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6-02-19 16:10
‘학생 맞춤형 교육’은 학교 교육의 이상(理想)으로 받들어진다. 한국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온 세계에서 그렇다. 학교가 ‘공장형’으로 개개인의 고유함을 배려하지 못한다는 오랜 비판이 설득력을 얻은 성과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육에서 개인차(個人差)는 과정(課程)을 표준 삼고 그것에서 떨어짐을 뜻했지만,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교육관이 힘을 얻으면서는 집단 다양성의 표징이고 그대로 존중되어야 할 개성이라 보게 되었다. 이제는 그것을 ‘필요’(needs)라 일컫는다. 교육(내용)이 그것에 맞게 조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학생 맞춤형이라는 조어는 정부가 앞서 분별없이 쓰고 있어서 그 뜻을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지만, 한 극단에서 그것은 교육의 고전적 의미를 뒤집는 데에 이르렀다. 학생이 모르는 것을 선생이 가르치는 행위를 교육이라 할 때, ‘모르는 것’을 골라 가르치는 주체는 으레 선생이려니 여겨 왔다. 이 암묵적인 전제가 ‘맞춤형’이란 깃발 아래에서는 뒤집힌다. 학생을 내용 결정 주체로 앉힌다. ‘선택권 확대’는 이제 당연하다 여겨지는 교육정책 노선이다. 저학년이나 주지 교과에서는 덜한 듯 보이지만 ‘수준’을 배려하는 양으로 변탈(變脫)할 뿐이다.
교육관이 뒤집힌 데는 ‘복지국가’라는 이념이 속화한 탓이 있다. 선진국이라면 모름지기 국민 복리 증진에 몰두해야 할 바, 한국 정부도 오직 ‘국민이 원하는 대로’ 섬겨야 할 만큼 성숙해져야 하리라 기대된다. 정치가 대중 영합의 온갖 ‘서비스’에 달려들고, ‘공교육’이 전략적 서비스 거리로 채택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게다가, 맨눈에 보이는 게 가치의 전부라 여기는 ‘실용’의 풍조에서, 학교 과목과 시장 물건에 대한 선택(가치) 저울질이 서로 달라야 하리란 염은 떠오르지 못한다. 교육이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볼 심안(心眼)을 요구한다면 비웃음 살 뿐이다.
교육이 ‘어린(愚)’ 학생을 깨우치는 활동이라면 거기에는 학생의 선호에 맡겨선 안 될 필수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교육으로 학생이 ‘사람’으로 커 가야 한다면, ‘사람 됨’의 길은 학생이 자의(恣意)로 밟게 되는 게 아니라 자의를 삼갈 이유를 교육 과정에서 터득할 때 비로소 찾게 되지 않는가? 교육을 제대로 받기 전에 교육(과목)의 가치를 헤아릴 수 있는가? 과목 선택은 과연 학생의 권리이어야 하는가? ‘적성과 흥미’에 따르면 되지 않느냐는데, 교육은 개인의 ‘내재 변수’에 맞춰지면 그만인가? 사람 됨의 규범은 개인 ‘밖’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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