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묵적 교육과정에 대한 명시적 검토의 필요성

by gyobasaNPO | 2025-04-02 12:23

 

암묵적 학습(implicit learning)은 높은 효율과 효과를 자랑하는 학습 기제인 동시에, 학습자로 하여금 학습 과정과 결과의 온전한 주체가 되는 것에 한계를 갖게 하는 학습 기제이다. 암묵적 학습에 의해 형성된 암묵적 기억(implicit memory)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 정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개인은 이와 같이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암묵적 기억의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하기 쉽다. 따라서 이미 형성되어 활용되고 있는 암묵적 기억을 의식적으로 성찰하고 평가하여 재구성하는 과정은 건전하고 적절한 사고를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학교의 공식적 교육과정과 일치할 수도,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암묵적 교육과정(implicit curriculum)은 암묵적 학습을 통한 암묵적 기억 형성을 통해 학생의 정체성과 가치관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현장에 존재하는 암묵적 교육과정의 내용과 적절성을 명시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해야 하며, 필요한 경우 수정해야 한다.

 

 

오전 7시 20분. 당신은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같은 라인에 사는 다른 직장인들도 출근을 서두르고 있는 것인지 엘리베이터는 18층, 15층, 12층, 11층에 연달아 섰다가 내려오고 있다. 드디어 7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당신 앞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역시, 벌써 7명이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다. 모두 문을 바라보며 서 있는 모양새다. 문득 당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엘리베이터 문을 등지고 서 있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를 느낀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는다. 모두 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만 문을 등지고 선다고? 사람들은 나를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라고 생각하겠지. 당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다. 당신은 그 (다소 엉뚱하지만) 강력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 문을 등지고 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 결국 당신은 엘리베이터 문을 등지고 서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를 억누르고,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본 채 1층으로 향한다.

 

도대체, 왜, 당신은 이 상황에서 엘리베이터 문을 등지는 행동을 결국 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누군가가 당신에게 엘리베이터를 타면 문을 향해 서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훈련시킨 적이 있었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을 등지고 섰다고 혼난 적이라고 있나? 그 역시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미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서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을 마음 깊숙이 내면화하여, 그 규범은 당신의 행동을 강력하게 통제한다.

 

 

암묵적 학습(implicit learning)의 정교함과 강력함

 

이토록 강력하게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고 서야 한다’는 지식은 어떻게 습득된 것일까? 바로 암묵적 학습(implicit learning)을 통해서이다. 암묵적 학습(implicit learning)은 일반적으로 주의가 학습되는 정보에 의도적으로 집중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며, 학습된 내용은 학습자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수행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문법 규칙을 명시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모국어 문장에서 어색한 문장을 자연스럽게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반복적 노출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언어의 통계적 패턴을 습득한 결과로, 암묵적 학습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암묵적 학습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Reber1에 의하면 암묵적 학습은 ‘비의도성(incidentalness)’, ‘비의식성(lack of awareness)’, ‘내성적 접근의 어려움(inaccessibility to introspection)’, ‘강건함(robustness)’을 특징으로 한다. ‘엘리베이터에서는 문을 바라보고 서야 한다’는 것과 같은 사회적 규범은 그러한 규범을 배우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해당 규범을 학습하였다는 점에서 비의도성을, 자신이 그러한 규범을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 혹은 학습하였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의식성을,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학습하였는지 언어적으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내성적 접근의 어려움의 특성을 갖고 있으며, 학습의 결과가 행동에 일관되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에서 강건한 특성을 갖는다.

