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6-04-15 14:26
| 이 글은 1970년대 특히 ‘유신헌법’ 발포 이후부터 1979년 말 박정희 대통령 사망까지의 시기를 ‘유신시대’로 명명하고, 그 시기에 한국의 국민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전개된 교육의 실태를 밝힙니다. |
「국민교육헌장」 선포로부터 약 4년 뒤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발포해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그리고 열흘 후인 10월 27일, 대통령 종신제를 기조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발표했는데 이는 11월 21일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통과되었다.1
이 개헌에 ‘유신(維新)’이라는 이름을 붙인 데에는 박정희가 모델로 동경했던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흉내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고, 아니면 ‘유신’이라는 말이 중국 『시경』과 『서경』에 나온다는 이유로 박종홍 등이 박정희에게 제안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어 분분하나, 이후에 전개된 과정을 교육사적으로 조망할 때 전자 쪽이 더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1972년 이후 박정희의 사망까지 이어진 이른바 ‘유신시대’에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제국 일본 그리고 이후에 식민지인 조선의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1970년대 특히 ‘유신헌법’ 발포 이후부터 1979년 말 박정희 대통령 사망까지의 시기를 ‘유신시대’로 명명하고, 그 시기에 한국의 국민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전개된 교육의 실태를 밝힐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당시 학교의 두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수류탄던지기’와 「국기에 대한 맹세」
‘10월 유신’ 직전인 1972년 6월에 문교부는 중학무시험제 이후 국민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고교입시와 관련하여 이른바 ‘고교입시체력장내신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전까지 입시에서는 ‘체능검사’를 실시했는데 그것은 달리기(남자 100미터, 여자 60미터), 넓이뛰기, 던지기, 턱걸이(여자는 턱걸이 대신 팔굽혀펴기) 등 네 종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체력장내신제에서는 검사 종목을 여덟 종목으로 두 배로 늘리고, 또 검사를 중학교 재학 중에 실시해 체력장(體力章)을 발급하여 내신제 점수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그 여덟 종목의 체력검사는 다음과 같았다.
○ 100m달리기=민첩성테스트 ○ 도움닫기멀리뛰기=순발력테스트 ○ 오래달리기(남자 1000m, 여자 800m)=지구력테스트 ○ 던지기=팔힘테스트, 모의수류탄(무게 남자용 350g, 여자용 200g)으로 실시 ○ 턱걸이(여자는 팔굽혀매달리기)=팔힘테스트 ○ 왕복달리기=민첩성테스트, 10m 간격으로 두 개의 각목을 준비해두고 이 각목을 집어다 출발선에 갖다놓는 것 ○ 윗몸일으키기=복근력테스트 ○ 윗몸앞으로굽히기=유연성테스트.2
이 여덟 종목 중에서 특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던지기’ 즉 ‘모의수류탄’을 던져 팔힘을 테스트하는 종목이었다. 이 모의수류탄은 실제로 당시 군에서 사용하던 수류탄과 모양이 유사했지만 내부에 철심을 심고 그것을 합성수지 고무로 감싼 형태였다. 그런데 이 모의수류탄으로 던지기 연습을 하던 중3 수험생들 사이에서 그것이 불규칙하게 튀는 탓에 그에 맞아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두개골이 파열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3 학부모들의 빈발하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모의수류탄을 고집하던 문교부는4 결국 1979년 9월에 가서야 ‘모의수류탄’을 ‘고무공’(180g의 무게)으로 바꾸고 아울러 ‘오래달리기’, ‘왕복달리기’, ‘윗몸앞으로굽히기’ 등 세 종목을 폐지하는 개선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5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중학생들에게 ‘수류탄던지기’를 연습시키는 군국주의적인 측면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안전사고 때문에 그것을 고무공으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모의수류탄’이 학교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식민지 말기인 1939년 10월, 당시 중국 전체로 전쟁이 확산되고 일제가 노골적인 파시즘 체제로 치닫던 시기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중등 입시 개혁안을 발표했다. 한편으로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철저히 하고, 또 한편으로 과열되던 중학교 입시경쟁을 완화한다는 이유로 중등학교 입시 성적 판정에서 전체 총점의 1/3을 신체검사 점수로 하는 방안이었다. 신체검사는 체격, 체질, 체능 등 세 검사로 이루어지도록 했는데 그 안에서 체능검사는 다음 여섯 종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주력(走力): 남자는 100미터, 여자는 50미터에서 이를 검사할 것, (2) 도력(跳力): 입폭도(立幅跳)에 의할 것, (3) 투력(投力): 수류탄(手榴彈)의 류(類)를 써서 자기가 쓰는 손으로 입투자세(立投姿勢)에서 이를 검사할 것, (4) 현수굴비력(懸垂屈臂力): 철봉 또는 횡목 사용의 정면 현수굴비. 여자는 지상상비(地床上臂) 입복와굴비(立伏臥屈臂)에 의함을 득(得)함. (5) 체조: 학교체조교수요목 제일표 소학교의 교재 중에 대하여 적의(適宜)하게 이를 행할 것. (6) 전게 외에 실시 가능한 편은 가급적 폐활량(肺活量), 배근력(背筋力) 등의 항목을 가(加)할 것.6
여기서 ‘도력’은 제자리넓이뛰기, ‘투력’은 모의수류탄던지기, ‘현수굴비력’은 턱걸이(여자는 엎드려 팔굽혀펴기), 그리고 ‘폐활량’은 오래달리기, ‘배근력’은 윗몸일으키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왕복달리기’나 ‘윗몸앞으로굽히기’ 등 1970년대 초에 새롭게 추가된 종목을 제외하면 사실상 한국의 중학교 체력검사와 동일한 종목들이었다. 삼십여 년을 사이에 두고 두 체력검사의 종목들이 거의 판박이처럼 대응하는 사실, 특히 모의수류탄던지기의 대응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또 한 장면. 애국조회가 열릴 때 국민의례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함께 일제히 제창되거나 아니면 아침저녁으로 태극기가 게양되거나 하강할 때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는 애국가와 함께 「국기에 대한 맹세」가 낭송되는 장면이다. 지금도 그것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게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내용으로 낭송된다.7 그런데 ‘맹세’가 처음 등장할 때는 내용이 조금 달랐다. 1972년 10월 유신을 앞둔 8월에 만들어진 맹세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는 당시 민관식 문교부장관의 지시로 장학관 이명권에 의해 초안이 만들어진 후 국무총리 김종필에 의해 문안이 결정되고, 박정희에 의해 최종적으로 승인되었다.8 이후 문교부에 의해 장학지시(문교부장학 1011-688)로 각 학교 및 관청에 시달되어 학교에서의 조회 때 국민의례나 국기하강식 등에서 낭송되었다. 그것은 1976년부터는 교과서에도 등장했고, 전두환 체제인 1984년에 「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11361호, 1984.2.21. 제정)이 제정되면서 법제화되어 2007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런데 본래 그것은 1968년에 충청남도교육위원회에서 이순신의 ‘충무정신’ 함양을 목표로 자체적으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암송시켜 오던 맹세문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라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 소식이 중앙의 문교부로 전해진 후 그런 ‘맹세’의 전국적 보급을 원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새롭게 ‘맹세’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정의와 진실’이라는 문구는 주도면밀하게 삭제되었다. 1972년 민관식의 지시로 문교부에서 ‘맹세’ 초안을 만든 이명권 장학관은 미국의 「충성맹세」를 참고했다고 했는데, 미국의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미국 Pledge of Allegiance(충성맹세), 1954> I pledge Allegiance to the flag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o the Republic for which it stands, one nation under God, indivisible, with Liberty and Justice for all. [나는 미합중국의 국기 그리고 이것이 표상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유와 정의가 함께하고, 신 아래 갈라질 수 없는 하나의 국가인 공화국에 대해 충성을 맹세합니다.]9
