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5-07-03 16:27
| 이재명 정부의 간판 교육정책은 ‘서울대 10개 만들기’인 듯하다. 현재 돌아가는 얘기대로라면, 안타깝게도 이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대학 서열을 완화하고 지역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방대학을 키운다는 발상 자체가 부정합이기 때문이다. ‘서열 완화’니 ‘지역 균형발전’이니 조건 덧붙이지 말고, 순수하게, 지역 거점대학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라고 충언한다. |
이재명 정부는 ‘서울대’를 10개 만들기로 작정한 듯
‘서울대 10개 만들기’가 이재명 정부 교육정책의 핵심인 듯하다. 대선 공약에서 돋보이게 내세웠던 구호이기도 하지만, 최근 대통령이 교육부장관 후보를 선택한 데서 그 뜻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고들 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에 힘을 싣기 위한 인사”라는 보도도 있다. 장관 후보자가 민주당 대선 조직에서 ‘서울대 10개 만들기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또 지방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다는 이력도 그런 분석을 낳고 있다.
장관 후보로 지명된 당사자도 세간에 도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인사청문회 준비를 위해 처음 출근하는 길의 인터뷰에서, 기자들이 ‘모두 발언’을 요청하자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께서 지방에 있는 저를 부르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요, 교육을 통해서 국가 균형 발전을 실현하시겠다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아무튼 앞으로 교육 현장과 소통하고 또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제게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얘기해 온 정책이지만,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불가능할 것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유의 시쳇말 구호는 교육계에 꽤 오래 떠돌아다녔다. ‘대학 서열 타파’를 역설하는 사람들은 흔히 서울대를 문제 삼았으며, 초기에는 ‘서울대 없애기’를 주창했다. 그런 제안의 소극성을 감지한 후에는, ‘상향 평준화’의 뉘앙스로 돌려, ‘서울대 여럿 만들기’를 내걸었다. 비교적 최근에 ‘지방 소멸’이니 ‘저출생’이니 하는 문제가 부상하면서는, 정책 얘기들이 ‘지방대학’을 살리는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탄핵으로 파탄한 지난 정부에서도 같은 연장선의 정책들을 ‘글로컬’이니 ‘라이즈’니 이름 붙이며 발진했고,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서울대 10개 만들기 프로젝트도 ‘국립대학법’에 걸어 만지작거렸었다. 이제 이재명 정부에 와서 서울대 10개 사업은 최우선의 국정과제로 부활한 셈이다. 이번 부활에 가세한 학자들이나 정책을 추진하려는 정부에서는 이번 시도가 과거 얘기되던 것들과 다르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좀 더 세련됐고, 실현 가능성도 커졌다고 말이다. 그러나 결국 큰 차이 없다.
‘지방’ 곳곳에 ‘서울대’를 만들자는(또는, 지방대학을 육성하자는) 제안은 결국, 서울대에 지원할 만한 고등학교 졸업자들이 서울로 가지 않고 지역의 대학에 진학할 만큼, 거점대학들의 인력(引力)을 높이자는 것이다. 그렇게 인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건 돈이다. 재정 지원만 이루어진다면 이른바 서울대가 여러 곳에 쉬이 만들어질 것으로 전제한다. 흔히들 학생 1인당 교육비를 서울대 수준으로 맞춰 준다면 지방대학들도 얼마 없어 서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 호언한다.
이제까지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망설였던 것은 돈 때문이었다고 여긴다. 이번에도, 엄청난 예산이 추가로 투입되어야 할 텐데, 어디에서 잘라 올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다. 최근 교육학회에서도 서울대 10개를 만들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지, 확보된다면 어떻게 배분/지원해야 할지(국립 거점대학만 지원하느냐, 사립대학도 지원하느냐) 논란했다고 한다. 대학 발전에 물론 돈이 소요될 테다. 그러나 돈이 충당된다고 서울대 10개가 쉽사리 만들어지진 않는다.
