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은 교사가 ‘수업’하는 곳인가?

by gyobasaNPO | 2021-07-15 14:09

언제부터인가 ‘수업’이 유아교육에서 일상 언어가 되었다. ‘유아교육’과 ‘수업’은 서로 어울리는 단어인가? 유치원은 유아에게 수업을 하는 곳인가? 유아교사는 수업을 잘하는 교사가 되어야 하는가? 필자에게는 이 단어가 여전히 낯설고 거북하다. 유치원은 교사가 유아에게 수업하는 곳이 아니라 유아가 놀이하며 배우는 곳이라고, 유아에게 수업하는 것이 아니라 유아의 놀이를 지원해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아교육의 ‘수업’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수학적 기호를 빌어 말해보고자 한다.

 

 

유치원 = 유아를 위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

 

유치원은 학교다. 『교육기본법』 제9조 ①항(유아교육·초등교육·중등교육 및 고등교육을 하기 위하여 학교를 둔다.)에서 그리고 『유아교육법』 제2조 2호(“유치원”이란 유아의 교육을 위하여 이 법에 따라 설립·운영되는 학교를 말한다.)에서 유치원을 학교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중앙정부와 지자체로부터 학교의 지위에 상응하는 지원을 받고 있다. 학교(學校, school)는 어떤 곳인가? 한 마디로 학교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형식적, 공적 기관이다. 대한민국의 법률에 따라 유치원은 유아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공의 기관이다. 그렇다면, 교육(敎育, education)은 무엇인가? 한자어로 풀이하면 교육은 ‘가르치고 기르는’ 행위이며, 라틴어 어원을 들어 말하자면 학습자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를 ‘밖으로 이끌어내는’ 행위다. ‘교육’이란 단어에는 교사가 학습자에게 기술이나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교육은 학습자에게 적합하고 학습자의 긍정적 변화에 도움이 되는 행위여야 한다. 초등교육은 초등학교 학생에게, 중등교육은 중·고교 학생에게, 유아교육은 유아에게 어울리고 도움이 되는 행위여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유치원은 학교이며, 학교인 유치원은 유아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유치원의 교육은 유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초·중등학교의 교육 ≒ 수업
유치원의 교육 ≒ 놀이
∴ 초·중등학교의 교육 ≠ 유치원의 교육

 

수업(授業, class/lesson)은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이나 기능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교사의 교수(敎授, teaching/instruction)가 수업의 기본 요건이다. 수업은 교육과 동등한 위치의 언어가 아니다. 수업은 학습자를 가르치고 기르는, 학습자에게서 무언가를 이끌어내는 교육의 수많은 행위들 중 하나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교육 시작 이래 지금까지 ‘수업’은 교과·학문중심 교육과정과 결부하여 유지되어 왔으며, 초·중등학교에서는 수업이 교육과 거의 유사한 의미로 여겨질 만큼 강력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40분, 45분, 50분 단위로 교사가 행하는 교과 수업을 학생이 정해진 시수에 따라 이수(履修)하는 것이 초·중등학교 교육의 일반적, 보편적 형태가 된 셈이다. 학습자 중심의 교육과정,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지향하면서 창의체험활동, 학생 참여형 수업, 자유학기제와 같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단위학교의 교육과정 편성 자율권을 확대한다 하더라도, 교과(군)별 체계와 교과의 단원/영역별 성취수준에 따른 평가 제도가 있는 한 교사가 행위주체로서 교수하는 수업은 초·중등학교의 교육을 대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치원의 교육은 어떤가? 1969년 『제1차 유치원교육과정』(문교부령 제 207호)이 고시된 이래 현행의 『2019 개정 누리과정』(교육부 고시 제2019-189호)에 이르기까지, 교과나 교과별 시수와 같은 용어가 국가 교육과정의 공적 문서에 등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동안 우리나라 국가수준 유치원 교육과정은 경험중심 교육과정을 지향하면서 유아의 발달이나 경험을 교육의 내용 영역으로 묶어 제시하고 이러한 교육 내용의 ‘통합’을 언급해 왔다. 그리고 유아기의 발달 특성이나 교육의 내용 및 방법으로서 ‘놀이’가 항상 강조되어 왔다. 특히 2020년 3월부터 시행된 『2019 개정 누리과정』은 ‘유아 중심과 놀이 중심을 추구한다.’고 교육과정의 성격을 명시하고 있으며, 교육과정의 목적(누리과정의 목적은 유아가 놀이를 통해 심신의 건강과 조화로운 발달을 이루고 바른 인성과 민주 시민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에 있다.)과 교육과정의 편성·운영(하루 일과에서 바깥 놀이를 포함하여 유아의 놀이가 충분히 이루어지도록 편성하여 운영한다.), 교수·학습의 기본 방향(유아가 흥미와 관심에 따라 놀이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즐기도록 한다. 유아가 놀이를 통해 배우도록 한다. 유아가 다양한 놀이와 활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실내외 환경을 구성한다.)에서 놀이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드러내고 있다. 국가수준 교육과정은 유치원 교육의 기본 방향을 유아가 주체가 되는 유아중심의 교육, 놀이를 통한 유아의 배움이 일어나는 놀이 중심의 교육을 명확하게 언표화 하고 있는 것이다.

