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14) – “국민교육헌장 체제의 성립”

by gyobasaNPO | 2026-03-31 16:06

1968년의 「국민교육헌장」 발포는 한국 교육을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으로 재편하는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여기서는 헌장이 당시 대통령의 저작이라는 형식으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1967년에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 집행과 수출 증대로 인한 성장에 힘입어 점차 자신의 지배체제 강화에 자신감을 갖고 나서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부터 징병제도를 강화했고, 1968년에는 주민등록제도를 전면적으로 실시했으며 그 해 2월 초에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다. 한편 북한으로부터의 무력 도발이 1960년대 후반에 특히 심화되었다. 1968년초 북한의 특수부대에 의한 박정희 암살 시도로 이른바 1.21사태가 발생했고, 바로 직후에 미해군의 함정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해 10월 말 울진 삼척지구에서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이승복 어린이 사건’은 그때의 참사다.

 

이러한 대내적인 동원 체제 강화와 대외적인 위기 고조라는 정치사회적 환경의 변화는 교육 세계에도 여지 없이 여파를 미치게 된다. 다름 아닌 1968년 12월의 「국민교육헌장」 발포다.

 

 

「국민교육헌장」의 제정

 

1968년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제2경제’라는 매우 생소한 개념을 갑자기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제2경제’란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했던 학술적 용어도 아니고 어떠한 학문적인 그런 개념을 가진 용어도 아닙니다. 내가 생각해낸 한 단어인데 이것이 부적당하다면 적당한 말로 고쳐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뜻은 우리가 경제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또는 물질적인 면에 대해서 우리가 노력하는 동시에 정신적인 자세가 올발라야만 ‘경제 건설이다’ ‘근대화 운동이다’ 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촉진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취지입니다. ··· 종전에 우리가 말하던 증산이다, 수출이다, 건설이다, 소위 통념적인 경제를 하나의 ‘제1경제’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지금 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면이라든지, 또 우리의 마음가짐 등 우리 국민이 근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의 철학적인 바탕 또는 기조 등을 ‘제2경제’라고 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러한 이야기입니다(밑줄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연두기자회견」 1968.1.15.).1

 

그 스스로가 밝힌 대로 ‘제2경제’ 개념은 박정희 자신이 생각해낸 전대미문의 신조어였다. 그것은 국민의 ‘정신자세’ 혹은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것인데 ‘제2’의 ‘경제’라고 명명된 이유는 경제 건설이나 근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철학 혹은 정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듣는다면 ‘제2경제’의 의미는 사회근대화론에서 말하는 ‘근대성’이나 인간자본론에서 말하는 ‘생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2경제’의 의미는 그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보다 이데올로기적인 의미, 즉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함의를 담고 있었다. 1988년 문교부의 『문교40년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964년에 발족한 제3공화국 정부는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의 중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교육 이념을 보다 전면에 부각시켰다. ···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 이른바 ‘제2의 경제’가 강조되었다. ··· 1968년에 창조된 ‘제2의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고, 국민의 정신혁명을 교육을 통하여 이룩하고자 하는 데에서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은 실현된 것이었고, 그것은 교육 이념에 있어 민족주의, 국가주의 이념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2

 

요컨대 ‘제2경제’ 개념을 모태로 하여 교육 이념에서 민족주의, 국가주의 이념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 「국민교육헌장」(이하 ‘헌장’으로 줄임)이다.3

 

박정희는 권오병 문교부장관에게 교육장전 제정을 지시했다. 권오병이 ‘헌장’ 발포를 앞두고 국회 문공위원회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1968년 6월 15일 대통령의 지시로 교육, 정치, 경제, 사회, 역사의 전문 교수 26명에게 원고 집필이 의뢰되었고 초안이 작성되었다. 작성된 초안은 5개월간(1968.6〜10) 각계 인사 48명으로 구성된 심의회에서 전체 및 소위원회 각 4회 모두 8회에 걸쳐 토의되었다고 한다.4

 

