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5-04-02 14:01
| 우리 학교와 교육이 사회적 소용돌이 안에서 어떤 변화를 시도해 왔는지를 짚어 봅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를 살펴봅니다. |
학교 외벽 개선, 내진 보강 공사가 한창이다. 지난 1월에 시작한 공사가 벌써 4달째 이어지고 있다. 학교 곳곳이 어수선하다. 이 불편을 감수하고 나면, 새 단장을 한 학교가 나타날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칠판과 분필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전자칠판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올해엔 전국적으로 AIDT를 교과서로 채택하여 사용하라고 호들갑이다. 학교가 참 많이도 변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는 진짜 안 변한다는 말도 흔히 듣는다.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는 모습이 혁명적으로 바뀔 리 없으며, 학생들 앞에서 교사는 꼰대일 때가 많고, 학부모의 눈에 학교는 만족스럽지 않다. 또, 우리가 원하는 학교의 진정한 변화는 그럴듯한 외양과 삐까뻔쩍한 첨단 교육 기자재에 있는 것도 아니다.
끝내야 할 시대는 곧 열어야 할 사회
‘돌이 부족해서 석기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어떤 끝자락에서 그다음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감히 낡은 것을 내던지고 새로운 연장을 만들어 집어야 온다는 말이다. 교육 즉 배우고 가르치는 일 또한 다를 게 없다. 특정 분야의 AI만이 아니라 범용 인공지능(AGI)까지 눈앞에 둔 상황,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해내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맞춰준다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어떤 새 연장을 만들어 그다음 문을 열어젖혀야 할까? 그냥 돌이 다 사라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수야 없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학교’는 학생들이 배우고 익히는데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여, 학생들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온전히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양한 교과에서 지식을 전하고 기술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이 상호작용하며 사회적 관계와 가치관을 만들고, 지역사회와 국가의 문화, 전통 등을 경험하며 자아 및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여 정서적 안정과 성장을 도모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요컨대, 학생들은 학교(교사)가 제공하는 교육과정에 잘 따라가기만 하면 좋은 삶이 가능했다. 그러한 관점이 수백 년의 교육을 이끌어왔고, 그것만으로도 학교는 자기 나름의 존재 의의를 인정받아 왔다.
차츰 학교가 시대 변화를 이끌기는커녕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의 방식이나 내용으로는 교육의 석기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우려이다. 그동안 우리는 집에 전화도 없던 시절에서 1인당 1스마트폰 시대로, 끼니를 걱정하다가 다이어트를 고민하고, 마시는 물이 석유보다 비싼 나라를 산다. 교육이 기존의 것 습득이라는 보수적 측면이 있음을 고려해도 그 변화가 미미하다는 평가에 반박이 쉽지 않다.
오늘날, 학생들이 교사의 말을 잘 따른다고 좋은 교육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는 거의 없다. 아이들이 혼자 스스로 할 수 있는 배움과 성장(실제적 발달 영역)에 더하여 계획된 배움과 성장(근접 발달 영역)이 확장되는 것이 바로 교육이 추구하는 변화의 궁극적인 모습인 것이다. 우리의 교육기본법1도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게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못박아 두었다. 그러려면 ‘왜’라는 질문, 의심하고 비판하기, 낯설게-삐딱하게 보기 등과 같은 능동적, 적극적인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생과 교사, 교실이라는 큰 틀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배움의 주체로서의 학생 자신, 또래 집단(동료), 보호자와 지역사회의 역할이 고루 부각되는 상황이다.
사회가 변하는데 그 안에서 그것을 배우는 학교가 변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나. 그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학교는, 우리 교육은 사회적 소용돌이 안에서 어떤 변화를 시도해 왔는지 살펴 나침반으로 삼으려 한다.
우리 교육의 변화 Big 5
# 위로부터의 변화 둘
정부 주도의 의도적 변화 시도가 있었다. 개혁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했던 시도를 보자.
먼저, 고교 평준화 정책(1974년)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치열한 고입 시험을 폐지하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모든 학생이 추첨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차츰 일류고, 명문고 광풍이 사라지고, 모든 고등학교는 동일한 교육과정을 따르게 되었다.