그렇다면 「국기에 대한 맹세」는 미국의 「충성맹세」의 복제였을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미국의 ‘충성맹세’ 안에 들어 있었고, 1968년 충남교육위원회에서 만든 애초의 맹세 안에도 들어 있던 ‘정의’라는 가치는 1972년의 최종적인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는 사라졌다. 오히려 ‘맹세’ 작성에 관여한 이들은 명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72년의 「국기에 대한 맹세」는 오히려 미국의 「충성맹세」보다는 식민지기에 조선인들에게 강제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ノ誓詞)」 쪽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10
[그림 1] 충북 미원국민학교 국기하강식 1977년
(충청북도교육청 (2005), 『충북교육의 맥』)

「황국신민서사」는 1937년 10월 2일 총독부에 의해 제정, 강제된 구호로서 초등학교 아동용과 중등 이상 성인용의 두 가지가 있었으며 아동용은 다음과 같았다.
<황국신민서사 초등학교 아동용. 1937.10.2.>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私共ハ 大日本帝國ノ 臣民デアリマス: 와타쿠시토모와 다이니폰데이고쿠노 신민데 아리마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합니다[私共ハ 心ヲ合セテ 天皇陛下ニ 忠義ヲ 盡シマス: 와타쿠시토모와 고코로오 아와세테 덴노헤이카니 쥬키오 쓰쿠시마스] 3. 우리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私共ハ 忍苦鍛鍊シテ 立派ナ 强イ 國民トナリマス: 와타쿠시토모와 닌구탄렌시테 릿파나 쓰요이 고쿠민토나리마스].11
「황국신민서사」에서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합니다’와 「국기에 대한 맹세」의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는 국가와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헌신을 다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해방 이후 국민학교 교정에서 한국의 아동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하던 장면을 보며 식민지기 보통학교의 교정에서 조선인 아동이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합니다’라며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던 장면을 떠올려 ‘기시감’을 갖게 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두 장면에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기시감’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부터 유신시대의 학교교육의 내부로 들어가 보자.
교육과정의 국가주의적 개편
먼저 유신시대 학교에서 가르친 교과서부터 들추어보자. 박정희 정권의 문교부는 1963년에 제2차 교육과정을 공포(문교부령 제119호)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에서 반공·도덕을 하나의 독립 교과로 분리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사 교과를 독립한 점 등에서 드러나듯이 학교교육의 국가주의적 재편 지향이 보이기는 했지만 「국민교육헌장」 발포 이전까지 이런 지향성은 노골적으로 발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헌장 발포 그리고 뒤이은 1972년의 ‘유신헌법’ 이후 학교교육에 대한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재편은 거침없이 전개된다. 그것은 먼저 교육과정 개정으로 발현되었다.
제3차 교육과정 개정은 1973년 2월 14일 국민학교 교육과정 개정(문교부령 제310호) 및 1973년 8월 31일의 중학교 교육과정 개정(문교부령 제325호), 1974년 12월 31일의 고등학교 교육과정 개정(문교부령 제350호) 등 학교 단계별로 연이어 이루어졌는데, 이때 개정된 교육과정을 1980년과 1988년의 두 ‘문교사’에서는 ‘학문중심교육과정’이라고 명명하고 있다.12 예컨대 1988년에 집필된 『문교40년사』에는 3차 교육과정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교부가 추진한 제3차 교육과정 개정은 1960년대에 미국 교육계를 주도한 학문중심교육과정 이론에 바탕을 두었다. 즉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기성의 단순한 지식을 전수하거나 경험의 강조만으로는 계속해서 급격히 증가되는 학문적 지식을 이해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없으므로, 단순 지식이 아닌 지식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지식의 구조를 학생에게 가르쳐야 하되, 지식의 구조는 학생 스스로가 발견하고 탐구하도록 해야 한다는 학문중심교육과정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제3차 개정 교육과정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제3차 개정 교육과정은 학문중심교육과정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13
이러한 문교사의 설명만 놓고 보면 3차 교육과정은 세계적인 지명도가 있는 교육과정 이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단순 지식의 전수나 경험의 강조를 넘어서는 ‘지식의 구조’를 가르치고 학생 스스로가 발견하고 탐구하도록 이끈다는 철학을 토대로 한 셈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진술은 사실에 부합할까. 3차 교육과정 개정 이후 구성된 수학이나 과학 교육과정이 이러한 교육과정 이론을 참조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3차 교육과정의 핵심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유신시대의 초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운 내용이 ‘학문’이자 ‘지식의 구조’였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3차 교육과정의 핵심은 ‘학문’이 아닌 다른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3차 교육과정의 기본 방침으로 문교부에 의해 천명된 것들 중 가장 먼저 제시된 것은 ‘학문’이거나 ‘지식의 구조’가 아니라 ‘국민적 자질의 함양’이었다. 그것은 ‘민족주체의식의 고양’, ‘전통을 바탕으로 한 민족문화의 창조’, ‘개인의 발전과 국가의 융성과의 조화’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요컨대 제3차 교육과정은 ‘학문’ 중심 교육과정이라기보다는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분식된 ‘이데올로기’ 중심 교육과정이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무너지고 민주화된 이후에 쓰인 1998년의 ‘문교사’인 『교육50년사』에서 ‘학문중심교육과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춘 사실14을 통해서도 방증될 뿐만 아니라, 3차 교육과정 하에서 신설된 고등학교의 ‘국민윤리’,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의 교과서 내용 등을 통해 뚜렷하게 입증된다.
