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5-12-03 15:00
| 한국과 중대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타이완이기에, 1945년 이후 타이완에서 어떤 교육개혁이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 교육을 상대화하여 보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
1950년대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시선을 한국의 밖으로 돌려 보자. 해방 이후 한국에서 이루어진 교육개혁의 특질을 밝히기 위해 한국 교육을 상대화하여 포착하는 기회를 가져보자는 뜻이다. 여기서 상대화를 위한 비교 대상으로 설정한 것은 1945년 이후 타이완(臺灣)에서 전개된 교육개혁이다.1 1945년 8월 15일 이전까지 타이완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1895년에 청국에 의해 타이완은 일본제국에 할양되었다. 조선에서의 식민지 지배가 35년간이었다면 타이완의 그것은 50년에 달했다. 교육 영역에서 보면, 타이완과 조선의 식민지 교육체제는 기본적으로 ‘동질적’인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 이후에는 식민지의 제도를 제국 일본의 그것과 동일하게 만든다고 하는 이른바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가 교육 영역에서도 취해짐으로써 타이완과 조선 간의 교육제도적 동질성은 더욱 강화되었다.2 그리고 그 식민지 교육체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타이완에서도 1945년 이후 역사적 유산으로 물려지게 되었다.
한편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의미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공통점에 주목해 보면, 첫째로 근대 이전에 타이완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화문명권에 속해 있었으며 식민 지배 이후 일본제국의 문화적 판도 속으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둘째, 1945년 이후의 현대로 내려오면, 한국의 분단과 유사하게 타이완의 ‘중화민국’이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치하는 이른바 ‘분열’ 상태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셋째, 반공을 이념적 기반으로 한 권위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것과 유사하게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정권 하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넷째, 1980년대 후반 이후에 한국에서의 민주화와 마찬가지로 타이완에서도 장제스·장징궈(蔣經國)의 계엄통치체제가 종식되고 민주화가 전개되었다.
한편 타이완과 한국 간에는 중요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몇 가지를 들어 보면 먼저, 한국이 단일민족국가로 구성된 사회인 반면, 타이완은 후술하듯이 그들의 표현으로 다중족군사회(多重族群社會)여서 사회 구성이 보다 복잡하다. 둘째, 1945년 이후 한국이 미군정 통치 하에 들어간 것과는 달리 타이완에는 미군정이 실시되지 않았고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에 의한 통치 하에 속하게 되었다. 셋째, 한국에서는 해방 이후 이른바 ‘친일파’의 청산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타이완에서는 후술하듯이 친일 활동을 했다고 여겨진 타이완인 엘리트들이 국민당 정부에 의해 거의 전면적으로 숙청되었다. 넷째, 한국과 북한 간의 ‘분단’ 상황이 한국전쟁과 같은 ‘열전’으로 치달은 반면, 타이완에는 그들 표현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분열’ 상황이 지속되기는 했어도 직접적인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다. 다섯째, 한국은 상당 기간 권위주의적 통치체제가 지속되기는 했어도 1960년 4월혁명이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민주적 변혁운동이 일어났고 대통령제 하에서 정권 교체가 상대적으로 빈번했지만, 타이완의 경우는 후술할 ‘계엄 체제’가 38년간 지속되어 정치체제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한국보다 매우 강했다.
이상과 같은 중대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타이완은 한국과의 비교에서 매우 유력한 대상이 되며, 1945년 이후 타이완에서 어떤 교육개혁이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그것을 상대화시켜 보는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 틀림없다.
타이완의 ‘광복’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이른바 패전을 선언하는 방송은 타이완에도 흘러 나갔다. 타이완은 일본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국민당군 일진이 타이완에 진주한 때는 8월 15일보다 조금 늦은 45년 10월 17일이었다. 두 달 간의 정치적 진공상태 동안 “도민(島民)은 일일천추(一日千秋)의 기분으로 마치 고아가 따뜻한 생모를 맞이하는 심정으로 조국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3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냄비를 지고 새끼돼지를 끌며 짚신 신고 들어오는 패잔병 같은 오합지졸들이었다”.4 타이완의 미래를 예고하는 불안한 조짐이었다. 전후 타이완의 중국 복귀를 국부-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를 ‘국부’로 약칭한다-는 ‘광복(光復)’이라 명명했다. ‘광복’은 회복(irredentism)을 의미하는 중국어 표현이다. 이 표현 자체가 어제까지의 제국 ‘신민’이었던 타이완인을 중국의 ‘국민’으로 만들려는 국부의 의도를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었다.5 10월 25일 타이페이에서 일본의 항복접수식이 거행되었고 그 날이 타이완의 ‘광복절’이 되었다.6
국부는 45년 이전부터 타이완 접수를 위한 준비를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후젠성(福建省) 주석 천이(陳儀)7를 주임위원으로 하여 1944년 4월 17일, ‘타이완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접수 요원의 훈련과 타이완 통치 정책을 구상했다. 「타이완접관계획강요(臺灣接管計劃綱要)」(1945.3.14)에는 교육 및 문화 관련 정책으로 학교의 재개와 교사 충원, 교육 확대에 대한 정책과 함께 다음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4. 접관 후의 문화 정책: 민족의식을 증강하고 노화(奴化) 사상을 청산하고 교육기회를 보급하며 문화수준을 높인다. ··· 7. 접관 후 공문서와 교과서 및 신문에서 일문(日文)의 사용을 금한다.8
그런데 이 ‘노화 사상의 청산’ 그리고 ‘일문의 사용 금지’ 정책은 이후 타이완인들을 예기치 않은 좌절과 피억압의 상황으로 몰아넣게 된다.
