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건축, 또 하나의 교육과정

by slowalk | 2014-10-15 15:52

교육감 시절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2011년 구정연휴 때 일본건축가의 책을 읽어본 것이 계기가 됐다. 수도 서울에 공립 초중고 하나씩이라도 일자형 학교건물을 탈피한 혁신적인 학교건축을 선보이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공립학교 건축의 신기원을 열고 학교건물의 새 표준을 제시하고 싶었다.

 

유럽 및 미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파격적이고 교육친화적인 학교건축 시도는 공립학교보다는 사립학교나 대안학교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마침 송순재 선생님이 2011년 봄에 새로 펴낸 책에 이우학교 등 우리나라의 몇 대안학교 건축사례가 소개돼 있었다. 아이들한테 참 좋겠다 싶었다. 공교육도 마땅히 따라가야 할 길이 틀림없다고 판단됐고 그렇다면 서울교육청이 앞장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부터 한달음에 구경 가고 싶었지만 직원들을 출장 보냈다. 2012년에는 예산을 확보해서 혁신적인 설계를 공모할 수 있도록 필요한 준비과정을 밟아나갔다.

 

일자형 복도식 학교건축을 포기하고 다양한 공간모양을 마련할 경우 학교신축비용이 1자형건물 표준건축비보다 최소한 50% 이상 더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다. 학교신축은 교육부 승인사항인데 사사건건 충돌중인 진보교육감의 혁신프로젝트에 필요한 추가비용을 대줄지도 의문이었다. 만약 통상적으로만 인정할 경우 추가소요액은 교육청 자체예산으로 충당할 생각이었다. 그밖에도 절차적인 문제가 생각보다 많았다. 무엇보다 통상적인 최저입찰제로는 품이 많이 들어가는 창의적인 건물설계가 불가능했다. 실무진 검토 결과, 최고 역량의 건축가 4,5인을 제한적으로 초빙해서 현상 공모하는 방식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됐다. 각종 건축대상 수상자 중 학교건축 경력이 있는 세 분을 모시고 얘기를 나눴다.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며 세 분 모두 기꺼이 참여의사를 밝혔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추진이 안 됐다. 내가 두 번이나 9월에 구금되는 바람에 내 책임으로 2012년도나 2013년도 예산안을 짜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학교건축과 관련해서 아무 일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첫째, 사용자참여 설계과정을 최초로 도입했다. 학교건물은 학생들이 적어도 3년 이상 자기 집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종합적 학습·생활공간이다. 학교건물과 인테리어, 각종 공간이 예술성과 기능성, 편의성을 결합하고 있을수록 아이들은 저절로 심미안과 감성을 계발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학교건축은 아이들에게 공식 교육과정 못지않게 중요한 숨은 교육과정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학교건물과 시설의 형태와 색채, 공간분할과 가구, 장식과 소품들을 단순한 교육환경을 넘어 중요한 교육내용으로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학교건축의 설계를 건축공무원과 건축가에게 전적으로 맡겨온 기존의 관행을 바꿔야 한다.

 

따지고 보면 가정집을 설계할 때 건축주의 철학이나 취향, 요구를 설계자가 최대한 존중하고 반영하듯, 학교건물을 설계할 때에도 건축가가 사용자들의 필요와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 학교건물의 경우 날마다 직접 사용할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물론 가끔씩 학교를 들락거리며 이용할 학부모들과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필수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주자인 서울교육청과 학교건축가들은 수많은 학교를 지으면서도 이런 인식이 전혀 없었다.

 

막상 해보려니 신설학교의 경우 아직 교사와 학생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사와 학생은 모두 긴 세월을 학교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어떤 용도와 느낌의 공간과 시설이 필요한지 다 알고 있다. 따라서 굳이 신설학교 학생이나 교사가 아니더라도 학교 설계과정에 참여하고 싶은 의욕이 있고 직접 신설학교를 경험한 교사와 학생, 학부모를 공모하여 참여시키면 된다. 이 경우 당연히 중학교 신축이면 중고생이나 중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래된 학교를 전면 개축하는 경우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 일단 개축 학교를 하나 정해서 참여형 설계과정을 운영해보기로 했다.

