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6-06-17 10:07
|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실업고교 진흥정책으로 1970년대 전성기를 누린 한국의 실업교육이 고학력화·사무자동화·학력 차별 등의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1980년대 이후 급격히 쇠퇴하게 된 흐름을 살펴봅니다. |
실업학교의 역사
박정희 정권 시대 실업교육의 역사를 다루기 전에 먼저 ‘실업교육’이라는 말의 역사부터 간단히 살펴보자.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용어지만 그것에 정확히 대응하는 외국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 영어의 ‘vocational education’이나 독일어의 ‘Berufsbildung’, 프랑스어의 ‘L’enseignement professionnel’에 해당하는 번역어로는 ‘직업교육’이 더 적합하다. 그럼에도 왜 ‘실업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일까. 그 이유는 실업교육이 일본에서 독특하게 창안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실업교육에서의 ‘실업’ 개념은 자기의 이익에만 착목하는 사업인 ‘허업’과 대비되어 ‘자기를 이롭게 하는 동시에 사회와 국가도 이롭게 하는 사업’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말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시부사와 에이이치(涉澤榮一) 등에 의해 사용된 개념이었다.1 1899년의 「실업학교령」(칙령 제29호)에서부터 이 ‘실업’이라는 일종의 신조어를 직업교육을 하는 학교명에 붙여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직업학교 관련 법제는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1899년 4월에 발포된 「상공학교관제」였다. 이에 의거하여 ‘관립상공학교’가 개설되었고 이것이 1904년에 ‘농상공학교’로 개편되었으나 이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실업학교는 설치되지 못했다. 이후 통감부의 주도 하에 1909년 「실업학교령」이 공포되어 식민지적인 중등 실업교육 체제가 형성되었다. 제1차 「조선교육령」 하에서는 4년제 보통학교 위에 2년 혹은 3년제의 농업학교, 공업학교, 상업학교가 위치하며 모두 실업학교로 불리었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 하에서는 6년제 보통학교 위에 3년제 또는 5년제 실업학교가 들어서는 체제로 바뀌었다.
식민지기에 민족 차별적인 교육 기회 제한 상황 하에서 실업학교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입학 경쟁 상황을 보더라도 예컨대 1934년에 공립고등보통학교 합격률은 28.1%였던 반면 공립농업학교, 공립상업학교, 공립상공학교의 그것은 각기 17.3%, 15.2%, 15.4%여서 입학하기 어려웠다.2 실업학교의 졸업 이후 근대적 부문으로의 취업률이 다른 학교에 비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졸업자의 취업률을 보면, 공립농업학교는 졸업생의 51.1%가 관공서에 취업했는데 그것은 조선총독부 농업기사로의 취업이었다. 공립상업학교 졸업생의 60.1%, 공립상공학교 졸업생의 44.8%도 회사상점 등 근대적 부문에 취업할 수 있었다.3
무엇보다도 식민지기에 실업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오늘날 4년제 대학에 취학하는 것보다 훨씬 소수의 정예 집단에 선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42년 당시 조선인 인구 25,525,409명 중에서 중등학교에 취학한 한국인 학생은 고보, 여고보, 실업학교, 실업보습학교를 모두 포함하여 86,110명으로 인구 만 명당 33.7명에 불과하였다.4 그런데 1970년에는 총인구 31,469,132명 중 대학생은 192,087명으로 인구 만 명당 61.0명에 달했다.5 식민지기에 실업학교 취학자는 1970년대의 대학생 이상으로 매우 선별된 집단이었던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중등 및 고등교육이 급격한 팽창을 보였으며, 실업학교는 그 숫자에 있어서도 1945년부터 1960년까지 농업고교가 30교에서 129교로, 공업고교가 4교에서 48교로, 상업고교가 22교에서 87교로, 수산고교가 2교에서 14교로 증가하는 등 비약적인 양적 팽창을 보였다.6 그러나 그 내실을 보면 발전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실업계 고등학교의 이름을 단 학교들도 일반계 고등학교나 다름 없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실업계 고등학교는 식민지기의 교육과정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거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진학반’을 운영하고 있었다.7 예컨대 당시 유수한 실업고교로 평가받던 부산상고조차 1960년 당시에는 졸업반 497명 중 상급학교 진학을 희망하는 250명을 선발하여 진학반을 운영할 정도였다.8 이와 관련하여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실태를 지적했다.