 

상황적 내성(situational tolerance)2과 관련된 마약 중독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암묵적 학습의 정교함과 강력함을 알게 하는 다소 자극적이지만 흥미로운 사례가 될 수 있다. 상황적 내성이란 특정 자극(예: 약물, 스트레스, 감정 등)에 대한 반응의 강도가 자극이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동일한 자극이라 하더라도 그 자극이 반복적으로 경험된 상황이나 환경에서는 반응이 약해지는 경향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상황적 내성이 마약 중독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초래하게 되는 것일까? 마약 중독자는 많은 경우 약물을 투여하는 고정된 장소를 두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기 방이나 자주 가는 화장실과 같은 곳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이 중독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약물을 투여하는 장소가 가진 특유의 색, 소리, 냄새, 형태 등과 같은 다양한 정보를 마약과 결합하여 학습하게 된다. 따라서 마약을 투여하는 장소에 가기만 해도 그 장소로부터 제공되는 다양한 신호(cue)에 의하여 그(녀)의 몸은 마약이 몸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예측을 하게 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한 반응을 하게 된다.3 몸은 마약이 미치는 강력한 부정적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한 반응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마약 중독자가 전혀 낯선 장소에서 평상시에 투여하였던 것과 동일한 양의 마약을 몸 안으로 들여보내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마약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한 반응을 촉발하는 환경적 신호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몸은 마약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한 반응을 제대로(평상시와 같이) 작동시키지 못하게 된다. 결국 평소와 같은 양의 마약을 투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평상시보다 더 많은 양의 마약을 투여한 것과 같은 효과가 발생하여, 심한 경우 중독자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4

 

상황적 내성에 의한 마약 중독자의 사망은 암묵적 학습의 전형적인 예가 되는 동시에, 암묵적 학습에 관여되는 인지적 기제가 얼마나 정교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학습 결과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약 중독자는 자신의 마약 투여와 일상적으로 마약을 투여하는 장소의 다양한 감각정보(소리, 빛, 촉감, 냄새 등)를 결합하여 조건화된 대응 반응을 의도적으로 학습한 것이 아니며(비의도성),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비의식성), 어떻게 그러한 학습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내성적 접근의 어려움), 암묵적으로 학습된 상황적 내성에 의하여 강력하고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암묵적 학습의 강력한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다소 자극적인 마약 중독자의 약물 쇼크사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이와 같은 암묵적 학습 기제는 인간의 학습 시스템이 갖는 고도의 효율성을 보여준다. 매우 한정된 인지적 자원인 ‘주의(attention)’를 크게 소모하지 않고도 환경에 존재하는 복잡하고 정교한 패턴을 탐지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생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암묵적 학습 기제이기 때문이다. 정보처리 이론5의 관점에서 볼 때, 암묵적 학습은 주의와 의식적 인식이라는 경로를 우회하여 외부로부터 유입된 감각정보로부터 직접 장기기억 체계에 통합될 수 있는 규칙적 구조를 추출하고 저장하는 처리 메커니즘이다. 암묵적 학습을 통해 형성된 암묵적 기억6은 행동 수행이나 판단 과정에서 자동화된 지식 형태로 활성화되며, 작업기억의 부담 없이 복잡한 처리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7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기능을 지닌 암묵적 학습이라고 해서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의식을 요구하지 않는 ‘무의식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개인은 암묵적 학습을 통해 기억될/된 내용의 적절성에 대한 명시적 검토를 거치지 않고 정보를 저장하거나 활용하기 때문이다.8 즉, 암묵적 학습은 주의를 거의 소모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학습자가 자신이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특정 패턴이나 정보를 습득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 배움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도 가지기 어렵고, 결국 학습의 실질적인 주체가 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9

 

더욱이, 암묵적 학습 결과 습득된 정보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암묵적 학습의 ‘강건한 특성(robustness)’ 덕분에, 우리가 암묵적 경로를 통해 습득한 정보가 오랜 시간동안 다양한 맥락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 정서에 강한 영향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경로에 의해 습득된 어떤 정보가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자체를 의식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정보가 적절한 정보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암묵적 학습을 통해 습득된 정보는 암묵적 속성상 적절성에 대한 의식적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많은 경우 사회적 맥락에서 타인에 의해 제공되는 피드백이 암묵적 학습을 통해 습득되는 정보의 적절성에 대한 검증 기능을 수행하게 되지만, 우리가 편협한 정보를 제공하는 환경에 장기간 노출되어 있다면, 그러한 사회적 피드백 역시 내면화될 정보의 적절성을 검증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게 된다. 우리는 때때로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암묵적으로 내면화된 경험이나 정보가 숨어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자신의 사고와 행동, 정서의 온전한 주체가 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일은 단순한 이론적 관심이 아니라, 우리가 보다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실천적 과제가 된다.

