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6-05-27 15:47
Antonio Gramsci, 『Prison Notebooks(옥중 수고)』 (1929~1935)
비평

1929년 이탈리아 남부의 한 감옥.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투옥된 지 2년이 지나고 있었다. 검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이 두뇌가 20년 동안 작동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두뇌는 멈추지 않았다. 감옥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학문적 언어로 위장하면서, 그람시는 10년에 걸쳐 서른두 권의 노트를 빼곡히 채워 나갔다. 그것이 『Prison Notebooks(옥중 수고(手稿))』다.
이 책은 교육학 책이 아니다. 철학, 역사, 정치, 문화, 언어학이 뒤섞인 방대한 사유의 집합이다. 체계적으로 쓰인 것도 아니다. 허약한 몸으로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며, 언제 검열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단편적으로 기록된 생각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 교육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누가 지식을 만드는가. 학교는 누구의 편인가. 교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헤게모니: 총이 아니라 생각으로 지배한다
그람시 사상의 핵심은 ‘헤게모니(hegemony)’라는 개념이다. 이 단어는 그가 발명한 것이 아니지만, 그가 새롭게 정의했다.
지배란 무엇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권력자가 법과 군대와 경찰로 사람들을 강제하는 것이다. 그람시는 이것을 ‘강압(coercion)’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이것만으로는 지배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고 보았다. 강압만으로 지탱되는 지배는 항상 불안하다. 힘이 조금만 빠지면 무너진다.
진정으로 안정적인 지배는 피지배자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할 때 완성된다. 지배 집단의 세계관이 ‘상식(common sense)’이 되고, 기존 질서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이것이 헤게모니다. 사람들은 착취당하면서도 그것이 착취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아니, 그것을 당연한 삶의 조건으로 여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성공한다’는 믿음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라. 이 믿음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전하고, 학교가 학생에게 가르치고, 미디어가 반복해서 확인해 준다. 그것이 ‘상식’이 된다. 그런데 이 상식 속에는 무엇이 숨어있는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있다. 불평등은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세계관이 있다. 기존의 계층 구조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라는 메시지가 있다.
그람시가 묻는 것은 이 질문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식’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학교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람시는 헤게모니가 유지되는 핵심 장치로 ‘시민사회(civil society)’의 여러 제도들을 지목한다. 교회, 언론, 정당, 그리고 학교. 이것들은 국가의 강압 장치—군대, 경찰, 감옥—와 달리 겉으로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람시는 이 공간들이 지배적 세계관을 재생산하는 핵심 기제라고 본다.
학교는 특히 그렇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단순히 읽기와 쓰기와 수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지식이 가치 있는지, 어떤 언어가 ‘표준’인지, 어떤 역사가 기억할 만한지, 어떤 삶의 방식이 정상인지를 배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객관적 지식’의 형태로 전달된다.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처럼 보이지 않을 때 가장 강력하다.
그람시 자신의 경험이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사르데냐(Sardegna) 섬 출신이었다. 이탈리아 본토의 표준어와 다른 언어를 쓰는 변방의 가난한 섬. 어린 그람시가 이탈리아 본토의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느꼈을 것은, 자신의 언어와 문화가 열등하다는 무언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표준 이탈리아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르데냐의 방언과 문화는 가치 없다는 위계를 내면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것은 그람시만의 경험이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아이들이 지배국의 언어와 역사를 ‘교육’받으면서 자신의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배웠던 것, 한국에서 표준어 교육이 지방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에게 암묵적으로 심어준 열등감, 저소득층 아이들이 중산층 중심의 교과서 언어와 문화 앞에서 느끼는 소외감—모두 같은 구조다.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
그람시 사상에서 교육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개념이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이다.