실업고등학교의 명칭을 가진 학교에 있어서도 교과 내용 교육방침 및 시설 등을 살펴본다면 인문계와 별반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해당 실업 면에 대한 내용이 불충실한 학교가 태반이며 심지어는 진학반과 실업반으로 양분해서 전자에서는 인문계와 거의 마찬가지로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교육에 시종하고 있는 예조차 있는 것이다.9
이 사설은 그 주된 원인을 “산업계가 실업학교 출신자를 흡수 소화해서 그들의 습득한 지식과 기술을 살릴 수 있을 만큼 활발하지 못한 데”에서 찾았다. 이런 상황은 실업고교 지원자의 격감으로 나타났다. 1959년에는 실업고교 모집정원 41,300명 중 겨우 29,565명만 입학하여 정원의 71.6% 밖에는 채우지 못했다.10
이런 상황에 대해 문교부는 이미 1956년에 「실업교육5개년계획서」를 발표하여 정책적으로 대응하고자 했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실업교육 담당 장학관과 편수관의 증원 배치, 실업계 교원의 재교육, 실험실습비 및 실업기술계 학교 건축비와 시설비 국고보조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한 이 계획에는 1960년까지 총예산 340억 환이 소요될 예정이었고 그중 국고 부담이 200억 환으로 예상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1956년에 문교부 총예산이 약 316억 환이었으니 사실상 이 계획 그대로는 실행이 불가능했다. 결국 이 계획은 1960년의 4월혁명으로 사실상 중단되었다.11
박정희 정권의 실업고교 진흥정책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 이등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12라고 일갈했던 박정희는 실업교육 진흥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집권초부터 표명했다.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9월에는 대학생의 구성에서 실업계를 70%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발표했고, 1962년 10월에는 일반계 고교의 60% 내지 70%를 ‘종합고등학교’로 개편할 것이라는 방안도 공표했으며, 인문고교 대 실업고교의 비율을 점진적으로 조정하여 1980년에는 3:7이 되도록 하겠다는 구상도 드러냈다.13
이상과 같은 실업교육 진흥 의지는 1970년대에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수출 위주의 경제성장 정책을 핵으로 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1차(1962〜1966)와 2차(1967〜1971)까지는 경공업 위주의 단순가공에 의존한 수출전략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그 주된 노동력은 초등 의무교육만 수료하고 특별한 기술 훈련을 받지 않은 여자 단순기능공이었고 그런 만큼 중등 실업교육에의 의존도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수출산업의 중심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되었고 1973년에 ‘중화학공업 추진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중등 실업교육, 특히 공업고교 교육에의 의존도가 급격하게 높아졌다.
정부는 1973년 이래 1979년까지 인력개발에 투입한 총 985억 6,500만 원의 예산 중 69.2%를 공고에 투입했으며, 전문화·특성화 정책에 따라 기계공고 중심으로 선별 지원했다. 1977년까지는 전국의 공고 중 11개교를 특성화공고로 지정해 선별 육성했으며, 1977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후는 공고를 기계공고와 시범공고, 특성화공고, 일반공고로 세분화해 이 중 기계공고에 시설 지원을 집중했다.14 이 과정에서 이른바 ‘엘리트’ 공업고교들이 부상했다. 1967년 서독의 차관에 기반해 설립된 ‘부산한독직업학교’는 1974년에 ‘부산기계공고’로 개편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1972년에 박정희의 지시로 ‘동양 최고의 공고’를 표방하며 개교한 ‘금오공고’는 일본의 기술원조자금으로 개교했는데 당시 일본 측이 부담한 액수는 총 14억 6천여만 엔에 달했다.15 한편 정부는 국영기업체와 민간기업에도 공고 설립을 강력히 요구해 포항공고, 광산공고, 수도공고(한전 출자), 동아공고(동아그룹), 대림공고(대림산업) 등 사립공고들이 연이어 설립되었다.16
수출 위주의 경제개발과 관련하여 특히 공업고교를 통한 기능사 양성에 주목한 이유는 당시 한국 공업의 정밀가공 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도와 중화학공업 위주의 산업화 전략 추진에 핵심 브레인으로 활동했던 오원철(吳源哲) 당시 청와대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금오공고 설립 당시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한다.