‘헌장’ 초안은 26일에 언론에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민족중흥은 우리 국민의 거룩한 역사적 사명이다. 조상의 밝고, 의롭고, 슬기론 얼을 현대에 되살려, 자주의 자세를 확립하고 합심·단결·노력과 약진 속에 창조의 기쁨과 삶의 보람을 느낀다. 타고난 성능의 계발을 바탕으로, 널리 학술과 기능을 배우고 익혀 저마다 직분따라 힘써 일하되, 성실한 인격에 뿌리박고, 자유에 따르는 책임, 권리와 같이하는 의무를 줄기삼아, 협동신의의 민주사회를 이룩한다. 국법을 지키고 중의를 따르며 국민의 복리를 골고루 하여, 전체의 안정과 번영을 기약하고, 생산과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합리의 새생활에, 효도와 우애 서로의 은혜에 감사하며, 고상한 멋을 아는 전통의 미풍양속을 이어받아 국가사회의 건전한 기풍을 일으킨다. 나라와 나는 하나인 것, 언제나 나라사랑을 내몸같이, 모든 일에 부지런하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는 굳센 의지와 튼튼한 몸으로, 새롭고 우렁찬 국가건설에 즐거이 봉사한다. 우리의 신념은 섰다. 반드시 이 땅 위에 통일조국의 빛나는 앞날이 올 것이요,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은 나아가 인류의 이상 실현에 이바지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영광의 새역사를 창조하고 그대로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자.5

 

이 초안을 발표할 때, ‘헌장’ 발포일은 10월 중으로 예고되었지만, 사태는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초안에 대해 박정희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다시 수정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은상이 작성한 초안보다는 ‘힘있는 내용의 글’을 원했던 박정희의 지시로 초안이 폐기되고, 박종홍이 다시 작성하도록 함으로써6 10월을 넘겨 공포가 연기되었다.

 

초안이 발표되자 언론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피력되었지만, 헌장 제정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나 초안 내용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작성과 선포 과정의 일방적 진행과 졸속성, 헌장이 형식화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정도였다. 잡지에서의 특집 기사를 통해 우려를 표명한 것은 기독교계였다. 박형규(朴炯圭) 목사가 주간으로 있던 잡지 『기독교사상(基督敎思想)』은 곧바로 「국민교육헌장 초안 시비」라는 제목의 특집 좌담회를 열어 의견을 피력했다.7 “이 교육헌장이란 것이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국민의 마음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냐 아니면 이것을 어떤 목적 때문에 만든 것이냐”8 하는 제정 동기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우리나라의 헌법과 교육법에 민주교육에 대한 기본 이념이 명시되어 있는데 새삼스레 이런 교육헌장이란 것을 제정할 필요가 있는가”9 하는 그 필요성에 대한 의심, “시행 방법에 있어서도 지금까지의 식으로 만들어 놓고 강요하는 식으로 하면 교육에 있어서 사상의 자유를 억제할 위험성이 강하지 않겠는가”10 하는 그 시행의 방식에 대한 의심 등 매우 타당한 문제 제기가 좌담회에서 이루어졌는데, 비판의 주된 포인트는 공포 기한을 정해 놓고 위로부터 강요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제정 과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박정희가 이끄는 심의회의 수정 과정에서는 초안의 내용 대부분이 유지되었지만 사라진 부분도 있었다. ‘민주사회’, ‘국민의 복리를 골고루 하여’,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등의 표현이 삭제된 것이다. 또 ‘효도와 우애’는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 상조의 전통’으로 바뀌었다. 무엇이 삭제되었는가를 통해 삭제되지 않은 것의 특질이 부조되듯 드러난다고 할 때, ‘헌장’은 민주, 평등, 자유, 평화, 정의 등의 가치를 담고 있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박정희는 ‘헌장’이 국민의 총의에 따라 제정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국회의 동의를 구했다. 그런데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바, 국회의 동의를 구하는 사항들은 조약 체결의 비준이나 국군의 외국 파견, 대통령의 감사원장 임명 등으로 제한되어 있어 ‘헌장’은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사항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국회에서의 동의를 요구한 것이다. 11월 13일에 열린 문교공보위원회 제67회 제10차 회의에서는 신민당 정상구 의원이 “제정한 배경과 내용 면에 있어서 대충 보면 표현에 잘못이 있는지 몰라도 개인주의를 청산하고 전체주의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 다소 있다”며 “일본의 교육칙어 모양으로 중요한 행사를 하는 날에 하는 그러한 식으로 해나간다는 것은 안 될 일”11이라고 문제 제기를 했지만, 헌장 제정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어서 11월 26일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도 신민당의 박한상 의원이 “민주주의 자체가 다원적이고 단원적이 될 수 없는 까닭으로 해서 사회질서에 배반되지 않는 사상이나 이념을 국가권력으로서 통제할 수 없다고 하는 것”12이라는 견해를 표명하면서도 그것이 국회의 동의 절차를 거칠 사안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데 그쳤다. 결국 법적인 위치나 공포의 절차 문제는 애매하게 미봉된 채로, 국회에서 동의안이 가결되었다.

