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배움 사이에서

by gyobasaNPO | 2021-10-20 11:16

• 본 글은 <격월간 민들레 제134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배움과 학습은 어떻게 다른가

 

학교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삶에서 배우는 것이 진짜 배움이고 학교에서 책으로 지식을 배우는 것은 진정한 배움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학습’보다 ‘배움’이란 말을 선호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교육’은 선호 대상이 아니라 기피 대상에 가깝다. 교육과잉 시대를 지나오면서 생겨난 과잉반응일까? 홈스쿨링을 옹호하는 글 중에 ‘배움? 좋지, 교육? 그건 아냐’ 같은 제목의 글도 있다.1 마치 배움과 교육이 서로를 배척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과연 그럴까? 교육과 배움 그리고 학습은 어떤 관계일까?

 

배움과 학습은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미묘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흔히 학습은 지적 배움의 경우에 쓰이고, 배움은 좀 더 폭넓은 의미로 쓰인다. 배움은 순 우리말인 반면 학습은 한자어로,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以時習之不亦說乎)”에서 나온 용어다. 엄밀히 해석하면 학습은 배우고(學) 익히는(習) 과정을 아우르는 말이다. 학(學)이 구체적 사실과 경험을 통한 배움이라면 습(習)은 이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개념적 지식을 형성하는 단계, 또는 체화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뇌기반 교육을 연구하는 주디 윌리스(Judy Willis)는 학습에서 패턴을 탐색할 때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2 하나는 구체적 차원에서의 이해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적 수준으로 확장된 이해 활동이다. 또 하나는 비유적 차원까지 확장된 이해 활동이다. 구체적 사실들을 통한 귀납적 이해에서 개념을 통한 연역적 이해로 나아간다. 하나하나 해보면서 배우는 과정을 거쳐 하나를 통해 열을 아는 연역적 배움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언어 학습에서 연역적 배움이 일어날 때 말문이 트인다. 비유적 차원의 이해는 응용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언어를 다른 맥락으로 비틀어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단계다.

 

사칙연산 학습을 예로 들자면, 첫 번째 차원은 구체적 지식을 습득하는 단계로, 문제를 통해 연산을 해보는 것이다. 다음은 개념을 이해하는 차원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개념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더하기와 곱하기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나눗셈은 곱셈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 단계에서는 한 개념이 다른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데까지 사고가 확장된다. 나누기2 대신 곱하기1/2을 할 줄 아는 단계다. 우리나라 학교교육에서 학습은 대개 첫 번째 차원에 머물러 있고 개념을 이해하는 차원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세 번째 차원은 비유적 용법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단계다. 또는 모순된 개념을 아우르는 변증법적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3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되는 원리, 피타고라스 정리를 통해 사칙연산이 기하의 세계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이해하는 단계다. 언어의 중의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이 단계에서 가능하다. 이를테면 우리말 ‘나누다’는 ‘편을 나누다’처럼 ‘갈라서다’의 뜻으로도 쓰이지만, ‘음식을 나누다’처럼 ‘함께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한 낱말이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종종 있다. 나누는 것이 곧 함께하는 것이 되는 이 차원은 초등 단계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학습의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귀납적 지식을 연역적 지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패턴을 인식하고 그것을 복제하는 일이다. 언어의 패턴을 인식하는 것이 배움이라면 그 패턴을 다양한 맥락에서 구사하는 과정이 익힘의 과정이다. 모든 아이들이 그 과정을 거쳐 모국어를 습득한다. 배움이 음식을 먹는 일이라면 익힘은 음식을 소화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먹는다’는 말이 소화시킨다는 의미까지 포함할 수 있지만, 익힘의 과정이 특히 중요한 경우도 있다. 악기 연주 같은 기예는 익힘의 과정 없이는 숙달할 수 없다. 소화 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때 음식이 피와 살이 된다.

 

 

교육이 배움을 방해할까

 

교실이 ‘배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본의 교육학자 사토 마나부가 주창한 학교개혁론인데, 일본 사회보다 한국 사회에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모둠학습을 통해 스스로 배우는 교실을 지향한다. 교사는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이다. 학생들이 수업의 주체가 되게 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자극한다.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에 대한 문제 제기이자 대안으로서, 교육보다 배움에 방점을 찍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강의식 수업은 교사 한 사람이 수십 명, 수백 명에게 어떤 지식을 전수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학생 개개인의 이해도 차이에 따라 배움의 정도가 다르지만, 그 격차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을 병행한다면 강의식 수업을 학교교육에서 포기할 필요는 없다.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데는 주입식 교육이나 암기가 효과적인 면이 있다. 가르침과 배움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어느 한쪽을 배제할 경우 반편 교육 또는 반편 배움이 되기 십상이다. 교사의 도움 없이 독서와 토론을 통해 아이들 스스로 배우기도 하지만, 그 배움의 질을 담보하기는 힘들다.