병기란 초정밀 가공품으로 100분의 1㎜의 정밀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공할 수 있는 한계는 10분의 1㎜ 정도였다. 과거 식민지 시대부터 일본인들은 ‘한국인은 정밀가공을 할 소질이 없다’고 평해 왔다. ‘정성’들여 ‘정직’하게 작업해야 ‘정밀’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데, 이 정성, 정직, 정밀 정신이 한국인에게는 없다는 뜻이었다. ··· 그래서 시범공업학교를 설립했다. 일본 교사를 초빙해서 일본식대로 교육과 실습을 시켰다. 정신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전원 기숙사에 집어넣고 군대식으로 규율을 잡았다. 이 학교가 금오공업고등학교였다. 그 후 100분의 1㎜를 가공할 수 있는 ‘정밀기능사’를 양성하기 위해, 각 도에 하나씩 기계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금오공고와 같은 개념으로 교육과 정신훈련을 실시했다. 박 대통령은 이들 공업고등학교에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휘호를 내리는 동시에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며 분발할 것을 촉구했다. 각 학교에서는 이 휘호를 각자한 탑을 세웠다. 그리고 아침 조회 때마다 이 탑을 향해, ‘나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이다.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고 크게 합창한 후 교육장으로 향했다.17
100분의 1㎜의 정밀도를 지닌 금속가공 능력을 갖춘 노동력을 길러내기 위해 특별히 ‘기계’공고가 절실히 필요했다. 외국의 차관을 우선적으로 투여하여 설립한 기계공고 학생들에게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휘호까지 내렸으며, 이후 그는 지방을 순시할 때마다 몇 차례나 공고를 방문해 격려하곤 했다.18 위의 증언에서 오원철은 금오공고의 교육이 ‘일본식’ 그리고 ‘군대식’이었다는 점을 말한다. 독일이나 프랑스 기타 서구식 실업교육이 아니라 일본형 실업교육을 모델로 하여 1970년대의 중등 실업교육이 재편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군대식 규율’을 기반으로 한 기능공 훈련 모델이 우리 사회에서 독자적으로 모색되고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여하튼 박정희 정부는 기계공고의 설립과 운영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1974년에 신설된 전북기계공고의 경우 투입된 시설자금은 모두 35억 9천4백만 원이었고 그것은 일반고교 설립비용의 10배에 달할 정도였다. 전북기계공고의 입학금과 수업료는 무상이었고, 학생들의 숙식비는 졸업 후 갚는 조건으로 저리융자를 해주었다. 그 결과 우수한 중학교 졸업생들을 입학생으로 확보하게 된다. 재학생의 4.2%가 중학교를 수석 졸업했고 37.6%가 졸업성적 5% 이내, 49.6%가 9% 이내, 나머지 8.6%도 12% 이내였다고 한다.19 금오공고의 경우에도 1976년의 경우, 금오공고 신입생 400명 중 126명이 중학교 수석 졸업생, 256명은 상위 5% 이내였을 정도다.20 이처럼 1970년대 중반에 실업고교 그중에서도 기계공고는 중학교를 졸업한 가장 우수한 학력 집단 안에서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었다. 이는 놀라운 교육 성과로 나타났다.
기능올림픽과 실업교육의 성과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와 후원, 그리고 우수한 학생 자원의 확보와 같은 투입 요인은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져야 했고, 실제로 그것은 이른바 ‘기능올림픽’에서의 수상이라는 성과로 가시화되어 나타났다.
‘국제기능경기대회’는 1950년 스페인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은 1967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다. 1977년 7월, 위트레흐트에서 열린 제23회 ‘국제기능경기대회’(International Vocational Training Competition)―당시 언론에서는 ‘기능올림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4개, 동메달 5개로 처음으로 종합우승을 차지하고 귀국한 선수단이 국내에서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 수상자들 중에는 부산기계공고, 성공기계공고, 금오공고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21 이듬해인 1978년에는 부산기계공고에서 제24회 대회가 열렸고, 여기서도 금메달 22개, 은메달 6개, 동메달 3개 등을 수상해 2회 연속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그 성과가 공업고교 교육에 있었다고 신문 사설은 다음과 같이 상찬했다.