[그림 1] 타이완의 광복절 1945.10.25.
(臺灣 國家文化記憶庫 tcmb.culture.tw/zh-tw/)

당시 타이완의 교육 상황은 ‘인구 약 600만의 타이완에 국민학교가 1,100여교 이상인데 비해 인구가 500만 가까운 상해에서도 공립·사립을 합해도 400교에도 미치지 못하여 ‘타이완은 중국의 다른 성에 비해 반세기는 앞서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9 그러나 문제는 그런 교육을 받은 타이완인을 바라보는 국부의 시선이었다. 천이는 식민지기 타이완 교육의 발달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노화된 낡은 심리’의 근절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10
‘타이완조사위원회’ 좌담회에서 타이완 출신 위원이었던 셰난광(謝南光)11은 타이완에서 ‘소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은 300여만 명, 중등교육은 30만 명, 대학 및 전문교육은 5만 명이기 때문에 인재가 결핍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이들을 활용’해야 하지만, 다만 베이징어 능력이 부족하니 접수 후 10년간은 일본어로 관료를 선발하자고 제안했다.12 그는 교육받은 타이완인을 노예화된 것으로 간주하고 동시에 일본어 사용을 즉각 금지할 때 발생하게 될 차별적 사태를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무시되었다.
마침내 국부가 왔다. 1945년 10월 25일 이후 타이완은 중화민국의 한 성으로 편입되었지만 타이완에 설치된 정부는 대륙에서와 같은 성(省) 정부가 아니라 ‘행정장관공서(行政長官公署)’(이하 공서로 줄임)라는 특수 제도였다. 중앙정부가 임명한 행정장관(천이가 장관이 되었다)이 입법, 사법, 행정 삼권을 장악하고 심지어 타이완성경비총사령관으로 군대의 지휘권까지 장악하는 제도였다. 천이에게 그야말로 ‘식민지기의 무관총독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독재적 권한’이 부여된 것이다. 행정장관공서는 곧바로 타이완인으로부터 ‘신총독부’라고 야유되기에 이른다.13
공서가 취한 통치 형태는 이른바 ‘훈정(訓政)’이었다. 훈정은 난징(南京) 국민정부의 통치영역 내에서 1928년부터 1947년 12월까지 20년 가까이 계속된 통치 형태다. 본디 이는 쑨원(孫文)이 「건국대강(建國大綱)」에서 밝힌 중화민국의 국민국가 건설 삼단계, 즉 ‘군정→훈정→헌정’에서 2단계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일당독재 하에서 국가주의적 교육을 통해 위로부터 근대적인 국민을 형성하고 지방자치를 훈련시킨다고 하는 통치 형태였다. 천이는 훈정을 전면에 내걸고 타이완 통치에 임했기 때문에, 광복 이후에도 타이완인의 정치적 권리는 심각하게 제약당했으며 문화적으로도 동화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타이완인에게 식민 지배의 재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14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도 타이완을 괴롭히는 이른바 성적모순(省籍矛盾), 즉 본성인(本省人)과 외성인(外省人)의 차별이 시작되었다. 국부는 1946년 1월 훈령을 통해 ‘타이완 주민은 1945년 10월 25일부터 중화민국의 국적을 회복했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이 ‘본성인’과 ‘외성인’ 구별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이 훈령으로 인해 비로소 중화민국 국민이 된 사람과 그 가족이 본성인이었고, 45년 이전에 중화민국 국적을 이미 취득했고 이후 타이완에 거주하게 된 사람과 그 가족이 외성인이 되었다.15
공서는 관료 충원 과정에서 본성인을 배제했다. 광복 초기 공서가 임명한 장차관급 간부 18명 중 단지 교육처 부처장 쑹페이루(宋斐如)만이 본성인이었고, 공서 각 기관의 장 16명 중에서 두 사람, 그리고 17명의 현 시장 중 세 사람만이 본성인이었다. 이 여섯 명 중에서도 한 사람만이 타이완의 의사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충칭(重慶)에서 국부와 함께 돌아온 이른바 ‘반산’(半山)16 인사였다.17 수치로 보면 1946년 당시 행정장관공서의 상급직원(상위 6개 급) 21,845명 중 본성인은 7,526명(39%)인 반면 외성인은 13,419명(61%)이었으며, 하급직원(하위 2개 급) 22,606명 중 본성인은 2,425명(11%)인 반면 외성인은 14,815명(66%)이었다. 그 외에도 공서에 여전히 잔류시켜 활용한 일본인이 6,266명(23%)이었다.18 공서는 광복 초기에는 본성인보다 오히려 일본인을 더 많이 기용했던 것이다.
