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lowalk | 2017-04-05 12:04
지난 한 주 동안 국회 원내정당들의 대선후보가 모두 확정됐다. 대선후보들은 저마다 교육대통령을 자임하며 대형 교육공약들을 쏟아낸다. 대체로 교육부를 축소해서 교육지방자치를 강화하고 자사고와 특목고를 폐지해서 고교입시경쟁을 없애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교육부를 대체하거나 축소할 ‘국가교육위원회’가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최소한 10년은 지속가능한 교육정책의 입안을 겨냥한다면 ‘특권학교’ 폐지는 중학생의 고교입시경쟁을 완화함으로써 경쟁교육 완화효과와 사교육비 절감효과를 겨냥한다. 진보교육감 시대가 지속되는 이상 이것만 관철돼도 학교교육의 바람직한 변화가 적지 않을 것 같다.
가끔 역사의 변곡점이 되는 해가 있다. 촛불시민혁명의 힘으로 정권교체를 이루고 강력한 적폐청산과 새 질서구축 드라이브에 나설 금년도 그 중 하나가 될 게 틀림없다. 이미 정경유착의 죄를 물어 한국정치와 경제의 최고권력, 박근혜와 이재용을 동시에 구치소에 가둬놓았다. 조기 대선으로 9년의 시대착오적인 보수정권을 뒤로 하고 새 대통령과 새 정부 출범이 예정돼있다. 정권교체로 들어설 새 정권은 지난 7년 계속된 진보교육감들과 불화의 시대를 끝내고 긴밀히 협력하며 교육개혁에 속도와 탄력을 붙일 게 틀림없다. 2017년이 교육정책에서도 역사의 변곡점이 될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본격적이고 불가역적인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체감 당위와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 한편에서는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표되는 제4차 산업혁명이, 다른 한편에서는 인류의 경제활동이 초래한 전지구적 기후변화가 맹렬한 속도로 진행 중이다. 과도한 사교육비와 입시경쟁을 낳는 경제적 양극화와 차별적 노동시장에 대한 염증과 개혁열망도 하늘을 찌른다. 2016년 초에 우리나라를 강타한 알파고의 충격으로 21세기에 걸맞은 교육개혁과 학교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높다.
인공지능 시대와 기후변화 시대, 경제양극화 시대와 안보위기 시대는 어느 때보다 강하게 고동치는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지금처럼 몇 번의 선거에 머무는 힘없는 민주주의와 몇 번의 투표로 그치는 빈약한 시민참여로는 지금의 엄중한 4중 위기상황을 돌파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다행히 우리사회에서는 촛불시민혁명이 진행 중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앞날을 낙관하게 만드는 현 시기 최고의 공동자산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유례없이 고양된 민주시민의식과 시민연대의식을 체계적인 학교교육을 통해 차세대 학생들에게 전수한다면 우리사회의 민주주의는 불가역적으로 공고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학교교육의 변화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추진동력도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 암기주입식 교육을 최대한 창의인성교육으로, 경쟁교육을 최대한 협동교육으로,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교육을 최대한 민주시민교육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데 어떤 이견도 없다. 하지만 교육계는 우리사회의 욕망구조와 경제구조, 사회문화에 단단히 뿌리박고 움직이는 고난도 복잡계이다. 개혁적 실천의 중심을 확실하게 잡지 않으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기대한 변화가 아주 더디게 나타난다.
