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5-04-16 13:21
| 이 연재를 새로 시작하는 이유는 교육의 이해가 교육 실제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의 개념을 다루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앞으로의 연재에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언급합니다. |
1. 새로 시작하며
재작년 가을부터 이듬해 3월까지 나는 여기에서 ‘한국 교육학을 위한 진언과 고언’이라는 주제 아래 몇 편의 글들을 게재했다. 그 글들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서이초 사건 후 교육 현장이 크게 요동쳤음에도 불구하고 교육학계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꼬투리 삼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교육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개적으로 제기해 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고 보니 만만치 않았다. 우선, 한국 교육학에 관해 그동안 나 스스로 축적해 놓은 지적 자산이 별로 없다는 게 현실적인 문제였다. 대상이 ‘교육학’인지라 어느 정도 학술적인 형식을 갖추려면 이미 역사 속에 묻힌 기억과 문헌들을 다시 불러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그래도 이것만이었다면 계속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즉,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어느 정도 근거 있는 이야기를 완성한다고 해서 그게 지금과 같은 한국 교육학의 풍토에서 무슨 의미를 갖겠느냐 하는 회의감이었다.
결국 한국 교육학 이야기 연재를 중단하게 되었다. 본래는 답답한 교육 현실의 변화를 위한 교육학의 역할을 주장하려는 의도였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은 것이었었고, 뒤늦게나마 이를 자인한 셈이었다. 그렇다고 침묵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중도하차에 대한 부담도 없지 않았지만,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암울해지는 교육 현실에 대한 조바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
망설인 끝에 ‘교육학에 관한 이야기’를 접는 대신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교육학이 ‘교육에 관한 학문’이니 교육학 역시 ‘교육에 관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도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하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교육학이 아니라 ‘교육’을 직접적인 주제로 하여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뜻이다. 이것을 현학적으로 표현하면 ‘교육학 하기’(pedagogizing)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철학 하기’(philosophizing)를 흉내 낸 말이다. 분석철학자들은 철학 공부를 철학적 지식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어떤 대상에 대해 직접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행위로 구분한다. ‘철학 하기’란 후자를 가리키는데, 이는 어떤 현상이나 명제 등에 대하여 분석하고 비판하며 종합하고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과정을 통칭한다. ‘교육학 하기’를 여기에 기대어 말한다면, 어떤 교육 현상이나 사건 혹은 명제 등에 대하여 교육학적으로1 사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학 하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한마디로 교육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진부한 이 질문을 새삼스럽게 꺼내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이것은 새롭게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까닭
‘교육학 개론’이라는 제호가 붙은 책의 첫 장은 대개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설명을 보면 대체로 어원을 소개하거나 몇 가지 정의와 용례들을 나열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그다음 장부터는 교육학의 분과 영역별 지식이 순차적으로 제시된다. 당혹스러운 것은 첫 장에서 소개한 교육의 의미가 그다음 장들의 내용과 별 연관이 없다는 점이다. 장상호 교수는 일찍이 여기에 주목하여 교육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서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그 뒤 수십 년에 걸쳐 교육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새로운 교육학 체계를 제시하였다(장상호, 1986;2005;2020). 하지만 이에 대한 기존 교육학계의 반응은 아직 크지 않으며, 그가 제시한 교육학 체계가 기존 교육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교육학 중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깊고 진지하게 다루는 분과 영역은 교육철학이다. 여기서 핵심은 ‘교육의 의미’ 혹은 ‘교육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대개 일상적 용례를 분석하여 그 보편적 의미를 유추하는 방식으로 정리하거나 아니면 널리 인정받는 학자나 학파의 교육에 관한 정의를 소개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교육에 관한 세 가지 정의를 제시하고 있는 이홍우(1991)의 『교육의 개념』은 이러한 방식의 논의에서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과 궤를 달리하여 교육의 의미를 깊게 사유한 주목할 만한 저서가 있다. 권재원(2020)의 『교육 그 자체』가 바로 그것인데, 이는 ‘교육에 관한 열아홉 편의 에세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이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양한 맥락에서 순차적으로 탐구한다. 특히 교육의 주된 측면을 기존 지식과 가치의 전수로 볼 것이냐 아니면 학습자의 성장으로 볼 것이냐 하는 교육학의 양대 흐름을 ‘창조성의 공동체로 가는 길’에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해석하는 데서 교육에 대한 그의 현장적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현직 교사의 풍부한 경험과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심층 탐구는 교육의 의미를 폭넓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마도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독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주된 관심은 교육의 의미나 개념에 관한 기존의 논의들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거나 비슷한 또 하나의 개념을 추가하기보다는 그것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교육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데 있다. 왜 그런가?