 

놀이의 인격적 행위자(agent)는 유아이며, 놀이를 불러일으키는 행위자들은 놀이친구나 교사뿐 아니라, 놀잇감들, 놀이하는 공간과 시간, 함께 어우러지는 상상력과 실험, 도전, 각종 기호 등 수없이 많고, 또 그들 간의 관계는 역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놀이가 지닌 이러한 복잡성과 변화무쌍함이 유아교육을, 유치원에서의 가르침과 배움을, 교사의 역할을 ‘수업’이란 단어로 환원시킬 수 없는 이유다. 초중등학교에서의 교육이 교사가 행위주체가 되는 수업으로 대표된다면, 유치원에서는 유아가 행위자로 참여하여 복잡한 관계 속에서 생성해내는 놀이가 곧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초중등학교와 유치원에서 말하는 교육의 모습은 분명 다르다.

 

 

놀이중심 유아교육 = 놀이 × (법률 개정 ∪ 유아교육자들의 성찰)
※ 놀이 = ∑놀이행위자들

 

‘수업’은 유아교육에서 언제부터 공적 언어로 등장했을까? 국가수준 교육과정에서 이 단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제6차 유치원교육과정』(교육부 고시 제1998-10호)에서다. 교수·학습방법(라. 교육 활동은 발표, 토의, 관찰, 실험, 조사, 견학 등 유아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수업 방법들을 활용하도록 한다.)과 시·도교육청의 교육과정 운영 지침(라. 교육 과정 편성ㆍ운영의 개선을 위한 연구·시범 유치원을 운영하고, 수업 개선을 위한 연구 교사를 두어 적극적으로 지원한다.)에서 등장하기 시작한‘수업’은 이후 『2007 개정 유치원교육과정』(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153호)과 『5세 누리과정』(교육과학기술부 고시 제 2011–30호), 『3-5세 연령별 누리과정』(교육과학기술부 고시 제 2012–16호, 교육부 고시 제 2015–61호)에 이르기까지 시·도교육청의 교육과정 운영 지침이나 누리과정 운영평가(계획안 분석, 수업 참관 및 모니터링, 평가척도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평가한다.)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아·놀이중심을 추구하는 『2019 개정 누리과정』의 고시문과 해설서에서 ‘수업’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유아교육의 무게 중심이 교사에서 유아로, 교수에서 배움으로, 수업에서 놀이로 옮겨졌음을 보여주는 공적 증거인 것이다.

 

이렇게 국가수준 교육과정에서는 쓰지 않는 용어가 법률에는 여전히 남아있다. 교육의 패러다임 변화와 교육 현실을 반영하여 개정되는 국가 교육과정과 교육 정책 및 제도의 근거가 되는 법률 간에 언어가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다. 2004년 1월 제정된 『유아교육법』과 그에 따른 『유아교육법 시행령』과 『유아교육법 시행규칙』에 초·중등학교 교육의 용어가 그대로 유아교육 법률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지금까지도 ‘수업료’, ‘수업일수’, ‘수업연한’과 같은 표현이 법적 용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법률로써 조건화되는 바람에,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는 유치원의 ‘원격수업’까지 운운하게 된 것이다. 1차 유치원교육과정에서부터 2011년 『5세 누리과정』까지 교육과정 고시문에 ‘교육일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수업일수’와 다르게 산정한 ‘교육일수’를 기준으로 유아학비(일명, ‘누리과정비’)를 지원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유아교육의 목적과 성격에 맞도록, ‘교육비’, ‘교육일수’, ‘교육연한’으로 법률의 언어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법률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수업’이란 언어는 유아교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교육의 현상과 사건들을 전형화(典型化)하는 것이며, 유아와 환경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역동적 놀이와 배움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리는 도구가 되고 있다. 또한 ‘수업’은 유아교사의 역할에 대해 규제적, 규범적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놀이 중심 교육과정에서 추구하는 ‘놀이지원자’로서의 교사 역할과 충돌하며 현장에 혼란을 주고 있다. 이러한 규제적, 제한적 언어의 반복과 습관적 사용은 유아교육의 역동성을 축소시키고 ‘수업 잘하는 교사’, ‘수업 잘하는 유치원’의 제도화 기제로 작동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놀이는 일종의 상수(常數)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 놀이는 항상 존재한다. 어른들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아이들의 놀이와 달리, 법률과 유아교육자들이 변수다. 모든 유아교육의 정책과 제도의 근거가 법에 있고, 법률에서 쓰인 용어가 유아교육현장을 통제하는 위력이 대단함을 상기해 볼 때, 유아교육법에서 ‘수업’이란 표현을 거두어내는 작업이 시급하며, 여기에 유아교육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유아교육을 향한 목소리와 실천이 더해져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유아를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지, 초·중등 학교교육의 언어나 체제를 가져와 유아교육을 학교화(schooling)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유아교육의 본질이 무엇이고 유아교육을 유아교육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아교사들, 연구자들과 행정가들 모두 치열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유아가 중심이 되고 놀이가 살아나는, 유아를 위한 교육으로의 진짜 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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