 

12월 5일에 ‘헌장’을 발포하면서 박정희는 그것이 총의에 의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애써 강조했다.

 

이 헌장이 나오기까지에는 우리나라 학계·언론계·종교계·산업계 등 각계 각층의 요망과 의견 등이 집약되었고, 또 그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는 오랫동안 각계 인사들의 성의를 기울인 논의와 수정이 거듭되었으며, 국회에서는 본회의에서 만장 일치로 찬성·동의하는 등 정부와 국회와 국민이 합심 협력해서 헌장을 만들어 오늘 선포된 것입니다. 이 헌장은 결코 누가 누구에게 강요하는 강제 규범이 아니라, 국민 속에서 우러나고 국민의 중지가 엉켜서 이룩된 자율적인 국민 윤리의 대강이라는 데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국민교육헌장’ 선포에 즈음한 담화문」, 1968.12.5).13

 

박정희는 거듭하여 ‘각계 각층의 요망과 의견 집약’, ‘만장 일치’, ‘자율적인 국민 윤리’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그러나 ‘헌장’의 말미에는 그것이 ‘대통령 박정희’라는 이름으로 발포된 것임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헌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발포되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

 

‘헌장’ 발포와 동시에 문교부는 「국민교육헌장독본」 265만 부를 발간하여 각급 학교와 기관에 배부하고, 초등학생을 위한 「헌장그림책」도 130만 부를 발간·배포하는 등 국민교육헌장의 대국민 보급에 주력하는 한편, 그 밖에도 전국의 국민학교 4학년 이상의 학생들, 공무원들에게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게 하였고 행사에는 반드시 그 전문을 낭독하게 하였으며, 헌장 이념을 담은 영화와 음반까지 제작·보급하는 등 전면적인 노력을 기울였다.14 박정희는 매년 국민교육헌장 선포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는 적극성을 보이는가 하면, 연두교서나 기자회견, 기타 중요한 연설 기회 때마다 ‘헌장’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특히 박정희는 헌장의 ‘암송’을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헌장 암송이 형식에 그치는 것이라고 비꼴는지 모르지만 형식이 생활 속에 파고드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지난번 선포한 국민교육헌장을 암송케 하여 정신력을 굳게 해야 한다”는 이유였는데, 그에 덧붙여 “며칠 전 우리 집 지만이에게 헌장을 외어보라고 했더니 학교에서 한 번밖에 안 가르쳐 줘 외우지 못했다고 하길래 이틀 안에 못 외우면 밥을 안 주겠다고 했더니 이틀 안에 외우더군” 하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15 암송하지 않으면 밥을 굶긴다는 으름장은 오늘날로 보면 ‘아동학대’에 해당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런 거리낌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학생들과 공무원들은 그의 자식이 아니었다. 또 박정희는 천황이 아니었다. 그는 헌법에 의해 그 역할이 규정되고 제한되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일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런 지시 하나로 전국의 수백만에 달하는 학생들과 공무원들이 헌장을 암기하느라 전전긍긍하는 현상이 펼쳐졌다.

 

[그림 1] 국민교육헌장 선포(1968년 12월 5일)

심지어 1974년에 당시의 국무총리 김종필은 행사에서의 ‘헌장 낭독’과 관련하여 “낭독자가 뒷짐을 쥐거나 또는 연설하는 자세로 낭독하는 등 교육헌장낭독 본연의 정신에 어긋나는 사례가 없도록 하라”며 구체적으로 “1. 헌장 낭독 때 참석자 전원은 일제히 기립하여 부동자세를 취해 경청하고, 2. 낭독자는 근엄한 부동자세를 취하고 참석자를 향하여 낭독하고 반드시 헌장을 공손히 들고 낭독하지 연단 위에 올려놓고 낭독하지 말라”16고 지시하여 ‘헌장’ 자체를 유사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이런 현상은 식민지기에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교육에 관한 칙어」 암송이 강요되는 것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렇다면 ‘헌장’의 내용은 어떤 원리로 구성되었을까.17 헌장을 구성하는 덕목들은 다양했다. 그 안에는 ‘자주 독립’과 ‘인류 공영’, ‘창조와 개척’과 ‘경애와 신의’, ‘자유와 권리’와 ‘책임과 의무’, ‘나의 발전’과 ‘나라의 발전’, ‘반공’과 ‘민주’ 등의 가치가 병렬적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자체만으로는 노골적인 배타적 민족주의나 파시즘을 표방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상의 가치들은 논리적으로 상호 모순되지는 않는다 해도 실제에서는 상호 충돌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공식적인 저작자이자 발포자인 박정희가 이 다양한 덕목들 중에서 어떤 부분을 어떤 맥락에서 강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헌장’의 실체적 성격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어떤 맥락에서 헌장을 이해하고, 활용했을까?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 해설