또한 공서는 「타이완성공무원고시규칙」을 제정하여 시험으로 공무원을 기용했으나 시험이 베이징어로 행해졌기 때문에 합격한 본성인은 극소수였다.19 교육계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행정사무도 모르는 외성인들이 일정한 승진 기준도 따르지 않은 채, 다만 외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장이나 상급관리직에 오른 것이다. 광복 후 지위의 상승을 기대했던 본성인들에게 이는 식민지 시대의 차별과 마찬가지였다.20
본성인의 배제와 차별은 이른바 ‘친일파’ 숙청의 논리로 전개되었다. 1946년 1월 21일 「타이완성현시공직후보자임시검정」 규정을 통해 공직후보자 검정을 실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황민봉공회(皇民奉公會) 임원과 이른바 ‘한간(漢奸)’ 용의자의 신청 자격을 박탈했다. 황민봉공회는 1941년 4월 19일, 타이완총독부가 타이완 주민을 전쟁 동원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 본국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를 원형으로 삼아 결성한 것으로 타이완 주민 전체를 하나의 조직으로 편성하는 동원 조직이었다. 총독부는 영향력 있는 타이완인 거의 모두를 봉공회의 조직망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린셴탕(林獻堂)21과 같은 대표적인 온건파 지도자만이 아니라 심지어 젠지(簡吉)22 같은 좌파 지도자까지 임원에 포함될 정도였다. 따라서 황민봉공회 임원 경력을 이유로 공직자 자격을 박탈하게 되면 본성인 엘리트층의 거의 전부가 공직에서 배제되어 버린다. “국부는 타이완 주민 전체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가담했다는 죄를 진 것으로 간주했다. 일본의 총력전체제 하에서 타이완인이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는 가령 내심으로는 반발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무언가 협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사정을 국민정부는 이해하지 않았다”.23
본성인들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환희와 조국으로의 광복에 대한 기대 속에서 국부의 ‘접수(接收)’를 맞이했으나 그것을 결국 ‘겁수(劫收)’로 부르게 된다.24 이러한 겁수는 타이완이 조국으로 광복될 당시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국부와 외성인은 “자신들은 8년 동안 항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둔 후 충칭에서 왔으며 타이완의 광복은 완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라고 말하고, 당신들은 어떤 공로도 없다며 타이완성을 일종의 식민지로 간주하고 타이완 동포에 대해 일종의 우월감”25을 갖고 있었다. 그 우월감과 표리일체를 이룬 것이 이른바 타이완인 ‘노화론(奴化論)’이다. 공서 교육처장 판서우캉(范壽康)은 “타이완 동포는 독립사상을 갖고 있고 외성의 공작인원을 배격하며 타이완인이 타이완을 통치해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타이완 동포는 완전히 노화되었고 본성의 정책에 방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발언을 하여 타이완 사회를 격분시켰다.26 공직에서 본성인을 배제하고 정치적 권리를 부정하는 공서의 논리가 바로 “본도인은 일본의 노예화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교육시켜 재훈련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다”27는 것이었다. 셰난광의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노화론은 타이완인의 자존심을 손상하고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대표적인 타이완 지식인 왕바이위안(王白淵)28은 언론을 통해 노화론에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일본통치 하에서 ‘황민화’라는 세 글자가 타이완 동포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는데 광복 후에는 ‘노화’라는 두 글자가 우리를 부단히 압박하고 있다. ··· 타이완 동포들이 많은 부분에서 일본화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이런 현상을 경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나 지엽적인 문제인 것이다. ··· 만약 타이완 동포들이 광복에 반대했다면 노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본질적 문제에 속하니 한 치도 관대하게 봐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완 동포 중 누구도 광복에 반대하지 않고 그것을 경축하였다. 어째서 ‘노화’ 운운하며 타이완 동포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가.29
보다 근본적으로 ‘노화론’은 단지 자존심 문제만이 아니라 본성인에 대한 외성인의 억압과 차별이라는 성적모순의 현실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본성인을 ‘노예’라고 모욕한 외성인의 지배는 봉건적인 독직과 횡포, 권력 남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예컨대 “타이난법원장의 처는 타이난법원의 검사처 서기관장, 검사처 수석검사관의 처는 같은 법원의 서기관, 타이중(臺中)법원의 직원들은 대부분 법원장의 친척들 ‘일색’으로 원장 처의 형제의 자식들 셋, 사위 하나, 나아가 그 아우 하나, 처의 형제의 외손이 하나, 기타 친척 등 이십 명을 포함하여 모두 52명. 화롄항(花蓮港) 법원장의 처는 동 법원의 서기이며 화롄항 감옥장의 장인은 교도관이고 그 처의 형제도 또한 같은 감옥에서 일하는”30 상황이었다. 그런가 하면 “외성인 교사들이 오기 전까지 학생이 교사에게 뇌물을 주는 본토의 일반적인 악습을 본성인들은 거의 몰랐다. 그러나 1947년 학생들은 시험을 치르기 전에 붉은 종이로 돈을 싸서 겉에 교사의 성공을 기원하는 말을 써서 교사에게 바쳤다”.31 이런 횡포와 착취는 당시 언론과 문학을 통해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각종 구술 증언과 영화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32 예기치 못한 이러한 횡포의 경험은 노화론에 대한 다음과 같이 조소로 이어졌다.
조국에서 오신 선생들께서는 늘 우리가 노화되었다고 말해 우리는 노화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른 채 크게 격분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알게 되었다. 공을 중시하고 법을 준수하는 것이 노화이며, 예의염치를 버려야만 비로소 이 ‘조국화’된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33
더구나 1946년 전반부터 타이완에서 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해 노화론에 대한 본성인의 반발이 결정적으로 격화되었다. 식민지기의 위생 정책으로 사라진 전염병이 광복 후 검역 업무의 마비와 외성인 군경, 공무원의 불법적인 물자 반입으로 인해 다시 발생하자 타이완인들은 ‘타이완의 조국화보다 조국의 타이완화’를 부르짖었다.34
본성인들은 식민지기 타이완이 근대화되었다는 논리로 노화론에 맞서기 시작했다.
일본 통치는 경제적 착취를 목적으로 했지만 그들이 타이완에서 이루어낸 결과는 그 목적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첫째, 상당한 정도로 타이완 민중의 문화정도가 높아졌다. 둘째, 상당한 정도로 타이완 민중은 법치적 훈련을 받았다. 셋째, 상당한 정도로 타이완 민중은 근대산업사회의 생활을 경험했다.35
따라서 “타이완을 접수하는 것은 곧 일본을 접수하는 것이며 저급한 사회조직이 고도의 사회조직을 접수하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36라는 반격 논리였다.