우선, 서울대는 서울에 있어서 서울대이다. 서울대의 유인력에서 서울 소재라는 매력이 차지하는 비중만큼 지역 대학이 자체 유인가를 높이려면(즉, 지방 소재의 불리함을 완전히 해소하려면) 투자가 어느 정도나 이루어져야 할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대학 위치가 서울이란 이점은 이제까지 으레 서울 중심이었던 온갖 정책과 필경 조선 시대를 포함하는 긴 역사로 고착해 온 문화적 습관이 그 뒷배를 이루는 것이다. 서울이란 ‘인프라’에 필적하는 매력을 지방 소재 대학이 갖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캘리포니아 고등교육 체제를 모방하면 된다는 논리는 비약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제안하는 이들은 미국의 캘리포니아주를 ‘벤치마킹’하는 모양이다. 주(州) 전역에 좋은 대학들이 산재해 있고 그 대학들이 지역의 경제도 살리고 있으니, 우리도 따라 하면 되리라는 식이다. 캘리포니아의 칼텍이나 스탠퍼드 대학 같은 명문 대학들도 처음엔 ‘지잡대’였다고까지 강조한다. 한국의 지역 거점 대학들이 ‘서울대’로 도약하지 못하란 법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변은 듣는 이의 가슴을 뛰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비약이 지나치다.
수많은 ‘정책 차입’의 실패가 보여주듯이, 외국 제도나 기관 등을 수입하는 정책 결정에서 종종 간과하는 것은 그것들이 진공에서 작동하던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캘리포니아 대학들은 무엇보다도 미국이란 환경에서(더욱이, 칼텍이나 스탠퍼드 대학 같은 경우는 19세기 말에1) 생겨났으며, 미국 안에서도 좀 더 특수하게, 캘리포니아라는 입지 조건에서 발전했다. 그와 같은 환경이나 시대 조건을 결코 맞춰볼 수 없는 ‘오늘날 한국’이란 상황에서, 동일한 고등교육 정책 ‘모델’이 실효를 보리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다.
몇 가지만 짚어 보자. 한국의 지역 거점 대학들이 캘리포니아 주립 체제의 대학들처럼 교수나 학생을 유연하게 (그것도 세계를 시장으로 삼아) 충원할 수 있는가? 캘리포니아 대학들이 위치한 도시와 같은 매력을 우리 거점 도시들이 지니고 있는가? 그런 매력이 없더라도, 한국 국내에서만이라도, 지역 대학이 QS 랭킹 100위(정책을 미는 사람들이 분수령으로 삼는 수준) 안에 들기만 한다면 탁월한 교수와 학생들이 지원해 몰려들까?
캘리포니아 대학들은 자본과 자연환경 등 캘리포니아였기에 갖출 수 있었던 풍요로운 바탕 위에서 세워질 수 있었고, 적어도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세계 교육 판도를 지배한 미국의 고등교육 체제 안에서 커 나올 수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매년 수 조 원 정도를 투자한다고 해서, 캘리포니아 체제와 같은 수준의 고등교육 편제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억지스럽다. 또, 대학이 좋아지면 지역의 경제도 끌어올려, 결국 지방도 서울 뒤지지 않는 흡입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식과 기술의 창조력을 갖추게 될 대학들이 ‘산-관-학’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지역 균형발전도 가져올 것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지역의 대학이 계획대로 ‘서울대’로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산’과 ‘관’ 부문과 네트워크를 순조롭게 구축하도록 간다는 보장도 없고, 산과 관 두 부문 역시 대학 변화에 보조 맞춰 네트워크에 가담할 조건을 갖추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정책을 재고해야 할 이유는 근본적인 데 있어
서울대 10개 만들기나 그것을 통한 균형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이번 정부의 핵심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날 선 듯 느껴질지 모르지만, 오히려 소극적인 견지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정책을 말려야 할 이유는 더 근본적인 데 있다.