 

지금부터 ‘헌장’ 관련 박정희의 공적인 언설들을 추적해 보자. 그는 ‘연두기자회견’이나 국회에서의 연설, 특히 ‘헌장’ 발포 기념식 등에서의 연설을 통해 ‘헌장’에 대한 그 자신의 이해와 강조점을 반복하여 발언했다. 먼저 ‘헌장’ 이해의 전제로 작용하는 그의 국가관과 국민관에 대해 검토해 보자. 1970년 연두기자회견에서의 박정희의 언설에서 그는 개인과 국가 간의 관련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했다.

 

‘나’라는 우리 개인을 우리는 이것을 ‘소아’라고 합니다. ‘나’를 확대하고 연장한 것이 국가인데 그 국가를 우리는 보통 ‘대아’라고 합니다. ··· 우리 민족이라고 할 때의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서 우리 민족이라는 것은 ‘나’를 확대한 ‘대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잘 되는 것은 결국은 내가 잘 되는 것이며, 민족이 잘 되는 것도 결국은 내가 잘 되는 것이며, 국가를 위해서 내가 희생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은 크게 따지면 내 개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고, 우리 자손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하는 것은 미덕이다,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연두기자회견」 1970.1.9.).18

 

“국가는 ‘나’를 확대한 ‘대아’이므로 개인의 운명은 국가의 운명과 일치된다. 따라서 국가를 위한 희생과 봉사는 개인을 위한 희생과 봉사이다”라는 논리다. 여기서 개인과 국가는 독립적인 두 실체 간의 대등하고 호혜적인 관계가 아니라 전자가 후자에 종속되는 관계로 설정된다. 요컨대 그 기본 원리는 ‘사회유기체설’에 입각한 국가주의다. 박정희의 이러한 국가관은 ‘헌장’의 이해와 활용에 가장 중요한 전제로 작용하였다. 이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1971년 12월 5일에 이루어진 ‘국민교육헌장 선포 3주년 기념식’에서의 연설이다.

 

우리는 이 헌장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빠짐없이 실천해야 하겠지만, 특히 오늘의 국내외 여건에 비추어 볼 때, 민족의 공동 운명 의식과 조국애를 강조한 구절은 다른 어느 구절보다도 더 깊이 명심하여 실천 궁행해야 하겠읍니다. 즉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 지나친 개인 위주의 생각, 즉 나라와 민족이야 어떻게 되든 나 혼자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퇴폐적인 생각과, 자기의 책임과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자유와 권리만을 앞세우는 그릇된 풍조가,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최근 세태의 일면을 눈여겨 볼 때, 이 헌장 구절에 대한 각별한 인식과 생활화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라고 믿습니다(「국민교육헌장 선포 제3주년 기념 치사」 1971.12.5.).19

 

박정희에게 있어서 ‘헌장’은 한 문장, 즉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라는 문장으로 집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문장에 나타난 제 덕목은 병렬적인 것이 아니라 가치 상의 선후 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헌장에 대한 이상과 같은 ‘국가주의적’인 선택 해석과 강조에 더하여, ‘민족주의적’인 선택적 해석과 강조도 이루어졌다. 1972년 3월의 「지방장관회의 유시」에서 박정희는 ‘안으로 자주 독립’과 ‘밖으로 인류 공영’이라는 대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렸다.

