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6-03-04 11:32
| 역사를 돌아보며 과거 아이들의 삶을 살피고, 그 아이들을 돌보는 교육의 양상을 확인합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태어난 아이들을 어떻게 제대로 돌볼 것인지 고민할 수 있길 바랍니다. |
모든 도토리 속에는 참나무가 들어 있지만
5월 은사시나무 숲은 솜털에 싸인 씨앗들이 구름처럼 온 숲을 뒤덮으며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아, 나무들은 어쩌자고 이토록 많은 씨앗들을 퍼트린단 말인가. 자연은 낭비벽이 심하다. 확률을 높이는 전략을 취하기 때문이다. 땅에 떨어진 씨앗 중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 큰 나무로 자라는 씨앗이 0.01%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만 개의 씨앗이 떨어지면 그 가능성은 100%다. 큰 수의 법칙이 작용하면 확률은 우연에서 필연으로 바뀐다.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고 싶어 하는 이들은 흔히 말한다. “모든 도토리 속에는 참나무가 들어 있다”고. 맞는 말이다. 참나무 씨앗이 자라면 당연히 참나무가 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말처럼,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는 이들의 눈에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씨앗이 자란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모든 도토리들이 참나무로 자라지는 못한다. 땅에 떨어진 수만 개의 도토리 중 나무로 자라는 것은 운 좋은 도토리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은 꿈꾼다. 도토리 같은 아이들이 참나무처럼 자라나 저마다 타고난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기를. 그런데 안토니오 그람시는 말했다. 땅에 떨어진 대부분의 도토리는 돼지 먹이가 될 뿐이라고. 외면하고픈 냉혹한 현실을 들추어낸 셈이다. 모든 도토리가 참나무로 자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버릴 수는 없지만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안이하다. 멧돼지와 다람쥐들에게 도토리는 좋은 먹잇감이다. 도토리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생태계 전체로 볼 때 이는 나쁜 일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법칙은 인간 세상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자신의 타고난 가능성을 꽃피우며 아름드리 참나무로 자라는 아이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가능성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도토리처럼 우연히 떨어진 어떤 곳에서 궂은 일을 하며 경제의 하부구조를 지탱한다. 자본주의 경제 생태계 관점에서 볼 때는 이 또한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슬픈 일이다. 조선 시대, 노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노비로 살아야 했던 숱한 아이들처럼.1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도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작은 체구로 방적 기계 틈새를 드나들며 실을 잣는 아이들이 필요했던 영국의 초기 산업자본가들에게 고아나 빈민 아동은 그저 값싸고 유용한 노동력일 뿐이었다. 아이들이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훈육하는 것이 근대 학교교육의 주된 역할이었던 것은 돼지들에게 먹잇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더 가치 있는 상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면서 아이들이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는 근면한 노동자가 되도록 부추겼다.
개발시대 이 땅의 대도시 주변에 생겨난 신생 사립학교들은 대개 그 지역에 사는 노동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업계 중고등학교였다. 대를 이어 노동자가 될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학교였으니, 노비 계급의 대물림이 20세기 후반에도 계속된 셈이다. 인천의 선인학원2을 비롯해 많은 사학 재단들이 각종 비리로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어려운 가정 출신 아이들이 비리로 점철된 열악한 환경의 학교를 힘들게 다니며 자라서는 부모의 뒤를 이어 공단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었으니, 돼지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돌본 사람들
전쟁이 잦았던 유럽에서는 고아들을 돌보는 시설이 일찍이 생겨났다. 운 나쁘게 길 위에 떨어져 수레바퀴에 깔릴 운명에 놓인 도토리들을 거두어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15세기 중엽 이탈리아 피렌체의 실크 직공 조합이 세운 이노첸티 병원은 유럽 최초의 고아원으로, 이후 5백여 년 동안 40만 명에 이르는 아이들을 돌보았다. 르네상스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건물에서 아이들은 단순히 생존만을 보장받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라틴어와 산술뿐 아니라 예술교육도 받았으며, 여자아이들은 직조 기술을 배워 경제적 자립을 도모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아원들은 이노첸티 병원처럼 이상적인 보육시설이 아니었다. 길에 떨어진 도토리들을 주워 돼지 먹이로 갖다 파는 이들이 더 많았다.
산업혁명기에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4~16시간씩 일을 해야 했다.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동은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일찍이 존 로크 같은 자유주의자도 평민의 아이는 다섯 살이면 노동을 해도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이들은 술도 마시지 않고 공장주의 말을 잘 들었으며, 작은 체구로 기계 틈새를 드나들며 어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냈다. 당시 질병과 전쟁 등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고아원이 곳곳에 설립되었는데, 수용된 아이들 중 운 좋게 살아남은 아이들은 네댓 살만 되면 단체로 공장 노동자로 보내지곤 했다. 고아원 원장과 공장주 사이의 노예 매매나 다름없었다.
영국에서 방적공장을 운영하며 산업혁명기의 부조리와 참상을 목격한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은 1816년 자신이 경영하던 공장의 노동자 자녀와 고아들을 위한 유아원과 학교를 열었다.3 10세 미만 아동의 고용을 금하고, 부모들로 하여금 자녀가 10세가 될 때까지 건강과 교육에 신경 쓰도록 했다. 술에 절어 살던 노동자들을 위해 숙소를 개량하고 공장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여 그들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들었다. 뉴래너크 마을은 이상적인 공동체 마을로 소문이 나면서 유럽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견학을 다녀갔으며, 런던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도 유아학교들이 생겨나고 1824년에는 유아학교협회가 발족하여 유아교사를 양성하는 교육이 시작되었다.
