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6-04-16 10:11
‘AI 교육’이 대세라는데
“인공지능(AI)을 빼놓고는 교육 정책을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 정부에서는 그래 보인다. ‘AI 3대 강국 도약’은 국정의 핵심 구호이고,1 그 도약에 이바지할 ‘AI 인재 양성’은 교육부의 중핵 과제이다.2 “AI 시대에 학생들이 안전하고 책임 있게 AI를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AI 교육 강화[가] 필요”3하다는 말은 교육부 입에 늘 붙어있다. ‘AI 교육’이 어떤 것인지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바는 없다. 아직 뚜렷한 ‘그림’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어딘가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올 텐데, OECD가 유력하다. 우리 정책 결정 과정에선 으레 ‘글로벌 트렌드’를 살피고, 특히 OECD의 기치(旗幟)를 믿고 따른다.
OECD도 인공지능에 열 올리고 있다. ‘시장성’ 높은 호재를 간과할 리 없다. 2029년 PISA에 ‘미디어와 인공지능 문해’를 포함할 예정이고, 그 준비로 ‘초중등 교육을 위한 인공지능 문해 기본 틀’이란 초안을 내놓았다(2025년 5월).4 늘 그래왔듯이, 초안은 거의 수정됨 없이 평가 틀로 기능할 것이고, PISA로 산출할 국제 순위는 AI 교육의 성패 척도가 될 것이다. 한국 정부의 ‘AI 3강’ 구호의 실효나 AI 교육 정책의 성과가 그것에 빗대어 가늠될 것이다. OECD의 ‘프레임’은 여러모로 한국의 교육을 구속한다.
OECD도 ‘리터러시’ 앞세워 교육의 틀 내놓아
OECD의 인공지능 문해 틀은 AI를 ‘잘 이용하도록’ 이끄는 ‘교육’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용(use 또는 interaction)의 국면(domain)은 교감(engaging), 실용(creating), 운용(managing), 개발(designing) 등으로 나누고, 각각에 5~7개씩 모두 22개의 역량(competences)을 행동 목표처럼 제시한다. 역량의 바탕에는 지식(knowledge), 기술(skills), 태도(attitudes)가 자리한다고 개념화하는데, 20세기 중반에 풍미했던 ‘행동주의적 교육 목표 분류’의 구도를 떠올린다. 이를테면 역량과 그 관련 교육 시나리오를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아래 따온 예는 ‘운용’에 해당하는 것이다.
[역량] 일의 능률을 높이거나 자동화하는 게 적절히 이루어지도록 작업을 AI 시스템에 맡긴다.
[초등 교육에서의 시나리오] 글짓기 과제와 관련해서, 철자 교정이나 비슷한 말 찾기는 AI에 맡기고 학생들은 이야기하기나 캐릭터 개발 그리고 창의적 내용 전개 등에 집중한다.
한국도 OECD도 ‘AI 교육’의 이유에 대해선 석연치 않아
한국이나 OECD나, ‘AI 교육’을 역설하면서도 그 당위성에 대해선 일절 묵언이다. 하루빨리 교육해야 한다는 다급함밖에 없다. OECD 교육국장인 Andreas Schleicher는 문해 틀을 내놓으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댔다. “인공지능은 기술과 사회의 어마어마한 변화를 낳고 있다. … 그러나 학생들이 AI와 깊이 교감하며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있는 교육체제는 거의 없다.” 한국 교육부에서도 AI 교육에 대해 발표할 때 사실상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다.
그렇다고 AI 교육의 필요나 방향이 자명하지는 않다. 의문은 무수히 인다. 우선, AI는 매우 다양하다. ChatGPT 같은 생성형 AI가 있는가 하면, 휴대전화나 가전제품 속에 들어앉아 있는 AI도 있고, 공공서비스를 제어하는 AI도 있다. 이런 AI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갈지도 확실치 않다. 지금 ‘교육’(‘문해’)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AI는 도대체 어떤 것(‘텍스트’)인가? OECD의 틀에서는 암암리에 ‘생성형 AI’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교육은 학생들을 그런 AI에 익숙해지게 만들면 그만이란 뜻인가? 더 나아가서, 왜 그것에 ‘적응’해야 하는가? AI 변화를 쫓아가며 익혀야 하는 건 학생들의 숙명인가? AI든 뭐든, ‘미래 세대’에게 이미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할 게 있는가? 미래 세대라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인류 복지에 공헌할 기계들을 설계하고 만들어 가야 할 주체가 아닌가?