여기서 이른바 타이완의 ‘친일’, 한국의 ‘반일’이라는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는 이분법적 대비 논리를 잠시 따져보자. 정치사회적으로 오해되기 쉬운 이 이분법적 논리는 현재에도 일본의 극우적인 정치세력에 의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오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일부 타이완 본성인들이 보이는 ‘친일’적 행태는 광복 후 국부와 외성인의 억압과 차별에 본성인들이 자위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식민지기에 대한 기억이 재구성된 결과임을 기억해야 한다.
국부는 본성인을 ‘노화’되었다고 간주해 배제하고 차별하는 동시에 그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이른바 ‘조국화’(즉 중국화 정책)도 추진했다. ‘조국화’란 “모든 것을 조국과 일치시키는 것으로서, 중국 내지에서 시행되는 규정은 본성에서도 실행해야 한다”37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국민정부의 법체제를 전면적으로 적용하는 법제적 일원화를 목표로 한 ‘동화주의’”38였으며 이로써 중화민국의 교육제도 및 법령이 그대로 타이완에 이식되어 식민지기의 그것을 대치했다.
타이완의 교육개혁
1945년 이후 타이완의 교육이념은 1929년 4월 26일에 국부가 제정한 「중화민국교육종지 및 실시방침」으로 대치되었다.
<교육종지> 중화민국의 교육은 삼민주의에 근거하여 인민생활을 충실히 하고 사회생존을 부식하며 국민생계를 발전시키고 민족의 생명을 연속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민족의 독립과 민권의 보편과 민생의 발전에 힘써 세계의 대동을 촉진한다(中華民國之敎育, 根據三民主義, 以充實人民生活, 扶植社會生存, 發展國民生計, 延續民族生命爲目的, 務期民族獨立, 民權普遍, 民生發展, 以促進世界大同).39
동시에 「중학규정」(1935년 6월), 「사범학교규정」(1935년 6월), 「직업학교규정」(1935년 6월), 「사범학원규정」(1942년 8월), 「국민학교법」(1944년 3월) 등 중화민국의 일련의 교육법령이 식민지기의 그것들을 대치했다. 이들 제도와 법령은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을 계기로 국부가 고도로 민족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 성격이 농후한 ‘당화교육(黨化敎育)’ 및 ‘삼민주의’ 교육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삼민주의 및 당의(黨義) 등 정치 이데올로기의 교화, 이른바 ‘예의염치’라는 중국의 고유도덕과 공자 숭배 등 민족주의적 덕육 강화, 그리고 초기 중등교육에서의 동자군(童子軍: 보이스카웃의 중국 명칭) 훈련 및 후기 중등교육에서의 청년의용군 훈련 등 학생 군사훈련을 포함하고 있었다. 타이완인이 주체적으로 광복 후 교육개혁의 구상을 말하고 실현할 여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광복 후 타이완인의 주체적인 교육 운동을 상징하는 것으로 주자오양(朱昭陽)이 교육엘리트 및 자산가들과 협력하여 1946년 후반기에 설립한 타이완인의 사립 고등교육기관 ‘옌핑학원(延平學院)’이 있었다. 이 옌핑학원은 정식으로 공서의 승인을 얻지 못했으며, 후술할 2·28사건에 학생들이 참가했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40
문화 및 언론을 포괄하여 전면적으로 중국화 정책이 전개되었는데 핵심은 결국 교육이었다. 타이완에 진주한 공서 전진지휘소는 1945년 10월 6일 각급 학교의 정상수업 재개와 ‘중화민국 국가지위에 저촉되는 교육정신을 다룬 교재’의 즉각 삭제를 지시했다.41 이어서 공서는 식민지기의 교육과정 중 수신, 국어(일어). 역사(일본역사). 지리(일본지리). 무도 등의 과정을 폐지하고 그것을 삼민주의, 국어, 국문, 본국역사, 본국지리로 대치했다. 특히 국어(베이징어) 시간이 중학교의 경우 주 14시간으로 대폭 증대되었다.42 한편 교과서 발행도 추진되어 1945년 11월 10일 ‘중소학교재편집위원회’가 설치되어 국어 및 역사 지리 국정교과서가 출판되기 시작했다. 다른 과목은 잠정적으로 일본어 교과서를 번역하여 활용하고 신설 과목은 중국 대륙의 그것과 동일한 국정본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43
교과서에서는 당연히 중화민족주의가 강조되었다. 예컨대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중국은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영토가 매우 크며 인구가 가장 많고, 게다가 동아시아 각국 문화의 원천이므로 … 따라서 중국이 동아시아를 영도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44거나, “일본과 중국은 다르다. 일본의 개화는 매우 늦어 2천 년 전에는 매우 야만적인 생활을 했다. 그들은 예절도 모르고 음악도 모르고 문자조차 없었기 때문에 물론 어떤 역사나 문학도 없었다”45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일본제국의 민족주의가 중국의 민족주의로 대치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정책은 국어의 강제와 일본어 배제였다. 1946년 3월 12일, 교육처장 판서우캉은 3월부터 9월까지를 국어보습시기로 규정하여 각 학교는 국어교수에 주력하고, 교사는 원칙적으로 모두 국어로 가르쳐야 하며 타이완 방언을 포함할 수 있으나 절대 일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그리고 9월 이후에는 반드시 국어로만 가르쳐야 한다고 하여 매우 단기간에 국어가 교수용어가 되었다.46 ‘국어’에 의한 수업이 불가능한 본성인 교사는 외성인 교사로 대치되었다.