 

표준화에 근거한 근대 학교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진보적 교육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교육을 추구한다. 이른바 학습자중심의 맞춤식 교육이다. 하지만 이런 개별화 교육은 방법론이어야 하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보편성을 지향하면서 개별성을 배려해야 한다. 반대로 개인의 특성을 배려하고 살리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고 그것을 보편적인 교육과정으로 달성하려 드는 것은 마차를 말 앞에 매다는 격이다. 오늘날 혁신교육이 자칫 그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강의식 수업이나 표준화 교육의 단점이 많지만 개인 맞춤형 교육이 곧 대안은 아니다. 공교육 체제 안에서 시도하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고,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도 그다지 권할 만한 방식은 아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학교를 지향하더라도 강의식 수업이나 표준화 교육의 장점을 폐기할 필요는 없다. 강의식 수업과 모둠 학습 또는 개별 학습을 적절히 조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교과 학습과 동아리 활동의 적절한 조화도 필요하다. ‘배움’의 공동체에도 교육은 필요하다.

 

개인 맞춤형 학습을 추구하는 홈스쿨링이 아이들의 성취도를 높이지만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대안일지에 대해서는 좀더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팀플레이 역량을 기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이나 한 사회의 역량은 개개인의 역량보다 팀플레이 역량이 결정한다. 개인의 성취도를 우선시하고, 상대평가제의 내신등급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사회 전체의 역량을 떨어트린다. ‘배움의 공동체’에서 시도하는 모둠학습은 팀플레이 역량을 기르는 데 적합한 학습방식이다.

 

교육은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성취나 자립 능력을 기르는 것을 넘어,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으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교육이자 교사의 역할이다. 교육보다 배움을 강조하면서 교사들이 아이들 뒤로 물러나는 자세를 취한 것이 교육과잉 시대를 지나오면서 나타난 반작용이었다면, 이제는 다시금 교육과 교사의 역할을 고민해볼 시기다. ‘배움의 도’에서 주장하듯 무위의 교육이 언제나 좋은 교육은 아니다.

 

 

양자적 존재, 아이들

 

‘바람이 분다.’ 흔히 쓰는 말이다. 마치 바람이라는 입자가 있어서 그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말한다. 경험적으로는 그렇게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다. 오감으로 경험하는 현상을 표현하는 일상의 언어는 흔히 우리의 인식을 왜곡시킨다. 존재적 진실은 기압 차이로 인한 공기의 흐름이 바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부는 것이 바람이다. 달리 말해 바람은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의 이름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기압차가 존재할 때 바람이 생겨나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가르침과 배움의 에너지가 흐를 때 교육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람은 명사처럼 쓰이지만 본질에서는 동사다.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들은 환경과의 관계 속에 비로소 존재한다. 부모와 자녀, 선생과 제자 역시 입자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의 존재다. 사실 모든 존재들이 그렇다. 입자처럼 보이지만 관계가 얽힌 양상이 존재로 나타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이 사실은 ‘사건’이라는 것이 양자역학이 밝혀낸 우주의 비밀이다. 이는 모든 명사 속에 동사적 요소가 숨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장미는 장미가 아니다.

 

바람을 입자가 아닌 사건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현상 이면의 본질이 보이듯이, 아이들 또한 사건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고 성장과정이 제대로 보인다. 혼자 있을 때의 아이 모습과 친구들 속에 있을 때의 아이 모습이 다르다. 부모가 보는 아이와 교사가 보는 아이가 다를 수 있다. 빛이 때로는 입자 때로는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처럼. 관계가 존재를 규정한다면, 개체를 개별적 존재로 인식하는 귀납적 관점은 본질을 놓치기 쉽다.

 

연역적 관점은 관계를 통해 현상 너머 존재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한다. 관계의 메커니즘을 읽는 것은 사물이 아닌 사건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사건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독립된 개체에 고유한 속성이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이 어떤 속성을 연출해낸다. 물은 부드러움의 상징 같은 거지만, 워터커터에서 고압으로 분사되는 물은 금속이나 돌도 자른다. 물질 속에 불변의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관계 속에서 어떤 성질을 띨 따름이다.