 

참여형 설계과정을 운영하려면 최소한 6개월 이상 건축기간이 더 소요된다. 또한 건축가의 입장에선 매번 제안을 듣고 반영하는 것이 귀찮다. 비용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새로 무엇인가를 들어주려면 기존의 무엇인가와 바꾸는 수밖에 없을 때가 많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제대로 설명하며 참여자들의 집단기억과 지성을 일깨우기 시작하면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사용효율을 제고하는 몹시 유용한 제안들이 줄을 잇는 법이다. 굳이 이렇지 않더라도 학교건물의 축소모형을 놓고 어떤 생각으로 어떤 선택지 중에서 이런 선택에 이르렀는지 설명만 들어도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 이 과정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겐 건축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속속들이 알게 되는 최고의 진로체험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참여한 교사들과 지역주민에게도 시민참여형 평생교육의 일부로 오랫동안 잊지 못할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설계과정 뿐 아니라 학교 증개축과정 전체가 몹시 훌륭한 교육기회를 제공한다. 지금까지 학교 증개축은 그 과정을 겪는 학생과 교직원에게 엄청난 불편을 초래할 뿐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지금처럼 교육기회로 활용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불편만 겪는 상황에선 100% 맞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학생들이 피하듯 지나칠 뿐인 증개축과정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어주려는 교육적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건축이 그렇듯이 증개축과정 역시 설계, 토목, 전기, 배관, 창호, 가구, 장식 등 참으로 다양한 지식과 기술, 자재와 인력을 총동원하는 종합예술이다. 설계과정부터 시작해서 토목공사를 거쳐 건물이 올라가고 내부설비와 인테리어공사를 거쳐 준공되는 전 건축과정과 각 단계 공사의 감리과정은 그대로 훌륭한 교육이 될 수 있다.

 

학교증개축공사가 진행될 때 건축사와 시공사, 감리사가 함께 정기적으로, 이를테면 매달, 관심 있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현재 공사가 어디까지 왔으며 앞으로 남은 공사는 무엇인지를 생생하고 쉽게 가르쳐주면 어떨까. 각 단계의 공사에서 어떤 기술과 자재가 동원되며 그 선택은 어떤 기준과 제약에 따라 이뤄지는지, 그 기술과 자재는 어떤 공학과 디자인을 반영한 것이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나아가서 현 단계와 다음 단계의 공정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은 무엇이고 눈여겨봐야 할 사항은 무엇인지를 아이들에게 생생하게 현장과 교실에서 가르쳐주고 논의하는 시간을 가지면 그 자체로 참 좋은 교육이 되지 않을까. 학생시절에 이런 학습기회와 관찰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행운이 아닐까. 증개축과정을 이와 같이 산교육의 기회로 만들려면 교육청이 공사를 맡길 때부터 설계사, 시공사, 감리사에게 이런 설명의무를 지우는 방향으로 관련규정을 고쳐야 하는데 도중에 사건이 나면서 다른 곽노현표 정책들이 그랬듯이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학교 증개축과정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취임한지 한 달여 지난 2010년 8월 중순께 주어졌다. 어떤 학교에서 태풍으로 증개축현장의 가림막이 무너졌는데 태풍피해 보고서를 통해 그 현장사진을 보는 순간, 그 황량한 공사현장을 날마다 지나다닐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딱하게 여겨졌다. 태풍에 날아간 가림막은 공사현장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싸구려 함석 가림막이었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이상 교육적이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고려가 없는 게 분명했다. 학교시설과장을 불러 증개축현장을 대형 가림막으로 가릴 때에는 공공미술 성격을 가미하면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그렇게 하려면 비용이 더 들어가기 때문에 이미 계약이 끝난 상황에선 시공사가 안 하려 들면 방법이 없다는 답변이었다. 그렇다면 특성화고등학교나 인근대학교에 공공미술 작업하는 팀이 있는지 알아보고 자원봉사를 받도록 해보라고 지시했다.

 

한 달 후 10여개 대학과 특성화고등학교에서 공공미술 작업이 가능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문제의 학교현장에는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그림가림막이 세워졌다는 보고서도 사진과 함께 올라왔다. 이참에 한걸음 더 나가자 싶었다. 특성화고등학교 디자인학과 전공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이 직접 학교담장을 그림으로 단장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침 자원봉사 팀들도 벽화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2010년 가을부터 준비작업을 거쳐 2011년 3월부터 상대적으로 빈곤한 지역의 노후한 초중고 각 4개 학교, 총 12개교를 선정해서 ‘희망벽화’ 그리기를 실시했다. 서울디자인고 등 특성화고 2개 팀이 6개교씩 맡아 학생들의 제안과 협의 과정을 거쳐 벽화 주제를 정하고 밑그림을 디자인했다. 기술적 사항에 대해서는 벽화 전문업체의 자문을 받았다. 준비를 마친 후에는 원하는 학생들과 학부모, 교사들이 함께 밑그림이 그려진 담장에 색칠을 입혔다. 어떤 학교는 타일을 붙이는 방식도 사용했다. 나도 2011년 5월 16일 오후 한 시간 동안 운동모자를 뒤로 돌려쓴 채 아이들과 함께 노후하고 삭막한 담장에 나비 밑그림과 구름 밑그림을 찾아 정성껏 색칠을 했다. 어느 봄날의 기분 좋은 야외작업이었다. 그 학교담장에선 그때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많은 나비들이 날개를 펴고 나와 온 동네를 날아다닌다는 소문이 들린다.

 

※ 컬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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