45년 이전에 타이완의 한인들이 구사한 말도 중국어였지만, 동일하게 중국어라도 한자 발음이 지역에 따라 크게 달라 그들은 중화민국의 국어인 베이징어(北京語)를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국부가 타이완인들에게 국어를 상용시키기 위해 학교에서 가동한 장치의 하나가 이른바 ‘방언찰(方言札)’이었다. 학생들이 방언, 즉 타이완어-민난어(閩南語)(푸라오어(福佬語)라고도 한다)나 커자어(客家語)47-를 말하다 적발되면 교사는 벌칙으로 그의 목에 ‘상용국어’라고 쓴 패찰을 걸어주며, 그것을 목에 건 학생은 다른 학생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적발하면 그에게 다시 패찰을 넘겨주고 교사에게 고발하게 하는 방법이었다.48 그런데 이 방언찰은 타이완인에게 매우 낯익은 것이었다. 45년 이전 식민지 시기에 타이완인들은 학교에서 국어인 일본어 대신 타이완어를 말하다 적발되면 방언찰을 목에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45년 이전과 이후의 두 ‘방언찰’ 중 하나는 일본제국의 국어, 또 하나는 중화민국의 국어를 강제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형식’은 동일했다. 45년을 사이에 두고 두 방언찰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형식의 복제’와 ‘내용의 환치’였다. 물론 방언찰만이 아니라 교육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원리였다.
한국의 경우 일본어에서 한국어로의 전환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된 점에 비추어 볼 때 타이완에서의 언어 전환 상황은 보다 복잡한 사정을 안고 있었다. 광복 후 타이완의 언어 상황이 해방 후 한국의 그것과 기본적인 구조적 조건에서 달랐다. 광복 이전에 타이완은 민난어와 커자어 그리고 타이완 원주민어 등이 혼재하는 다언어 사회였다. 그런 상황에서 광복 전까지 민난인과 커자인, 원주민 등 족군(族群) 간의 의사소통의 공통어로 사용된 것이 일본어였으며 광복 후 이를 새로운 공통어로 대치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언어를 새로운 공통어로 할지도 문제였다. 민난어는 사용자가 가장 많은 언어로서 타이완어가 될 가능성이 컸지만 독자적인 문자를 갖지 못했고 다른 족군의 반발 문제도 있었다. 결국은 중국어를 새로운 국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9
애초에 광복을 환영했듯이 타이완인들이 새로운 국어인 베이징어를 애초부터 거부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국어를 일본어에서 베이징어로 대치하는 속도, 그리고 국어 문제의 정치성에 있었다. 공서는 1946년 10월 25일부터 신문잡지의 일문(日文)판을 폐지함으로써 타이완인들의 의사표현을 심각하게 제한했으며, 국어 습득 여부를 공직 충원이나 참정권 부여의 기준으로 삼아 정치적 참여 기회 역시 제한했다.50 이는 모어에 대한 타이완인의 열등감을 심어주는 동시에 진학 기회에서도 성적모순을 야기했다. 대학생 중 외성인의 비율은 광복 후 20년이 지난 1966년 시점에서도 34%, 심지어 1987년에도 30%로서 외성인 인구 비율의 2배를 상회했다.51
2·28사건
외성인과 국부의 지배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풍자라는 무기를 통해 표현되었다. 당시 타이완에는 「타이완영천지(臺灣零天地)」라는 풍자시가 유행했다. “타이완의 광복을 크게 기뻐했지만(臺灣光復歡天喜地), 탐관오리들은 주색을 탐하고(貪官汚吏花天酒地), 경찰은 만행과 횡포를 일삼으니(警察蠻橫無天無地), 인민의 고통은 끝이 없구나(人民痛苦烏天暗地)”52라는 내용이었다. 천이가 표방한 ‘모범적(模範的: mófànde) 타이완의 건설’은 ‘모반적(謀叛的: móufănde) 타이완의 건설’로, ‘삼민주의(三民主義: sānmínzhǔyì)의 실천’은 ‘삼민취리(三民取利: sānmínqǔlì)의 실천’으로 야유되었다.53 가장 통렬한 것은 ‘개가 가니까 돼지가 왔다’는 유명한 풍자일 것이다. 당시 타이완을 방문했던 오스트레일리아 기자 벨든(J. Belden)은 거리 곳곳에 ‘개 한 마리(일본인)가 섬을 빠져나가고 있고 돼지 한 마리(외성인)가 들어오는 그림’이 그려진 포스터가 걸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림 밑에는 “개가 가니까 돼지가 왔다(狗去豬來). 개는 집이라도 지키지만(狗會看家), 돼지는 처먹기만 할 뿐이다(豬只會吃). 돼지는 개만도 못하다(豬不如狗)”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54 언제 ‘타이완 주민의 마음에 뿌리박은 한이 화산처럼 폭발’55할지 모를 불안한 상황이었다.
