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5-09-03 15:04
| 교장의 교육 활동 및 지원은 어디까지일지를 살펴보며, 필자가 교장으로서 진행한 수업들을 언급합니다. 교장의 수업 참여는 교장실의 문턱을 낮춰주며 그때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
학생들에게 교장은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동영상이 있다. 이런저런 답변이 나오는데, 단연 압권은 “학교 돌아다니면서 휴지 줍는 사람”이다. 그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아이들도 줍고, 선생님들도 줍지만, 대개는 교장이 더 많이 줍는다. 주울 시간도 많고, 평교사일 땐 안 보이던 쓰레기가 유난히 눈에 띄는 까닭이다. 학생들의 그런 답변에는 교실에서 수업으로 만나는 교사가 아니기에 학교장의 하루를 들여다보거나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던 것도 단단히 한몫을 차지한다.
교사와 교장의 차이를 교사들에게 묻는다면 뭐라 할까? 가장 많이 꼽는 것은 수업의 여부일 테고, 급여의 차이나 개별 사무실(대부분의 학교에는 교장실이 있음)이 있다는 점을 꼽기도 한다.
교장의 교육 활동 및 지원은 어디까지
교장이 무엇을 해야 하는 자리인가는 초·중등교육법에 “교장은 교무를 총괄하고, 민원 처리를 책임지며, 소속 교직원을 지도·감독하고, 학생을 교육한다.”고 나와 있다. 다소 모호하긴 하나, 학교 안팎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관여하고 책임지는 자리라는 의미이다. 또, 급여와 관련해서도 ‘관리업무수당’과 ‘직급보조비’를 받음으로써 일반 교사와 달리 수업 중심이 아닌 관리직으로서의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요컨대, 교장은 학교 행정과 운영, 교직원과 학생 지도 등의 역할에 중점을 두며, 이를 법령과 수당 체계 등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교사는 동법에서 “법령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한다.”고 규정한 것을 볼 때, 직접적인 학생 교육은 주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교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아는 학교 모습 그대로다.
그럼 교장은 수업을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수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장은 학교의 모든 교육 활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한다. 어떻게 하는 것을 수업으로 볼 것인가? 수업(授業)을 좁게 보는 관점은 일정한 공간에서 일정 기간 이루어지는 교사와 학생의 활동을 의미한다. 수업 내용은 교과목, 학습 주제, 성취기준 등에 따라 정해질 것이고, 보통 칠판과 책상이 있는 교실에서 교사가 앞에 서고 학생들은 앉아 있는 모습을 띤다.
하지만 학교의 실제 수업은 그것만이 아니다. 강당이나 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 수업도 있고, 아예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현장 체험형 수업도 상당히 있다. ‘삶과 연계한 교육과정’을 말하는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특히, 학습자 주도성(student agency)을 중시하는 최근의 교육 흐름은 교사만이 아니라, 동료 학습자, 보호자, 지역사회 4자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교장도 단순히 관리자, 감독자의 역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교육 활동을 펼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다. 그런 관점에서 교장의 역할도 거듭날 필요가 있다.
내가 교장으로서 한 수업들
‘교장의 수업’이라니, 제목만 보고 어떤 과목을 일주일에 몇 시간이나 한다는 건가 기대한 독자에게는 죄송한 일이지만, 그와는 거리가 멀다. 사실 그 어떤 교장의 경험과 철학도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드러내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다양성을 높이는 의미가 있다. 특별할 것 없는 나의 그것이 누군가의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가장 흔하게 이루어지는 수업은 학교 입구에서 이루어지는 등교 맞이일 테다. 생활지도 교사와 번갈아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최대한 학생들의 등교 모습과 표정을 살피는 편이다. 신학기 초에 가장 활발한데, 특히 1학년 학생들은 다짜고짜로 얼굴을 내밀고 자기 이름을 물어오기도 한다. 교실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얼굴 익히기도 쉽잖은 판에 이름과 연결을 하라니, 이런 억지가 없다. 하지만, 수백 명의 아이들이 얼굴을 마주치면서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면 얼마나 삼엄하고 삭막한 등굣길이 될 것인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가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렇게 전교생 얼굴을 익히는 데 힘을 쏟고, 이름을 불러주는 시간을 갖는다. 물론, 아무리 용을 써도 모두의 얼굴과 이름을 알지는 못한다. 아이들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시간을 끌 때면 식은땀이 흐른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날 탓하지는 않는다. 초성을 알려 주거나 마지막 이름자로 힌트를 건네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다시 한번 알려주고 교실로 들어간다.