문교부는 1976년 8월에는 중학교 교과서를 모두 국정화한다는 방침을 발표했으며, 1977년 8월 22일에는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8660호)을 제정하여, 교과서를 문교부가 저작권을 가진 제1종과 문교부장관의 인정을 받는 제2종으로 구분하고, 국민학교·중학교·실업고등학교의 전 교과와 인문고등학교의 일부 교과(국어·국민윤리·국사 등)는 1종으로 하고, 기타 교과는 2종으로 편찬키로 했다. 이러한 학교 교과서의 국정화 방침은 물론 「국민교육헌장」 이념을 구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국정’교과서라는 교육과정의 형식은 새롭게 발명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 근대교육의 형성 과정에서 작위적으로 고안되었고 결국 식민지 교육에도 도입되었다. 예컨대 식민지기 보통학교 교과서의 거의 대부분은 조선총독부 편찬 ‘국정’ 교과서였다. 이 국정교과서라는 제도적 형식은 1945년 이후 일본에서는 사실상 폐지되었으나 우리 사회에서는 3차 교육과정에서 초등교육에서 후기중등교육에 이르기까지 학교교육의 전 단계에서 전면적으로 부활한 것이다.
여기서 3차 교육과정 하의 교과서 내용 전체를 조망할 여유는 없지만 특별히 한 주제로 초점을 좁혀 당시의 교과서를 들여다보자. 즉, 대통령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적 기구에서의 간선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며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하고, 또 대통령이 헌법을 정지시키는 ‘긴급조치’를 발동할 권한을 갖게 만드는, 박정희의 영구집권 장치인 ‘유신헌법’이 어떻게 교과서에서 서술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먼저 1975년 중학교의 국정교과서 『민주생활 3』의 한 대목이다.
아무리 급변하는 정세라 하더라도, 정신만 올바로 가지고 단결하여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뚫고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이 있다면 능히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급변하는 정세를 우리 스스로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 냈는데 이것이 바로 ‘10월 유신’이다. 10월 유신의 기본 이념은 우리 민족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고, 평화 통일을 성취하자는 것이다. 즉, 10월 유신은 ‘올바른 민족 사관’에 입각해서 우리 민족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고, 나아가 평화 통일을 성취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의 힘과 예지로써 구현하려는 것이다.15
10월 유신이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라는 논리다. 고등학교의 『정치·경제』 교과서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서구의 민주정치 제도를 비판하고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강변한다. 다음은 1977년 검인정 교과서 『인문계 고등학교 정치·경제』의 한 대목이다.16
유신헌법은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서구 선진 각국의 민주정치제도를 비판 없이 도입하여 실행한 잘못을 시정하고, 우리의 풍토와 실정에 맞는 한국 민주주의의 정립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비약적인 발전과 번영을 도모하려는 것이 그 근본 취지인 것이다.17
실업계 고등학교 교과서는 국정교과서로서 문교부가 편찬했는데 1974년도 『실업계 고등학교 정치·경제』에서는 세계정세의 변화, 통일의 성취 등을 거론하며 박정희의 ‘10월 유신’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 체제가 와해됨으로써 평화 공존 체제로 급선회하는 국제 정세의 격동기에 처하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기하고 평화적 조국 통일의 성취와 민주주의를 토착시키며, 사회 제도의 일대 개혁을 단행할 필요성이 절박해짐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하에 10월 유신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18
‘학문’ 중심이라는 3차 교육과정 하에서 만들어지고 가르쳐진 교과서는 이상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유신시대의 학교교육의 성격은 이상과 같은 교과교육, 교과서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도 교과외 교육, 즉 여러 가지 학교 행사와 학교 규율 등에서 그 이데올로기적 교화로서의 성격이 더욱 뚜렷했다.
유신시대의 학교 행사와 규율
유신시대에는 국민교육헌장 이념을 구현한다는 명목 하에서 갖가지 학교 행사와 규율장치들이 학교에 도입되고 실천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침과도 같은 역할을 한 것은 문교부가 매년 하달하는 「국민교육헌장」 이념 구현을 강조하는 장학 방침이었다. 이런 장학 방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학교 교육과정의 운영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특별한 실천 방안들을 학교 단위로 강구하여 시행해야만 했다. 그 시행 여부에 따라 교장 이하 교원들에 대한 포상 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학교 단위로 구체적인 구현 방안을 모색할 때 가이드 역할을 했던 것이 전국적으로 보급된 『국민교육헌장의 사상적 배경과 그 실천』이나 『국민교육헌장의 자료총람』 같은 자료집들이었다.19
동시에 「국민교육헌장」 발포 이후 그 이념의 구현을 위한 교육 방안이 문교부의 위탁연구에 의한 보고서 등으로 만들어져 각 시도교육위원회 및 학교에 배부되었고, 학교 행사 등의 구체적인 방안과 실천사례 등이 문교부 및 각 시도교육위원회 혹은 그 산하의 교육연구원에 의해 책자로 만들어져 일선 학교에 배포되었다.
