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lowalk | 2019-03-06 11:22
지난 달 23일 통계청은 소득분배의 공평성을 보여주는 5분위 분배율 지표에서 작년 4분기에 가장 소득이 낮은 하위 20%의 1분위 계층의 전체 소득은 123만8200원(명목기준·월 평균)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2012년 1분기(120만9200원)보다는 많고 같은 해 2분기(127만5900원)보다는 적은 수치이다. 지난 2012년 이후 한국 경제는 연 평균 2.5~3.0% 성장했기 때문에 가계 소득도 비슷한 증가율을 보여야 하는데 감소한 상황은 시사점이 크다. 더구나 그동안의 물가상승률을 반영하지 못한 명목소득이므로 가계의 실질 소득수준은 2012년보다 후퇴했다고 여겨진다. 즉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더욱 팍팍해졌다.

10분위 분배율도 비슷한 추세이다. 실제로 하위 10%의 1분위 계층의 소득은 2012년부터 증가하여 2017년 4분기에 150만4800원까지 증가한 후 급격하게 감소하여 지난해 1분기 128만6700원, 2분기 132만4900원, 3분기 131만7500원으로 등락하다가 4분기에는 123만원으로 크게 하락했다. 즉 최하위 10%는 지난해 4분기 전체 소득이 24.7% 감소했다. 근로소득은 47%나 줄었다. 소득 하위 10~20%는 -13.3%, 하위 20~30%는 -7.2%, 하위 30~40%는 –2.8% 소득이 감소했다. 이와 달리 소득 상위 10~20%는 소득이 6.6% 증가했고, 최상위 10%는 12.9% 증가했는데, 근로소득은 20% 넘게 늘어났다. 소득 상위자와 하위자의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은 소득주도성장이다. 소득주도성장은 포스트케인지안의 임금주도성장을 말한다. 명목임금을 올려(주로 저소득자의 임금) 가계소득을 증가시킴으로써 소비를 진작시키면 생산과 고용의 증가를 이룰 수 있다는 이론이다. 즉 부자와 빈자의 소득분배의 격차를 줄이면서도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근거를 노동자에게 충분한 임금을 제공하는데서 찾는다.
한국경제에서 기존의 성장패러다임은 ‘임금주도성장’이기보다 ‘이윤주도성장’이었다. 소득의 여러 유형 중에서 노동자의 임금보다는 기업가의 이윤을 중시함으로써 기업가의 이윤을 크게 하면 사내유보금과 투자가 늘고 생산 및 고용의 증가로 이어져 가계의 소득이 증가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경제는 기업가의 이윤이 늘었지만 그에 준하는 만큼 노동자 소득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다보니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이윤과 임금의 소득격차는 커졌으며 노동자와 기업가의 부의 불평등은 심각했다.
이 점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소득주도성장’이다. 경제성장을 긍정하면서도 그 연료를 노동자의 임금에서 찾으려는 의도였고 바람직하다. 상품의 판매로부터 이어지는 이윤은 기업가의 몫만은 아니다. 제공한 노동력에 등가로 대응하지 못하는 저임금을 기반으로 기업가의 이윤이 커졌다면 그 책임은 기업가에게 있으며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적정한 재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까닭에 문재인 정부는 2018년에 최저임금을 역대 가장 큰 비율로 16.4% 인상했고 저소득층에 대한 직접적인 소득지원을 늘렸다. 그런데 소득격차는 역대 최악이었다.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졌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졌다. 그 까닭은 고용이 줄고 그 질이 나빠진 데서 찾을 수 있다. 2017년 4분기 각각 1분위 0.81명, 2분위 1.31명이던 가구당 취업자 수는 작년 4분기 0.64명, 1.21명으로 더 낮아졌다. 가구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 더욱 줄었다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4분위의 가구당 취업자 수는 같은 기간 1.77명에서 1.79명으로 5분위는 2.02명에서 2.07명으로 오히려 늘었다. 1분위 가구가 주로 자치하는 임시직이 2017년 4분기에 비해 작년 4분기에 17만 명이 감소한 반면, 4분위와 5분위 가구원이 주로 구성하는 상용직은 같은 기간 34만 2천 명 증가했다. 즉 고용 감소와 고용의 질적 차이가 소득양극화를 심화시켰다. 문재인 정부의 선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적극 지지하지만 소득주도성장의 현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처럼 의도와 결과가 다른 현상은 경제만이 아니다. 교육에서도 나타난다. 자기 학년에 학습해야 할 성취수준은 그만두고라도 최소한의 수업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한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이 지난 2012년 이후 꾸준하게 늘어난다. 학업성취도 평가를 시행하려는 취지는 국가교육과정이 정한 성취수준에 한참 미달한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국어, 영어, 수학 100점 만점에 20점 미만자)들을 국가가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기초학력 미달’ 학생은 2012년 4.3%(고2 수학)에서 2016년 5.3%로 꾸준히 늘어났다.