··· 15개국에서 288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그처럼 훌륭한 성적을 올린 것은 ··· 우리의 기능인력의 질적 수준이 그만큼 향상되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금오공고 부산기계공고 정수직업훈련원 등 70년대에 들어와서 이른바 전략산업의 기능인력양성기관으로 설립한 공고 출신자들이 대거 입상한 것은 실업고교의 설립과 운영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22
이후에도 한국은 연속하여 2015년 상파울루 대회까지 두 차례를 빼놓고 종합우승을 놓치지 않았다.23
1970년대 후반은 한국 중등 실업교육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빛나던 융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공고는 대부분 기능사 2급 및 정밀가공기능사 2급(기계과) 자격 취득을 졸업요건으로 하고 있어 거의 대부분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가능했고, 방위산업이나 기간산업에 근무할 경우 병역면제의 특혜도 보장받았다. 동시에, 상업고교 졸업생들 특히 ‘주산1급 부기2급 자격 취득자’는 당시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던 상사, 은행, 기업체 등에서 고용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다.24 1977년 당시 “S상고 졸업예정자 8백43명 중 9월 20일 현재 취업이 결정된 학생은 35% 선인 2백90여 명. 그러나 ··· 내년 2월 말까지는 90% 이상 취업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S공고 졸업예정자 50%가 이미 취업이 결정돼 현장실습 중이며 오는 12월 말까지는 2급 기능사 자격을 획득한 87%의 졸업예정자가 모두 취업될 것이라고 전망, S·K·T상고, S·T여상, S·Y공고 등 실업계 명문 고교들은 졸업생들의 구직 자체에는 큰 어려움을 못 느낀다”25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다만, 이상과 같은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의 화려한 수상 경력, 상대적으로 높은 졸업 후 취업률 이면에는 실업고교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을 쉽게 전망하기 어렵게 만드는 그늘도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실업고교 졸업생의 높은 취업률을 보도한 기사의 말미에 실업계 출신 취업자들이 겪는 부당한 대우 또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월 4만 원씩 받기로 하고 지난 12일부터 H사에서 실습 중인 S공고 한모군(18)은 “우리는 공업한국의 기수가 되겠다는 각오와 긍지를 안고 일한다. 그러나 업주들은 우리에게 ‘값싼 기능공’ 이상의 대우를 해주지 않고 있다”고 분개했다. 온몸이 기름투성이로 땀흘리며 일하는 공고 출신들에겐 단정한 넥타이를 맨 사무실의 대졸 직원들이 ‘먼나라 사람’으로만 느껴진다. 그들보다 훨씬 고된 일을 열심히 하지만 월급봉투의 두께는 그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을 나와야지’ 하는 응어리를 가슴 깊이 심어놓는다.26
실업계 고교 출신 취업자가 대학 진학에 대해 갖는 ‘한’에 가까운 좌절된 욕망은 최고 수준의 기능 보유자에게서도 확인되었다. 1981년 제2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기계조립부문 금메달 수상자는 “이번 기능올림픽에 출전했던 대표선수들의 대부분이 상급학교 진학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며 공고를 졸업한 기능인이 취업 4년 후에 대학졸업자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토로했다.27 1980년도에 금오공고의 경우 졸업생 3백여 명 중 67명이, 부산기계공고의 경우 8백여 명 중 2백 명이 무더기로 대학에 진학하여 그런 조짐을 이미 보이고 있었다.28
박정희 정권의 기능공 우대와 실업교육 진흥 정책의 내실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기능공 전체가 기술력으로 인정받고, ‘생산 자체에 종사하고 있던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그 외 직업 종사자들과 동등’해지도록 하는 사회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능올림픽 수상자와 같은 소수의 우수 기능공을 선별하여 포상하고 혜택을 주는 방식이었는데 그 가장 주된 혜택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 부여였다. 그 결과로 ‘기능 우대사회를 만들기 위해 도입된 기능경기대회의 수상 특혜가 학벌과 학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창출’하는 역설적인 결과가 빚어지기도 했다.29
중등 실업교육의 쇠퇴
1980년대 들어서 중등교육 수준의 실업교육은 점차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73년 이후 급증한 공고들 중에서 절반 가량이 사립이었는데, 기업체가 설립한 이들 사립 공고는 국가가 외자를 독점적으로 몰아준 국공립 공고에 비해 시설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공고 시설을 금액으로 환산할 때 1984년 현재 국공립의 설비 총액은 약 580억 원인데 반해 사립은 약 248억 원으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문교부는 1980년에 전국 197곳의 공고를 통폐합해 100곳으로 정리했다.30
실업교육의 추이를 고교생 중에서 실업계 고교생이 차지하는 비중을 통해 살펴보자.
