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교육 용어 사전 [우리 교육 사전_250220]

by gyobasaNPO | 2025-02-1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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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판에는 ‘미래’를 포함하여 표제어 4개(‘미래’, ‘미래 교육’, ‘미래 역량’, ‘미래 학교’)가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 참여해 주신 독자들께서는 편집실(gyobasa@21erick.org)로 연락처를 알려주십시오. 작지만, 저희가 약속했던 선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미래’ ‘미래 교육’ ‘미래 역량’ ‘미래 학교’

(위의 용어를 ‘클릭’하면 해당 용어로 바로 이동합니다.)


 

<사전 만드는 취지와 참여 안내>

 

교육의 현실은 그것을 이야기하는 말에 달린 듯합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우리 상식을 반영하고, 그것이 여론이 되고 정책을 끌어내는 듯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교육 용어들을 새삼 살펴보는 일이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교육 실제를 성찰하고 정책과 제도를 바루려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언어를 살펴보아야 하리라 여기게 됩니다.

 

새해 새로운 기획으로 우리의 현실 교육 언어를 짚어 보는 난을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용어 사전을 독자들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길 바랍니다. 교육에 관련된 우리 일상에 묻어 있는 정의(定義)를 모아 정리하려는 사전이고, 거듭 개정해 가는 사전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표제어 뜻풀이를 풍요롭게 키우고 사전을 두텁게 만들어 가는 과정은 유쾌하기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용어 정의를 제안하면서 교육의 제도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때로는 교육을 뒤틀고 있는 ‘관제’ 용어를 통쾌하게 풍자하며 새로운 관심을 환기할 수도 있길 바랍니다.

 

사전을 만들어 가기 위한 실마리로, 편집실에서 몇 개씩 표제어를 추가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편집실의 작업에 구애됨이 없이, 교육에 관련된 어떤 단어나 구절이든, 사전에 등재될 만하다 여겨지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표제어로 삼아 나름의 정의를 제안해 주십시오. 이미 등록된 표제어에 새로운 정의를 추가하거나 수정 보완해 주셔도 좋습니다. 간단한 댓글이나 조언도 환영합니다.

 

채택되는 ‘기고’에 대해서는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방식으로 성의껏 사례하겠습니다. 모두 함께 교육을 이야기하며 사전을 꾸준히 증보해 갈 수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시는 댓글이나 조언 그리고 표제어와 정의 등은 편집실에서 모두 모아 정리해서 기존 버전에 반영한 후, 새로운 버전의 사전은 격주마다 발행하는 저널에 업데이트하여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새로워진 사전의 ‘현재본’은 항상 ‘교육을바꾸는사람들’ 홈페이지 상단에 올려두겠습니다. 언제든 들여다보시며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 아래 표제어는 ‘가나다순’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 이번에 새롭게 등재한 용어 및 수정보완된 용어는 ‘청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공부’

 

학생의 경우에는, 시험 점수를 얻는 데 효험이 있을 인지적 활동을 가리킨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공부’ 이야기가 없지 않지만, 그런 이야기에서 ‘공부’는 대체로 위선적인 뜻을 품는다. 어른들은, 다른 집 아이들을 위해서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라고 충고할지 모르지만, 자기 자녀에게는 그런 공부를 공부가 아니라며 말릴 것이다. 학생이 좋아서 또는 궁금해서 ‘공부’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본인은 공부라 우기겠지만, 적어도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공부가 아니라고 지적하기 십상이다. 특히 시험을 앞둔 시기에는,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헛된 짓을 하고 있느냐고 핀잔할 것이다.

 

 

‘교과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을 자세하게 풀어 정리한 교육자료이다. 학생들이 그 내용을 얼마나 습득하게 되건, 학기별로 처음부터 끝까지 수업 진도는 완결되어야 한다. 적지 않은 학생이 배움에서 처지고 결국 포기하게 되지만 진도는 나간다. 교육정책은 교과서에 포함하면 내용은 가르쳐진다고 전제한다.

