 줄일 수 있다.

 

 

학교교육 우선순위의 대 전환 필요!

 

수업에서 일상적으로 배제되는 아이들을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 해결을 학교교육의 최우선 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헌법 31조 ①항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능력에 따른 교육’은 ‘정신적·육체적 능력은 물론 현재의 준비도(readiness)에 상응한 적절한 교육’을 의미하며 ‘교육 받을 권리’는 능력에 상응하는 교육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와 교육의 기회균등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교육받을 형식적 권리와 기회는 주어져 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에 맞는 실질적 교육 기회는 제공받지는 못하고 있다. 교실의 수많은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수업에서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된 배경은 충분히 이해한다. 이미 초등학교에 발을 들여놓을 때 엄청난 출발선의 격차가 존재했고 이것이 해를 거듭하면서 심화되어 왔기 때문에 한 반에 20-30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 지도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또 학습이 느린 아이들에게 적용했을 때 효과가 있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든가 교사가 그런 아이들까지 끌고 갈 물리적 에너지가 없다는 점도 일면 이해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이유들이 이런 아이들을 이대로 방치해도 좋다는 명분은 되지 못한다. 모두를 위한 교육에서 앞서가는 나라들은 교육자들의 신념부터 다르다. 이들은 “모든 아동은 성공적으로 배울 수 있다”라는 믿음이 확고하다. 이제 학교교육의 최우선 과제는 실질적으로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을 실현해야!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의 실현은 교육행위 중 가장 고난도에 속한다. 이런 교육적 과제는 당위론을 내세워 목소리만 높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선 교육 지도자들부터 ‘멀쩡한 환자만 돌보고 진짜 돌봄이 필요한 환자는 내팽개치기’에 앞장서면서도 이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21세기 들어 세계 주요국들의 학교교육이 지향하고자 하는 최고의 비전과 목표는 ‘공정하고 포용적인 교육을 통해 교육의 목표를 탁월하게 달성하는 것’ 즉 ‘Excellency through Equity’이다. 이때의 equity는 크게는 교육의 기회와 결과(outcome)가 출신 문화나 배경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공정하게 배분되는 것을 말한다. OECD의 정의를 따르면 equity의 의미는 공정(fairness)과 포용(inclusiveness) 두 가지를 다 포괄한다. 공정은 ‘공정은 동일함이 아니다(Fairness is not the sameness)’로 대변되는 가치다. 긍정적 차별정책(positive discrimination)을 쓰는 것이 공정하다는 뜻이다. 한편 포용적 교육은 그 사람의 출신배경, 인종, 언어 등과 상관없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불편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문해력 같은 것을 책임지고 사회가 갖추어 주고 각자의 강점을 기반으로 잠재력을 최대치로 키워주는 교육을 의미한다. 한 사람도 포기하기 않는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정하고 포용적인 교육과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키워주는 것(Excellency through Equity)’을 교육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세계 주요국들은 예외 없이 이를 교육 개혁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한국만 유독 이에 대한 ‘실질적인’ 투자와 장기 비전이 없다. 있다고 해도 구체적인 대안도 없으며 구호에 가깝다.

 

이를 정책적으로 잘 접근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 핀란드, 캐나다 온타리오주, 앨버타주 등이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이런 아이들을 대상으로 매우 우수한 효과를 내는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있어 희망을 준다. 좋은교사운동의 배움찬찬이 팀에서 개발한 ‘읽기 자신감’ 같은 것은 난독증 해결에 좋은 효과를 내고 있고, ‘경인교육대학교 학습 및 정서·행동 문제 상담/치료 센터’가 제공하고 있는 한글 해독 지원프로그램도 효과가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빈곤층 아동들이 처한 각종 불평등을 개선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질 높은 개입(intervention) 프로그램이 필요하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7가지 핵심 원칙이 매우 중요하다.

 

① 최빈곤층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
② 아동의 발달 초기에 맞춰 시작한다.
③ 지원프로그램이 종합적이고 강력해야 한다.
④ (준전문가나 자원봉사자가 아닌) 숙련되고 헌신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이 투입되어야 한다.
⑤ 건강, 영양, 주택, 해체된 가정 등 각 요소를 아우르는 통합적 서비스이어야 한다.
⑥ 발달 초기에 가장 긴요한 언어능력, 학습 습관, 동기, 호기심 등을 키워주기 위한 속진형 보충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⑦ 프로그램 진행의 관찰, 기대의 설정, 성과의 평가 등을 통해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Neuman, 2009)

 

이를 위해 현 시점에서 교육부의 판단이 매우 중요하다. 개혁의 초점을 구조적 변화(예: 국가교육위원회 설치)에 두려는 접근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대신에 ‘공정하고 포용적인 교육을 통해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키워주는 것(Excellency through Equity)’을 미래교육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의 실현에 변화의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지금과 같은 표준화된 교육과정의 경직된 운영을 벗어나는 일이다.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은 IB 프로그램이나 핀란드 교육과정처럼 프레임만 제공하고 개인이 배우고 싶은 것을 깊게 배울 수 있도록 개인별 교육과정이나 학교수준교육과정을 지향하며 대학입시도 이와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차기 교육개혁의 핵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교육위원회가 만들어져 구조의 개혁에 매달리게 되면 ‘버려지는 아이들’과 같은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은 뒤로 밀리기 쉽다. 작년의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 결과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기초학력미달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란 소문이 돈다(동아일보 2019년 2월 12일). 만일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교육부는 솔직하게 자료를 공개하면서 근본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학교사회는 시급히 도덕적 사명감(moral purpose)을 회복해야 한다. 이는 “모든 아동은 성공적으로 배울 수 있다”, “격차를 줄인다”, “타인(동료)·타학급·타학교를 돕는다”라는 세 개의 요소로 압축된다. 교육개혁은 구조적 개혁이 아니다. 진정한 교육개혁은 교사 집단이 높은 도덕적 사명감을 갖추고 매일 아동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적 역량을 키우는 일이다. 우리 사회는 ‘이상한 병원’을 닮은 학교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은 ‘버려지는 아이들’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의 해결을 남은 임기 동안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Source URL: https://21erick.org/column/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