등교하는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혼자 등교하는 아이도 있지만, 늘 여럿이 무리를 지어 오는 친구들도 있다. 밝은 표정으로 가방을 메고 오는 아이, 슬리퍼를 끌며 가방도 없이 오는 아이, 손에 학습 준비물 대신 먹을 것을 챙겨 들어서는 아이, 교실 조회 시간을 지나서도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 그 하나하나에 아이들의 어제와 오늘의 생활이 스며있다.
이렇게 해서 교장은 교장대로 학생들과의 관계에 깊이와 두께를 더하고, 아이들은 교장과 배우 케빈 베이컨의 1단계 또는 2단계1 관계로 연결된다. 자연스레 학교가 더 친근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관계망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모두에게 긍정적 에너지가 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격식을 갖춘 수업도 있다. 대개 입학식, 졸업식, 방학식이나 학교의 행사 무대에서 이루어진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월요일마다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애국 조회2라는 걸 했다. 교사들이 학급별로 줄을 세워놓으면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고 교장이 훈화(訓話)라고 아이들에게 씨가 안 먹히는 얘기를 장시간 늘어놓던 시절이다. 지금은 다행히도 자취를 감췄다.
간단한 행사 무대의 발언은 짤막하게 응원하고 마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입학식과 졸업식의 환영사, 축사는 더 신경을 써서 준비한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보호자인 지역 주민도 함께하는 자리이기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중학 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환영, 3년의 중학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공간으로 나서는 이들에게 주는 응원과 축하를 담으려 한다. 특히, 나는 최근에 유행했던 노래나 자리에 어울리는 시구를 즐겨 사용한다.
입학식에서는 정현종의 「방문객」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를 가져다 썼다.
졸업식에서는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3에서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라는 구절을 통해 오늘의 졸업은 사건의 지평선을 잠깐 넘는 것으로 그 모퉁이 뒤에서 손짓하는 새 운명을 만나러, 경계를 넘어 신나게 달려나가라고 당부했다. 지난해는 걸그룹 아이브(IVE)의 노래 「I Am」4에서 ‘너는 누군가의 Dreams Come True/ 제일 멋진 어느 날의 Deja vu/ 머물고픈 어딘가의 낯선 View/ I’ll be far away.’를 어설프게 불러주며 날마다 새로운 꿈의 배낭을 메고 곳곳을 여행하며 그 어딘가에서 ‘제일 멋진 어느 날’을 ‘데자뷔’처럼 만나길 바란다고 축하를 했다.
인상 깊은 아이들 이름도 불러주면 자칫 꼰대의 ‘라떼는 말이야’를 피할 수 있어 좋았다. 예를 들면, ‘햇살관 무대와 버스킹을 책임진 밴드부의 보컬 김○○와 고○○, 못 다루는 악기 없는 밴드 팔방미인 임○○, 모든 행사의 시작과 끝에서 방송과 촬영으로 뛰어다니던 정○○와 김○○, 나랑 텃밭을 가꾸던 고○○, 연극제 영화제 뮤지컬에서 연기의 끝판을 보여준 이○○, 뮤지컬 신데렐라에서 숨멎 독창으로 무대를 압도한 김○○’ 이렇게 마지막 출석을 부른다.
이러한 학교장의 말은 학교 교육의 방향이나 분위기를 제시하고, 일정한 매듭을 짓는 행위가 된다. 즉, 배움은 학급 교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입학식, 졸업식도 모두가 함께 모여 만들어가는 집단적 배움의 현장인 셈이다. 혼자 배우기도 하지만, 모둠 단위, 학급 단위의 배움도 있는 것이고, 학년 전체가 또는 보호자와 함께 만드는 배움이 어우러지는 곳, 그곳이 학교, 공교육이다. 이는 그 어느 사교육도 하지 못하는, 공교육만이 가진 탁월함이다.