정책을 펴서 전국에 10개를 만들겠다는 ‘서울대’는 어떤 대학인가? ‘대문자’ 서울대는 하나 이미 있으니, 그것과 똑같은 ‘복제’ 대학을 다른 아홉 곳에 만들겠다는 곧이곧대로 뜻은 아닐 것이다. 지금 나와 있는 이야기들은 막연하다. 서울대로 표상되는 조건에 대해, 연구력이니 창조력이니 하는 말을 쓰는 이들도 있고, 대학의 국제적 순위를 언급하는 이들도 있으며, 정부에서는 흔히 학생 1인당 교육비 수준을 기준으로 잡는다. 어쨌거나 목하 정책을 위해 명료한 지향이 정리되어 있지는 않아 보인다.
이미 국정과제인 정책이 갈 바를 정해 놓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걱정스럽지만, 곧 구체화해 내리라 기대하면서, 그것이 어떤 것일지 짐작해 보자. 교육부장관 후보자를 포함해서, 정책을 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거론하는 정책 취지는 ‘서열 완화(또는 타파)’와 ‘지역 균형발전’이다. 그래서 짐작건대,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서열을 누그러뜨리기(부수기) 위한 정책이면서, 대학들이 자리한 지역이 서울 못지않은 발전 조건을 갖추도록 지원하려는 정책이다.
이와 같은 정책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하나는 대학 서열이 대학 ‘내부’의 속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 발전도(특히 경제 발전도) 대학의 주동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재 서울대가 누리는 ‘서열’ 가치는 온전히 서울대가 지닌 어떤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런 성질을 품도록 ‘만들면’ 대학은 소재 지역의 경제에도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 낙관한다. 이런 낙관이 지나치다는 점은 바로 느껴지리라 짐작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는 ‘의대 진학 열풍’을 보자.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라면 서울에서 ‘지방’으로도 유학한다. 말하자면 의대는 일반적인 대학 서열을 파괴하고 있다. 이때 의대에 붙어있는 유인가는 대학에 내재한(교육적인, 또는 ‘창조적인’) 역량으로 얻어낸 것인가? 의학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고 의사를 양성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지방 의과대학을 ‘의대’로 둔 채, 의사 면허에 대한 제도적 권리만 앗아버린다고 가정해 보면 사태는 명료해진다. 면허권이 없는 지방 의대로 여전히 사방에서 학생들이 지원할 리는 만무하다.2
개개 대학이 지닌 내재적 가치가 각 대학 서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현실에서 그리고 상대적으로 사소하다. 우선, 대학의 내재적 가치라는 것이 대학을 선택할 때 기준 삼을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인 지표로 드러나지도 않으며(그래서 그 가치가 실지로 영향 미칠 방도가 거의 없으며), 서울대를 10개 만들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암암리에 염두에 두는 내재적 속성들이(이를테면, 연구력, 국제순위 등이) 고스란히 서열에 반영되지도 않는다.
당장 오늘날의 서열을 두고 따져보자. 서울에 있는 대학들보다 ‘객관적으로’ 우월하다고 인정할 수 있을 대학들이 ‘지방’에 적지 않다. 지식과 기술을 창조하는 데서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서도 앞서고, 세계 대학 순위에서도 앞서는 대학들이 지방에 있다. 하지만 그 대학들과 ‘인서울’ 대학들을 두고, 진학 희망자들은 어떤 대학을 선택하고 있는가? 서울에 있는 대학들을 선호하는(서열 우위에 두는) 현상을 대학 자체의 탓이라 볼 수 없다. 인서울이라는 조건이 지닌 힘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이 지역 발전(경제 성장)을 주도하리라는 전제도 허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대학이 좋아지고 그곳에 훌륭한 교수와 연구진 그리고 학생이 몰리면서, 그들이 대학 도시 주변을 실리콘밸리 버금가는 ‘산업 특구’로 변화시킬 자원이 되리라고들 장담한다. 그러나 기업이(벤처가) 자리 잡고 산업단지가 조성되는 데는 ‘서울대’가 가까이 있느냐보다 지역의(지정학적) 경제성이 우선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 점을 고려하는 투자가 얼마나 이루어지느냐가 결정적일 터이다.