일제고사는 경쟁을 부추기고 창의적 사고를 저해한다는 학업성취도평가에 대한 비판이 있자 2017년 이후 학업 성취도 평가 방식을 모든 학생이 치르는 ‘전수(全數) 평가’에서 일부 학생(3%)만 치는 ‘표집(標集) 평가’로 바꿔서 시행하였다. 그러나 고2 수학 과목의 기초 미달 비율은 9%로 크게 늘어났다. 아직 2018학년도 성취도평가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유은혜 교육부장관이 지난 달 25일 “(작년 평가에서) 기초 학력 미달 비율이 늘어났다”고 밝힌 것으로 볼 경우에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중은 증가하고 있다. 장관도 이 상황에 대해 “(정부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쟁의 해악을 지적하는 진보교육의 목소리에 적극 공감하지만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 급증하는 현실에 대해 박수만은 칠 수 없다. 어찌된 일인지 지금처럼 기초학력 미달자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시기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확증할 수 없지만 지난 2010년부터 시행한 직선교육감의 시대와 상관성을 맺는다. 직선교육감은 학업성취도평가를 비롯한 기존의 총괄평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특히 총괄평가를 일제고사라 통칭하면서 교육과 학교에서 경쟁과 줄을 세우는 전형이라고 몰아붙였다. 시험은 기존의 계급적 사회구조를 공고하게 만들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기제라고 보았다. 또한 그처럼 시험으로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려는 욕망을 서열화하고 배분하였기에 학교생활은 단 한명의 아이마저 불행하게 한다고 보았다. 그 해법은 학교에서 경쟁을 촉진하고 비인간적인 학교생활을 강요하는 총괄평가(일제고사)에 대한 거부였다. 특히 전국적으로 치러지는 국가수준학업성취도 고사에 대해 학생들을 줄을 세우게 하고 인간존엄과 자아의 복원이라는 교육의 내재적 목적에 어긋나는 가장 나쁜 국가고사라고 규정하였다.
진보교육감의 선의를 이해하고 지적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리고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려는 개인적인 과시욕망과 서울대, 연대나 고대, 중경시외(중앙, 경희, 시립, 외국어), 지방대에 이르기까지가 서열적인 대학진학구조가 학생들의 진학 경쟁을 부추긴 것도 사실이며 지금도 그렇다. 또한 시험의 형태가 주로 낡은 객관식 형태의 수능상대평가였으며 전체고사로서 획일화된 형태인 점도 사실이며 경제적 부유층에 유리한 전형이었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개혁이 필요하고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목소리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소득주도성장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듯이 교육현실 역시 달랐다. 가난한 지역이나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이 주로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었고 그 비중은 점점 더 커졌다. 수능의 비중을 줄이고 학생부종합전형의 비중을 크게 확대하여 대입진학에서 양극화를 막고자 했지만 그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소득주도성장이나 한국교육과 학력에서의 경쟁완화정책이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나오게 한 원인은 무엇일까? 보수언론은 소득주도성장의 탓을 최저임금의 상승이라고 말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최저임금의 상승이 소득주도성장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기보다는 최저임금의 상승만으로 소득주도성장을 하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 즉 한국경제의 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그동안의 분배 소득의 상대적 격차라는 문제점에 급급하여 최저임금의 상승이 다른 경제변수에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도덕적 기대감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한국경제의 구조는 수출주도형 경제구조이다. 원래 소득주도성장은 내수주도형 경제구조에 적합한 성장모델이다. 또한 그 나라의 화폐가 기축통화여야 한다.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수출주도형 국가가 아니다. 막대한 무역적자 및 재정적자를 지고 있는 까닭은 경제구조의 탓이다. 또한 달러화는 기축통화로 자국의 경제구조가 내수구조와는 다르게 국제무역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성장침체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 키이다. 또한 과거부터 소득주도성장을 경험한 독일은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라고 할 수 없다. 내수중심도 아니다. 그러나 독일은 과거에도 유로화 이전의 화폐인 마르크화가 기축통화였고 지금도 유럽 제일의 경제 강국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경제성장이 거의 전적으로 수출에 의존하며, 수출에 맞추어서 상품가격과 분배구조가 정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하려면 그 점을 고려해서 다른 보완점을 찾았어야 했다. 최저임금의 상승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저물가를 유지하려면 기술혁신을 강조했어야 했다. 기술혁신으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질 경우에만 실질임금의 증가를 가져와 소비의 진작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술혁신에 대해 정책당국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고 강조하지도 않았다. 