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lowalk | 2018-03-21 15:12
우리나라는 1969년 유치원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고시하고 1979년에는 교사용 지도서를 개발하여 전국의 유치원에 보급하였다. 또 바로 전 정부 때 3-5세 유아를 위한 유치원 교육과정과 어린이집 표준보육과정을 ‘누리과정’으로 통합하고, 교사용 지도서를 개발하여 전국의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보급하였다. OECD 국가 중 유아를 위한 교육과정을 우리처럼 일찍 현장에 제공한 국가는 없으며, 교사용 지도서를 보급하는 나라도 극히 드물다.
국가가 고시한 교육과정은 교사의 수업을 통해 현장에서 실현된다. 교육과정을 실행하기 위해 교사는 다양한 수업 지원 자료를 활용한다. 교사용 지도서는 다양한 자료 중 한 가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사에게 지도서는 ‘교사용 국정교과서’이다. 교사용 지도서가 한 가지 수업 지원 자료가 아니라 국정교과서화 되었을 때 나타나는 득과 실은 무엇일까?
1. 교사용 지도서의 실체
3, 4, 5세 각 연령당 11권이다. 한 권당 한 개의 주제를 다루고, 각 주제당 4개의 소주제, 각 소주제마다 10-20개의 활동이 담긴 자료집이다. 교육부가 개발하여 전국의 유치원과 어린이집 3, 4, 5세 유아의 교육보육을 위해 보급한다.
교육부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3, 4, 5세반의 누리과정 실행을 위해 11개의 주제를 선정하였다(유치원/어린이집과 친구, 나와 가족, 우리 동네, 동식물과 자연, 건강과 안전, 생활도구, 교통기관, 우리나라, 세계 여러 나라, 환경과 생활, 봄여름가을겨울). 11개의 주제, 주제 당 4개의 소주제를 선정한 것은, 한 달에 한 개의 주제를 다루고, 매 주마다 한 개의 소주제를 다룰 수 있도록 현장의 편의성을 고려한 것이다. 이 지도서에 담긴 활동 내용을 근간으로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의 교육, 보육활동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각 소주제마다 여러 개의 활동을 포함했기 때문에 어떤 연령이던지 11권의 지도서에 담긴 활동은 수백 개에 달한다. 실제로 3, 4, 5세 교사용 지도서 총 36권에 포함된 활동의 총수는 2,116개에 이른다. 유치원 교육 일수는 물론, 어린이집 운영 일수에 비추어보아도 지도서에 담긴 활동이 얼마나 많은지 금방 알 수 있다.
지도서에 담긴 각 활동은 구조화된 양식에 맞추어 제시하였다. 활동 제목, 목표, 연령별 누리과정 관련 요소, 초등학교 교육과정 관련 내용은 위쪽에 배치하고, 활동 자료, 방법, 유의점, 평가, 확장 활동은 아래쪽에 배치하였다. 특히 활동 방법은 매우 정형화된 IRE(Initiation, Response, Evaluation; 교사가 주도하여 묻고, 학습자가 반응하고, 교사가 평가하는) 방식으로 제시하였다.
2. 교사용 지도서의 공헌
무엇보다도 유치원과 어린이집, 공립과 사립/민간 기관 간 교육 활동의 차이를 줄이는데 기여했을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나라 유아 교육, 보육은 사립/민간 의존도가 매우 높다. 지난 해 기준, 유치원 수는 국공립이 52.2%로 사립보다 더 많지만, 다니는 유아는 24.2%에 불과하다. 어린이집은 더 심각하여 국공립기관 수도 7.0%에 불과하고 다니는 유아도 12.1%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상을 개선해보고자 문재인 정부는 국공립 유치원,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의 비율을 40% 수준까지 올리겠다고 선언하고 추진 계획을 마련한 것이다.
사립/민간 의존도가 높은 유아 교육, 보육 현실에 정부는 사립유치원과 민간어린이집도 반드시 누리과정을 운영하도록 한다. 전체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사에게는 누리과정 연수를 필수로 이행하도록 하여 누리과정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며, 유치원은 장학지도와 평가를 통해 또 어린이집은 평가인증을 통해 관리한다. 당연히 교사 연수 과정에서 지도서의 적극적인 활용을 독려한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동일 연령 학급을 위해 똑같은 활동을 담은 교사용 지도서는 서로 다른 명칭의 기관에 다니는 유아들의 경험의 차이를 완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 이유는 다른 어떤 교육 단계보다도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사들 간의 학력과 임용과정에 이르는 훈련과정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용시험을 거친 교사들이나 일 년 단기교육을 받은 교사가 똑같은 지도서를 보며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한다는 것은 유아들의 경험을 유사하게 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요소가 크다. 또 교과서 없이 누리과정을 운영해야 하는 교사들에게도 국가가 개발해서 보급해주는 지도서를 그대로 따라서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안정감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누리과정의 도입과 함께 지도서를 보급하면서 정부는 오전에는 반드시 누리과정을 운영하고 방과후 과정이나 특별활동은 오후에 배치하도록 하여 유치원과 어린이집 하루의 일과도 매우 유사하게 만들었다. 22만원이라는 동일한 무상교육보육비를 지원받는 부모들에게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자녀들이 유사한 일과를 보낸다는 것 또한 상당히 명분이 있다.