 

 

암묵적 기억(implicit memory)과 암묵적 교육과정(implicit curriculum)

 

암묵적 기억의 광범위한 영향력과 잠재적 위험성 때문에,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개인과 집단의 암묵적 기억의 형성 기제와 작동 방식을 보다 자세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져 왔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사고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행동과 사고, 정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암묵적 기억의 형성 기제와 영향력에 대해 잘 이해할수록 우리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다수의 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방향과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10

 

그렇다면 사회화를 위한 주요 기관인 학교에서는 어떤 암묵적 기억이 형성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우리는 암묵적 교육과정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암묵적 교육과정은 공식적 교육과정이나 교사의 의도에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학교나 교실의 문화, 상호작용, 규범, 관행 등을 통해 학습자에게 비의도적으로 전달된 가치, 태도, 행동 양식 등을 지칭하며, 주로 암묵적 학습을 통해 습득된다.11

 

학생이 습득하게 되는 암묵적 교육과정의 내용은 공식적 교육과정의 내용과 논리적 궤를 같이 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공식적 교육과정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실제 학교문화와 일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식적 교육과정이 학생이 지나친 (성적) 경쟁으로 인해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줄이기 위해 성취평가제를 도입하였다고 할 지라도, 학교 현장에서 여전히 등급을 위한 경쟁이 지속된다면, 이는 공식적 교육과정과 암묵적 교육과정 사이에 간극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또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에서는 ‘전인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의 진로와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자기 주도적인 사람’을 추구하는 인간상으로 설정하였다고 할 지라도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을 뒤로하고 진학에 유리한 과목을 선택하는데 급급하다면, 이 역시 공식적 교육과정과 암묵적 교육과정이 뒤틀려 맞물려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공식적 교육과정과 암묵적 교육과정이 동일한 주제에 대하여 상이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을 때, 학생은 어떤 교육과정의 영향을 더 크게 받을까? ‘말보다 행동이 진실을 말한다(Action speaks louder than words.)’라는 표현은 교육적 영향력 면에 있어서 암묵적 교육과정의 우위를 직관적으로 잘 설명해 준다.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한다고 볼 수 없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한다면, 당신은 상대방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공식적 교육과정과 암묵적 교육과정이 동일한 주제에 대하여 상이한 메시지를 전달할 경우, 학생은 암묵적 교육과정의 메시지를 내면화한다. 공식적 교육과정은 인지적 차원에서 전달되지만, 암묵적 교육과정은 다양한 상황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며 주로 정서적 몰입과 동일시를 통해 학습자에게 내면화되기 때문이다. 즉, 학생은 학교에서 반복적으로 접하는 교사와 또래의 행동, 분위기, 권력 구조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때로는 모범이 되는 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며, 이 과정은 학습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무엇이 가치 있는가’에 대한 감정적 기준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암묵적 교육과정에 대한 명시적 검토의 필요성

 

암묵적 교육과정이 공식적 교육과정보다 그 영향력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며, 주로 암묵적 학습에 의해서 내면화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학교 현장에 존재하는 암묵적 교육과정의 내용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앞서 안내된 대로 암묵적 학습은 ‘비의도성(incidentalness)’, ‘비의식성(lack of awareness)’, ‘내성적 접근의 어려움(inaccessibility to introspection)’, ‘강건함(robustness)’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내면화되는 지식의 적절성을 검토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특히, 암묵적 교육과정에 의해 특정 ‘태도’와 ‘가치’를 내면화하게 될 때, 학생은 자신이 습득하고자 의도한 것이 아닌 태도와 가치를 내면화하면서도 자신이 특정한 형태의 태도와 가치를 내면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면화된 태도와 가치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한, 암묵적 학습의 강건함에 의하여 자신도 모르게 습득한 태도와 가치가 광범위한 맥락에서 사고와 행동,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12

 