다행히 진보교육감이 대거 등장한 지난 2010년이래 학교교육은 미흡하나마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해왔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끊임없이 발목을 잡은 탓에 극단적인 이념투쟁의 대상이 되며 혼선을 빚어내기도 했지만 만약에 진보교육감이 대거 등장해서 교육개혁과 학교혁신에 힘쓰지 않았더라면 이명박근혜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쟁교육정책의 폐해가 더욱 깊어지고 아무런 희망의 싹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혁신교육을 주창하고 실천한 진보교육감 시대도 두 달만 지나면 7년을 채운다. 그동안 인사와 감독 행정, 시설과 조달 행정이 깨끗해졌고 학교에서 체벌문화가 사라졌으며 수업과 생활지도, 학교운영에서 선진국들의 이름난 학교 부럽지 않은 모범적인 혁신학교가 곳곳에 생겨났다. 의무교육기간 중 점심급식이 무상으로 제공되는 등 학생복지가 증대되고 학부모 부담이 경감됐다. 그밖에도 교육의 모든 분야와 층위에서 크고 작은 개혁과 혁신이 시도됐다.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 따라 변화와 혁신의 체감 정도는 다르겠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모두를 위한 교육을 향해 돌이킬 수 없는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도 혁신학교가 아닌 절대다수 일반학교에서 얼마나 수업이 바뀌었는지 의문이다. 특히 질문과 토론, 창의와 협동이 살아있는 수업이 얼마나 제공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입시경쟁교육에서 벗어나 민주시민교육에 가까워진 학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특히 교육적 관심과 실천이 일차적으로 부모소득이나 학교성적 하위 30% 학생에게 집중되는 학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학년별, 교과별 교사들이 교육과정과 수업, 평가방식을 놓고 끊임없이 토론하고 개선하는 학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학생자치와 학부모참여가 뿌리내린 학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지역사회와 협력하며 지역사회의 교육역량을 효과적으로 학교교육에 접목하는 학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이 모든 한계를 이명박근혜 정권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당연히 진보교육감 측에도 시행착오와 정책실패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명박근혜 정권 아래서는 진보교육감들의 개혁방향과 혁신정책을 지원하는 국회입법과 대통령령, 교육부의 시행규칙을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다. 교육부의 학교정책과 예산지원도 거꾸로 갔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보교육감에 반대하는 혁신저항세력들이 정권과 손을 잡고 진보교육감들의 교육정상화 노력을 이념적으로 분탕질할 수도 없었다. 구시대의 위기징후가 뚜렷하고 진보교육감 시대가 왔는데도 많은 학부모, 교사, 학생들이 여전히 혁신과 개혁을 체감하지 못한 이유다.
물론 학부모와 교사, 학생들은 모든 익숙한 것과 결별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상황이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안다. 학교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는다. 누군들 민주주의교육의 요청과 21세기교육의 요청을 거부하랴. 누군들 입시경쟁교육과 사교육의 틀에 갇힌 학교교육에 불만이 없으랴. 누군들 발표토론교육, 프로젝트협동교육, 노작생태교육, 자율자치교육으로 일대전환을 바라지 않으랴. 그저 관행적 사고와 구조화된 욕망, 눈앞의 필요와 익숙한 대응방식에서 하루아침에 벗어나기 어려울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변화 동기와 희망을 북돋는 일이다. 시민과 학부모, 교사와 학생에게 두려움과 우유부단에서 빠져나와 과감하게 변화와 혁신을 선택하자고 설득하는 일이다. 시민과 학부모, 교사와 학생들이 각자도생의 고립과 경쟁 속에서 길을 찾는 대신 집단지성과 시민연대 속에서 모두를 위한 ‘봄길’을 찾을 수 있도록 힘껏 지원하는 일이다. 교육주체들의 각성을 최대한 이끌어내고 그 힘을 조직하여 필요한 개혁과 혁신을 선도하며 ‘행복한 교육혁명’을 추동하는 일이다.
대선후보들은 이미 저마다 담대한 교육개혁방안을 내놓으며 시민의 교육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데 기여해왔다. 주요 후보마다 하나씩만 소개하면, 자사고와 특목고 폐지를 제일 먼저 공약으로 내건 후보는 유승민이었다. 처음으로 보수진영의 대선후보까지 가세한 덕분에 특권학교 폐지는 이제 움직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국회도 ‘나 홀로’ 반대를 계속할 자유한국당의 반대를 뚫고 나갈 수 있게 됐다. 안철수는 교육부 폐지와 국가교육위원회 신설, 66년 묵은 학제개편을 주창하며 상상력을 자극했다. 초등학교 5년, 중학교 5년, 총10년을 의무교육으로 하고 고등학교는 폐지하되 중학교 졸업 후 2년 간 진로탐색학교(일반고)나 직업학교(특성화고)를 다니도록 하는 파격적인 방안이다.
문재인의 교육공약 중에서는 초중등교육의 시도교육청 완전 이관 공약과 학교단위의 자치기구 제도화가 눈길을 잡아끈다. 교육정상화를 위해서는 교육자치와 학교자치가 기본이라는 올바른 인식이 반영된 정책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학부모의 정보비용과 정보격차를 줄여줄 대학입시전형의 단순화와 교육격차 해소를 겨냥한 모든 대학의 기회균등전형 의무화와 기업의 학력블라인드 채용 확대도 기대할만하다. 심상정의 교육공약 중에선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통합공교육화 공약과 급당 인원 20명 이하로 초6, 중2 책임학년제 도입 공약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직업계고를 내실화하며 확충하고 직업계고 졸업생의 선 취업, 후 진학을 유도하겠다는 공약과 교육격차해소를 위한 국공립대학 등록금 무상화공약도 좋다.