이는 학생들이 특정 학교 진학을 위해 경쟁하는 대신,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교육의 기회균등을 이루어 보겠다는 의도였다. 고입 시험의 폐지로 학생들의 입시 부담이 줄어들었고, 학업 스트레스 또한 완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학생들의 학력 격차 문제, 교육의 하향 평준화 논란, 사교육 의존 증가와 같은 부작용과 맞닥뜨려야 했다. 결국, 교육의 평등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한 고교 평준화는 학력 차별과 사회적 불평등 해소에는 이르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개혁2이다. 1995년 5월 31일 발표된 교육개혁 방안으로, 교육의 질 향상과 교육 시스템 개선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주요 내용을 보면,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학생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하고,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방향으로 교육 내용을 재구성하고 있다. 또한, 사교육 억제 및 공교육 강화를 위해 학교생활기록부제를 도입하고, 대학입시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수능과 내신 성적 반영 비율 조정을 모색했다.
고교 평준화 정책도 지속적으로 유지하되, 고교 유형의 다양화 및 특성화를 추진하여 학생에게 중·고등학교 선택권을 부여하였다. 학교의 자율적 운영을 위한 ‘학교공동체’ 구축을 내세우며 학교운영위원회 설치를 법제화하고, 학교장·교사 초빙제를 시범 실시하는 시도도 있었다. 또한 학생회와 같은 자치 기구의 활성화를 통해 학생의 자율성을 확대하겠다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제법 포함하고 있었다.
이 개혁안은 자율, 창의, 세계화와 같은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으나, 현장과의 소통은 뒤로한 채 교사를 개혁 대상으로 취급하는 우를 범했고, 정치적 목적까지 개입하면서 경쟁과 서열화를 완화하기는커녕 교육의 시장화를 불러왔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시작은 떠들썩했으나 겉만 번지르르했던 까닭이다.
# 아래로부터의 변화 둘
앞의 두 가지가 관 주도적,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였다면, 다음 두 가지는 학교 내부에서 시작된,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다.
그 처음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결성(1989년)이다. 교사의 손으로 교육의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시도였으나, 교원노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정권에 맞서 싸우다 1,500여 명의 교사가 교단에서 쫓겨나는 고통을 겪었다. 이는 우리 교육에 3가지 중대한 의미가 있다.
먼저, 관 주도의 상명하복 교육 관행을 거부하고 헌법에서 보장하는 교육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노동조합’이라는 결사체를 조직하여 집단적으로 천명했다. 당시 정권은 이를 빌미로 공무원의 집단행동이라는 꼬투리를 잡아 파면, 해임을 강행하긴 했지만. 이전까지 형편없는 대우를 하면서, ‘성직(聖職)’ 운운하던 기득권을 향해, 교사는 노동자이고, 노동이 결코 낮잡아 보아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치임을 자신과 사회를 향해 선언한 것이었다. 교육 내용에서도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이라는 지향을 분명히 하여, 서구 자본주의 강국 중심, 기득권의 반민주적, 비인간적 지배에 눈을 감는 교육에 맞서, 평화적이고 인간적인 교육을 추구하는 새 지평을 열었다.