 

사람들을 4가지, 9가지, 16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다양한 인간유형론이 있다. 이러한 이론들은 개개인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자칫 인간을 입자적 존재로 바라보게 만든다. 기질론, 체질론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소음인도 연인과 함께 있으면 소양인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어떤 기질이나 체질이 두드러진 사람도 있지만 고착된 속성으로 볼 것은 아니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아이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다시 말해 사물이 아닌 사건의 관점에서 아이를 바라봐야 한다. 그릇을 빚는 찰흙도 흙마다 고유한 성질이 있지만 물과 공기, 불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성질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흙을 주무르는 손의 온도에 따라서도 변한다. 뛰어난 도공은 흙의 상태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읽으면서 적절히 대응할 줄 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인체의 구조를 알아야 하듯이 교사는 아이들의 신체와 정서, 의식의 보편적인 발달과정을 알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개별적인 아이의 기질과 발달단계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당장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겠지만 아이의 인생에 두고두고 그림자를 드리울 가능성이 있다. 흙의 고유한 성질과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하는 성질을 고려해야 좋은 그릇을 빚을 수 있다. 황토로 백자를 만들 수 없고, 밀가루 반죽이 발효되는 시간을 모르는 사람이 맛있는 빵을 굽기란 힘들다. 개별성과 보편성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꿰뚫는 것이 실력이다.

 

 

상보성의 원리

 

‘교육은 만남’이라는 말은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만남으로 교육이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만남의 질이 교육의 질을 좌우하는 것이 사실이다. 선생과 학생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이 선생과 학생을 만들어내고 친구들을 만든다. 교사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기보다 아이들을 둘러싼 관계의 흐름, 상호작용의 과정을 살펴야 한다. 그 속에서 아이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변화와 성장이 일어난다. 아이도 교사도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다. 연인들이 밀당을 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사실 바람 같은 존재들이다.

 

만남은 교육의 시작이다. 스승을 만나는 것으로 제자는 배움의 길에 들어선다. 아무리 잘난 제자도 혼자서 배우는 것은 아니다. 스승과 동료들이 만들어내는 가르침과 배움의 자장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진다. 근대학교가 생겨나면서 ‘스승님’이 ‘선생님’으로 바뀌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시절을 지나 이제 학생과 선생이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것이 꼭 바람직한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배움이 작동하는 구조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스승이라는 존재가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로 있을 때 그를 뒤좇는 제자의 수행력이 더 좋아진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의 경우 좀더 친근한 선생이 나을 수 있다. 정신적 성장 속도가 점점 늦춰지고 있고 부모와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니 십대 중반까지는 친근한 선생님이 더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배움의 구조가 작동하는 친근한 사제관계를 맺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교사들에게 주어진 셈이다. 이 시대에 아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어떤 것일지 배움터를 만들 때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세세한 교육과정을 고민하는 것보다 배움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교육이 자칫 놓치기 쉬운 지점이다.

 

배움이 일어나려면 교육과 배움의 긴장관계가 유지될 필요가 있다. 선생의 역할이 필요하고, 서로 자극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들과 선후배가 있어야 한다. 배움터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아이들의 타고난 자질도 중요하지만 환경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천재도 홀로 성취를 이뤄낼 수는 없다. 세상을 바꾼 천재들 뒤에는 현명한 부모와 뛰어난 교사가 있었고, 주변에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다. 평범한 아이들의 경우는 더욱 환경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의지를 다잡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교육환경을 주의 깊게 세팅해야 한다. 동기부여도 환경이 받쳐줄 때 가능하다.

 

아이들의 성장은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고 계단식으로 일어난다.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다가 어느 시점에 비약적으로 한 계단을 뛰어오른다. 일시적인 퇴보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성장은 일관된 방향성을 갖고 있다. 적절한 피드백을 주고 난관에 부딪혔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성취도는 훨씬 높아질 수 있다. 변화의 흐름을 읽으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 교사의 내공이다. 교사 없이 배움이 가능하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스스로 배우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도 책 속의 교사든 거리의 교사든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대립되는 것은 상보적’이라는 닐스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는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다. 세상 만물은 대칭과 인과로 얽혀 있다. 언뜻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팽팽한 긴장이 만물을 존재하게 한다. 우주가 안정되어 있는 것은 그렇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긴밀하게 얽힐수록 더 안정된다. 수많은 요소들이 얽히고설켜 아슬아슬한 균형 속에 이 지구별에서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지만 그 얽힘이 긴밀하기 때문에 쉬 무너지지 않는다. 양자역학이 발견한 우주의 구성 원리는 교육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교육과 배움, 교사와 학생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할 때 배움터는 안정되고 아이들도 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본 글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1. 아론 팰벌, ‘배움? 좋지, 교육? 그건 아냐’ 『민들레』 2호, 1999.
  2. 주디 윌리스 씀, 이찬승, 김계현 옮김, 『수업혁명2』, 교육을바꾸는책, 2012.
  3. ‘지양하다’란 뜻의 변증법 용어인 독일어 ‘Aufheben’은 ‘폐기하다’와 ‘보존하다’라는 상반되는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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