 

우리 국민교육헌장에 보면 이러한 대목이 있읍니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한다는 것은 우선 우리 나라 교육의 일차적 목적은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자질을 갖춘 국민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가 또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는 분야에까지 발전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제1회 지방장관 회의 유시」 1972.3.7.).20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안 ‘과’ 밖이라는 공간적 비유가 안 ‘그리고 난 후의’ 밖이라는 시간적 비유로 전화되는 대목이다. 공간적 비유에서는 안과 밖은 동시에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적 비유에서는 가치 공존이 아니라 가치 상의 선후 관계가 강조된다. 인류 공영에 앞서서 먼저 자주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강조되는 바, ‘자주 독립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국민의 자질’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박정희는 보다 명시적인 해설을 덧붙인다. 박정희는 교육의 목적으로 ‘선량한 민주 시민’ 양성과, ‘대한민국 사회에 꼭 필요한 선량하고 충실한 인재’ 양성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흔히, 우리 나라 식자들 중에도 교육을 통해 선량한 민주 시민을 양성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 대한민국 국민도 선량한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춰야 됩니다. 그러나, 선량한 민주 시민이라는 것이 일본 국민도 될 수 있고, 미국 국민도 될 수 있고, 영국 국민도 될 수 있는 만국 공통의 국민이어서는 곤란합니다(「제1회 지방장관 회의 유시」, 1972.3.7.)(대통령비서실(편), 1973d: 167-168).21

 

‘민주시민’이라는 개념조차도 독특한 민족주의의 맥락 하에서 재해석되어 ‘대한민국 사회에 꼭 필요한 선량하고 충실한 인재’로 표방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 시민’의 ‘국적’을 강조하려는 이러한 박정희식 헌장의 해독은 같은 해 말, ‘국적 있는 교육’이라는 모토로 한층 더 노골적으로 발전한다. 박정희는 같은 해 3월 말의 「총력안보를 위한 전국교육자 대회」 치사에서 교육에서의 「국적」 회복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혹평을 한다면, 우리는 그동안 국적 없는 교육을 해 왔다고 할 수 있읍니다. ··· 나는 우리의 교육도 이제는 외국의 교육 형태를 모방하고 추종하는 데서 탈피하여, 국가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올바른 국가관에 입각한 교육을 지향해야 할 때가 왔다고 강조하는 바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국가 현실에 알맞는 교육, 즉 우리 교육의 ‘국적’을 되찾아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총력안보를 위한 전국교육자 대회 치사」, 1972.3.24.).22

 

‘우리의 국가 현실에 알맞는 교육’ 즉 ‘국적 있는 교육’이라는 담론은 그 해 말, 즉 1972년 10월 27일의 이른바 ‘10월 유신’의 교육론적 전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마치 ‘제2경제’ 개념이 ‘헌장’의 모태가 된 것처럼, ‘국적 있는 교육’은 ‘10월 유신’의 이데올로기인 ‘한국적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몸에 알맞게 옷을 맞추어서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는 국적 있는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서 이것을 신념을 갖고 운영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공고된 이 헌법 개정안이 ···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토착화시킬 수 있는 올바른 헌정 생활의 규범임을 확신합니다(「헌법개정안 공고에 즈음한 특별담화문」, 1972.10.27.).23

 

‘국적 있는 교육’은 곧바로 ‘국적 있는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로 확대된다. 여기서 이 ‘국적 있는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영구집권, 긴급조치권을 통한 초헌법적 권력 장악, 유정회 제도를 통한 입법권의 장악 등으로 이루어진 박정희 파시즘 체제를 가리키는 것임은 새삼 지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헌장’의 이념이 곧 ‘10월 유신’의 이념임을 최종적으로 확인시키는 것이다. 1972년 11월 21일에 치러진 ‘유신헌법’ 관련 국민투표에서 전국 투표율 91.9%, 찬성 91.5%라는 경이적인 투표 결과24가 나왔다. 그 직후인 12월 5일 ‘헌장’ 선포 제4주년 기념식에서 박정희는 “이 국민교육헌장의 정신이 바로 유신 과업 수행에 있어서 국민 모두가 가져야 할 기본 정신”(「국민교육헌장선포 제4주년 기념식 치사」, 1972.12.5.)25이라고 강조하며 양자가 동일한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 1968년의 ‘헌장’ 제정에 참여한 지식인들, 그 보급과 실천에 노력했던 교육자들에게 애초부터 헌장의 정신이 ‘10월 유신’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박정희에게 있어 ‘헌장’은 언제나 국가주의적인 맥락에서만 이해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적어도 그의 인식 속에서 ‘헌장’과 ‘10월 유신’은 한 치의 이탈도 없이 직선적으로 이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제2의 경제’에서 시작해 ‘헌장’의 제정으로, 그리고 ‘국적 있는 교육’으로 연쇄적으로 전개되어 간 박정희의 ‘헌장’ 이해와 활용이 궁극적으로 귀착한 지점이 ‘10월 유신’이었다.