교사노동조합의 출범은 향후 우리 교육이 나아갈 길을 뚜렷하게 제시함으로써 지금도 다양한 교육 철학과 실천, 교육 단체의 출현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 하나는 ‘혁신교육 – 혁신학교’의 흐름으로, 최근 10여 년 교육의 전반적인 운영과 학교 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혁신교육은 크게 ‘학교 운영 혁신’, ‘교육과정 및 수업·평가 혁신’, ‘공동체 문화 활성화’의 세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학교 운영 혁신’은 교직원 회의를 지시·전달 위주에서 토론 중심으로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학교 시스템을 행정 업무가 아닌 교육 활동 중심으로 재구조화하고 학생 자치를 확대하여 전반적으로 자율 운영 체제를 갖추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교육과정 및 수업·평가 혁신’은 교사의 전문성을 키우는 교원학습공동체 활성화를 바탕으로 결과 중심 평가에서 과정 중심 평가로의 전환을 꾀하며, 지필평가와 함께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자기평가 등 다양한 평가를 실시해 왔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문제 해결력과 창의적 사고를 기르는 한편,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등 학생의 학습 과정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공동체 문화 활성화’는 학부모의 학교 참여 확대를 바탕으로 학교를 학생-학부모-교사의 3주체 공동체로 구축을 진행하면서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통한 거버넌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혁신교육은 선언적 의미에 그치고 말았던 ‘5.31 교육개혁’의 한계를 일정 수준 극복하고, 2022개정 교육과정에서 추구하는 삶과 연계한 역량 중심 교육과정, 학생 맞춤형 교육과정, 깊이 있는 학습 및 의미 있는 학습 경험3의 밑바탕이 되어 궁극적으로 학생들이 미래 사회에서 필요한 역량을 갖추는 데 기여해 왔다.
# 끝으로, 외부로부터의 압력 하나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과 디지털화의 가속이 있다. 컴퓨터로부터 촉발된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김대중 정부가 모든 학교에 인터넷을 연결함으로써 IT가 교육을 보조하는 한 축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는 ICT(정보통신기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문서 작성, 인터넷 활용 등으로 시작되다가 모바일 기기의 보편화로 학습 자료가 다양하고 풍부해졌으며, 접근성도 매우 높아지는 등 획기적인 변화를 거듭하였다. 특히, 코로나19로 등교가 불가능했던 시기에는 온라인 원격 학습을 쌍방향으로 제공하기도 하는 등 교육 경험과 기회의 확대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이 사람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그 기능이 정교해졌고, ChatGPT의 출현으로 교육의 형식과 내용만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에도 흔들림이 일어날 정도의 커다란 변혁의 소용돌이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아직 변화의 방향 설정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충분한 내부 논의 없이 외부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대비가 시급한 영역이다.
한 학교의 변화는 이렇게
정책과 개혁, 운동 차원의 변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혈관에도 대동맥만이 아니라 모세혈관이 있어야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듯, 이젠 눈을 학교 안으로 돌려, 당장 한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과 방법을 찾아 보자. 그런데, ‘어떻게, 언제 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다. 무리하지 말고, 가능한 시도를 해 보자. 일 년에 교육 활동 10개 중 하나만 달라져도 우린 머잖아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이를 ‘복리의 마법’에 기대어 예측해 보자. 학교의 교육과정을 세분화해서 100개라고 가정하자. 해마다 열에 하나 즉, 10%씩만 바꾸어 보는 것이다. 논의를 단순화하여 복리의 계산식 A=G×(1+r)ⁿ (A는 예금 총액, G는 원금, r은 이자율, n은 연수)에 넣어 보면, 학교의 교육과정 산식은 G=100(1+0.1)ⁿ으로 변환할 수 있다.
첫 해엔 10개가 바뀔 것이다. 다음해엔 G=110(1+0.1)이 적용되어 바뀐 10개를 포함한 110개 중 10%가 바뀔 것이기에 실제로는 10+11=21개가 바뀐다. 또 3년째엔 G=121(1+0.1)에 의해 133개가 바뀌게 된다. 이 흐름이 계속된다면 약 7년쯤 지나면 학교 교육과정 전체가 모두 바뀌게 된다. 물론, 이론적인 계산일 뿐이고, 교육과정 중엔 바뀌지 않아야 더 잘 배우는 것도 제법 있긴 하다. 그렇다면 2, 3년만 제대로 실천해도 학교에 상당히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학생들의 더 나은 교육 활동을 돕기 위해 상벌점제를 시행하던 중학교가 있었다. 잘한 일에는 상점을, 잘못한 일에는 벌점을 부과함으로써 학생들 스스로 생활 습관을 바르게 형성하게 하려는 취지로 도입한 제도로 지금도 여러 학교에서 시행 중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의도가 좋다고 결과가 늘 좋은 건 아니다. 학생들은 보이는 데서만 잘하려 하고, 친구들 언행에 수시로 상점과 벌점을 들이대는 일이 벌어졌다. 또 벌점을 받은 아이는 다른 친구가 같은 일에도 벌점을 받지 않으면 이를 신고하며 벌점을 주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잘 지키는 아이는 자신이 손해 본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게다가 제대로 적발하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처벌 위원회에 불려와야 할 아이도 제법 있어서,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좀 더 교육적인 해법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상벌점이 있어도 학생들의 생활이 엉망인데, 그걸 폐지하면 난장판이 될지 모른다는 일부 교사의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교사조차 지키기 힘든 지경이니, 교사들 설문으로 폐지를 결정하고 학생 자율 중심의 지도 대책을 세워 새 학년도를 맞이했다.