때론, 특정 학급에 들어가서 수업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교장들이 이미 상당수 있다. 어느 학교든 보강이 발생한다. 예고된 것은 시간표 변경이나 시간강사 채용 등으로 수업을 진행하지만, 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갑작스런 일 등으로 해당 교사가 수업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미리 정해놓은 차례대로 보강교사를 배정한다. 그런데 동교과 교사를 배치하기도 쉽지 않고, 아무런 준비 없이 다른 학년, 학급 수업을 하는 건 실제론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들어가서 보강 자료를 나눠주거나 자습을 진행하는데, 이래저래 보강 교사는 자신의 수업 준비에 지장을 받고, 아이들이 원하는 수업과도 거리가 멀다.
이럴 때 교장이 수업을 맡아 들어가면 큰 도움이 된다. 교사들은 자신의 교육 활동 준비를 원활히 할 수 있고, 아이들은 일정하게 준비된 수업을 받을 수 있으며, 교장도 아이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학교장이 보강 수업을 들어가서는 어떤 것을 주고받으면 좋을까? 정해진 것이 없으니, 자신이 가장 잘하면서도 아이들 배움에 기초가 될 만한 것을 해 주면 좋을 테다. 내가 보강을 위해 준비해 둔 수업은 그리스·로마 신화와 일리아스, 오디세이를 엮어서 배경지식을 체계화하기, 사회적 이슈를 바탕으로 다양한 관점을 접하며 논리적 사고와 비판적·창의적 사고력을 키우기, 학습 어휘력 강화를 통한 학습 바탕 다지기 등이다. 한 차시 단위로 끊어서 할 수도 있고, 여러 차시로 이어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같은 학급에 보강을 계속 들어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예, 정규 수업의 일부를 맡아 진행할 수도 있다. 난 1학년 학생들과는 자유학기 주제 탐구 시간에 1학기 동안 사회적 쟁점 토론 16차시 수업을, 3학년 자기개발시기 시간에는 독서토론과 비판적·창의적 사고력 키우기 수업을 진행한 바 있다. 일주일에 4차시 정도의 시간을 내면 되는 정도여서 다른 일에 지장을 받는 일이 거의 없다. 지난해부터는 창체 동아리 ‘모의법정반’을 맡아 운영하는 중이다. 동아리를 신청한 14명의 학생들과 법과 우리의 생활 문제를 엮어서 헌법과 법률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러한 기준은 왜 생겼는지, 그러한 기준에 대해 아이들은 어떤 생각이 드는지 나누고, 특정 사안을 정해 모의재판을 만들어 보는 활동이다. 약 3주에 한 번 모여 3시간 동안 밀도 있게 배움을 진행할 수 있어서 학생이나 진행하는 교사나 모두 만족스런 수업 방식이라 할 것이다.
아이들은 이런 교장을 어떻게 생각할까. 처음엔 ‘어, 교장샘이 왜 수업에 들어왔지?’ 하는 눈빛이다가 어느 정도 수업을 하고 나면, 여느 교사의 수업과 다름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스스로 선택하거나 탈락해서 동아리에 온 이들도 ‘교장선생님과 동아리를 하니 조금 더 흥미롭고 재미있다. 우리 학교가 좀 다르구나’ 등의 반응이다.
학부모와도 수업할 수 있을까
학부모와의 만남도 수업의 연장선이 될 수 있다. 물론,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지니고 있던 수업에 대한 고정관념, 일정한 공간과 한쪽이 우월하고 주도적인 위치에서 진행해야 수업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면 된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서로 배우며 가르치면 그곳이 수업 현장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출발점이다.
보호자들과는 휴대전화나 교장실 직통 전화를 통한 상담이 가장 흔히 이루어지는 수업이다. 잘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는 마음속에 간직해 두는 것으로 충분하기에 굳이 전화가 오질 않는다. 당연히, 학교가 왜 그 모양이냐는 힐난과 질책, 아무개 교사 때문에 상처와 고통을 당했다는 항의가 대부분이다. 최대한 귀를 기울이며 자초지종을 살펴 가닥을 잡고, 학교와 보호자 사이에 놓인 간극을 줄여나간다. 간혹, 교장실로 직접 찾아오시거나, 내 쪽에서 오셔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물론, 교장 만난다고 안 풀릴 문제가 쉬 풀릴 리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가 근본적인 차이보다는 표현상의 문제와 같은 감정의 앙금이나 소통의 부족에서 온 것이라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견이 좁혀지곤 한다.