대체로 교육의 의미나 개념을 둘러싼 논의는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교육을 이해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달라 새로운 개념을 얼마든지 새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자신의 개념이 교육의 새롭고 독특한 면을 드러낸다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여러 개념 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교육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양해지더라도 그로 인해 교육의 실제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하! 교육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꼭 교육적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물론 다양하다. 여건이 받쳐주지 않은 탓이기도 하고 제도 탓이기도 하고 학생과 부모가 협조하지 않아서이기도 할 것이다. 교육의 개념을 제안하는 학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이런 개념과 현상의 괴리를 당연하게, 혹은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그 현상 역시 불가항력의 이상과 현실 간 차이로 체념할 수 있다.
물론, 특정한 맥락에 국한하여 이해해야 하는 관점이기는 하지만, 개념과 현실의 괴리가 필연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홍우(1991) 교수가 말하는 ‘보는 교육’과 ‘하는 교육’의 구분이 그러하다. 그에 따르면, 개념은 논리의 세계이고 현실은 사실의 세계이다. 논리와 사실은 차원이 다른 세계이므로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육의 개념이 어떻게 달라지든지 간에 그것이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그는, 물론 이 점을 이홍우 교수가 인정할지는 모르지만, 교육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적 관점을 추구하는 진보적 교육 실천가들을 그가 말하는 교육의 개념(‘보는 교육’)에 비추어 비난한다.2 그러한 태도는 그가 말하는 교육의 개념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넘어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내가 다른 시각에서 교육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겠다는 말은,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단지 ‘교육은 무엇무엇이다’라고 개념을 규정하는 데 머물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이유는, ‘교육은 이런 거다!’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현실에서 별 반향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객관적인 여건이나 이해 부족 탓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개념 규정 방식 자체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애써 교육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의도나 목적은 무엇인가? 아마도 누구든지 교육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그게 전부인가? 물론 이해하는 일을 최종 목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육 현실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단지 교육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기 어렵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육의 이해와 교육 현실의 변화가 서로 연결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교육에 대한 단순한 개념적 이해는 교육의 실제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무력하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교육 실제의 변화로 연결될 수 있는 교육 이해란 어떤 것일까?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교육의 이해가 교육 실제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의 개념이다. 즉, 관조나 논리정연함을 넘어 변화를 전제로 한 교육의 개념을 새롭게 구안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다른 시각으로 교육을 생각해 보겠다는 말의 의미이며, 이 글에서 붙들고 씨름할 주제인 동시에 이 글을 새롭게 시작하는 이유이다.
어떤 것을 이해하는 일과 그 실제를 다루는 일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익숙한 주제이기도 하다. 1845년에 발표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11개의 테제’에서 철학의 중요한 임무가 세계를 해석하는 일이 아니라 변혁하는 일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명제는 너무나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생각은 이론(theory)에 대비되는 실천, 즉 프락시스(praxis)로 표현된다. 여기서 프락시스는 단지 변혁을 위한 행동만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가능케 하는 인식도 포함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글에서 추구하는 것은 프락시스적 교육 개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3
3. 무엇을 할 것인가?
단지 교육 세계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넘어 교육 현실을 변화시키는 일과 연결된 교육의 개념은 그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운 하나의 공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교육은 마르크스가 세계 변혁을 위해 분석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와 같은 요소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역동적인 교육 세계는 의외의 현상들을 풍부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 속에서 프락시스적인 교육 개념을 찾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다. 이 글의 후속편은 이를 향한 여정이 될 것이다.
가장 먼저 다룰 이야기 범주는 우리 교육의 현실에 관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대한민국의 교육은 건재하다. 매년 수십조 원의 교육 재정이 투입되고 수백만의 학생들과 수십만의 교원들이 일상적으로 배움과 가르침을 나누고 있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연속되기는 하지만, 취학률과 진학률 그리고 PISA 성적 등은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외양 이면에는 온갖 모순과 허위 그리고 심화하는 위기가 감추어져 있다. 나는 근원적인 해결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그야말로 회복 불능의 처지로 추락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이 괜한 호들갑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여러 측면에서 아프게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의 이야기 범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보여주는 다양한 교육 사례들에 관한 것이다. ‘이게 교육인가?’라는 당혹스러운 현실에서도 ‘이게 정말 교육이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는 현장과 개인들의 경험을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의 통념을 채워왔던 교육의 개념이나 실제와는 다른 교육 세계를 조명해 보려고 한다. 아마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교육 실제의 변화를 위한 교육 개념의 윤곽을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마지막 이야기 범주에서는 프락시스적 교육 개념에 관한 논의를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를 위해서 프레이리의 교육론을 포함하여 좀 더 깊은 시선으로 그동안 어려운 여건에서나마 쌓아 온 다양한 대안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내가 오래도록 곱씹어 온 교육의 실천적 개념을 깊이 있게 논의하게 될 것이다.
교육의 변화에 깊은 관심을 지니신 분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기탄없는 대화를 기대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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