사실 나는 학교교육을 손수 챙기는 교육대통령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학교교육은 본래 지방자치의 영역이니 교육감에게 맡기면 된다. 1만 개가 넘는 학교마다 고유한 색깔이 있는데 대통령이 일률적으로 개입해서는 될 일이 없다. 대통령은 주구장창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교육개혁의 방향과 원칙을 선창하며 교육주체들과 일반시민을 교육개혁의 공론장으로 불러내고 거기서 드러난 사회적 합의를 교육입법과 교육예산으로 뒷받침하는 큰 역할만 하면 된다. 나는 여기서 교육대통령을 꿈꾸는 분들이 교육공약에서 소홀히 다루거나 놓친 실천적 중요성이 몹시 큰 세 가지 교육정책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첫째, 교육자치의 실질화, 둘째, 시대착오적 교장승진제도의 혁파, 셋째,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그것이다.
첫째, 교육자치의 실질화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역할 축소, 교육관계법의 권한책임주체 명확화, 교육감의 행정자율성 강화가 가장 중요하다. 먼저 교육부의 제자리 찾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교육관계법은 처음부터 교육자치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교육부의 중앙집권행정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교육감 직선제 도입으로 교육자치가 전면 부상한 이후에도 교육부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는 법령과 조직, 관행과 문화로 뒷받침돼 여전히 교육부가 학교교육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교육부 역할의 축소 요구는 흔히 국가교육위원회 신설 요구와 연동된다. 국가교육위 신설 요구는 5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오락가락한 현상에 대한 반성과 교육이 본래 국가의 일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일이라는 인식이 맞물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김상곤 전 경기교육감이 주창한 이래 국가교육위원회 신설 요구는 정치권과 교육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해서 새 정권에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중장기 교육정책을 담당할 사회적 합의기구로서의 국가교육위원회가 만들어져 교육부의 기능과 역할을 크게 잠식할 전망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 컬럼을 통해 별도로 점검할 기회를 가질 예정이다. 여기서는 다만 국가인권위원회를 구상하고 운영했던 경험에 비춰볼 때 과도한 환상은 금물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과연 국가교육위원이 정권의 5년 임기에 따라 춤추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긴 임기를 부여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위원 구성에서 정권프리미엄을 얼만큼이나 빼고 사회적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나아가서 그럴 경우 개혁의 진도와 속도를 얼마나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또한 개별 국가교육위원, 특히 비상임위원의 역할에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모든 것은 근거입법과 조직문화에 달려있다. 특히 기능 및 권한과 관련해서도 논의할 지점이 아주 많다. 예컨대, 국가교육위원회가 중장기계획을 입안하고 교육부가 집행한다는 식의 담론은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
다시 직선교육감 주도형 교육자치의 현실로 돌아오면 현재의 교육관계법에는 교육부 중심 시대의 구조와 장치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관계법령의 권한 및 책임주체를 “교육부장관 및/또는 교육감”으로 모호하게 규정한 교육관계법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 결과 교육부장관이 모든 영역에서 교육자치를 훼손할 법적 여지가 너무나 크다. 이걸 바꿔야 한다. 학교교육은 원칙적으로 지방자치에 속하는 일이다. 예외적으로 지방자치 차원에서 풀 수 없거나 전국적 차원의 일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교육감이 단일 권한 책임주체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교육자치의 관점에서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앞서 교육관계법령의 권한 및 책임주체를 일제히 교육감 중심으로 과감하게 정비할 필요가 있다.
하나만 더 지적하자면 현재 교육청의 제2인자, 부교육감은 교육감 추천, 교육부장관 제청, 국무총리 경유, 대통령 임명의 수순을 밟아 임명된다. 무조건 교육부 고위직이 내려온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의 이주호 교육부장관은 부교육감을 교육감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개정안을 낸 바 있다. 이 법안은 2010년 서울, 경기 등 진보교육감 6인 등장으로 없던 일이 됐다. 현재 아예 부교육감을 교육감이 임명하는 지방교육자치법 개정안이 제출된 상태다. 한걸음 나아가서 부교육감을 교육감과 성이 다른 러닝메이트 선거로 뽑는 방안도 고려할만하다. 교육부와 교육청의 협력은 얼마든지 다른 통로로 하면 된다. 지금처럼 교육부가 부교육감 독점공급권을 갖는 제도를 하루바삐 바꿔야 한다.