그는 지식인을 두 유형으로 나눈다. 하나는 ‘전통적 지식인(traditional intellectual)’이다. 이들은 자신이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역사학자, 철학자, 성직자, 교수—이들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진리를 다루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람시는 이 중립성의 신화를 해체한다. 전통적 지식인들은 대개 기존 질서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중립을 자처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현상 유지를 돕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기적 지식인’이다. 모든 사회 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표현하고 조직하고 이해시키는 지식인을 만들어낸다. 노동자 계급에서 나온 노동운동 조직가, 여성 집단에서 나온 페미니스트 이론가, 피억압 공동체에서 나온 활동가 지식인—이들이 유기적 지식인이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사유는 삶의 현장에서 나오고, 다시 그 현장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느 쪽인가. 이 질문이 불편하다면, 그것이 바로 그람시가 원하는 반응이다.
교사는 무엇의 유기적 지식인인가
그람시는 『Prison Notebooks』 곳곳에서 교사와 교육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지식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회에서 지식인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공장 노동자도, 농부도, 어부도 자신의 일에 대한 정교한 지식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지적으로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다만 그 지식이 ‘공식적 지식’으로 인정받지 못할 뿐이다. 학교는 공식적으로 가르칠 만한 지식과 그렇지 않은 지식 사이의 경계를 관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경계는 누가 그었는가. 그람시의 대답은 명확하다. 헤게모니를 가진 집단이 그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언어, 역사, 문학, 도덕—이 모든 것은 특정 집단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리고 교사는,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이 경계를 매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그람시가 교사에게 던지는 질문이 나온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유기적 지식인으로 서 있는가. 기존 질서의 헤게모니를 재생산하는 전통적 지식인으로 서 있는가, 아니면 학생들—특히 소외된 학생들—의 편에 선 유기적 지식인으로 서 있는가.
구체적인 장면을 생각해 보자. 어떤 교사가 수업 시간에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 교사는 특정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우월하다는 위계를 재생산하고 있다. 또 다른 교사는 교과서에 나오는 ‘위인’들이 대부분 지배 계급 남성들임을 학생들과 함께 짚어본다. 이 순간 그 교사는 공식 지식의 경계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같은 교실, 같은 교육과정 안에서도, 교사의 선택에 따라 헤게모니를 강화할 수도 있고 균열을 낼 수도 있다.
진지전: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람시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이 ‘진지전(war of position)’이다. 그는 사회 변혁을 두 가지 전략으로 나눈다. 기동전(war of maneuver)은 정면 돌파다. 혁명처럼 지배 권력을 단번에 전복하는 것. 반면 진지전은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싸움이다. 시민사회의 곳곳에—학교, 언론, 문화, 지역 공동체—천천히 거점을 만들어가면서 헤게모니 자체를 조금씩 바꾸어 나가는 것.
그람시는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지전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전략이라고 보았다. 국가 권력은 군대와 경찰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민사회 전체가 지배 세력의 헤게모니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그 헤게모니를 바꾸지 않고서는 아무리 권력을 잡아도 진정한 변화는 오지 않는다.
교육은 이 진지전의 가장 중요한 전선 중 하나다. 아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무엇을 당연하다고 느끼는지, 불평등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변화시킬 수 있는 구조로 보는지—이것이 교실에서 매일 형성된다. 그람시가 교육에 주목한 것은 그것이 헤게모니가 만들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사에게 어떤 의미인가. 교실에서의 변화는 느리다. 한 해 동안 아이들과 함께한 것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 사회 구조는 요지부동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람시는 말한다. 진지전은 그런 것이라고.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려는 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교실에서, 지역에서, 공동체에서 조금씩 다른 ‘상식’을 만들어가는 것—그것이 쌓일 때 변화가 온다.
한국 교육에서의 의미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한국 교육에 대입하면 불편한 질문들이 쏟아진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교육적 ‘상식’은 무엇인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곧 능력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좋은 직장을 얻고, 그것이 곧 성공이다. 이 서사는 너무 깊이 내면화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람시의 시각에서 보면, 이 서사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 서사는 학벌 중심의 위계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입시에서 실패한 것은 개인의 문제이며, 사회 구조의 책임은 없다고 말한다. 수능이라는 단일한 척도로 모든 아이들의 가치를 줄 세우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 서사를 가장 열심히 재생산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학교다.
