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5-06-05 16:55
| 새 대통령, 새 정부가 민생을 챙기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이를 위해 교육 문제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민생과 교육 문제는 서로 붙어있습니다. |
새 대통령 새 정부, 민생을 챙겨야 마땅
정치의 으뜸 과제는 민생을 평화롭고 풍요롭게 지탱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어떤 정권에서건 ‘정치 지도자’들은 으레 ‘민생이 우선’이라 역설하는데, 사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셈이다. 정치는 정의상 민생을 챙기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 국민국가가 생겨난 이래, 국정에 결부된 정치는 그렇게 자리 잡았다.
우리는 막 새로운 대통령, 새로운 정부를 맞았다.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격동을 가까스로 수습해 냈다. 일상의 안녕과 생계마저 위협해 가던 국정 패착을 만회해야 하는 과제가 새 정부에 안겨졌다. 이른바 민생을 새삼 돌봐야 할 테다. 새 대통령도 이 점을 취임사 첫머리에서 짚고 있다. “벼랑 끝에 몰린 민생을 되살리”리라 약속하고 있다.
정치와 정책 이야기에서 ‘민생’은 흔히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사안이라 전제된다. 국민 모두 ‘웬만큼 벌어먹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국정’의 과제라 여긴다. 틀리지 않은 생각이다. 벌이가 안정되지 않아 나날의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면, 그 불안은 삶의 모든 구석에 스밀 것이다. 과연 민생은 먹고 사는 문제이며, 근본 문제이다.
민생을 위해 교육 문제가 뒷전으로 밀리지만, 두 문제는 붙어있어
교육 문제는 민생 문제처럼 세간의 삶에 다급하게 다가서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때로 교육은 민생(세속)과 멀리 떨어져 이루어져야 하는 ‘여유’의 활동이라고도 얘기된다. 정치가 길을 잃고 경제가 곤두박질한 사태를 바로잡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교육 문제가 뒷전이 되는 양상은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재명 정부를 맞는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런 형국이다.
그러나 민생이 먹고 사는 문제라고 해서, 일상에서 물질적으로 부딪치며 ‘거리’의 경험과 지혜로 풀어가게 되는, ‘항간(巷間)’의 일만은 아니다. 우리네 삶은 당연히 얼마나 벌며 누리느냐는 세속의 처지에 엮여 있지만, 처지를 보고 받아들이는 개인의 깜냥은 일률이지 않고 물적이지만도 않다. 그것은 문화적이며 주관적이다. 사회마다 다르고, 개인 수준에서도 다양하다.
돈을 일찍 많이 벌고, 긴 여생을 오직 즐기는 데 쓰겠다는 청년의 꿈을 지당하다고 여기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부지런히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하지만 일상은 청빈해야 마땅하다고 암암리에 구속하는 사회도 있다. 또 어떤 문화의 사회에서건, 하나의 사회 안에서도 개인마다 인생관은 천차만별이다. 금욕적인 사회에도 오직 즐기며 살겠다는 개인들은 적지 않다.
우리 마음에는 ‘행복’의 의미 또는 ‘꿈’이 있다. 그것은 한번 생겨나 불변이지 않고 꾸준히 개정된다. 그 작용이 늘 분명하게 의식되지도 않는다. ‘이러저러하게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꿈은, 분명히 진술된 일과의 목표 같은 표상이 아니라, 변변찮은 우리 일상의 이면에 어렴풋이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 일상의 의의나 민생의 정서는 이 모호한 꿈에 비추어 드러난다.
민생의 와중에서 개인이 품는 꿈은 다분히 교육의 소산이다. 교육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기 형편에 ‘이름’을 붙이며 행불행을 가늠하는 기준을 지니도록 이끈다. 외부에 만들어져 있던 ‘잣대’를 교과 지식을 욱여넣듯 주입한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때마저도, 일상이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모종의 선호나 취향을 마음에 심는다는 뜻이다.
민생을 위한다며 흔히 경제적인 대책을 찾는다. 민생은 개인들에게 돈이 축재되고 또 돈이 ‘시장’에 풀리면 해결되는 문제로 간주된다. 그러나 ‘실물’의 해결책으로 삶의 격(格)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일상의 의미는 의식주의 ‘객관적’ 형편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각각의 형편에 뜻을 부여하는 사회 문화적 명명(命名)이 좌우한다. 말하자면 민생 문제는 교육과 붙어있다.
‘20대 남성 문제’에서 읽어보는 민생과 교육 관계
청년의 민생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필경 교육 문제에 닿아있을 법하다. 이번 대선에서도 거론됐던 징후가 있다. 적어도 평균적으로는, 우리 사회 20대 남성과 여성이 대립적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집합적 분노 또는 불만이 끓고 있다고들 한다. ‘여성 차별’에 대한 보상책을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제법 강하다는 것이다.
20대 남성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과서’가 가르친 정의론과 부딪친다. 교과서는 여성이 차별받아 왔고 그 역사에 대한 보상이 정의롭다 가르치지만, 적지 않은 남성 청년들은 동의하지 않으며 분개하고 있다. 남녀 평등 또는 ‘공정’의 구호가 기만이라고 분노한다. 집에서마저 부모가 ‘진보적인’ 정의론을 신봉하는 걸 보게 되면 배신감마저 느낀다고도 한다.
20대 청년 남성의 역차별 관념은 그들의 일상과 생계(즉, 민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자신의 직업이나 벌이에 대한 만족감이나, 여성과 관계를 포함해서 다양한 사회관계에 부여하는 의미에서도 모종의 뒤틀림이 생길 것이다. 그들은 민생 사태를 나름의 정의론으로 채색할 것이다. ‘청년 고용 안정책’을 비웃고, 결혼 관습과 자녀 양육의 문화도 냉소할지 모른다.
20대 남성이 역차별받는다고 여기게 되는 이면에는 교육이 있을지 모른다. 남성과 여성을 대립 부족인 듯 구분하도록 이끄는 암묵적인 ‘가르침’이 우리 ‘교육’에 내포되어 있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성별 구분은 우리 학교 교육에서 전략 포인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진학을 염두에 둔 ‘내신’의 타산에서, 교실(교과 선택)이나 학교의 남녀 구성은 핵심 고려 요소이다.
성별을 주시하는 학업 전략에는 여학생과 남학생에 대한 교육 관련 통념도 잠입해 있다. 여학생은 분별 있고 열심히 하며 남학생은 어리숙하고 덤벙댄다는 식이다. 이런 통념이 그동안 학생들의 학습과 학교 안팎의 일상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수많은 학생의 기회와 삶 인식을 적잖이 흔들었으리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적지 않은 남성 청년들이 오히려 차별받았다고 믿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들이 학교 교육에서 밟은 ‘숨겨진 교육과정’은 오늘의 일상 처지와 미래 불안이 여성이란 ‘부족’ 탓으로 여기도록 이끌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숨어 있을 수 있는 교육 문제가 오늘날 청년들이 겪는 ‘민생 문제’의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민생 문제를 마땅히 우선 걱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붙어있기 마련일 교육 문제도 함께 들여다보아야 할 터이다. 교육 문제는 보통 드러나지 않는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교육관과 문화가 어떤 모습의 민생 문제로 불거질지 늘 예민한 성찰이 필요하다. 눈에 확연히 드러난 민생 문제는 교육 문제란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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