한편, 암묵적 교육과정에 의해 내면화된 암묵적 기억의 영향력이 매우 큰 것에 비하여, 학교라는 공간에서 형성되는 암묵적 기억은 그다지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공식적 교육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구현될지에 대해서는 빈번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만 암묵적 교육과정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내용, 가치, 태도를 포함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나 논의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암묵적 교육과정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데에는 몇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겠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통적으로 학교 교육이 교과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교과 교육의 핵심 목표는 지식과 정보를 다양한 맥락과 문제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인출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을 갖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교과 교육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이러한 이유로 수업과 평가는 암묵적 기억보다는 명시적 기억에 압도적으로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

 

[도표 1] 다양한 형태의 기억13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암묵적 학습 기제의 정교함과 강력함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암묵적 교육과정이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앞서 상황적 내성에 의한 마약 중독자의 사망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인간이 암묵적 학습을 통해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환경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규칙이나 패턴을 감지하고 내면화하는 특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고 암묵적 학습을 통해 습득된 암묵적 지식이 개인의 사고와 행동, 정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안다면, 공교육에서 천명하고 있는 교육적 메시지와 별개로 학교라는 공간에서 어떤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있는지,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이 어떤 가치와 태도를 내면화할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지, 학교 현장의 암묵적 교육과정이 진지한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걱정스럽다. 공교육 현장에 존재하는 암묵적 교육과정이 매우 비 교육적인 경우가 심심치 않게 관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육과정은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배려와 나눔, 협력을 실천하는 더불어 사는 사람’을 천명하고 있으나, 고등학생들은 등급 병기에 의해 무력화된 성취평가제(절대평가제)에 의해 여전히 극심한 경쟁의식을 내면화하고 있고, 교육과정은 ‘진취적 발상과 도전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창의적인 사람’을 키울 것을 선언하고 있으나 고교학점제의 본격적 도입 이전부터 학생들은 내신등급 따기에 유리한 과목을 선택하기에 여념이 없으며, ‘지식과 정보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탐구하여 활용할 수 있는 지식정보처리 역량’의 습득을 강조하고 있는 교육과정의 취지와 달리 학생들은 지식과 정보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탐구하여 활용할 수 있는 지식정보처리 역량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수행 결과물을 산출하기 위하여 밤잠을 설치고 있다. 교육과정은 ‘우리나라의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천명하지만, 아이들은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진정한 의미의 봉사활동을 하는 대신, 진로 적합성과 성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프로젝트형 봉사활동을 한다. 서울대 혹은 의대에 몇 명의 학생을 보냈는지에 근거하여 학교의 성과를 단정짓는 공교육 현장에서, 날림으로 시행되어 관련된 누구도 실효성을 확신하지 않는 최소 성취 수준 보장 제도가 전개되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어떤 암묵적 지식을 축적하고 있을 것인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위선, 혹은 눈도 가리지 않고 아웅 하는 뻔뻔함을 내면화할 위험에 직면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절제하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된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도덕성(ethics)과 덕(virtue)이 습관(habituation), 즉 ‘행동’의 반복을 통해 고양된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암묵적 교육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반복하게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1. Reber, A. S. (1993). Implicit learning and tacit knowledge: An essay on the cognitive unconscious. Oxford University.
  2. 상황적 내성(situational tolerance)이란 반복적인 약물 사용을 통해 특정한 환경적 단서(예: 방의 냄새, 조명, 시간 등)가 체내의 보상 반응(compensatory response)을 자동으로 유도하게 되는 현상을 지칭하며, 이러한 보상 반응은 약물의 효과를 일부 상쇄함으로써 약물에 대한 ‘내성’과 같이 작용한다. Siegel, S. (2005). Drug tolerance, drug addiction, and drug anticipation.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14(6), 296–300. 이와 같은 현상은 환경적 단서(cues)나 정황적 조건이 생리적 반응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행동주의 학습이론인 고전적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의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되곤 한다.