<표 1> 일반계 고교와 실업계 고교 학생 구성비: 1952~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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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연도 |
고등학생 전체 |
일반계 고교 학생 수 |
실업계 고교 학생 수 |
일반계 고교 % |
실업계 고교 % |
| 1952 | 131,202 | 59,421 | 61,524 | 45.3 | 54.7 |
| 1955 | 262,941 | 141,702 | 108,009 | 53.9 | 46.1 |
| 1960 | 263,563 | 164,492 | 99,071 | 62.4 | 37.6 |
| 1965 | 426,531 | 254,095 | 172,436 | 59.6 | 40.4 |
| 1970 | 590,382 | 315,367 | 275,015 | 53.4 | 46.6 |
| 1975 | 1,123,017 | 648,149 | 474,868 | 57.7 | 42.3 |
| 1980 | 1,696,792 | 932,605 | 764,187 | 55.0 | 45.0 |
| 1985 | 2,152,802 | 1,266,840 | 885,962 | 58.8 | 41.2 |
| 1990 | 2,283,806 | 1,473,155 | 810,651 | 64.5 | 35.5 |
| 1995 | 2,157,880 | 1,246,427 | 911,453 | 57.8 | 42.2 |
| 2000 | 2,071,468 | 1,324,482 | 746,986 | 63.9 | 36.1 |
| 2005 | 1,762,896 | 1,259,792 | 503,104 | 71.5 | 28.5 |
| 2010 | 1,962,356 | 1,496,227 | 466,129 | 76.2 | 23.8 |
| 주) 1952, 1955년 실업계 고교에 사범학교가 포함되었다
출처) 1952-1955년: 교육신보사 (1960), 『대한교육연감』 / 1960년: 『한국통계연감』 1961년 / 1965-1990년: 『문교통계연보』 각년판 / 1995-2010년: 『교육통계연보』 각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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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에는 실업계 고교생의 비중이 54.7%로 높았으나 이후 1950년대에 40% 중반대로 떨어져 1960년에는 37.6%로까지 내려갔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대에는 다시 상승한다. 위의 표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1973년 전체 고교생 839,318명 중에서 실업고생은 428,212명으로 그 비중은 51.0%였다. 1952년의 54.7% 이래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50%를 넘어선 때였다.31 이 때가 실업고교가 융성하던 정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실업고교 진흥 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업고 학생의 비중이 더 늘어나지는 않았다. 대체로 40% 대를 유지했지만, 1980년 이후에는 30% 대 후반에서 40% 대 전반을 오르내리다 2000년 이후에는 20〜30% 대로 급격히 떨어진다. 실업계 고교생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을 실업교육의 쇠퇴의 한 지표로 볼 수 있다면, 그 가장 큰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요인은 1973년의 ‘고교평준화’ 정책, 그리고 1980년의 ‘졸업정원제’ 정책이다. 전자로 인해 일반계 고교 입학에의 난관이―일종의 자격고사로서 고입 연합고사 제도는 실시되었지만― 사라져 대학 입학 기회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그리고 후자로 인해 대학 입학 정원이 30% 이상 급증하여 입학이 크게 용이해졌다. 연쇄적으로 등장한 이러한 포퓰리즘적인 두 정책이 사람들로 하여금 교육적 진로의 방향을 실업계에서 일반계로 바꾸게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정권이 취한 고교평준화 정책이 역설적이게도 실업교육 진흥 정책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를 초래한 셈이다.