 

‘인공지능 디지털교과서(AIDT)’

한국 교육부가 세계 최초로 만들어 채택하겠다는 교과서이다. 교육부장관의 말로는 모든 학생에게 맞춤교육이 이루어지게 할 ‘교실 혁명’의 열쇠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지는 숨겨져 있다. 그렇게 대단한 교과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어떻게 1년도 안 되는 ‘학습’ 시간에 모든 학생에게 맞춤의 ‘교육’을 실행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해지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으며, 세계 유례없는 맞춤교육의 도구라면서, 그 맞춤(알고리즘)이 어떤 표적을 향하는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짐작건대, 곧 나오는 AIDT는 옛날의 ‘전과’와 ‘완전학습 참고서’를 묶어 디지털화한 정도일 것이다. ‘개념과 원리’에 대한 제법 자세한 설명과, 학생이 수준을 높여가며 풀 수 있도록 문제를 제시해 주는, 말하자면(‘디지털’이므로) 매우 ‘두터운’ 참고서라고 상상하면 될 것이다. 물론,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VR’의 매력을 갖추었을 텐데, 그 매력은 곧 퇴색할 것이다. 화려하지만 내용에 대한 진정한 호기심을 키우지는 못할 교과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

 

학교에서 교육의 일을 맡는 사람이다. 스승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도 쓰였었지만 그런 뜻은 거의 죽었다. 교사들 스스로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 청원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특히 정책적으로는, ‘교육 공급자’라고 불린다. 공급자로서 그들은 교육 수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 단계가 올라 갈수록 그들의 직무는 학생들의 진학 경쟁력을 키우는 일로 귀결한다. 정부나 학부모의 수요가 그렇기 때문이다. 문제 풀이 수업의 수요가 매우 강해서 이에 부응하는 것이 주된 사명이 된다.

 

 

‘교육’

 

교육¹

사다리 타기 게임이다. 어떤 출발 지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종점에서 얻는 이익이 달라진다. 그러나 사실 출발점 선택을 스스로 할 수는 없다. 어디에서 어떤 가정에 태어나 자랐느냐에 따라 올라가는 경로가 달라진다. 올라가는 중간에, 돈이나 권력 같은 게 있다면, 알음알음으로 경로를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올라가는 능력에 따라 길을 달리 잡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승패는 일찍이 결정되어 있는, 게임 아닌 게임이다.

 

교육²

꼰대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다. 대체로 지루하지만, 잘 기억해야 한다. 들은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시험에서 보여주지 못하면 머저리 취급받게 된다. 부모가 많은 재산을 물려주거나 스스로 떼돈을 벌면 그런 취급에서 면제될 수는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 수준까지는 들어야 사람 취급받으며 살 수 있다. 그러했다는 증서는 취업이나 결혼에도 요긴하다.

 

교육³

학교 교육과 비슷한 말로, 학교 제도를 바탕으로, 국가가 국민을 통솔하고 국가 경쟁력의 재료인 ‘인적자원’을 개발하려는 과업이다. “저출산 시대에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는 흔히 듣는 말에 그런 뜻이 담겨 있다. 인구가 줄어들면 개개인을 ‘일당백’으로 ‘교육’해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이 ‘평생학습’이란 용어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교육은 이제 국민 스스로 평생 인적자원으로서 값을 유지하려고 애써야 하는 과제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교육평가’

 

본디 교육의 시작 전부터 마무리까지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점검 행위를 가리켰다. 어느 수준에서 시작할지, 과정은 제대로 흐르고 있는지 그리고 의도한 성과는 얼마나 거두었는지 알아보려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뜻은 증발해 버렸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점수(‘라벨’)를 붙이며 변별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절대평가’

점수대별로 다른 등급을 매기는 방식의 평가이다. 시험을 쉽게 또는 어렵게 출제함으로써 수험생이 받는 등급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무줄 잣대’의 평가이다.

 

‘상대평가’

한 집단에 속하는 학생들 사이의 순위를 기준으로 점수(등급)를 매기는 평가이다. ‘나’의 실력보다 같이 평가받는 다른 학생의 실력이 내 점수를 좌우하는 이상한 평가 방식이다.