한국의 교사들은 이 구조 안에서 이중적 위치에 서 있다. 한편으로 그들 자신이 이 헤게모니를 내면화한 사람들이다. 성실하게 공부해서 교사가 된 사람들이, 지금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특정한 세계관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교사들은 이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가장 전략적인 위치에 있기도 하다.
상식을 비틀 수 있는 사람
그람시가 『Prison Notebooks』에서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상식의 문제다.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상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상식은 학교에서 만들어진다.
이것은 교사에게 엄청난 책임이기도 하고, 동시에 엄청난 가능성이기도 하다. 교사는 매일 아이들과 함께 무엇이 당연하고 무엇이 당연하지 않은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고, 그 이야기 안에 빠진 목소리를 함께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강화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고, 서로 다른 능력과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함께 배우는 것이 더 풍부한 배움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그람시는 감옥에서 이 모든 것을 생각했다. 손발이 묶인 채로, 병든 몸으로, 그는 여전히 교육이 세상을 바꾸는 진지전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맺으며: 교사들에게
『Prison Notebooks』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저작이라기보다, 감옥에서 남긴 단편적 메모와 사유의 기록에 가깝다. 그럼에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이유는, 그람시가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여온 것들을 다시 질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학교가 중립적이라는 믿음, 지식이 객관적이라는 믿음, 교사가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믿음들에 조용히 균열을 낸다.
교사로 산다는 것은, 그람시의 언어로 말하자면, 매일 헤게모니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매 순간 선택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지식인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지식인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람시의 이 문장 앞에서 물어보자. 나는 지금 누구의 지식인으로 서 있는가. 기존 상식을 재생산하는 사람으로 서 있는가, 아니면 그 상식에 조용히 균열을 내는 사람으로 서 있는가. 그 질문 하나가, 감옥에서 쓰인 이 방대한 사유가 오늘의 교사에게 건네는 가장 진지한 초대다.
균열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교과서의 서술을 읽다가 “여기서 빠진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를 학생들과 함께 묻고 답하는 것, 성적이 낮은 아이를 “능력이 없는 아이”가 아니라 “아직 인정받지 못한 지식을 가진 아이”로 보는 것, 학급회의에서 소수의 의견이 묻히지 않도록 구조를 만드는 것—이런 작은 선택들이 매일 쌓일 때, 교실은 조금씩 다른 상식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된다.
| <교실 적용 팁>
교과서를 펼치기 전에 “이 단원에 누구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지”를 교사 스스로 먼저 확인한다. 역사 속 인물들이 어떤 계층, 어떤 성별, 어떤 지역 출신인지를 학생들과 함께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출발점이 된다. 교과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더 깊이 읽는 방법이다.
수업 중에 “여기서 빠진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를 학생들과 함께 묻고 답한다. 이 질문 하나가 학생들로 하여금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능동적으로 검토하게 만든다. 당연하게 여겨온 것에 처음으로 질문을 던지는 순간, 비판적 사고는 시작된다.
학생이 쓰는 말과 집에서 익힌 표현 방식을 교정의 대상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는다. ‘표준’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워진 언어 안에도 정교한 지식과 삶의 감각이 담겨 있다. 그 언어를 존중하는 교사의 태도가, 그람시가 말한 “모든 사람은 지식인이다”를 교실에서 실천하는 방식이다.
토의나 모둠 활동에서 누가 말하고 누가 침묵하는지를 의식적으로 살핀다. 소수 의견이 결론에 반영될 수 있도록 발언 구조를 설계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 교사의 선택이다. 교실의 민주주의는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매일의 운영 방식 속에서 조금씩 쌓인다.
성적이나 시험 결과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학생을 마주할 때, “아직 인정받지 못한 능력을 가진 아이”라는 가능성을 먼저 열어둔다. 능력이 없는 것과 능력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다르다. 그 시선의 차이가, 교실 안에서 헤게모니가 만들어놓은 위계를 조용히 허문다. |
| ※ 이 시리즈는 AI 도구를 활용해 원서의 핵심 내용을 추출하고, 필자가 내용을 검토·수정하여 한국 교육 현실에 맞게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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