3. 교사용 지도서가 잃고 있는 것
어떤 현상의 가장 큰 장점은 가장 큰 단점을 내포하기도 한다.
지도서는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육, 보육과정을 획일화시키는 일등 공신이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바람직한 교육보육과정 운영은 국가가 제시한 누리과정을 토대로 하되, 기관이 위치한 지역, 학급아이들의 사회문화적 배경, 교사의 교육보육과정 운영 역량 등을 고려하여 자율적으로 구성해가는 것이다. 교사가 국가 교육과정을 참고하되 유아들의 흥미와 관심을 고려하여 유아들과 함께 교육과정을 구성해가는 발현적 교육과정이 유아 단계의 가장 이상적인 교육보육과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현행의 교사용 지도서는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인 다양화와 자율, 지역화를 지양하고 획일화나 강제를 지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3월 넷째 주, 오전 시간대에 우리나라 어느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만 3세 반 교실에 가더라도 거의 같은 활동을 한다. 4세반, 5세반 교실도 마찬가지로 서울에 있는 유치원이나 경주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 거의 유사하다.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사들 대부분이 해당 연령의 담임교사를 위한 지도서를 보고 활동을 계획하여 운영하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평가를 통해 지도서의 활동이행 여부를 확인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사들에게 국가가 개발해서 보급한 지도서, 의무적인 연수를 통해 설명을 들은 지도서에 담긴 활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꼭 따라야 할 내용, 다 실행해야 하는 활동들로 간주될 것이 자명하다. 지도서의 서문에 ‘참고’ 자료임을 명시했어도 지도서는 교사가 꼭 보고 실행해야 할 내용이 담긴 ‘교사용 국정교과서’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의 유치원과 어린이집 동일 연령의 3월 넷째 주 활동이 거의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유치원과 경주 대릉원 앞의 어린이집 만 4세 유아들이 동일한 활동으로 오늘 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지도서의 개발, 보급을 찬성하는 사람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교과서가 없기 때문에 지도서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맞지 않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왜 교과서가 없을까를 생각해보자. 교과서는 학습자가 경험할 내용을 담은 자료라기보다 교사가 가르쳐야 할 내용을 담은 책이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유아교육보육을 위한 최소한의 국가 교육과정은 있지만, 교과서가 없다는 것은 일상의 활동을 보다 유아 중심으로 진행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실행해야 할 활동을 담은 지도서는 이런 유아교육의 본질적인 특성을 저해하는 것이 된다.
더구나 지도서는 주제가 달라도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활동을 제시하고 있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접근 방식을 고안하여 자신의 수업역량을 높이고 해가 갈수록 교육과정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함양하려는 교사의 전문성 발달 과정에도 지도서는 방해가 되고 있다.
4. 교사용 지도서의 대안
교사를 위한 수업 지원 자료는 필요하다. 더구나 훈련 과정의 차이가 큰 공사립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교사와 유아들을 위해서는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강제 자료가 아니라 기관과 학급의 지리적, 사회문화적 특성과 교사 자신의 경험을 고려하여 선택할 수 있는 자료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수업 지원 자료가 다양해야 한다.
모든 대안은 현장에 있다. 현장에는 아이들과 함께 일상의 활동을 재미있게 운영하면서도 의미 있는 배움을 창출해내는 교사들이 포진해 있다. 활동을 했던 교사 스스로, 학부모가, 선배나 후배 교사가 추천하여 자료를 공유하도록 해보자. 금방 일 년을 채울 수 있는 계절별 자료들이 연령별로 모아질 것이다.
예를 들어 유치원, 어린이집 교사들이 스스로 실행보고 재미있고 의미 있었던 활동을 동영상이나 문서로 올리고, 다른 교사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사들이 올린 자료를 수업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선배 교사와 교수들이 검토하여 논평을 달고, 이 내용을 참고하여 다른 교사들이 선택한다면 더욱 발전적인 형태의 자료들이 모아질 것이다. 플랫폼을 구축하여 운영할 수 있는 기관들도 이미 많다.
수많은 보통 사람의 의지와 참여로 이룬 정부답게 획일화된 전국적인 지도서는 그만 개발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현장에서 발굴한 다양한 자료가 다양한 교실 맥락에서 수정 보완되어 창의적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 이 내용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2017.12.21에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열린 [누리과정 운영의 자율성 강화를 위한 개선방안 토론회] 자료집을 참고하기 바람. 자료집에는 ‘유아의 놀이가 살아나고 교육과정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국가수준 유아교육과정’에 대해 임부연의 “성격 재정립”, 정선아의 “운영 개선”, 이경화의 “평가체제 정립” 발표 원고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칼럼은 본인의 평소 생각에 세 분의 발표 원고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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