과거에 기술혁신의 수혜가 주로 기업가에게 가는 경험에 매몰되어 있었다. 즉 우리나라 기술혁신의 주체는 주로 대기업으로 중소기업은 기술혁신의 속도가 크지 않다. 의도치 않았지만 최저임금의 상승폭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곳은 중소기업 노동자 그리고 기술혁신의 가능성이 떨어지는 중소자영업자였고 세계경제 침체기에 소득주도성장은 빛을 발하지 못하며 고용감소와 빈부격차의 심화로 나타났다. 그 원인에 대해 공격과 방어가 있겠지만 선한 의도가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 못한 까닭은 국민 일반에 미치는 정책일수록 그 정책의 부작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부족했다. 임금구조의 개선은 절대적이지만 수출주도의 경제구조 및 비기축통화, 세계경제의 침체국면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고려했어야 했다.
교육도 비슷하다. 지난 거의 10년 동안 진보교육감을 중심으로 학교와 교육에 대한 구조개혁이 단행되었지만 경쟁과 협동에 대한 담론이 지배했고 그 논쟁 또한 관념적이었다. 즉 경쟁과 협동에 대한 담론이 허구적·이분법적이다. 양시양비론을 말하지 않는다. “경쟁은 점수로 나타나는 악이며 협동은 정성적인 학생생활로서 선”이라고 단선적으로 보았다.
인간의 삶에서 경쟁, 협동, 갈등은 상시적이다. 즉 사실적 현상으로 삶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었다. 특정한 상호작용이 지나쳐서 인간의 삶을 위협한 것이 문제였다. 경쟁이 나쁘다면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고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방적으로 ‘경쟁을 악으로 협동을 선으로’ 규정하는 것은 대중 감정을 조작하며 흑백사고의 오류, 사실과 당위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혼동하고 자연스럽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경쟁은 공정한 규칙을 무시하지 않는다. 경쟁의 참여자들이 규칙에 동의했음을 전제한다. 그 경우에만 공동의 목표에 대한 우선적 보상을 승자에게 허용한다.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규칙의 문제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려면 공정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
보통 규칙의 공정성은 세 측면으로 되어있다. 첫째, 규칙이 지향하려는 목표의 가치이다. 인간이 존엄한 사회로 가는 수단이냐는 것이다. 둘째, 규칙의 민주성이다. 규칙의 제정 및 적용과정에 이해당사자가 참여할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졌냐는 것이다. 셋째, 규칙의 가변성이다. 규칙이 사회적 상황을 반영해 개정될 가능성이 열려있냐는 것이다. 이 점을 반영하지 않는 규칙은 공정하지 않고 공정한 경쟁은 불가능하다. 물론 경쟁이 악일 수 있다. 경쟁규칙이 공정한데도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무조건적으로 경쟁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카오스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즉 나비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한국 사회에 공정한 경쟁의 규칙이 갖춰져 있었는가를 따져본 후에 경쟁이 나쁜가에 대해 평가해야만 옳은 대안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담론에만 치우치면 협동과 경쟁을 선악의 개념으로 전도시킨다. 협동과 경쟁은 사실적 개념이며 선악은 가치적 개념인데도 상당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일반화시킨다. 그 과정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보다는 당위론적인 주장에 공을 들이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떤 문제든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세밀한 검토 없이는 좋은 대안을 찾을 수 없다. 실증적 검토 없이 경쟁을 매도하는 것은 무조건 협동을 찬미하는 경우와 유사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담론과 그에 기반한 정책이 학교에서 지식경시풍조를 만들어냈다. 학교에서 교육과정이 지식위주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을 바꾸는 정책이 경쟁구조를 없애거나 완화하는 과정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다보니 의도치 않았지만 개념과 내용 중심의 지식교육은 소홀하게 되었으며 감성과 활동 중심의 교육과정이 이데아로 등장했고, 나아가 과거의 학력은 시대적으로 낡은 학력으로 지양해야 하며 사실적 지식을 경시하고 역량을 강조하는 새로운 학력만이 미래 학력이라고 전시되었다. 지식은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역량)’, ‘조건적 지식(역량)’으로 나눠진다. 그 중에서 역량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새로운 듯이 절차적 지식과 조건적 지식만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세 지식은 상호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히 초중고 기본교육과정에서는 사실적 지식은 크게 중요한데도 경시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실적 지식에 대한 배움의 기회가 적은 저소득층 아이들이나 사실적 지식이 부족한 중간 이하의 학력 학생에게는 지식결핍이 나타났고 경제적 부유층인 학력 수혜층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며 기초학력 미달자의 비중은 더욱 커져갔다.