유신시대에 일선 학교에서 계획되고 실천된 다양한 학교 행사들을 예로 들어보자. 예컨대 청주 대성중학교의 1976년 학교 운영계획에 따르면 1년 동안 다음과 같은 학교 행사들이 실시되었다.
명승고적지문화재청소(월1회), 그림극제작(안중근의사)(1편), 민속공예전시회(10월), 민족고전읽기(연5권), 애국가 새마을노래 4절까지 부르기(매주 월요일), 훈련조회(매주 토요일), 우방국 학생과의 펜팔 및 미술작품 교환(연2회), 교내반공웅변대회(춘추 연2회), 6.25 당시의 참상 사진 전시회(6월), 반공표어포스터 모집(6월, 10월), 반공영화관람(월1회), 반공교육자료전시회(10월), 시사교육실시(주3회), 조련계동포모국방문돕기(3〜10월), 방위성금모금운동(3〜10월), 효행학생표창(연2회), 양로원방문(연2회), 선행학생표창(월1회), 불우이웃돕기(월1회), 새마을학생장수여(월2회), 퇴비증산(1인 3kg), 1인1수가꾸기(연중), 폐품수집활용(연4회), 불우학우돕기(연2회), 위문편지보내기(6, 12월), 위문대보내기(12월), 새마을청소(월1회), 민방위훈련(월1회), 중간구보(주3회), 학생용의검사(월1회), 교내외대청소(주1회), 신체검사(5월), 기생충검사(4월, 12월)20
다양한 교과외 활동들로 구성되는 다양한 학교 행사들이 일년 내내 학교에서 시행되는 이런 경향은 비단 남자중학교에만 한하지 않았다. 서울사대부속여중의 1979년 학교교육계획을 보더라도
반공글짓기대회(6월), 반공표어포스터제작(6월), 반공웅변대회(6월), 귀순용사초청강연(6월), 반공안보영화관람(5월, 10월), 우수승공관견학(6월), 간첩식별 및 유언비어 방지교육(9월), 불온문서 수집 및 처리(연중), 반공가요 지도(연중), 반공스크랩북제작(8월, 12월), 국립묘지헌화(6월), 국림묘지참배 및 묘역정화(8회), 민방위훈련(매월), 소화기사용법지도(3월, 11월), 자매부대위문(8월, 12월), 일선장병위문엽서쓰기(6월, 11월), 충효방송훈화(4월, 6월, 12월 3회), 충효독후감기록 및 방송(연9회), 충효스크랩북제작(8월), 효행사례발굴 및 표창(4월), 우수효행 경로사례 및 수기방송(5월, 11월), 국기 국가 국가원수에 대한 존엄성 방송훈화(3월, 9월), 국가원수에 대한 예절지도(3월, 9월), 민족문화우수성 방송훈화(4월, 7월), 고적잡사 및 박물관견학(10월), 문화재정화사업(매주토요일), 공중도덕심앙양 방송훈화(4월, 7월, 11월), 우수영화감상(6월, 10월), 교내미술실기대회(5월), 독후감노트작성 및 검사(6회), 우수독후감방송(월2회), 교내백일장(10월), 폐품수집 및 매각(연8회), 불우급우돕기(3회), 원호자녀돕기(1회), 자매복지시설 위문(6월, 12월), 자매부대위문(7월, 12월), 장병위문 엽서제작(12월), 구호활동용 수편물 제작(12월), 새마을조기청소(매월 1회), 춘추계대청소(연2회), 교내체육대회(연2회), 학생교원신체검사(연1회), 콜레라장티푸스접종(연1회), 기생충검사 및 투약(연2회), 환경미화심사(연2회)21
등이 실시되었다. 물론 고등학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1971년 서울공업고등학교의 학교 행사 계획이다.
용의검사(매월), 소지품검사(매월), 교내미술실기대회(매학기), 교내백일장(6월, 10월), 교내서예대회(10월), 폐품이용전시회(11월), 실습작품전시회(11월), 교내체육대회(5월, 10월), 반공영화관람(1학기, 2학기), 선열유족돕기운동(6월, 12월), 국군장병위문문위문품수집발송(6월, 12월), 건설상 사진전시회(1학기, 2학기), 문화재및고전사진전시회(1학기, 2학기), 민속놀이대회(10월), 반공인사초빙강연회(6월), 불온문서신고지도(연중), 자매부대위문(12월), 애국조회(매주), 외래품배격지도(매월), 교내합창대회(6월), 1인1권책모으기운동(10월), 자매부락위문(8월), 소풍 및 수학여행(춘추), 고아원양노원방문(12월), 벽지학생학용품보내기운동(6월, 12월), 크리스마스씰사기운동(12월), 적성검사실시(5월), 운동장정지 및 배수작업(7월, 9월), 공장견학(6월, 11월), 과학전람회 출품(10월), 교내실기경진대회(6월), 교내계산자경진대회(11월)22
아울러 여자고등학교의 학교 행사도 살펴보자. 다음은 숭의여자고등학교의 1973년 행사 계획이다.