그런데 지각 벌점이 있을 때도 지각을 수십 명씩이나 하던 아이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어 폐지 3년째에는 아예 지각생이 사라졌다. 또 시도 때도 없이 앞뒤가 안 맞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던 아이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욕설이나 괴롭힘 같은 학교 폭력의 사례도 해마다 10여 건을 넘나들다가 한 해 한두 건으로 줄어들었다. 그 여파는 다른 교육 활동에도 고루 스며들었다. 교사가 신경을 곤두세워도 벌어지던 일들이, 신경을 덜 써도 오히려 전보다 나아지는 모습, 이게 우리가 바라던 학교의 변화 아니었던가? 벌점이 신경쓰이고 교사의 잔소리가 듣기 싫고 처벌을 피하기 위한 순응을 배워 간다면 우리 가르침은 장차 약(藥)이 아니라 독(毒)이 되고 말 것이다.
학생들이 배운다는 것은 지적 성장만이 아니라, 자율과 책임을 균형 있게 갖추는 일이다. 일일이 끼어들어 조언할 수도 없다. 그 효과도 아주 떨어진다. 그들의 눈엔 도움이 아니라 ‘간섭(干涉)’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행동해야 오래가고 자기 것이 된다. 그 변화가 쌓여야 우리 사회가 좋아진다. 우린 아직 거기까지 가 보진 못했다.
변화,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가
해방 이후 무려 80년, 우리 사회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교육계 또한 국제비교평가(PISA)나 대학 진학률과 같은 지표에서 교육 선진국에도 뒤지지 않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결과 중심의 입시 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보다 나은 성적’을 위해 분투 중이다. 경쟁과 줄세우기를 통한 서열화가 계속되는 한, 학교에서 아무리 발달과 성장 중심의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꺼내기 교육, 생각 만들기 교육을 한들 그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다. ‘더 많이’로 승부를 보는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학생·학부모가 학원과 인강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현명한 판단이 되고 만다.
그로 인해 사회적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하는 중이다. 그 사회적 불평등은 다시 교육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지역 간, 계층 간 교육 격차는 다시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낳는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누군가, 어디선가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다만 ‘고양이 목의 방울’처럼 해결책을 찾아도 막상 실행이 쉽지 않은 것이 우리 교육의 얽히고설킨 상황일 뿐이다.
당장 올해만 해도 교육부가 AIDT 확산에 예산을 퍼붓고 있는 사이, 중요한 변화를 하나둘 놓치고 있다. 교육과정을 이루는 핵심 중의 핵심인 교사들이 해마다 줄어들고, 교직을 떠날 궁리4를 하고 있다.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교육은 전력 질주, 100미터 달리기 잘할 사람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다그친다고, 조바심 낸다고 좋아지지 않는다. 우리네 인생처럼 교육도 긴 호흡으로 보면, 이어달리기의 한 주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 차례에 충실할 일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면 성(聖)가정 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이 있다. 그 도시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그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성당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눈에, 가슴에 담아 온다. 무엇이 그토록 많은 이들의 발길을 끌어 설레게 했을까? 나는 그 무엇을 성당이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찾는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설계 이후 1882년에 세워지기 시작한 성당이 14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는 가르침, 그것이 바로 교육의 본질을 여실하게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섣부른 완성을 욕심내지 말자. 그래야 진짜 변화가 온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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