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 교육이란 무엇인가?

by gyobasaNPO | 2026-11-05 11:00

우리가 일상에 녹이고 있고 또 교육정책에도 자연스럽게 스며있는 교육관을 되돌아보자고 제안합니다. ‘두려운’ 미래를 예상하며 ‘멀리 내다보는’ 교육 계획을 열망하는 추세를 경계합니다. 시간상 멀리 보기보다 교육을 근원적으로 보는 일이 긴요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교육이 어떤 행위인지, 의식 위에 떠올려 성찰하거나 일상에서 논의할 일은 거의 없다. 주변 일을 살피거나 앞날을 걱정하게 될 만큼 자라면,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교육에 대하여 나름의 관념을 품게 된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교육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라기도 했고, 이모저모로 부대끼며 ‘교육’도 짧지 않게 받아보았다. 그렇게 지니게 되는 고정관념을 우리는 나날의 삶(특히 교육)에 자연스럽게 녹이고는 있지만, 그것에 대해 새삼 되돌아볼 이유는 좀체 만나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교육은 은연히 우리 삶을 채색한다.

 

우리는 어떤 교육관에 매여 있는가? 교육정책은 여론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교육관을 어림하게 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물론 단순화하는 점이 있지만), 교육은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일이며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게임’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이른바 인공지능 시대에 국가경쟁력을 담보할 인재를 양성하는 사업이고, 개인에게는 막대한 ‘사비(私費)’를 들여서라도 경쟁자를 능가할 학교생활 기록과 시험 점수를 얻어내야 하는 게임이다. ‘AI 인재’ 양성과 ‘공정한 평가’는 최근 정책의 기틀이다. AI의 정체도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AI 과정(課程)’이란 걸 만들어 부과하며,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보다 평가나 입시에서의 채점에 우선 신경 쓴다. ‘교육’을 위한 이런 행태를 무심히 받아들이는 이면에 우리 교육관이 있다.

 

AI 인재를 키우려는 ‘교육’과 ‘공정한 평가’ 대안들은 필경 부딪칠 것이다. 교육 관료나 ‘전문가’들이 툭하면 얘기하듯이 AI 인재를 얻기 위해 창의적 사고력을 키워야 한다면, ‘공정한’ 시험(평가)은 그 일에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다. 창의와 사고의 역량을 키우려는 교육은 ‘정답주의’에 바탕을 둔(그래야 모두에게 수긍될/공정할 수 있는) 시험의 점수로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체제와 조화로울 수 없을 테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이렇지만, 교육부나 국가교육위원회가 생산하는 정책 문서에는 두 방향의 방안들이 으레 한자리에 있다.

 

함축된 교육의 의미로 보면 서로 등 돌리고 있는 정책 대안들이지만, 정부 계획이나 개혁안에는, ‘미래 교육’의 이름 아래 상보적이듯 정렬되어 있기 다반사이다. 곧이 읽으면, 교과 지식을 학생이 스스로 캐면서 나름의 의문을 키우고 깊이 생각하도록 키우는 것도 교육이고,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에 정답을 댈 수 있도록, 정도(正道)보다는 ‘왕도(王道)’의 요령을 학생에게 전수하는 것도 교육이란 뜻이다. 궁극에 두 ‘교육’은 조화로이 더욱 값진 교육으로 수렴하리라고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셈이기도 하다.

 