  3. 보상적 반응(compensatory response)이란 조건자극이 주어질 때 생리적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유기체가 약물 등의 효과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약물의 효과를 상쇄하며 내성을 형성하는 주요 기전이 된다. Siegel, S. (1984). Pavlovian conditioning and drug overdose: When tolerance fails. Addiction Research, 79(4), 405–412.
  4. 이와 같은 마약 중독자의 상황적 내성은 고전적 조건형성에 의해 학습(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는 것과 같이 마약 중독자는 자신이 일상적으로 마약을 투여하는 장소 특유의 냄새, 소리, 색깔 등의 감각자극을 마약 투여와 결합시켜 학습하고, 마약이 들어오기도 전에 해당 감각자극만으로도 마약이 들어올 경우에 대비하여 신체가 반응한다. Schacter, D. L., Gilbert, D. T., Wegner, D. M., & Hood, B. (2016). Psychology (2nd European ed.). Palgrave Macmillan.
  5. 정보처리 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은 정보를 습득, 저장, 사용하는 데 관련된 정신적 과정을 연구하는 인지 심리학 이론을 지칭한다. Cuncic, A. (2023, May 25). Information processing theory in psychology. Verywell Mind.
    https://www.verywellmind.com/information-processing-theory-in-psychology-7503601​
  6. 암묵적 기억(implicit memory): 해당 사건을 기억하라는 요구나 기억이 형성된다는 의식 없이 생성되는 사건이나 경험에 대한 기억
    https://dictionary.apa.org/implicit-memory
  7. Reber, A. S. (1993). Implicit learning and tacit knowledge: An essay on the cognitive unconscious. Oxford University Press. Sun, R., Slusarz, P., & Terry, C. (2005). The interaction of the explicit and the implicit in skill learning: A dual-process approach. Psychological Review, 112(1), 159–192. 암묵적 기억의 사고, 행동, 정서에 대한 영향력은 광범위하고 강력하며, 적절한 암묵적 기억의 형성과 활용을 위하여 성찰과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8. 암묵적 학습이 모두 암묵적 기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 성찰과 분석적, 비판적 사고를 통해 명시적 기억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9. 암묵적 학습은 학습자가 자신의 학습 과정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거나 습득된 지식을 명시적으로 모니터링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특성은 학습자가 오류를 자각하거나 전략적으로 수정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외부로부터의 관찰과 피드백이 암묵적 학습의 질적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복잡한 과제나 정확성이 요구되는 학습 상황에서는 외재적 피드백이 암묵적으로 형성된 지식을 점검하고 명시적 지식으로 전환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10. 인간의 사고와 행동, 정서의 기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은 다양한 하위분야에서 암묵적 기억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인지심리학에서는 인간 사고가 제한된 인지 자원 내에서 작동하고, 많은 처리 과정이 자동화되어 의식적 통제 없이 수행된다는 점에 주목하며, 자동화된 처리와 암묵적 기억이 문제 해결과 기억 재인에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분석한다. 지각심리학은 자극이 의식에 도달하지 않아도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사회인지 분야에서는 개인이 의식하지 못한 채 습득한 편향된 정보가 판단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하며, 성격심리학은 자기도식과 자존감 같은 변수들이 의식적 접근 없이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탐구한다. 분야마다 연구 맥락과 용어는 다르더라도, 각 연구 영역은 ‘의식되지 않은 기억과 정보처리 과정이 인간의 행동과 판단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적 가설을 공유한다. 다시 말해, 암묵적 기억은 단지 특정 분야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인간 정보처리 체계의 핵심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보편적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11. 암묵적 교육과정이 항상 암묵적 학습을 통해 습득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 암묵적 교육과정의 숨겨진 메시지를 명시적으로 인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 물론, 암묵적 교육과정과 공식적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태도와 가치가 유사하다면 학생은 암묵적 교육과정을 통해 습득하고 있는, 혹은 습득한 태도와 가치를 명시적으로 습득한 개념과 언어를 통해 인지하고, 명료히 하며 의도적 분석과 성찰을 통해 수정하고 정교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13. Schacter, D. L., Gilbert, D. T., Wegner, D. M., & Hood, B. (2016). Psychology (2nd European ed.). Palgrave Macmillan. 교과 교육의 핵심 목표는 지식과 정보를 다양한 맥락과 문제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인출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교과 교육이 실질적으로 학교 교육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 학교 교육은 암묵적 기억보다는 명시적 기억에 압도적으로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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