 

유신 체제 하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인 발전교육론의 타겟을 초중등 학교 교육의 영역을 넘어서 대학 교육으로까지 확장하게 된다. 1974년 연두기자회견에서 그는 대학 교육 역시 ‘국적 있는 교육’이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 대학교육에 있어서 정신적으로 국적이 없는 세계인을 만드는 교육을 우리 한국 대학에서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 분명히 건전한 한국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라야 하겠읍니다(「연두기자회견」 1974.1.18.).26

 

74년 이후부터는 국가권력이 노골적으로 나서서 대학 교육 자체를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으로 재편성하려는 시도가 전개된 것이다. 학문마저도 이데올로기적 교화의 수단으로 장악하려는 파시즘 교육정책의 최종 국면이 바야흐로 전개된 것이다.

 

 

국민교육헌장 체제의 구축

 

‘헌장’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교육의 이념을 지배한 가장 중요한 문서였다. 발포 이후 한국 교육의 이념과 목적, 내용과 방법은 ‘헌장’의 관련 부분으로부터 연역되는 방식으로 설정되고 정당화되어 갔다. 문교부가 매년 발표하는 장학방침은 언제나 ‘헌장’의 이념을 구현한다는 목적을 앞세웠다. 각 시도 교육청은 헌장의 이념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책자로 만들어 배포하고, 그것을 내용으로 교사연수를 행했다. 일선 학교에서의 교육계획의 구상과 집행, 각종 의식과 행사의 개발과 시행은 언제나 ‘헌장’의 이념과 연결되어야만 했다. 모든 교과서와 학교의 모든 교실에 ‘헌장’이 게시되었다. 학교장은 흰 장갑을 끼고 기립한 채로 조회 때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해야 했으며, 모든 학생들은 부동자세로 서서 그것을 경청해야 했다.

 

나아가 ‘헌장’의 이념을 실현한다는 목적으로 정부는 일련의 파시즘적인 교육정책을 앞장서서 시행했다. 발포 직전에 이루어진 69년 11월의 고교 이상 군사 훈련 실시 결정, 72년 1월의 새마을 교육 강화 지시, 73년 2월 14일의 제3차 교육과정 개정(문교부령 제310호)을 통한 도덕(국민윤리) 및 국사 교과의 법제화, 75년 9월 2일 전국 중앙학도호국단 발단식 거행, 같은 해 10월 대학 일반 군사교육 강화, 77년 8월 22일의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8660호) 제정을 통한 국민학교·중학교·실업고등학교의 전 교과와 인문고등학교의 일부 교과(국어·국민윤리·국사 등) 국정교과서제 실시 등이 대표적인 정책들이다.

 

문교사는 ‘헌장’의 교육사적 의의를 “우리 나라의 새로운 국민상, 즉 교육이 지향할 바 이상적인 국민상을 진술하고 제시했다는 데 있다. 국토의 통일과 산업 경제의 근대화, 민족문화의 창달로 민족 중흥의 대과업을 완수하고 영원한 국가발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그 근간이 되는 우리의 정신적 기반과 건전한 국민생활윤리와 가치관이 집약된 새로운 국민상을 밝혀서 국민 교육의 기본 이념으로 하고자 이를 제시한 것이다”27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1995년에 그것이 사실상 폐지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헌장의 발포는 한국 교육을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으로 재편하는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헌장’ 발포 이후 한국 현대교육사에서 ‘국민교육헌장 체제’가 성립했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국민교육헌장 체제’ 하에서 실제로 어떤 교육이 전개되고 어떤 인간상의 형성이 추구되었는가는 특히 ‘유신헌법 시대’의 교과서와 학교 행사 등 교육내용의 실제를 밝힘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그것이 대통령의 저작이라는 형식으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강조하는데 그친다. ‘헌장’의 말미에는 ‘대통령 박정희’라 명기되어 있어 그것이 대통령의 저작임을 드러냈지만, 그것의 법적 지위는 애초부터 애매하고 불확실했다. ‘헌장’은 교육의 목적을 명시하고 있는 「교육법」의 하위에 있는가 아니면 그보다 상위에 있는가, 나아가 「헌법」을 초월하는가 아니면 그것의 규정을 받는가 하는 문제들은 발포 당시부터 불확실했다. 그럼에도 마치 박정희가 ‘유신헌법’ 이후 초헌법적인 권력으로 등극한 것과 마찬가지로 ‘헌장’은 「교육법」이나 「헌법」보다 상위에서 학교 교육과 사회교육 전반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초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통령의 저작인 ‘헌장’의 초법적 영향력은 “권력기회주의 방식으로 활동하던 박정희 개인에게 교육의 구심점으로서 중후한 권위를 부여하였다. 헌장의 선포자로서 박정희는 더 이상 정치나 경제에서 성공한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교육의 지도자로서 정신적으로 내면화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28고 평가된다. 박정희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이렇게 드러내놓고 국민교육의 지도자를 자처한 대통령은 없었다. ‘헌장’은 영구집권을 추구한 제왕적 대통령 박정희의 ‘영도자’적 자의식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증거다.