노파심에서 다시 밝히건대, 서울대 10개를 만들 수 없다고 반박하려는 것도 아니고, 서열 완화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정책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서울대가 좋은 대학이라면, 그런 대학은 많이 만들수록 좋다. 대학 서열도 교육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문제를 낳고 있는 현상인 만큼 최대한 해소하려고 애써야 마땅하다. 지역 균형발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여기에서는 다만 ‘교육’을 동원해서 대학 서열을 완화하고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다고 충언하는 것이다. 대학 사이에는 서열이 있고 또 대학은 교육 기관이기 때문에, 서열 문제는 곧 교육 문제라고 인과(因果) 지우는 일이 비일비재해 왔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서열화’ 문제는 교육 탓이 아니며, 교육 탓으로 돌리면 오히려 그 문제해결을 회피하는 꼴이 된다. 굳이 원인을 짚는다면, 인간 사회에서 불가피한 사회적 분업을 정당화하는(‘메리토크라시’를 유지하는) 데 교육을(교육제도를) 활용하게 된 인류사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야 적절할 것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에 담긴 교육의 의미 다시 짚어봐야
서울대가 ‘최고’로 인정받는 것이 물론 서울대 교육의 ‘훌륭함’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은 그 훌륭함의 수준에 상응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밖’에서 해당 대학에 투사하는 것이다. 대학들은 나름의 역사로 어떤 지위를 얻어가며, 그 지위는 하나의 ‘문화적 지폐’로 기능한다. 대학의 서열은(지위, 졸업장 등은) 졸업자의 실력을 표시하는 점이 물론 없지 않지만, 이를테면 조직에서 어떤 자리로 승진하거나 중매 시장에서 어떤 배우자와 맺어지기 위해 치러야 할 ‘돈’이 되기도 하는데, 이때 ‘액면가’가 반드시 실력(대학 교육의 질)에 상응하지는 않는다.
대학이 지역 발전의 원인이 된다는 생각도 ‘교육’을 바탕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흔히, 교육은 인재를 만들고 인재는 경제에 요긴하므로, 교육은 경제 발전에 핵심 수단이라 추론한다. 서울대도 실지로 훌륭한 ‘경제 인재’를 배출할 테지만, 그런 결과가 개인이 받은 교육의 탁월성에서 온다고 곧이 해석하기는 어렵다.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뜻이 무엇인지 누구나 동의하도록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서울대에서 교육을 가장 잘 받은 졸업생이 가장 훌륭한 (경제적, 분업적) 인재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데 대체로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교육의 발전을 모색하면서는, ‘교육받은 사람’과 ‘인재’를 구분해 논의해야 할 것이다. 단순하게 풀어보면, 전자는 ‘일반적’이며 후자는 ‘특수’하다. 전자가 ‘인격을 갖춘’, ‘교양 있는’, ‘전인적인’ 등등의 수사를 받을 듯하다면, 후자에는 그런 수사가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대를 10개 만든다고 할 때, ‘서울대’는 과연 어떤 교육을 추구하는가? 정책 제안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교육’은 ‘일반’ 교육의 의미에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을 터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업에는 교육을 보는 입장 자체를 되돌아보아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서울대’가 ‘특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적합한 기관인지, 더 나아가서, 실지로 양성할 수는 있는지(그리고 양성해야 마땅한지까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정책 이야기대로라면, 지금의 서울대나 앞으로 만들어질 나머지 9개 ‘서울대’의 프로그램은 ‘특수한’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말하자면, 한국의 ‘엘리트’ 교육이 직업교육의 기조를 띠어야 한다는 뜻인데, 과연 합당한지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분야에(전공에) 따라 다르리라며 검토를 유예하려 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를테면 공과대학과 같이 ‘기술’(응용 또는 실용) 분야라 하더라도, ‘서울대’가 경제적 가치를 염두에 두는 교육을 주조로 삼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위험하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제안은 결국 교육의 의미를 매우 특정하게 비틀어 규정하자는 것이거나, 아니면 대학이 해낼 수 없는 일을 대학에 맡기자는 것이다. 먼저, 서열을 완화하는 대학을 만들자는 취지로 보면, 앞으로 만들어질 ‘서울대’들은 지금 서울대의 졸업장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닐 졸업장을 수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졸업장의 가치는 일반적인 뜻에서 교육을 잘한다고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과는 다른 조치가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부연한다면, 예컨대, 지역 대학의 학위마다 공무원 5급 취업을 보장한다면 그 졸업장의 가치는 바로 서울대의 것을 추월해 급등할 것이다.