마침내 폭발이 일어났다. 1947년 2월 27일 저녁, 타이페이 시내 거리에서 담배 암매상을 하던 과부를 단속 직원이 구타하자 그것을 목격한 민중들이 항의했고 그중 한 사람이 직원의 위협사격에 사망했다. 다음 날인 2월 28일, 공서에 항의하러 모여든 민중들에게 경비병이 발포하여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면서 타이페이시가 폭동 상태에 빠졌다. 2·28사건이 발발한 것이다. 민중들은 시내의 타이페이방송국(현재는 2·28기념관으로 되어 있다)을 점거, 방송으로 궐기를 호소하면서 폭동은 타이완 전 지역으로 삽시간에 파급되었다. 폭동이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성적(省籍) 대립의 양상을 띠면서 본성인이 외성인을 적발, 폭행하기 위해 일본어를 말하게 하거나 ‘기미가요’를 부르게 하는 사태56까지 발생했다. 국부의 일본어 금지와 국어 강제에 대한 본성인의 자위적 반격이 지닌 식민주의적 역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림 2] 2·28사건의 발단을 묘사한 황룽찬(黃榮燦)의 판화
「공포의 검사(恐怖的檢査)」(1947.4.)(https://zh.wikipedia.org/zh-tw)

곧 타이완의 엘리트층은 ‘2·28사건처리위원회’를 자발적으로 결성해 수습에 임하는 한편, 천이와 공서에 대해 탐관오리의 처벌, 공서의 폐지, 자치의 실현, 타이완인의 등용 등을 요구했다. 천이는 한편으로 협상에 응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은밀히 장제스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했고 마침내 3월 8일 국민당군이 도착하면서 무력 진압이 시작되었다. 「타이완접관계획강요」에는 ‘타이완에서 적국 세력을 일소하고 반란을 숙청한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결국 그 적국 세력이란 다름 아닌 본성인이었고, 파견한 군대는 바로 반란군을 토벌한다는 태세로 타이완에 온 국민당 군대였다. 진압 과정에서 전개된 잔혹한 학살과 폭력 실태는 민주화 이후 여러 조사를 통해 밝혀졌지만, 특히 타이완의 엘리트에 대한 계획적이고 집요한 숙청이 전개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28사건을 관찰한 외국 언론인은 이렇게 지적했다.
학살은 무차별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일정한 패턴이 확인된다. 국민당군은 타이완의 지식인과 엘리트층을 말살하려 의도했다. 그들은 처리위원회 위원들, 교사들, 학생들, 신문 편집자들, 변호사들 그리고 정부에 비판적이라고 간주된 모든 사람들을 추적했다.57
2·28사건 후, 국부 측이 작성한 ‘반란분자’ 명단에 앞서 말한 황민봉공회 임원 여부를 기입하는 난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58 또한 타이완의 최고 지도자층에 대한 계획적인 말살이 전개되었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다. 이렇게 해서, 국부에 의해 ‘노예화’되었다고 매도당한-우리식 표현으로는 ‘친일파’로 간주된- 타이완 엘리트층이 대거 사라졌다. 계엄령 해제 이후 리덩후이(李登輝) 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1992년의 국가 공식 조사에 따르면 사망자만 해도 만 팔천 명에서 이만 팔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59 ‘사막에 있는 듯한 적막감과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침묵’60만이 흐르는 가운데 사건 자체가 이후 40여 년간 봉인되어 버렸다. 2·28사건에 관한 금기가 풀린 1988년에 한 신문사가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건의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타이완 전체 응답자의 15%에 불과했을 정도였다.61
진압을 마친 천이는 사건의 원인을 ‘일본 사상의 반동’이자 타이완인이 ‘일본인의 노예화교육 및 (중국과의) 격리교육의 독소’에 젖어든 탓으로 돌리고 ‘앞으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는 것’62이라 강조했다. 2·28사건의 영향으로 1947년 5월 16일, 행정장관공서가 폐지되고 타이완성(臺灣省) 정부가 정식으로 발족되어 웨이다오밍(魏道明)이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상징적으로 몇 사람의 타이완인이 고위관료에 임명되기는 했으나 성 정부의 민정, 재정, 교육, 건설 등의 주요 지위는 여전히 외성인이 차지했다.
교육에서 조국화 정책도 한층 강화되었다. 「타이완성각급학교거행주회잠행판법(臺灣省各級學校擧行週會暫行辦法)」을 통해, 전교생이 이유를 불문하고 모두 강당에 모여 매주 1회 아침 주회(週會)를 거행하도록 하고 주회의 절차 및 형식과 주회 시의 보고 및 강연 범위까지 상세히 규정했다. 주제는 ‘국부의 가르침과 장제스 주석의 말씀, 중국혁명사략, 상급기관이 규정한 선전사항, 중앙 및 본성의 중요시정방침’이어야 했다. 그리고 주회의 절차로 국가 제창, 국기 및 국부초상에 대한 삼국궁례(三鞠躬禮: 세차례 허리굽혀 절하기. 인용자주)까지 상세히 정했다.63 심지어 학교가 수업을 재개한 후 교육당국은 학생들의 복교 시 주의 사항으로 “등하교시에 일렬로 줄을 지어서 가야 하며, 집단행동을 해서는 안 되고, 학생들은 휘장을 항상 착용하며, 교내에서 집회를 가지거나 교외의 어떤 단체활동에도 참가해서는 안 된다”64고 지령했다.
한편, 대륙에서는 1946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국공내전(國共內戰)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국민당군의 우세는 애초 예상과는 달리 지속되지 못했다. 군사적 패배와 파벌 투쟁, 국민당 통치 지역의 물가앙등 속에서 국민당의 지배력은 붕괴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당은 서둘러 헌정을 실시하여 통치 기반을 굳히려 했다. 1946년 12월 25일 국민대회에서 제정된 「중화민국헌법」이 47년 1월 1일자로 공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서가 지배하는 타이완에는 시행되지 않았다. 헌정 미실시에 대한 정치적 불만은 2·28사건의 원인의 하나로도 작용했다.
1949년 1월 공산당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장제스는 국민당 세력의 타이완 이전 준비를 본격화했다. 자신의 심복인 천청(陳誠)을 48년 12월에 타이완성 주석에 임명했고 다음 해 2월에는 타이완경비총사령, 다음 달에는 국민당타이완성 당부주임을 겸임시켰다. 천청은 1949년 5월 26일에 타이완에 계엄령을 발포하여 국부의 타이완 이전에 대비한 포석을 깔았다. 1987년 7월 15일까지 38년간 지속된 세계 정치사상 가장 긴 계엄령의 시작이었다.