‘충무공전기’ 독후감쓰기(3월), 국가관 확립을 위한 훈화지도(18회), 6.25기념 교내웅변대회(6월), 학교방송을 통한 국어사랑(주1회), 한글백일장(10월 8일), 국립박물관견학(7월), 국사 초청강사 강연회(7월, 2월), 국가발전상 홍보게시교육(복도 및 교실게시판 활용. 수시), 국가발전 포스터 현상모집(10월), 국가발전 표어 현상모집(6월), 선현선열에 대한 게시(60점), 유적 및 유물견학(연2회), 한국고전읽기지도(매월1권), 민요부르기운동(매월1곡), 서예지도(주1시간), 민속놀이지도(5월), 교내자유교양대회(10월), 자매부대 결연 및 위문(8월), 자주국방 헌금(연1회), 국립묘지 참배 및 헌화(6월), 민방공소방훈련(월1회), 저축심고취 글짓기 및 표어(연4회), 저축실적우수학생 표창(연2회), 일선장병 위문활동(연4회), 신체검사 및 체력검사(연1회)23
유신시대의 학교교육은 반공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이념의 내면화를 위한 갖가지 학교 행사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학교 행사의 상당수는 당시 새롭게 발명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기원을 갖는 것들이었다.24 예컨대 ‘황국신민화정책’이 극성이던 1930년대 말에 보통학교(당시 명칭으로는 소학교)에서 국방 헌금 모금, 위문품·위문문 모집, 폐품 수집 등이 수시로 전개되었다.25 그리고 당시 보통학교 학급의 게시판과 복도의 벽면은 다음과 같은 게시물로 채워졌다. 시국 대처에 관한 통첩, 시국에 관한 신문 잡지, 시국에 관한 사진, 점령 지도, 황군 장병의 편지, 황군 장병의 무용담(강화,낭독,사진), 총후 애국 미담, 시국 뉴스 영화, 국제 관계의 시사문제 주지(강화, 사진, 영화), 각국 군비의 비교 도표, 각종 비행기 비행선 등의 회화 사진, 폭탄의 모형 진열, 폭탄의 위력 명시도, 각종 총포 전차의 사진 회화, 각종 군함의 사진 회화 등이었다.26
애국조회와 같은 수시로 치러지는 집단 훈련과 행사의 수행을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열중쉬엇, 차렷, 좌향좌, 우향우’ 등의 구령에 맞추어 행동하게 하는 기본적인 제식훈련이 필요했는데, 그것들은 이미 식민지기의 학교에서 이루어지던 것들이었다. 식민지기에 전체주의적 훈련을 위해 보통학교 ‘체조’과의 교과 내용 중에는 ‘교련’ 관련 내용이 공식적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학교 교련은 단체 생활을 하는데 있어 어떤 규율에 복종시키는 것으로서, 호령, 명령 등을 받았을 경우에 자기 몸의 행동을 스스로 처리하는 수단 방법으로서 내면적으로 또한 외면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유에서 예컨대 저학년의 경우, 체조 수업 시간에 ‘모여, 차렷, 앞으로나란히(바로), 쉬어, 헤쳐, 앞으로가(제자리서), 우향우(좌향좌), 뒤로돌아, 원형대형으로, 경례법, 정렬법, 복장정돈법’ 등을 반복 훈련시켰다.27 이런 훈련은 해방 이후에도 예컨대 ‘기오쓰케(氣をつけ)’가 ‘차렷’으로, ‘야스메(休め)’가 ‘쉬어’로 바뀌면서도 한국의 학교에서 여전히 지속되어 유신시대의 집단 훈련과 교련의 기초를 이루었다. 한편, 1975년 8월에 문교부는 심지어 국민학교와 중학교 학급의 반장, 부반장을 학교장이 임명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는데28 이는 식민지기 보통학교의 급장, 부급장 제도 임명제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림 2] ‘북괴만행규탄궐기대회’에 참가한 충주실업고등학교 1975년
(충청북도교육청 (2005), 『충북교육의 맥』)

유신시대의 권위주의적 학교 규율이 박정희의 지시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 하나를 들어보자. 1977년에 당시의 문교부장관 황산덕은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이 되는 교육계의 현안 중 하나였던 ‘교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복과 교모를 폐지한다는 안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쓸데없는 일을 벌이려고 한다’며 질책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29
1968년부터 고교생을 대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군사훈련, 즉 ‘교련’으로 인해 고등학교의 문화는 더욱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교 이상의 전문학교, 초급대학, 4년제대학에 이르기까지 후기중등교육 및 고등교육에서 학도군사훈련이 의무화되었고, 대학에서는 교련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나 고등학교 교련 교육은 이렇다 할 반대 없이 추진되었다. “유신시대 고등학생들이 3년 동안 이수해야 하는 교련 교육 시간은 총 216시간이었다. 이는 당시 입대한 신병들이 받았던 전반기 군사교육 246시간과 차이가 없다. 여기에 고등학교 교련 교육은 체육 및 윤리 교육과 연계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교생들이 받았던 군사교육은 신병들의 전반기 교육보다 적다고 볼 수 없었다.”30 심지어 1975년 5월에는 「학도호국단설치령」이 의결되어 4월혁명 이후 폐지되었던 이승만 시대의 ‘학도호국단’이 망령처럼 15년 만에 다시 부활했다.31 이후 학도호국단은 각종 관제 궐기대회에 학생들을 빈번하게 동원시켰으며, 매년 지역별로 또 전국적으로 열리는 ‘교련 대회’ 또한 이데올로기적인 교화 장치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유신시대 학교교육 형식의 특질
지금까지 밝힌 것처럼 유신시대의 학교교육, 특히 조회 등의 집단의식과 각종 학교 행사, 학교 규율의 형식은 식민지기의 그것들과 놀라울 정도로 대응하고 있었다.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신시대에 한국의 학교에서 펼쳐진 ‘애국조회’와 같은 집단의식은 식민지 시기 조선의 학교에서 전개된 ‘조례’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그 ‘조례’는 조선인에게만 강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의 기원은 일본 근대교육에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국민-보다 분명하게는 일본제국의 신민-만들기의 소프트웨어이자 국민통합 장치로 구안된 내셔널리즘의 장치’였다.32 이 장치를 통해 메이지유신 이전의 막번제 하에서 내셔널한 아이덴티티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만들어져 갔다. 이 사실은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 학교 규율의 연속성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일종의 인조물로 창출된 내셔널리즘이 그것이 창출된 사회를 넘어서서 다른 사회로 이식, 복제, 합체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내셔널리티, 내셔널리즘이라는 인조물은 개개 역사적 제 힘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가운데, 18세기 말에 이르러 스스로 증류되어 창출되었는데 그러나 일단 창출된 후에는 ‘모듈(규격화되고 독자적인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이 되어 다소간 자각적으로, 극히 다양한 사회적 토양에 이식될 수 있었으며, 또한 이것이 극히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패턴에 합체하고, 또한 이에 합체되었다는 것이다.33
요컨대 내셔널리즘은 일종의 ‘모듈’이 되어 다른 사회에 이식되고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패턴에 합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회와 같은 학교 규율은 말하자면 근대 일본에서 창출된 내셔널리즘 모듈의 일부다. 그것이 식민지 시기에는 조선인을 일본국민으로(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로 이식된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신민만들기’ 장치로서의 조회라는 모듈은 식민지 사회에서 근대 국민국가로 이식되어 ‘국민만들기’ 장치로 복제되고 한국 내셔널리즘과 합체할 수 있었다. ‘국민교육헌장 체제’ 하에서의 식민지적 교육 형식의 전면적 부활은 이런 이론적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유신시대의 학교교육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빠뜨려서는 안 될 질문이 있다. 국가권력의 압도적 우위를 특질로 하는 유신시대의 학교에서 학생들은 단지 그 ‘국민교육헌장 체제’의 지배 하에서 피동적으로 주조되는 객체에 불과했을까. 유신 체제는 자신이 요구하는 인간상을 학교교육이라는 기구를 통해 순조롭게 조형해낼 수 있었을까. 이 질문과 관련하여 학교 행사 중 독특한 성격을 지닌 한 행사를 선택해 일종의 보론으로서 논의를 연장시켜 보자.