둘째, 학교교육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행 교장승진제도의 근본 수술이 필요하다.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의 1차 주체는 누가 뭐래도 교사다. 교사의 전문성과 자주성, 정치적 중립성을 일차적으로 이끌어내는 주체가 바로 교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를 바꾸고 싶으면 교장을 바꿔야 한다. 물론 교사를 바꾸면 교육이 바뀌고 교육이 바뀌면 아이가 바뀌고 아이가 바뀌면 미래가 바뀐다. 그런데 교장이 바뀌려면 교장승진제도를 바꿔야 한다. 교장승진제도는 학교단위에서 교육을 책임지는 교장을 어떤 원칙과 기준으로 세울지를 정한다. 교장승진제도는 어떤 역량과 덕성을 갖춘 사람이 교장이 될지를 정한다.
지금의 교장승진과정은 절대다수의 교장들을 권위순종형, 관료주의형 인간으로 주조한다. 절대다수의 교장들은 장학사나 장학관으로 근무하며 교육청의 관료주의에 길들어진 교장이거나 학교에서 10년 넘게 교무행정을 맡아 눈앞의 교장에게 충성을 다하며 온갖 가산점수를 취득해서 교장이 된 분들이다. 승진을 꿈꾸는 모든 교사들은 근무평정권한과 업무분장권한을 행사하는 교장에게 복종을 미덕으로 알고 지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교무행정경력과 교장충성심만 보상받는 교장승진제도 아래서는 수업과 생활교육에 열심이고 인격과 민주시민성에서 모범적인 교육자가 교장이 되기 어렵다. 이래서는 학교교육이 바뀔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현재의 교장승진제도는 철저하게 두 가지 충성심만을 보상한다. 교육청에 대한 충성심과 교장에 대한 충성심이 그것이다. 교장에 대한 충성심이 없으면 교장승진점수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근무평점에서 최고점을 받을 수 없다. 교육청에 대한 충성심이 없으면 교육청이 부여하는 각종 가산점을 취득할 수 없다. 현재의 교장승진제도 아래서는 눈앞의 교장에게 언제나 충성하고 잡다한 교무행정에 밝으며, 특히 교육청의 지시와 유인을 잘 따르는 교사만이 교장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수업을 늘 연구한다든가 아이들의 존경을 받는다든가 리더십이 뛰어나다든가 교육자로서 모범이 된다든가 하는 것들이 조금도 설자리가 없다. 교육자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참 교육자들은 오히려 열패감을 느낀다.
또 하나의 교장승진트랙은 장학사시험으로 장학사나 장학관을 하다 교장이 되는 경우다. 이 분들은 교육청의 관료주의와 간섭주의에 익숙해져서 학교에 돌아와 군림하거나 전시행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원칙적으로 장학사와 장학관은 교육행정전문가로 교육청에 있어야지 학교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교육관계법에서도 교사와 장학사는 전보가 아니라 전직으로 취급된다. 그만큼 서로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별종의 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장학사가 교감으로 나가고, 장학관이 교장으로 나가는 것이 당연한 관행이었다. 교육전문가의 정책전문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학교현장을 관료주의로 물들이는 이런 관행도 새 정권이 바로잡을 때가 왔다.
교장승진제도 개혁을 위해서는 대통령령을 고쳐 평교사도 교장에 지원할 수 있는 내부형 공모제를 최대한 활성화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일 바람직하다. 나아가서 전교조가 주장해온 교장선출보직제도 적극적으로 시범운영해보고 확대여부를 결정하는 게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누가 하더라도 20년 넘게 교육청과 교장에게 절대복종하며 집요하고 치밀하게 스펙관리를 해야만 취득할 수 있는 교장자격증을 일정한 근무연한과 교장연수시간을 쌓으면 누구나 취득할 수 있도록 개방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런 연후에 교장자격자들끼리 치열한 공모경쟁을 통해서 교장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전반을 뜯어고치면 된다.
셋째,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사회현안 수업 활성화와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원칙의 수용, 그리고 그에 입각한 교사의 정치기본권 회복이 핵심이다. 교육기본법상 학교교육의 목적은 자주생활능력을 갖춘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학교교육은 자주생활교육이자 민주시민교육이어야 한다. 민주시민교육을 위해 중요한 것은 학교사회와 지역사회, 나아가서 국가사회와 국제사회의 주요현안에 대한 학습과 토론이다. 사회현안을 민감하거나 복잡하다는 이유로 회피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업시간에 끌어안고 교육적으로 소화해야만 학생들이 정보홍수와 페이크뉴스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책임 있는 민주시민으로 커나갈 수 있다.