박정희 정권은 적극적인 기능 우대사회 정책을 펼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현장에서 유지되고 있던 관리직·사무직과 기능직·생산직 간의 격차는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절대적인 임금 격차에 더하여 대부분의 기업에서 승진 구조 자체에서 사무직과 기능직이 다른 문제도 있었다. 연공서열제에 따라 연한이 흐르면서 대리·과장으로 승진하는 사무직과 다른 승진 구조의 문제, 즉 “대졸 사원들은 학력 하나만으로도 3년 단위로 대리, 과장 등 착착 승진 코스를 밟아가는데 비해 자신은 학력이 공고졸이라는 이유 때문에 15년째 ‘작업반장’이라는 직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32 있다거나, 일부 대기업에서 ‘부직장 직장 부조장 조장 반장’ 등의 기능직 중간관리층을 두기도 하지만 연공서열제보다는 정실에 따른 임명 사례가 많다는 것, 또 사무직과 기능직의 신분증이나 작업모 색깔을 달리하는 등의 일상적 차별33 등이 이 불만을 야기했고 이것이 실업고교 기피로 이어지게 되었다.
1980년에 일반계 고교 졸업생의 대학진학률이 50.9%에 달하여 학령인구에서 대학 입학자가 대세를 이루기 시작하자 점차 실업계 고교의 위상이 하락하게 된다.34 특히 1990년을 계기로 하여 실업계 고교 졸업생의 취업 기회가 현격히 줄어들었다. 1996년의 한 기업 인사담당자의 다음 증언은 취업 세계의 ‘구조적’ 변화와 실업고교의 위상 하락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90년을 기점으로 고졸 여사원 채용을 대폭 줄였다. 그 이전에는 1년에 30〜40명의 고졸자를 채용했었는데, 요즘은 그 인원의 대부분을 전문대생으로 대체하고 있다. ··· 남자는 더 심하다. 89년 이래로 상고 출신 남자 사원은 전혀 채용하지 않았다. ··· 90년을 전후해서 각 기업은 ··· 사무자동화를 통해 단순업무를 줄이려고 노력해 왔다. ···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력은 창의성 있는 전문인이다. 그러나 실업고 졸업자는 이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 둘째 이유는 이직이 심하다는 것이다. ··· 이직하는 이유는 대개가 진학 준비다. ··· 셋째는 실업고 학생들의 자질 문제다. ··· 대부분이 성적 때문에 인문고를 가지 못한 학생들이다. 상품에 비유하자면, 전혀 구매력을 자극하지 않는 상품이 바로 실업계 졸업생이다.35
1990년 이후 실업계 졸업생은 사무자동화로 인해 불필요해진 인력, 기회만 있으면 대학 진학을 위해 이직하려는 인력, 성적이 나빠 인문고에 가지 못한 인력으로 간주되기에 이른 것이다. 1992년 한 조사에 따르면 ‘공·상고의 37%가 실업계로 진학한 것을 후회하고 있으며, 46%가 졸업 후 대학이나 전문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생각’36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고, 실업고 학생들 중에서는 학교에서는 충족되기 어려운 대학 진학 준비를 위해 ‘친척이 하는 회사에서 현장실습확인서를 가짜로 떼다 학교에 주고 입시학원에 다니고 있는’37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이를 당시 ‘가취업’이라고 했는데, 이를 알고 있는 학교 측도 사실상 묵인하는데다 수치상으로는 이들도 ‘취업’으로 분류되어 학교의 실적으로 여겨지는 폐단도 있었다.38
이런 상황 속에서 실업고교의 교육도 아울러 황폐해질 가능성이 컸다. ‘졸업생 300여 명 중에서 은행에 취업한 학생이 고작 4명밖에 안되는 상업학교, ··· 공부를 아무리 안 해도 3D 업종 작업장에는 꼭 취직되는 공고 남학생’39들로 채워진 실업고교의 수업시간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변해버렸다.
공책은커녕 교과서도 갖고 있지 않은 학생들이 대다수이며, 어떤 경우는 볼펜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다. 시간에 관계없이 잠만 자는 학생, 시간 내내 얘기하고 딴짓을 하는 학생,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는 학생, 교사가 아무리 소리쳐도 그 순간뿐 끊임없이 계속되는 소란, 훈계를 좀 할라치면 지겨워하는 표정을 짓고 엎드려버리는 아이들. 수업시간에 그래도 제대로 공부하려는 학생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것이 날마다 시간마다 반복되는 실업계 고등학교 수업시간의 일상적인 모습이다.40
한때 국가에 의해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까지 상찬되고 고무되었던 실업계 고교생들의 이미지는 대학 진학률이 급격히 고조되는 1980년대 이후에는 다른 것으로 바뀌어 갔다. 그들은 단지 고교 이후에 대학 진학보다는 취업을 ‘선택’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대학 입학 경쟁에서 밀려난 저학력자들로 간주되게 되었고, 취업 세계에서도 ‘일반적으로 고용이 불가능한 자’ 또는 ‘미숙련 일자리에만 고용할 수 있는 자’로 점점 낙인이 찍히게 된다.41 앞서 인용한 인사담당자의 말에 따르자면 ‘전혀 구매력을 자극하지 않는 상품’이라는 낙인 말이다.