AI 교육이라면 AI라는 ‘텍스트’를 제대로 읽게 이끌어야
적어도 1970년 이후(Paulo Freire의 교육 비판 덕에) 문해의 의미는 ‘텍스트’ 독해력을 넘어 삶의 세계를 읽어내는 안목으로까지 넓혀졌다. 문해를 위한 교육이라면 텍스트에 함축된 동기나 이념 등을 포착하고 비판할 수 있는 데까지 학생을 이끌어야 마땅한데, 왜 AI 교육(AI라는 ‘텍스트’의 문해를 추구하는 ‘교육’)에서는 이 ‘비판적 안목’을 도려내 버렸는가? AI는 논란의 여지 없이 중립적이며 윤리적이고 인본적인가? 그것은 ‘모종의’ 경로로 모은 빅데이터를 ‘모종의’ 알고리즘으로 연산해 ‘모종의’ 결과를 내놓으라고 ‘모종의’ 개발자들이 만들어 놓은 기계 아닌가? AI를 교육적으로 다루면서, AI에 스며있는 그 ‘모종의’ 뜻들에 대하여 온통 눈감고 넘어가야 한다는 뜻인가?
AI는 특정한 과학/기술 영역의 탐구 흐름이 낳은 (편중된 지역, 편중된 전통, 편중된 사고의) 산물이며, 사적인 이해타산의 바탕에서 (돈이든 시간이든) 투자한 사람들의 ‘계산’에 일관하게 구성된 ‘지능’을 장착했을 테다. 빅데이터든 알고리즘이든 그리고 전산 네트워크이든, AI의 속성을 결정하는 요소들은 자연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인공적이며 문화적이고 상대적이다. 요컨대 AI는 특정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 체제 안에서 특정 의향으로 제작된다. 그렇게 나온 제품(‘시스템’)에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뜻’ 또는 ‘타산’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AI라는 시스템에 대해 교육한다면, 그렇게 숨겨진 뜻과 이해관계까지 학생들이 읽어낼 수 있도록 이끌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OECD의 틀처럼 이런 측면에 완전히 눈 감고 있는 교육 아이디어는 심각하게 재검토해야 하지 않겠는가?
‘AI 교육’ 제안들에 교육이 있는가?
OECD의 인공지능 문해 틀을 만드는 데는 ‘code.org’라는 조직이 깊이 참여했다고 한다.5 비영리 조직이라지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메타 등 패권적인 영향력을 지닌(AI 부문에 밀접한 이해관계를 지닌) 기업들의 지원을 받아 온 조직이다.6 현재 첨단에 있는 AI들의 속성이나 그 미래 버전에는 이런(AI의 ‘경제성’을 우선시하는) 후원 기업들의 의중이 잠입하지 않을 리 없다. 그렇다면 code.org와 같은 조직이 ‘AI 교육’의 기본 틀을 만들고 지구적으로 교육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동조하는 게 과연 온당한가? 한국도 그런 틀을 ‘벤치마킹’해 교육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가?
정치와 권력 그리고 주권과 자본 등의 체제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지금 OECD나 한국 정부가 내놓은 것과 같은 대안대로의 ‘교육’이 과연 교육일 수 있는가? 모름지기 교육이라면 개인의 삶과 그 삶을 구속하는 체제/환경을 바르게 읽으며 세계(개인적이고도 지구적인 세계)의 미래를 자율적으로 서로 합심하며 설계하고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향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AI에 대한 투자는 필경 ‘기업적인’ 이유로 어마어마할 테고, 그런 ‘동력’을 장착한 변화(‘발전’)는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형국(이면)을 두고 “변화가 신속하고 어마어마하다” 위협하면서, AI 교육이 불가피하다고만 다그쳐야 하는가? 갈피도 잡히지 않는 ‘발전’을 좇아 치열하게 경쟁하며 맹목적으로 익히라고, 그렇게 체득하게 될 ‘역량’에 의존해 미래에 ‘성공’해 내라는 식으로(오직 ‘개인’ 책임인 듯이) 미래 세대에게 주입하는 게 교육일 수 있는가? AI에 이미 스며들어 있는 권력과 자본의 위계나 사회문화적 관성에 무조건 굴종하라고 세뇌하는 셈이 아닌가? 그런 암묵적인 억압이 교육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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