학부모 총회나 간담회, 독서 모임도 학교장이 해야 하는 수업의 하나이다. 그 자리에선 대개 학교의 교육철학과 교육 방향과 같은 비교적 큰 그림도 함께 그린다. 또한, 수업 평가나 현장 체험학습, 급식이나 화장실 문제 등 학생들과 보호자들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고 수렴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정통신문과는 별개로 교육활동 안내자료를 만들어 틈틈이 학부모에게 보내는 교장도 있다. 난 그것보다는 SNS(인스타그램)에 교육 활동 이모저모를 전하는 편이다. 학기 초 총회 때, SNS 계정을 학부모에게 공개하고 ‘친추’나 ‘맞팔’을 하는 방식으로 교육 활동 모습을 전하고, 학부모가 자녀와 어떻게 지내는지 관찰하며 공감대를 넓혀나간다. SNS가 지닌 한계와 위험성을 거론하며 꺼리는 이들도 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다. 하지만,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이 또한 어느 정도는 사용자에게 달린 문제일 뿐이다. 아직까지 별 탈 없이 서로의 거리를 좁히고 이해를 넓히는 원활한 소통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문턱이 낮아지면 벌어지는 일
수업 등을 통해 접하는 시공간이 많아지면 당연히 거리가 가까워진다. 친밀감이 높아짐은 물론이요, 아이들이 문턱을 넘기가 매우 쉬워진다. 그게 다 바람직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기존의 관습이나 스스로 만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넘나드는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우린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라고 하면서, 막상 아이들이 낯선 시도를 하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야단을 치기 일쑤였다.
교장의 수업 참여는 교장실 문턱을 크게 낮추는 효과가 있다. 교장이 자신을 안다는 사실을 무기 삼아 건의 사항이 있거나, 점심시간에 공을 빌리거나, 잠시 머물고 싶은 때면 교장실에 들르곤 한다. 또, 같이 하는 공부가 있으니 채팅방에 모여 있어야 했고, 주말에도 급히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나한테 전화를 걸고 도움을 청했다. 난 내 수업의 가장 큰 효과를 여기에서 찾는다.
교실 안팎에서 만난 이런저런 수업에서 아이들이 지식을 얼마나 쌓고, 무슨 기능을 얼마나 익혔겠는가. 10년, 20년 뒤에 무엇이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다만, 자신들이 다닌 학교에서 교사와의 경계, 공간적 테두리를 수시로 넘나들었던 그 기억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만 남아 있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더 좋은 세상을 꿈꾸며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흐를 것이라 믿는다.
앞에서 거론한 초중등교육법 제20조에 따르면, 교장은 학교 교육 활동에 관한 모든 걸 다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잘하기 어렵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다 할 수밖에 없다. 그중 하나가 쓰레기 줍기, 정원 가꾸기이며 수업도 그 하나가 될 수 있다.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은 물론이요, 교실 밖에서도 교직원, 학생 및 그들의 보호자들과 다양한 형식과 주제로, 때론 돌발적인 방식의 수업도 해야만 한다. 교과 수업은 잠시 접었지만, 교장은 자신만의 색다른 수업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다. 거기서 작은 웃음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누구든.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그 감상은 ‘문학 작품을 읽은 사람의 수’만큼 존재한다고도 한다. 심지어는 어젯밤의 내 감상과 오늘 아침의 그것이 달라지기도 한다. 하물며, 학교마다 사정이 천차만별인 조건에서 교장의 교육 활동, 학교 운영을 어찌 한 틀에 가둘 수 있을 것인가. 좋은 교육 활동, 올바른 교육 방법, 그것이 딱 한 길일 리 없다. 각자의 역량, 상황, 조건에 맞게 오늘도 출근과 퇴근을 거듭할 뿐이다. 그러고 있을 전국의 모든 교장 선생님들을 뜨겁게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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