요컨대 기술발전과 산업구조 고도화로 인해 저학력자에 대한 수요가 절대적으로 감소했을 뿐 아니라, ‘고학력화로 짧은 기간 동안에 노동인력 공급구조가 크게 변하였는데, 이는 일자리 경쟁 격화로 이어져 과거 고졸자들이 취업했던 일자리가 전문대졸자로 대체되는 현상이 진전’42된 것이 중등 실업교육의 쇠퇴를 야기한 구조적 요인이었다.
중등 실업교육의 특질
유네스코가 1997년에 정의하고 2011년에 개정한 국제교육표준분류(International Standard Classification of Education: ISCED)에 따르면, 교육은 ‘보통교육’, ‘직업준비교육’ ‘직업교육·훈련’ 등 세 가지로 분류된다. 보통교육(general education)은 그 교육내용에 직업적, 기술적 내용이 포함되더라도 전체의 25% 미만인 경우고, 직업준비교육(pre-vocational education)은 그것을 수료해도 노동시장에서 통용되는 직업·기술 자격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으며 교육내용의 25% 이상이 직업적 기술적인 내용인 경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업교육·훈련(vocational education and training)은 특정 직업에의 고용에 필요한 스킬과 노하우의 습득이며 그것을 수료한 후 노동시장에서 통용되는 직업자격을 취득하는 경우다.43
이에 따르면 한국의 실업고교는 시기별로 다소간 차이는 있으나 그 교육과정에서 보통교육의 과정이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직업준비교육으로 분류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의 기계공고 교육을 통한 100분의 1㎜ 정밀가공능력 훈련이나 상업고교 교육을 통한 주산과 부기 능력 훈련처럼 고용부문이 요구하는 특정한 기능과 노하우가 실업고교에서 훈련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실업고교에서는 직업 수행을 위한 기초적 교육에 중점을 두며, 직무수행을 위한 구체적인 기능과 노하우는 취업 이후 기업 내 교육과 훈련을 통해 훈련되는, 자기완결성은 낮고 후속하는 기업 내 교육과의 접속을 전제로 하는 산업부문별·전문과학별 직업기초교육, 혹은 초기 직업훈련(initial vocational training)의 성격이 강했다.44 그렇기 때문에 기업으로서는 신규 채용 시에 지원자의 구체적인 스킬이나 노하우의 습득 여부보다도 일반적인 능력 여하를 따지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채용 심사에서 지원자의 학력 및 학교력으로 드러나는 학력의 높고 낮음이 그만큼 중시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때 기업이 저임금을 이유로 실업고교 졸업생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려 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노동운동의 활성화로 학력별 임금격차가 줄어들자 실업고교생 채용의 메리트가 상대적으로 줄었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컸고, 자연히 고졸자를 일반적 능력이 고졸자보다 상대적으로 높다고 여겨지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력 소지자로 대치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실업고교의 ‘직업준비교육’ 또는 ‘초기 직업훈련’으로서의 성격은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의 직업고교도 유사하게 지니고 있는 특질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우리보다 시기는 조금 이르지만 유사하게 고교교육이 보편화되고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직업고교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980년대 중반에 이미 직업고교가 높은 중퇴율 같은 문제에 더하여 저학력자의 집중, 저계층자의 집중, 낮은 학습의욕, 학습내용의 진부화와 같은 문제점을 안게 되면서, 고교의 서열체계 안에서 직업고교가 “일반적으로 보통과목보다 위신의 면에서 낮고 또 실제적으로도 현재의 노동 내용과의 관련성의 희박화가 문제되고 있는 직업과목이라는 커리큘럼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계층구조의 저변부를 차지하는 위치를 점할 수 밖에 없는 상황”45이 지적된 바 있다.