 

그러나 동시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헌장’의 구상에서 발포, 집행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절차상의 문제나 운용 상의 형식성 등에 대한 지적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이 그러한 교육 장전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반발이 제기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근본적으로 교육장전의 제정과 발포가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에 속하는 것인지 여부는 전혀 문제로 제기되지 않았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헌장’과 같은 교육장전이 국가권력에 의해 위로부터 제정되고 그것이 밑으로 하달되어 교육 실제를 지배하는 제도적 틀이 한국 사회에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헌장’은 많은 이들에게 「교육에 관한 칙어」를 곧바로 연상시켰다. 예컨대 ‘초안’ 발표 이후 『동아일보』가 지도급 교육계 인사를 대상으로 행한 앙케이트 조사에서 김상기 서울대명예교수, 권중회 전 서울대총장, 김재준 전 한국신학대학장 등은 공통적으로 「교육에 관한 칙어」처럼 의식 등에서 낭독시키면 곤란하다고 지적했다.29 그러나 그것을 떠올린 이들조차도 “‘천황’이나 ‘황군’ 등 일본적 요소를 제거한다면 오히려 ‘국민정신 개조’에 유용하다는 사고를 하는”30 이들에 가까웠다. 국가권력에게 과연 국민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할 여지가 큰 ‘교육장전’을 제정하여 시달할 권한이 애초에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는 없었다. 요컨대 ‘교육장전’의 존재 자체는 수용했던 것이다.

 

동시에, ‘헌장 체제’의 성립을 「교육에 관한 칙어」로 대표되는 식민지기의 교육 형식이 일종의 관성을 유지한 결과로만 보는 것은 불충분하다. 이렇다 할 반대나 거부의 움직임이 없었다는 현상의 바탕에는 민족적인 이념에 기반한 교육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요망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까. 특히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의 남북한 체제대립 그리고 그것의 극단적 표출로서의 한국전쟁 발발이 강화시킨 안정적인 국민국가 출현에의 기대, ‘보리고개’로 대표되는 절대적 궁핍 속에서의 경제성장과 근대화에의 욕망 등이 ‘헌장’ 발포와 시행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 혹은 방조의 바탕에서 작동했을 것이다.

 

한편, 교육자들은 어떠했을까?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선포한 직후, ‘헌장’ 발포 4주년 기념식에서 유신헌법 확정의 공을 교육자들에게 돌리는 치하의 발언을 했다.

 

··· 특히 전국의 교육자 여러분이 일찌기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솔선해서 유신헌법 확정을 위해 앞장서 노력했다는 사실은 교육헌장 이념과 이번 ‘10월 유신’의 정신이 그 기조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국민교육헌장선포 제4주년 기념식 치사」 1972.12.5.).31

 