지금 한국의 초중등교육은 학력에서 정책당국의 의도와 결과의 부조화를 보고 있다. 그런데도 그 대안은 수년째 ‘기초학력부진아’만을 대상으로 하는 미시적이고 부분적이었다. 당연하게 초중고의 학력은 개선되지 않았고 더욱 상황은 나빠졌다. 소득주도성장도 마찬가지였다. 고용문제가 심각하니까 정부는 재정지출을 증가시켜 저소득층의 생계지원과 고용을 증가하려고 했지만 큰 효과는 없다.
그와 같은 미시적인 대안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경제부처든 교육부든 교육청이든 경쟁에 대한 담론적인 사고와 현실을 고려치 않는 추상적인 정책을 그만해야 한다. 저소득층의 인간다운 삶이나 교육에서 상대적 격차를 줄이려고 하면 허구적인 담론을 그만 둬야 한다. 가령 지식에서의 ‘사실적 지식’의 가치를 인정하고 국가교육과정이 정한 성취수준에 해당하는 수준만큼은 이르도록 정책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또한 총괄평가든 과정중심평가라고 하는 형성평가든 과정이자 수단에 불과하며 그 목적은 교육과정이 정한 성취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당위적 사실을 백안시하는 교육적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이런 방향은 과거처럼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줄을 세우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동안 한국교육이나 경제가 보여준 야수적인 경쟁을 그만두지만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다시 만들어내자는 의미이다. 즉 국민이 합의하고 그 규칙이 국민 일반에게 수용될 수 있도록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을 고민해야 하며 비과학적인 담론을 장밋빛 정책으로 포장하지 말자는 제안이다. 가령 일제고사냐 아니냐를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낡은 객관식 위주의 교육과정과 평가를 없애야 한다. 또한 학생부종합전형 같은 불공정하고 국민 대다수가 수용하지 못하는 전형방식도 개선이 아니라 폐지해야 한다. 당장이라도 대학서열화를 없앨 수 없으면 수능이라도 절대평가로 바꾸고 자격고사화하며, 개별대학에게 초중고 교육과정 범위에서의 대학입학고사로 논술형과 서술형 고사를 시행토록 하여 학력 토대인 지식교수학습과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데 주력해야 한다.
이러한 사례가 보여주는 실사구시적인 시도는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상식적이다. 현실과 미래를 고려하는 더 나은 공정한 규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면서도 전면적인 구조개혁을 위한 중심 고리에 집중하고 있다. 이처럼 경제와 교육의 다른 쟁점에서도 그 같은 정책방향을 추구할 경우에 ‘경쟁과 협동의 양립불가’라는 사변적인 담론을 실질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 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도 소득의 공정성에 기여하며 교육과 학력에서 감성과 시민성을 기르면서 지성의 지체를 막을 수 있다. 근대의 도구적 이성이 갖고 온 여러 문제를 감성에 의존하지 않고 비판적 이성을 무기로 실사구시적인 대안을 찾아야만 한다. 그 경우에만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개혁과 보수 및 선과 악의 경계에만 머무르며 지배 권력만 교체되는 흐릿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삶의 풍경에 드러난 교육과 경제문제를 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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