보론: 국민학교 ‘운동회’의 두 얼굴
유신시대에 교과교육을 능가할 정도로 다양한 학교 행사들이 범람하여 학교교육을 지배했는데 그 행사들 중 하나로 ‘운동회’라는 것이 있었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1980년의 초등학교-당시의 명칭으로는 국민학교- 운동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어른들에게 어렸을 때의 즐거웠던 추억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국민학교 시절의 운동회에 대하여 말한다. ··· 가을 대운동회 전날 밤은 즐거운 조바심으로 밤잠을 설치기 마련이고 아침밥까지 제대로 먹지 않은 채 일찍부터 서두르게 되는 날이다.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 만국기가 펄럭이고 말끔하게 체육복을 차려 입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학부모님들과 온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점심을 싸들고 학교에 가느라 분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학생, 교사, 학부모, 지역 사회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달리고 노래하고 즐기는 가장 흥겨운 잔치날인 것이다.34
요컨대 학교 행사 중의 하나인 운동회가 단순한 학교 규율장치가 아닌 일종의 ‘잔칫날’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학교 행사나 학교의 규율장치가 국가권력의 의도와는 다른 차원의 미묘한 성격을 지닐 수 있다고 하는 단서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이 운동회를 소주제로 설정해 학교 규율의 양면성에 대해 고찰해 보자.
먼저 학교 운동회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자. 그것은 해방 이후에 한국의 학교에 처음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우리 교육에 정착해 있었고,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의 기원은 일본에 있었다. 일본 근대교육사에서는 1874년 해군병학료(海軍兵學寮)에서 경투유희회(競鬪遊戱會)가 개최된 것이 최초의 운동회로 알려져 있다. 서구 교육의 모방으로 출발한 일본의 운동회는 메이지 초기에는 중등 이상의 학교에서 엘리트들의 아마추어 스포츠 경기적 성격이 짙었으나 1880년대 이후부터 소·중학교에서 단체경기 및 병식체조 등이 강조되는 지역 단위의 행사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에 운동회는 “단순히 학교 행사로서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행사장의 장식에 천막과 국기, 그리고 만국기가 필수품이었으며, 칙어봉독과 기미가요 취주 합창이 장엄한 의식으로서 거행되는 등 국가 행사로서의 색채가 짙었다.”35 19세기 말에는 몇몇 학교가 학교 밖의 장소 등에서 공동으로 거행하는 ‘연합운동회’ 그리고 ‘원족운동(遠足運動)’이 주를 이루었으나 1900년대부터는 운동회가 개별 학교의 운동장에서 독립적으로 거행되고 지역민의 축제적 성격이 강화되며 동시에 유희적 종목이 늘어나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군사적 색채가 짙어지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에 돌입할 무렵이 되면 운동회는 드디어 온통 군사적 색깔로 덧칠해지게 된다.”36
조선의 경우 최초의 운동회는 1896년 5월 2일 화류 형식으로 실시된 관립영어학교 운동회였다. 교사가 아동들을 인솔하여 학교 밖으로 이동한 후-당시 용어로 ‘화류(花柳)’라 했다- 운동을 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식이었다.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대만 최초의 운동회와 같은 ‘원족운동’의 형식이었다. 이후 관립소학교에서의 ‘연합운동회’ 형식이 정착하고, 군사훈련과 단체경기, 유희적인 내용이 강화되면서 운동회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신문매체는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 소개하였고 정부 역시 충군애국의 이념 하에 관공립학교 연합운동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예컨대 고종은 1908년 5월의 관사립학교 연합운동회에 직접 참석하여 관람한 후, 크게 만족하여 상품을 내린 적도 있었다. 운동회는 국가의례와 같은 형식을 갖추었다. 그 장소도 병사들의 훈련 장소인 훈련원으로 선정되었다. 김성학은 식민지기 이전 운동회의 특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관공립학교 운동회를 통해 학생들은 충군애국의 국민으로 ‘훈련’되어 갔다. ··· 한 나라의 수도에서, 새로 설립된 대표적인 신식 관공립학교들이 연합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수많은 국내외 고위관료와 일반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의 기대와 찬사를 받으며 진행된 학교 운동회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학교 운동회에 정부와 독립협회가 관여하면서 운동회는 처음부터 국가의례와 같은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틀 속에서 학생들은 국가가 요구하는 ‘국민’으로 만들어져 갔다.37