로버트 오언은 흔히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불리지만,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자본가 독재만큼이나 나쁠 것”이라는 오언의 말에 마르크스가 열 받아 한 말이다.4 뉴래너크 마을은 공상이 아닌 현실이었다.5 방적공장의 생산성도 다른 어디보다 높았다. 사회주의를 추구한 자본가였던 오언이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에 미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때문에 주로 경제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는 어린아이들의 교육에 누구보다 헌신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유아학교는 프뢰벨의 유치원보다 20여 년 먼저 생겨난 세계 최초의 유치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오언과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한 페스탈로치는 흔히 ‘(빈민)교육의 아버지’라 불린다. 루소의 영향을 누구보다 많이 받은 페스탈로치는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갖다 맡긴 루소와 달리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고아들을 돌보고 가난한 농민의 아이들을 교육하면서 일생을 바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 사회는 매질 같은 전통적인 훈육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는데,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함으로써 변화로 이끈 페스탈로치의 교육 방법은 당시로서는 ‘교육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일컬어질 만큼 혁신적이었다. 고아나 빈민의 아이도 인간적인 교육을 통해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인류가 모든 아이들의 타고난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세상을 휘저어놓은 격동기에 가장 사회적 약자였던 고아들을 돌보았던 오언과 페스탈로치 같은 이들로 인해 인류는 아이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고,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대하면 사람이 되고, 짐승으로 대하면 짐승이 된다”는 오언의 신념은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함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는 페스탈로치의 교육 이념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이 말 속에 담긴 진실만큼은 빛이 바래지 않을 것이다.
이 땅의 운 나쁜 도토리들을 위하여
우리 옛말에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지배 계급의 무능을 합리화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고아와 과부, 노인, 병자를 사궁(四窮)이라 하여 이들을 돌보는 것을 국가의 책임으로 여겼으나 최소한의 구휼에 그쳤을 뿐이다. 고아는 대개 씨족 사회였던 마을의 친족이나 이웃에게 입양되었다. 길에서 굶어죽은 고아가 발견되면 조정에 보고되어 임금이 질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체계적인 돌봄 시스템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연고 없는 고아는 활인서나 진휼청에서 기본적인 구휼을 한 뒤 입양을 시키거나 공노비로 삼았다.6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흉년이 이어지고 세도정치가 횡행하면서 지방 행정이 마비되어 고아를 돌보던 마을 시스템이 붕괴되자 많은 아이들이 절에 맡겨지거나 여자아이들은 심청이처럼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 아이들을 구한 것은 선교사들이었다. 장로교 선교사 H. G. 언더우드가 1886년에 설립한 고아원이 이 땅에 생겨난 최초의 근대식 고아원이다. 인신매매 대상이 되었던 여아들도 거두어 돌보고, 읽기 교육과 재봉 같은 기술 교육을 시켜 자립을 도왔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고아원은 구한말에 이필화가 사재를 털어 만든 경성고아원(1905)이다. 이후 세브란스 의대 교수였던 오긍선이 경성에 세운 고아원(1919)과 목포의 윤치호와 그의 일본인 아내가 설립 운영한 공생원(1928)이 수십 년 동안 수천 명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아동복지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아원 시설이 제도화되었지만 넘쳐나는 고아를 감당하지 못해 해외입양이 적극 추진되었다.7 최근에 드러나고 있는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사실상 국가가 인신매매를 방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픈 현대사다.
해외 입양을 줄이고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기 위해 2025년 「입양특례법」이 「국내입양에 관한 특별법」으로 개정되고 따로 「국제입양법」이 제정되었다. 그동안 민간기관이 주도하던 입양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책임지는 공적 체계로 개편한 것이다. 출생신고 의무화, 입양 숙려 기간 도입, 가정법원 허가제 등을 통해 아동의 권리를 더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8 하지만 입양 절차가 까다로워지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아동들이 시설에 맡겨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나쁜 양부모를 만나게 될 가능성은 줄어들었지만, 집단 양육시설이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은 아니다. 제도의 부작용을 줄이는 세심한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9
1904년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건너와 러일전쟁 종군기를 쓴 인종주의자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에는 조선인들을 혐오하는 표현으로 가득한데, 유일하게 감탄하는 대목이 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자식 사랑이 사회적 사랑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핏줄 신화가 유난한 한국 사회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여종 둘을 딸과 며느리로 삼았다. 길 위에 떨어진 도토리들이 수레바퀴에 깔려 으스러지거나 돼지 먹이가 되지 않도록 돌보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이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이 땅의 도토리들 처지가 더 나아졌을까.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다. 금수저로 태어났다면 다만 운이 좋은 것이다. 워렌 버핏은 이를 난소복권(Ovarian Lottery)이라 표현했다. 운이 좋으면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보다도 낫지만, 대개는 ‘꽝’이거나 5등에 당첨될 뿐이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 찬스’는 고사하고 부모를 돌봐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더 운 나쁜 아이들은 부모 얼굴도 모른 채 세상에 던져진다. 공동체의 역할은 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국가에만 맡겨둘 수는 없는 일이다. 전통적인 마을공동체가 했던 역할을 오늘날 되살리긴 어렵겠지만 이 시대에 맞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출산율을 걱정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들을 어떻게 제대로 돌볼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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