그런데 한국의 실업고교에는 일본과는 다른 독특한 난점도 존재했다. 일본의 경우, 이른바 ‘실적 관계’로 불리는 기업과 고교 간의 연결이 직업고교 졸업자의 취업을 안정화시키는데 기여했다. 기업이 고교의 학력서열을 기준으로 하여 특정 고교의 졸업자를 학교 추천에 의해 매년 특정 규모로 안정적으로 고용하는 관행이 그것이다. 이는 주된 직업 선발이 학교에서의 예비적 선발을 통한 추천에 맡겨진다는 뜻인데, 학교는 학업성적에 기반한 메리토크라틱한 선발 과정을 통해 학생들을 ‘일인일사주의(一人一社主義)’ 원리에 따라 공정하게 추천함으로써 그 직업 선발에 대한 동의를 확보한다.46
이러한 학교 추천을 통한 취업이라는 메카니즘은 우리의 실업고교에서도 유사하게 확인되는 것이다. 실업계 고교 졸업생이 학교 추천을 통해 취업한 비중은 1978년의 경우 37.1%, 1988년에는 55.1%, 1998년에는 47.7%로,47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 학교 추천을 통한 취업 경로가 일본에서처럼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실적 관계’로 정착하기에는 장애물이 있었다. 그것은 징병제로 인해 발생하는 이탈 문제였다. 실업계 남자 졸업생은 졸업과 동시에 학교 추천을 통해 취업하더라도 징집될 경우, 병역의무를 마치고 원래의 직장으로 되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로 인해 고졸 남자 취업자의 이직 문제가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하여 안정적인 ‘실적 관계’의 정착을 저해했다. ‘실적 관계’가 불안정하고 취약한 만큼 학교 재학 과정에서 보다 양호한 취업 기회를 확보하기까지의 과정이 불확실해지고, 그만큼 실업고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학업에 몰두하고 안정적으로 학교 생활을 지낼 만한 유인가를 느끼기 어려워진다.
무엇보다도 중학교 졸업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일반계 고교와 실업계 고교로의 진로 분화 과정이 자발적 선택인가 강제적 배치인가 하는 문제가 존재했다. 대학교육 기회가 보편화되기 시작하는 1980년대 이후 일반계 고교와 실업계 고교로의 진로 분화는 희망하는 미래의 직업에 대한 포부의 차이에서 비롯된 ‘자발적 선택’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학업성적에 따른 ‘강제적 분화’의 성격을 강하기 지니게 되었다.
나카무라 다카야스(中村高康) 등은 고교 입학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선발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일본의 경우에 “성적이나 진학 등 학업 면에서의 가치의 리얼리티를 유지하는 것은 일부 계층뿐이고, 기타의 다른 학생들은 각기 다양한 가치 지향에 따라 선택한 결과로 (일반계 고교 혹은 직업고교로 진학으로의: 인용자주) 의식·행동의 분화가 일어난다. 이 점에 일본의 특질이 있으며 굳이 명명하자면 ‘선택적 분화’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경우 가업을 계승한다거나 고등 학력을 요구하는 직업 이외의 다른 직업을 지향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며 그들은 학업성적 등의 요인으로 인해 중학교 졸업 후에 비진학 코스인 직업고교에 진학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한국의 학생들에게 “(고교 입학 단계에서의: 인용자주) 진로 분화는 어쩔 수 없는 선발이라는 현실에 의해 강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 강제적 분화야말로 한국 교육시스템의 특질이라고 판단된다”48는 것이다.
고교 단계에서 일반 고교와 실업 고교로의 배치가 지닌 이러한 ‘강제적 분화’ 그리고 그 결과로 강화된 실업계 고교생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 과정은 곧 실업고교의 쇠퇴 과정이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본격적인 대응은 이후 2007년에 이명박 정권이 ‘마이스터고등학교’ 제도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나타났으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강제적 분화’와 ‘낙인’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는지는 새롭게 따져물을 필요가 있고,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중등 실업교육의 쇠퇴 과정은 고등교육의 팽창 과정과 병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 두 현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1980년 이후 한국의 고등교육은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취학률을 달성하기까지 주춤거림 없이 가파른 상승세로 팽창해 갔다. 그리고 그러한 본격적인 대학교육 팽창의 계기가 된 것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상되고 추진된 이른바 ‘7.30교육개혁’이었다. 이제 1980년대의 교육사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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