마침내 1949년 12월 초순 장제스 국민당정부의 중앙이 타이완으로 이전했다. 그는 곧바로 ‘대륙반공’(大陸反攻)을 선언하며 타이완을 상시적인 ‘내전 모드’로 끌어들였다. 이미 48년 5월에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제정하여 헌법의 총통연임제한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총통에게 긴급처분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전국 자원을 반란 진압과 군사활동에 동원할 수 있는 총동원 체제를 가동시켰다. 이는 1991년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49년 6월 21일에는 「징치반란조례(懲治叛亂條例)」를 제정하여 공산당 및 그 동조자를 처벌하는 법령을 제정했고, 50년 6월에는 식민지기의 연좌제를 계승한 「감란시기검숙비첩조례(戡亂時期檢肅匪諜條例)」를 통해 상호감시와 밀고를 의무화했다.
교육도 내전 모드로의 재편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이데올로기 교화와 군사훈련 및 감시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1950년대 이후 국부의 교육정책을 규정하는 법령으로 「감란시기교육실시요강(戡亂時期敎育實施要綱)」이 1950년 6월 15일 발표되었다. 총 28항으로 되어 있는 요강 중 첫 네 조항은 삼민주의교육의 강화에 관한 것으로 “1. 중소학의 공민, 역사지리 및 전과 이상 학교의 삼민주의 교수를 강화할 것, 2. 각 학교는 명사를 초청하여 삼민주의사상 및 감란건국(戡亂建國)의 의의를 천명할 것, 3. 중등이상 학교에서 삼민주의 논문시합을 개최하고 학술단체의 삼민주의 연구를 조직할 것, 4. 삼민주의 및 반공항아(反共抗俄) 간행물을 출판할 것”65 등이었다. 1952년 4월부터 모든 학생에게 총통의 훈사(訓詞)를 암기시키고 삼민주의 경연을 실시하게 했고, 이른바 ‘문무합일교육’이라는 이름으로 51년부터 사범학교에서, 53년부터 고급중학에서, 54년부터 대학과 전과학교에서 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초급중학에서도 ‘동자군’을 활용한 군사훈련이 52년부터 시작되었다.66
학교에서의 민족주의 교육은 식민지적 형식을 차용하는 방식으로도 전개되었다. 식민지기에 천황의 어진영(御眞影)과 교육칙어를 보관했던 봉안소(奉安所) 유적이 다시 재활용되어 그것을 공자상을 안치하는 ‘제사실’(祭祀室)로 바꾸어 유사종교 의식을 치르게 했다.67 사범학교의 교사 훈련 방식도 “식민지기 사범교육체제와 상당히 연속적이었고, … 그중에서도 특히 군사화된 생활관리 및 공비(公費) 지급 제도는 정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범체제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속되었다”.68
국부에 의한 타이완 교육 재편의 절정은 1952년 10월의 ‘중국청년반공구국단’(中國靑年反共救國團. 이하 구국단으로 줄임) 결성이었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는 타이완에 오자마자 곧바로 대륙 반공과 반공 구국을 외치며 구국단을 창설하고 스스로 단장에 취임했다. 구국단은 학생에 대한 훈련과 통제만이 아니라 소·중학교 교장과 교원 및 대학교수 임명에까지 간섭하여 교육행정을 좌우했으며 그 권력은 행정원의 교육부 및 성정부 교육청이나 현시정부 교육과에까지 침투했다. 행정원 교육부나 타이완성 교육청 등 공식 교육행정기관과 별개로 각급 학교에는 ‘훈도처’라는 기관이 설치되어 국가안전국의 하부기관인 각 학교의 ‘안전실’과 함께 학생과 교원의 사상동향을 감시하는 교육 통제의 요체가 되었다. 구국단은 이들 각 학교의 훈도처를 장악했다.
구국단은 대학, 전과학교, 고등중학, 직업학교 학생 “대부분을 가입시켰고 또한 각 현과 시에 ‘지대’, 각 학교에 ‘대대’, ‘소대’, ‘분대’를 창설했다. … 단원에 대한 사상통제는 극히 엄밀하여 매주 각 단원에게 ‘주기(週記: 반성문)’를 쓰게 했다. 남학생에게 군사훈련, 여학생에게는 간호훈련을 시켰다. 특히 학교 휴가를 이용한 하계훈련이나 동계훈련에는 수만 명의 타이완인 학생을 모아 그 강대함을 과시했고 그 때에는 수령 장제스가 몸소 열병분열을 주최할 정도로 힘을 실어주고 이를 통해 청소년에게 장제스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주려 했다”.69 안호상이 만든 학도호국단이 그러했던 것처럼 구국단도 ‘소련의 공산주의청년단, 나치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와 마찬가지’의 ‘파쇼 단체’70라고 비난받았다. 해방 후 한국 교육개혁의 흐름이 도달한 지점의 하나가 ‘학도호국단’이었던 것처럼, 광복 후 타이완 교육개혁의 흐름이 마침내 도달한 지점의 하나가 ‘중국청년반공구국단’이었다.