모순적인 대안들이 착오로 교육정책에 함께 투입되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대립해 문제를 일으킬 것이고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이어지면, 결국 미래 교육은 자연스럽게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교육정책의 역사를 참조한다면 그런 기대를 걸기는 어렵다. 과거 수십 년의 교육개혁 이력을 살피면, 그 흐름이 조삼모사라고 풍자될 만하다고 인정하게 된다. 왜 그런가? 부정합의 정책안들이 문제를 낳지 않았을 리는 없을 테다.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래서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집행되고 있는 정책 대안들이 서로 부딪쳐 문제를 일으키는 사태를 포착하려면, 서로 관련도 없어 보일 수 있는 여러 갈래의 집행 과정을 연계하여 총체적으로 조망할 안목이 필요하다. 그렇게 중심을 잡아줄 안목이 교육정책 행위에 작용한 적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런 안목은, 이를테면 교육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에서 비롯하여 성숙하는, 통섭적인 교육관을 요구한다. 개개인의 일상에서는 물론, 정책 과정에서도 그런 물음의 계제는 여간해서 생겨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한국 교육정책을 이끄는 통섭의 교육관은 없다. 그렇기에 교육 문제는 여론이 끓는 데 따라 결정된다. 그렇게 정책 의제로 떠오르는 문제들은 사실상 민원(民怨)일 테고, 거기엔 갈등이 이미 내재해 있다. 그것들은 ‘교육 문제’라 불리지만 교육이라는 공동선을 지지하기 위해 제기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를테면, ‘서·논술형 평가’ 이슈는 왜 중요하며, ‘공정한’ 채점이 되는지는 왜 바로 따져야 하는가? 학생들이 시험 위주 학습에 지쳐 내재적 흥미나 동기를 갖지 못하고 교사도 학원 강사와 비겨지는 현실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학교 굴레에서 벗어난 청년들은 ‘나처럼 고통스럽게 교육받으며 살아가야 할 아이라면’ 아예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게 낫다고 여긴다. 오늘날 만연해 보이는 이런 현상은 심각한 교육(!) 문제가 아닌가? 왜 이런 문제는 교육상 덜 중요하게 취급되는가?

 

우리의 교육 이야기나 정책은 요란하지만 정합되지 않는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교육이 개인사(個人事)로 변질해 버린 탓이 크지 않을까? 교육이 잘되고 못되고는 개인별로 교육을 ‘잘 받고 못 받고’의 문제로 둔갑했다. 교육에 대한 이의는 ‘민원’으로 해결하거나, 억울하면, 점수와 ‘생활 기록’ 그리고 졸업장의 높은 등급으로 해결해야 한다. 교육은 으레 학교와 대학이 맡는 일로 굳어져 있는데, 이 ‘교육기관’들은 이제 교육보다는 증서(credential) 발급을 주 업무로 삼게 되었다. 학생들이 쌓은 성적이나 학점에 맞춰 ‘배지’를 발부하는 게 교육의 전부인 형국이 되었다.

 

본디 교육은 사람됨의 품격을 키워야 하는 과업이었지만, 교육을 위임받은 학교나 대학은 그것을 드러내는 표징일 법한 ‘역량’에 대해 점수나 졸업장으로 보증서는 데 자족한다. ‘학력 인정 기관’이라는 배타적 공인에 안주하고 있다. 인증의 일은 ‘공식적인’ 과정과 절차를 따르기만 하는 것으로 완결된다. 기계적이고, 미래 세대에게 인격을 심는 과업보다 훨씬 쉽고, 거기에는 나날이 고심해야 하는 ‘불편’도 없다. 그래서 기관의 안일 또는 타락은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이런 형국에서 결국 문제는 교육 당사자들인 개인이 제기해야 하겠지만, 그들은 깨닫기도 전에 ‘학력(學歷)’을 두고 이루어지는 생존 게임에 급급해야 한다. 교육의 가치를 곱씹어 볼 여지는 부러 만들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원초적으로 보면, 교육의 성패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복리에 비추어 짚어져야 한다. 인류에게 교육은 집합적 생존에 이바지하도록 생겨났다. 취약하게 태어난 아기를 ‘마을’이 키우게 된 진화는 아기 개인의 생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마을(친족)의 존망이 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마을의 존망(공동선)에 비추어 볼 교육의 이유는 사라져 가는 듯하다.

 

근대에 와서 교육은 제도화되고 개인이 자유와 권리를 쥐기 위한 기제로 변질해 왔다. 교육의 잘잘못은 학교/대학이라는 제도로부터 개개인이 얻어내는 이익이나 그런 이익이 걸린 기회의 분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계산해서 따질 일이 되었다. 교육은 더 이상 우리 또는 인류를 위한 과업일 수 없게 된 듯하다. 이런 현실에서 물음은 절실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하는 게 교육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물음에 정답이 있으리니 찾자는 제안이 아니다. 우리의 일이고 우리를 위한 일인 만큼, 교육의 이름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의식하고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함께 교육의 길을 간다면, 어딘가에 공분모의 ‘뜻’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육에 두는 우리의 뜻은 무엇인가?

 

아래의 ‘인쇄(Print)하기’ 클릭한 후, ‘Ctrl + P’를 누르시면 칼럼 내용을 인쇄할 수 있습니다.

Source URL: https://21erick.org/column/18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