이러한 치하를 한국의 교육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 아니 그에 앞서, 대체 교육자들이 1968년 12월 이후 ‘헌장’의 이름으로 학교에서 어떤 일을 해왔기에 권력자로부터 이런 언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헌장’ 발포 이후 학교에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이데올로기 교화와 전횡이 자행되었는지, 학교 교육이 어떻게 독재 권력의 영구집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는지를 밝힌 후에 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제 유신 시대의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볼 때가 되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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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3―제6대편』, 대한공론사, 133-134쪽.
  2.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文敎40年史』, 文敎部, 7-8쪽.
  3. 「국민교육헌장」과 발전교육론, 박정희의 교육론 간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오성철 (2003), 「박정희의 국가주의 교육론과 경제성장」, 『역사문제연구』, 11, 역사문제연구소, 53-80쪽. 참조.
  4. 大韓民國國會事務處 (1968), 『國會文敎公報委員會會議錄』, 第67回, 第10號, 1968.11.13. 6쪽. 그런데 후에 신문에 발표된 심의위원은 총 44명이어서 권오병의 국회 보고 내용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경향신문』에 보도된 심의위원은 아래와 같다. 교육계: 박종홍 이인기 최문환 임영신 이종우 김옥길 이선근 엄경섭 한흥수 고황경 권오익 유형진 백현기 정범모 / 문화계: 이병도 박종화 김팔봉 이은상 안호상 / 종교계: 한경직 최덕신 이청담 김수환 / 언론계: 장기영 고재욱 장태화 최석채 / 경제계: 박두병 홍재선 / 정계: 이효상 윤제술 길재호 임순천 육인수 백남억 김성희 고흥문 / 정부측: 정일권 박충훈 권오병 이석제 홍종철 김원태 박희범 / 헌장기초위원: 박종홍 이인기 이은상(「敎育憲章 10月공포」, 『京鄕新聞』, 1968.7.23.(1)).
  5. 「協同信義의 民主社會 이룩」, 『東亞日報』, 1968.7.26.(3).
  6. 李祥雨 (1986), 『박정권 18년―그 권력의 내막』, 東亞日報社, 162-163쪽.
  7. 朴炯圭 외 (1968), 「國民敎育憲章 草案 是非」, 『基督敎思想』, 12(9), 대한기독교서회, 90-96쪽.
  8. 당시 서울신학대학 정보경(鄭普慶) 교수의 견해다.
  9. 당시 예수교장로회총회 교육부 총무였던 성갑식(成甲植)의 견해다.
  10. 당시 이화여자대학 현영학(玄永學) 교수의 견해다.
  11. 大韓民國國會事務處 (1968), 『國會文敎公報委員會會議錄』, 第67回, 第10號, 1968.11.13. 11-12쪽.
  12. 大韓民國國會事務處 (1968), 『國會會議錄』, 第67回, 第24號, 1968.11.26. 2쪽.
  13.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3―제6대편』, 대한공론사, 382-383쪽.
  14. 교육50년사편찬위원회 (1998), 『교육50년사』, 교육부, 82쪽.
  15. 「憲章 못외우면 밥안줘」, 『東亞日報』, 1969.1.17.(3).
  16. 「金總理 지시 敎育憲章 낭독때 不動姿勢 취하라」, 『東亞日報』, 1974.6.22.(1).
  17. ‘헌장’의 구성 내용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로는 아래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김진균 (1994), 「현행 ‘국민교육헌장’의 정치적·교육적 문제」, 『경제와 사회』, 24, 한국산업사회학회, 8-20쪽.; 홍윤기 (2004), 「국민교육헌장 왜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졌나?」, 『내일을 여는 역사』, 18, 111-127쪽.; 윤해동 (2005), 「‘국체’와 ‘국민’의 거리」, 『역사문제연구』, 15, 역사문제연구소, 61-95쪽.; 황병주 (2005), 「국민교육헌장과 박정희 체제의 지배담론」, 『역사문제연구』, 15, 역사문제연구소, 129-175쪽.; 이상록 (2017), 「‘조국과 민족에 너를 바치라’―국민교육헌장 다시 읽기」, 『내일을 여는 역사』, 68, 180-191쪽.
  18.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3―제6대편』, 대한공론사, 686쪽.
  19.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4―제7대편』, 대한공론사, 86쪽.
  20.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4―제7대편』, 대한공론사, 168쪽.
  21.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4―제7대편』, 대한공론사, 168-169쪽.
  22.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4―제7대편』, 대한공론사, 179쪽.
  23.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4―제7대편』, 대한공론사, 307쪽.
  24. 「維新憲法案 확정公表」, 『東亞日報』, 1972.11.23.(1).
  25.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4―제7대편』, 대한공론사, 321쪽.
  26. 대통령비서실(편) (1976),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5―제8대편 상』, 대한공론사, 238-239쪽.
  27. 韓國敎育三十年編纂委員會 (1980), 『韓國敎育三十年』, 文敎部, 19.
  28. 홍윤기 (2004), 「국민교육헌장 왜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졌나?」, 『내일을 여는 역사』, 18, 127쪽.
  29. 「뚜렷한 理念浮刻을」, 『東亞日報』, 1968.8.1.(3).
  30. 이상록 (2017), 「‘조국과 민족에 너를 바치라’―국민교육헌장 다시 읽기」, 『내일을 여는 역사』, 68, 190쪽.
  31.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4―제7대편』, 대한공론사, 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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