조선에서의 운동회는 애초에는 식민지 교육 형식으로 강제적으로 이식된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학습과 모방의 결과였다. 당시 조선의 운동회를 통해 기르고자 했던 주체는 ‘일본제국의 신민’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신민’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1908년 이후, 조선에 대한 일제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면서 통감부는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지배하면서 조선의 관공사립학교 연합운동회를 폐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일본 근대교육에서 ‘충군애국의 신민’을 기르기 위한 장치로 고안되고 보급되었던 운동회가 조선에서 ‘애국심’을 발동시키는 장치로 확산되자 오히려 저지하려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에서 운동회는 단기적으로 위축되고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통감부 시기에 일시적으로 억압된 운동회는 1910년 이후 식민지 교육에서 다시 부활한다. 다만 대한제국기의 연합운동회와 같은 민족주의의 이념적 측면은 제거되고 그것을 제국의 신민을 위한 신체 규율장치로 다시 전유하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1930년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의 운동회 프로그램을 보면, ‘만국기’가 걸려있는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상품을 받거나 ‘공굴리기’, ‘줄다리기’, ‘스푼레이스’ 등 유희적 성격의 종목을 즐기고, 또 내빈이나 졸업생, 직원들이 ‘이인삼각’ 등의 종목에 함께 참여하는 장면도 펼쳐졌다. 하루 동안 진행된 종목만도 60개에 달했다.38 그런데 1930년대 후반 이후 전시기에 접어들면서 운동회에서 ‘비행기폭격’, ‘백병전’, ‘장애물넘기경쟁(短繩跳競爭)’, ‘육탄전’, ‘들것운반경주’ 등 전쟁과 관련된 군국주의적인 종목이 늘어나게 된다.39
이는 운동회가 국민만들기의 규율장치의 일환으로 활용되는 증거다. 그런데 운동회에는 그러한 국민만들기 장치로만 환원되지 않는 미묘한 측면도 또한 존재했다. 1935년에 조선교육회의 기관지 『문교의 조선(文敎の朝鮮)』 지상에 실린 학교 운동회와 관련된 식민지기 교육 관계자들의 좌담회 기록을 보면, “운동회를 1년에 한 번 있는 오락, 즉 위안으로 생각하므로 학교장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학교 체조를 거의 도입하지 못합니다”라는 일본인 교장의 하소연이나 “운동회를 오락과 분리시키고 학교 체조의 본질로만 돌아가는 것은 조선의 실정으로 보면 너무 이른 감이 있습니다”라는 교원들의 현실적 판단을 확인할 수 있다.40 달리 말해 운동회가 ‘교육적’인 궤도를 ‘탈선’하여 지역 민중의 오락이나 위안에 치중되고 있는 경향을 문제시하면서도 동시에 운동회를 오락으로 전유하려는 ‘조선의 실정’을 무시할 수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시기에도 운동회가 국가권력이 의도한 바대로 작동하지 않는 또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유신시대의 운동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해방 이후 운동회라는 학교 규율의 형식 자체가 혁파되지는 않았다. 운동회의 주된 종목은 여전히 달리기, 릴레이경주, 줄다리기, 기마전, 기뺏기, 장애물경주, 그리고 각종 유희 경기 등이었고 모든 학생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경쟁하는 형식도 유지되었다.41 운동회는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일종의 교육적 관행이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실시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학교의 여건과 재량에 맡겨졌다. 그런데 운동회 실시에는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상품 준비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에 기금 확보가 필요했다. 식민지기에도 운동회 실시는 학부형의 기부금 찬조를 주요한 조건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는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에 게재된 운동회 관련 기사를 추적해 보면, 예컨대 1965년의 경우 서울시내 160개 국민학교의 대부분이 운동회를 폐지했다. 그 주된 이유는 2부제, 3부제 수업으로 아동수가 많아 운동장에 한꺼번에 모일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운동회비 징수의 어려움이었다.42 해방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정부는 운동회 실시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1975년 한국 정부는 이른바 서정쇄신 시책에 따라 학부모로부터 찬조금을 걷는 폐단을 없앤다는 이유로 아예 국민학교 운동회의 폐지를 지시한 일조차 있었다. 그러나 운동회 실시를 요구하는 민간의 여론이 고조되자 정부는 결국 이듬해인 1976년 9월에 운동회의 부활을 다시 지시했다. 그런데 유신시대였던 당시 문교부는 운동회 부활을 지시하면서도 그 종목에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강화하려 시도했다. “새마을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가마니짜기, 새끼꼬기가 거론이 되고 총력안보 국방경기로는 대피운동, 모래주머니 나르기, 화생방대비경기 등이 고안”43되었던 것이다. 즉 국가는 민중의 요구에 따라 운동회를 부활하면서도 그것을 국가의 규율장치로 전유하려 시도했다.
1970년대 중반 이른바 권위주의적인 유신 체제 하에서도 국가의 규율장치로서의 운동회와 민중 및 아동의 축제로서의 운동회는 경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경합의 과정에서 국가는 표면적으로는 우세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1970년대 말의 초등학교 운동회는 적어도 그 종목의 면면으로 볼 때 국가 이데올로기의 종합 전시장으로 변모했다. 예컨대 1978년 당시 국민학교 운동회의 종목에 관한 어느 조사를 보자. 이는 경상북도 내 전역의 국민학교를 대상으로 하여 운동회의 종목과 운영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다.44 트랙 종목과 필드 종목으로 나누어 종목을 조사했는데, 트랙 종목 중에서 반공주의 등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종목으로는 ‘김일성잡기달리기, 최후의 일각까지, 적진돌파, 땅굴폭파, 안보경기, 백마고지’ 등이 실시되었다. 필드 종목의 경우에는 이데올로기 관련 종목이 훨씬 다채로웠다. 조사된 국민학교 운동회 필드 종목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았다.