타이완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본 한국 교육개혁
광복 후 타이완에서는 타이완인들이 주체적으로 개혁에 참여할 기회 자체가 처음부터 봉쇄되었다. 교육의 변화는 ‘개혁’이라기보다는 식민지의 교육이 국부의 민족주의 교육으로 전면적으로 ‘대치’되는 과정이었다. 양자는 공히 중앙집권적이며 전체주의적인 형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식민지기의 ‘교육칙어’는 ‘삼민주의교육종지’로 바뀌었고 그 안에는 쑨원이 말한 삼민주의의 삼대 강령, ‘민족’, ‘민권’, ‘민생’이 교육이념으로 담겨 있었다. 그중 민주주의와 관련된 이념으로 ‘민권’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을 ‘민족’ 이념이 일방적으로 압도했다. 광복 초기의 ‘중국화’ 정책, 계엄령의 실시와 ‘내전 모드’로의 전환 이후 타이완 교육에서 ‘민권’ 이념은 사실상 실종되어 버렸다.
해방 이후 미군정 통치 하에 들어간 한국과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통치 하에 들어간 타이완은 정치구조 상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교육 영역에서는 식민지기적인 교육 형식의 복제와 내용의 환치를 공통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한국과 타이완의 교육개혁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국민 만들기 형식의 복제와 내용의 환치 현상은 ‘왜’ 나타났는가.
한국의 경우 이를 인적 요인으로 설명하려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방 이전에 식민지적 형식을 운용한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살릴 수 있는 기회와 지위를 장악하는 상황이 실제로 한국에서 전개되었다. 이를 근거로 이른바 ‘친일파’의 청산에 실패한 것을 식민지 잔재가 지속된 주요한 원인으로 간주하는 입장이 우리 사회에서는 강하다. 그런데 미군정기 한국 교육개혁을 주도했던 오천석도 정부 수립 이후의 안호상도 ‘친일파’는 아니었다. 안호상은 식민기기에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던 자타가 공인하는 민족주의자였다. 미군정기의 교육개혁에서 식민지적 교육 형식에 대한 혁파의 측면이 약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 수립 후 교육법 제정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라는 이름 하에서 식민지적 형식이 복제되었던 현상은 단순히 ‘친일파’ 청산의 실패라는 요인만으로 충실히 설명되지 않는다.
광복 후 타이완의 상황은 이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친일파’의 인적 숙청이라는 점에서 타이완에서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교육자를 포함한 식민지기 타이완의 엘리트들은 광복 후 승진은커녕 예전 지위를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2·28사건과 백색테러71 과정에서 말하자면 ‘최종적 절멸(final solution)’의 운명에 처하기도 했다. 이른바 ‘친일파’의 인적 청산이 심지어 생물학적인 차원으로까지 실현된 것이다. 따라서 외성인 중화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식민지적 교육 형식이 복제되는 현상을 ‘친일파’라는 인적 요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72
그렇다면 이를 외래 권력의 지배라는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의 경우 미군정이라는 외래 권력에 의해 삼 년간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이를 이른바 ‘신식민주의’ 또는 ‘신제국주의’적 관점에서 포착하여 식민지 잔재 청산의 실패를 미군정의 지배와 결부시키려는 시도도 있다.73 그리고 타이완인에게도 국부는 90년대의 정권 교체까지 장기 지속된 외래 권력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견 그러한 설명을 시도할 만한 근거도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전후 동일하게 미군정 하에서 전개된 일본의 교육개혁 내용을 한국과 타이완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외래 권력의 지배 자체가 민주적 개혁의 좌절을 야기한다고 단순하게 결론내리기 어렵다. 적어도 교육 부문에서 개혁에 대한 토착민의 자율적 참여 정도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은 미군정기 3년간은 ‘상대적 자율성’ 그리고 이후는 ‘절대적 자율성’으로, 일본은 1952년 미군정이 종식되기까지 ‘상대적 타율성’으로, 그리고 타이완은 ‘절대적 타율성’으로 성격을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토착민의 자율적인 개혁이 전개된 한국과 절대적으로 타율적인 개혁이 전개된 타이완에서 식민지적 잔재가 강하게 유지되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타율적인 방식으로 개혁이 전개된 일본에서 제국의 잔재가 비교적 철저하게 청산되었다는 사실은 외래 권력이라는 이른바 ‘새로운 식민주의적 지배’ 요인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과 타이완의 교육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식민지기와의 연속성은 단순히 식민지적 관행의 단순한 관성이나 개혁세력의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혁세력들의 의도적인 선택과 결정의 산물이었다. 식민주의적-동시에 ‘일본’ 민족주의적- 교육의 형식을 식민 지배가 종식된 이후에도 복제하여 재활용하겠다는 선택이 해방 후 한국과 광복 후 타이완의 교육개혁 과정에서 작동한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민족주의가 이식이 가능한 모듈(규격화되고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면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이며 그 모듈은 다양한 이념과 사회적 토양과 합체되어 확산되고 재생산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74 이 개념을 적용해 본다면, 일본제국이 타이완과 조선에 이식한 식민주의 교육 장치야말로 민족주의 모듈 특히 국민 만들기 장치라는 모듈이었고 그것이 1945년 이후 두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이식(형식의 복제)되고 새로운 국가의 이념과 합체(내용의 환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교육법제가 식민지적인 요소를 청산하는 방향으로 개혁된 것은 한국과 타이완에서 공히 민주화 이후였다. 타이완의 경우 40년 동안 교육발전의 ‘풀리지 않은 매듭’75은 1987년 7월 15일 계엄령 해제 이후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타이완도 1987년은 현대사에서 민주화의 역사적 분기점이 되는 해였다. 이후 본격화된 시민운동과 교사운동의 결과로 마침내 1999년 6월 23일에 「교육기본법」이 제정되었다.76 이런 역사적 흐름은 식민지 잔재 청산의 동력이 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에 의해 창출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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