다른 한편, 지역 균형발전을 노린다는 취지를 두고 보면, 미래 서울대들은 ‘경제적’ 인재들을 배출할 수 있어야 한다. 특수(응용) 인재보다 일반(이론) 역량에 맞춰진 대학 교육의 전통적 관성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업이다. 그렇기에 관성을 깨면서 시도한다면, 대학 교육을(적어도 ‘서울대들’ 수준에서는) 매우 특수한 ‘기능사’ 양성 프로그램으로 전환하는 ‘혁명’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혁은 교육의 의미(가치)를 근본적으로 뒤집는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시민 또는 엘리트의 조건을 뒤집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사회 규범과 질서 그리고 복지를 총체적으로 흔들 수 있다.
대학을 키우는 데 서열 완화이니 균형발전이니 하는 조건 달 이유 없어
땅에 발을 딛고 톺아보면,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정책으로 그리는 서열 완화나 지역 균형발전은 환상에 불과하다. 거듭 말하건대, 대학(그 안의 교육)은 서열을 좌우하는 데 큰 힘이 없으며, 경제 ‘인재’를 양성하는 데도 본질적으로 정합하지 않다. 서울대 만들기 정책은 지금대로라면 결국 실패할 것이다. 그런데 실패 책임은 정책 제안자나 결정자 또는 정부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정책이 시행되면 자연히 ‘공’은 대학(교육)에 넘어가게 되고, 실패하게 되면 대학 탓이 될 것이다. 대학은 새 정부의 야심 찬 정책에 부응하지 못했거나 나태하게 대응했다고 비난받게 될 것이다.
어쩌면 책임을 교육(대학)에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정책이 늘 국정과제로 떠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계산상, 국민이 주목할 만한 ‘문제’를 국정에서 버려두지 않을 테다. 한편, 실패가 번하고 실패에 따른 정치적 실각의 위험이 있는데도 정부가 그 정책을 밀어붙일 리 또한 없다. 그런데 ‘교육정책’에는 그런 위험에 대한 방패가 있다. 특히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같이,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고 그에 따라 대학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게 밖으로 훤히 내보이는 정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밀어붙였던 정책이 실패한다면, 외견상 정책에 따라 바삐 움직였던 대학이 추궁당하게 된다. 돈을 주고 지원한 정부를 비난 대상에 올리게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정책에 있었다. 애당초 대학(교육)이 감당할 수 없는 과업을 떠맡긴 정책이 잘못됐지만, 이 점은 간과된다. 결국 대학은 희생양이 된다. 정책 실패의 원흉으로 비난받고, 거듭거듭 개혁 대상에 오르게 된다. 정책 제안자나 정부는 ‘뜻이 좋은’ 정책을 폈지만, 현장(대학)이 부응하지 못한 꼴이 된다. 왜 교육개혁이 으레 실패해 왔고, 학교나 대학은 왜 비난의 대상이 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을 것이다.
전국 각지에 좋은 대학을 만들자는 데 이견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서울대 하나로 족하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지역 거점대학들의 성장은 여러모로 긴요하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에 대해서보다 더 큰 관심과 지원을 쏟아 마땅하다. 그러나 지역 대학들을 키우겠다며 서열 완화를 주문하고 지역 균형발전 문제를 덧붙일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다. 그렇게 정책이 불순(不純)해지면, 관심과 지원에도 불구하고, 지역 대학의 발돋움은 오히려 더뎌지거나 가로막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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