<애국주의> : 조국찬가, 민족의 얼, 나의 조국, 민족의 물결, 전진하는 나의 조국, 나라사랑, 자유의 종, 우리는 대한의 꽃, 우리나라 금수강산, 영광영광 대한민국, 우리는 대한의 딸 등. <통일> : 조국통일, 통일의 염원, 통일기원, 남북통일, 통일을 이룩하자, 통일의 이념, 통일의 꽃, 우리의 소원, 통일 아리랑, 북진통일 등. <새마을> : 새마을잔치, 새마을 새나라, 새마을일꾼, 새마을의 꽃, 새마을대행진, 꽃피는 새마을, 새마을만세, 우리도 잘살아보세, 근면자조협동, 새역사 창조, 새마음 새정신 등. <총력안보> : 총화의 꽃, 총화유신, 총력안보, 유비무환, 총화의 꽃다발, 유신의 물결, 총화행렬 등. <분식장려> : 점심잡수세요, 내가먼저 혼분식, 혼분식으로 다진 국력, 혼분식 여행, 즐거운 혼분식, 공중전쟁, 점심탄 폭발, 혼분식시간 등. <경제 관련> : 저축, 저축왕, 티끌모아태산, 알뜰살뜰모으세, 땀흘려모으세. 소득증대, 올해도증산, 모으고 모으자, 땀흘려 모으세, 풍년놀이, 올해도 풍년, 풍년이 왔네, 풍년잔치, 새마을풍년, 얼시구 풍년 등. <민방위훈련 관련> : 민방위운동, 모범민방위대, 나는 민방위, 용감한 소방수, 우리는 소방대, 소방대출동, 예비군만세, 새마을소방수 등. <반공 관련> : 반공훈련, 간첩신고, 간첩을 잡자, 간첩은 내가먼저, 간첩생포, 간첩색출, 김일성교수형, 김일성혹은 내가 뗀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 멸공통일, 안보경기, 초전박살, 쳐부수자공산당 등. <국방 관련> : 자주국방, 북진통일, 백두산에태극기, 백마고지 탈환, 후방은 이상없다, 적기를 뺏아라, 태극기는 내 것 등.45
현기증이 날 정도로 잡다한 이상과 같은 운동회 종목들은 유신 체제 하에서 강조된 애국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국책 선전 등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종목 하나를 들어보자.
<때려잡자 김일성(저학년편)> ○ 청·백 두 팀으로 갈라서 각각 2열 횡대로 마주 선다. ○ 시작 신호에 따라 두 아동이 손을 잡고 백선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서 가지고 간 콩주머니 두 개로 김일성 오뚜기를 때려 맞추어 떨어뜨린 다음, 콩주머니를 주워가지고 출발선으로 돌아와 다음 사람에게 콩주머니를 이어준다. ○ 오뚜기 옆에는 보조자가 한 사람 있어서 떨어진 오뚜기를 올려 놓는다. ○ 마지막 사람까지 먼저 끝나는 편이 승리한다.46
‘때려잡자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종목은 이념적인 내용으로 보면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교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운동회의 이데올로기적 규율장치로서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실제로 운동회에서 이 종목에 참여한 아동들에게 그것이 과연 반공주의의 내면화 과정으로 기억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해방 이후 초등학교의 운동회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아동, 학부형, 지역민-에게 기억되는 운동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인터넷의 다양한 카페나 블로그 등을 ‘운동회’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바로 읽을 수 있는 것은 ‘향수(nostalgia)’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운동회를 과거의 학창 시절에 대한 몇 안 되는 행복하고 그리운 추억의 일환으로 여기는 기억들이다. 그 기억들 속에서 운동회는 규율의 공간이기보다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것은 ‘수업의 연장’이 아니라 ‘수업하지 않는 날’로 기억된다. 책가방도 숙제도 없는 그 하루 동안 아동들은 일상적인 교육과 규율의 틀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특히 운동회는 ‘꼴찌’들의 잔치였다. 운동회날, 학교의 교육 이데올로기인 ‘능력주의’와 ‘경쟁’ 원리는 일시적으로 작동을 멈추었다. 학력 경쟁에서 실패한 ‘꼴찌’들도 운동회의 달리기를 통해 자존감을 확인하고 ‘공책이나 연필’ 같은 상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운동회는 ‘가족’과 ‘지역민’의 잔치였다. 학부모, 특히 아버지로 대표되는 대가족이 참여하지 않는 운동회는 맥 빠진 운동회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회는 특히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마을의 공동체적 축제가 된다. ‘먹고 마시는’ 향연이 축제의 필수적인 요소이듯이 교정에서 가족과 함께 먹는 ‘점심’은 운동회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핵심을 이루었다.
요컨대 운동회는 국민만들기의 ‘규율장치’이면서 동시에 ‘잔치’라고 하는 두 얼굴을 갖고 있었다. 운동회라는 장에서 예컨대 국가로 대표되는 사회구조는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국민으로 만들고자 집요하게 시도했지만, 그들은 그 자장을 벗어나 운동회를 자신들의 놀이와 잔치의 장으로 전유하려 했다. 아동과 학부모, 지역민들은 단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대상에 머물지는 않았다. 운동회라는 장을 둘러싸고 전개된 ‘민’과 ‘국가’의 경합에서 ‘국가’가 언제나 일방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이나 민들이 적극적으로 유신 체제에 저항하거나 그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국민교육헌장」 발포 이후 유신헌법을 거치는 1970년대 내내 박정희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교육 영역에서의 저항은 다음 하나의 예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것은 1978년 6월 27일에 발발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다. 당시 송기숙 교수 등 전남대 교수 11명이 “국민교육헌장은 ··· 행정부의 독단적인 추진에 의한 그 제정 경위 및 선포절차 자체가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의 교육 칙어를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형태의 애국, 애족 교육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지난날의 세계 역사 속에서 한때 흥하는 듯하다가 망해버린 국가주의의 교육사상을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부국강병과 낡은 권위주의 문화에서 조상의 빛난 얼을 찾는 것은 잘못이며 민주주의에 굳건히 바탕을 두지 않은 민족중흥의 구호는 전체주의와 복고주의의 도구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47고 비판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선언서를 발표한 후 구속되거나 파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의 억압적인 언론통제 상황 하에서 거의 일반에 보도되지 않았으나48 「국민교육헌장」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저항의 귀중한 사례로 기억되어야 한다.
「우리의 교육지표」에서 제기된 바, 유신시대 학교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박정희 시대에는 쟁점으로 부각되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교육계를 각성시키고 정책과 제도의 변화에 임팩트를 주기까지는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서슬퍼런 권위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교육계는 유신시대의 교육정책 수행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침묵으로 사실상 방조하면서 ‘국민교육헌장 체제’의 재생산을 도왔다. 이런 상황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지형이 바뀌기 이전까지 변하지 않았다. 1980년 이후 들어선 제5공화국 체제 하에서도 ‘국민교육헌장 체제’는 기본적으로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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