논쟁적인 사회현안에 대해 교육할 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보이텔스바흐 3대 원칙이다. 첫째, 교화금지원칙. 사회현안 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은 자신의 입장을 주입하거나 교화하는 데 있지 않다. 민주사회에서 교사의 역할은 교화나 주입과 양립할 수 없다. 둘째, 논쟁재현원칙. 학문과 정치의 세계에서 논쟁이 진행 중인 사안을 학교수업에서 다룰 경우에는 반드시 대립하는 입장을 균형 있게 제시함으로써 사안의 논쟁지형을 재현하여야 한다. 셋째, 학생이해관계중심원칙. 판단주체는 학생이다. 사회현안 교육의 목적은 학생 각자가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깨닫게 하는 데 있다. 교사의 역할은 단지 학생이 합당한 논거를 갖고 판단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교사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성은 논쟁적인 사회현안을 다루는 수업시간에 보이텔스바흐 3대원칙에 따라 교육하는 것으로 확보된다. 여기에 더해 근무시간 중이나 교내에서 교사의 정당활동과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분명한 점은 교사가 사회현안 수업시간에 자신의 견해를 주입하지 않고 논쟁성을 재현하며 학생판단을 존중한다면, 나아가서 근무시간 중이나 학교 안에서 어떤 당파적 정치활동도 하지 않는다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공무원법, 정당법, 선거법, 정치자금법은 교사의 정당가입과 정당활동, 선거입후보와 선거운동, 정치후원금까지 원천 봉쇄한다. 본래 이런 활동은 민주시민에게 장려 대상이지 금지 대상이 될 수 없다. 교사의 정치활동 제한은 오직 학생에 대한 교사의 일방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차단할 목적에서 최소화될 때만이 민주사회에서 정당하다. 이를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보이텔스바흐 원칙의 수업 적용과 근무시간이나 교내에서 정치활동 금지로 족하다. 교사가 근무시간과 학교 바깥에서 일반시민으로서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교사의 정당가입 기타 정치활동 허용은 교사들에게 정치적 기본권을 되돌려주는 인권보장효과 외에도 좋은 부수효과가 많다. 무엇보다 중산층 전문직의 정당가입을 유도하여 한국 정당의 체질과 문화를 바람직하게 바꾸고 지방자치와 민주주의를 살리는 일대 계기가 될 것이다. 교사의 정치기본권 회복은 교육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정치적 금치산자 신분을 강요받는 교사들이 무슨 수로 학생들을 온전한 민주시민으로 길러낼 수 있겠는가. 공동체의 일에 무관심한 사람이 좋은 인간이 될 수 없듯이, 시민성 없는 인성으로는 반쪽짜리 인간을 넘기 어렵듯이, 정치기본권 박탈에 순응하며 정치적 무관심 속으로 숨어들어간 교사들이 민주사회의 좋은 교사가 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영국은 1996년 교육법에 보이텔스바흐 제1원칙(교화금지원칙)과 제2원칙(논쟁재현원칙)을 각각 법조문으로 수용했다. 우리도 교육기본법에 유사한 법조문을 신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교육감은 전교조와 교총 등 교원단체와 좀 더 구체적인 협약을 체결해서 그 법의 정신에 생명과 실효성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와 함께 교원단체와 시민사회가 중심에 서고 교육감들이 지원하는 가운데 교원의 정치기본권 금지입법 개폐를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 추진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래교육의 도전에 응해야 한다. 대선후보들은 앞으로 남은 한 달 남짓한 기간에 고만고만한 정책공약 열거를 넘어 한국교육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압축해서 내놓아야 한다. 대선후보들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간명한 미래교육의 비전과 원칙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국민주권의 무한의지가 또렷하게 갈 바를 잃을 수 있다. 머지않아 대선승자가 정해지고 새 정권이 출범하면 이 부분의 공백을 메꿀 대대적인 공론화의 장을 열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처한 위기상황을 창조적으로 타개해나가려면 무엇보다도 문제해결을 위한 우리 국민의 집단지성을 믿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떤 지도자도 국민의 집단지성을 능가하지 못한다. 민주적인 국가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일은 모두를 위한 차원 높은 공동선을 제시하고 국민들이 집단지성을 통해 그 실현방안을 찾아갈 수 있도록 활발한 공론의 장을 열어주는 일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Source URL: https://21erick.org/column/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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