 

 

‘맞춤교육’

 

기성복이 아닌 맞춤복처럼 학생마다 맞춰 제공하겠다는 교육을 뜻한다. 정보 기술(IT)이니 인공지능(AI) 기술이니 하며 ‘에듀테크’가 유행하면서 교육부가 정책 구호로 채택해 적극 퍼뜨리고 있는 용어이다. 최근에는 ‘AI 디지털교과서’가 ‘대전환’ 맞춤 도구라며 채택하겠다고 열 올리고 있다. 그렇지만, ‘교과서’ 자체가 이미 맞춤이 아니라 모두에게 강제하는(똑같은) 기성복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어떻게 맞춤의 도구가 된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맞춤교육은 결국, 유니폼을 학생 개인 치수에 맞게 만들어주는 것과 같은 식으로, ‘똑같지만 모두에게 똑같지는 않은’ 교육이다.

 

※ ‘극복하는 힘’ 님의 이견

같은 밥을 먹어도 사람마다 소화하여 가져가는 영양분은 사람마다 다르다. 마찬가지로 같은 교과서를 제공하여도 아이마다 습득 또는 가져가는 방식은 차이가 난다. 그러니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많은 면에서 타당하고 바람직하다. 단순히 교과서가 동일하게 제공된다고 해서 맞춤교육에서 벗어난다고 이야기하면 교과서에 대한 인식만 왜곡하게 될 것이다. [교과서가 모든 학생에게 동일하다고 해서 교과서가 나쁜 것도 아니고, 또 그런 교과서로 수업하는 상황에서도 맞춤교육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미래’

 

일반적으로 ‘앞으로 올 때’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지만, 교육 이야기에서는 ‘불확실해서 두려운 때’라는 뜻이나 ‘살아남기 위해 지금 단단히 준비해야 할 때’라는 뜻으로 더 쓰인다. ‘일자리’와 ‘먹거리’를 거론하며 특히 그렇게들 쓴다. 미래란 지금 있는 일자리들이 대부분 사라지는 때를 이르며, 그렇게 일이 사라지는 상황에 적응하고 또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애써야 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때 먹거리는 개인의 생존과 국가의 경쟁력을 아울러 가리킨다. 미래는 불확실하다고 하면서도, 어떤 점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그 정해진 듯한 상황에 대해서 지금 ‘미래 역량’을 쌓으며 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모순적인 이야기가 특히 ‘교육 개혁’을 위해 태연스럽게 소통된다.

 

 

‘미래 교육’

 

‘앞으로 올 때를 준비하는 교육’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냥 좋은 교육’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있는 일자리가 대부분 사라질 미래를 대비해서 교육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할 때 ‘미래 교육’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한국판 뉴딜을 외치며 학교를 ‘그린스마트스쿨’로 짓거나 고치면서도 미래 교육을 추구한다고 했었다. 특히 교육부에서는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종종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미래를 알고 준비(교육)할 수 있게 되는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오늘과 미래는 사실상 붙어 있고 또 오늘 우리의 의논과 결정이 미래 우리 삶의 형편을 결정할 텐데, 왜 잘 모르는 미래를 그리면서 그 허구의 상황에 대한 적응 훈련을 해야 하는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교육부나 교육청은 종종 새롭게 발진하는 정책을 ‘미래 교육’ 정책이라 칭하면서 그냥 교육을 발전시킨다는 듯이 이야기하기도 한다. ‘미래’를 ‘좋은’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쓰는 셈인데, 역시 ‘불확실한 미래’를 팔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미래 역량’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망라해 가리키는 말이다. OECD 같은 국제기구에서 유행시켰고,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세계 여러 나라가 받아 쓰고 있다. 교육이 그런 역량을 키워야 한다며 구체적으로 그 역량을 정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정의는 동어반복이다. 예컨대,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창의적인 역량’이 필요하다면서, 창의적인 역량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이야기하는 식이다. 수백만 년 전을 포함해서, 창의적인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기나 했는지 따져보면, OECD의 정의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PISA 프로젝트 같은 데서는 미래 역량을 평가하는 시험도 시행한다. 미래의 핵심적인 속성이 불확실성이라면서, 미래 역량은 어떻게 알아내서 평가까지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결국 그 시험은 전통적인 교과에 대한 학업 성취를 평가하고 있는데 말이다.

 

 

‘미래 학교’

 

앞으로 변화해 있을 학교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시설이나 설비 등이 ‘그린화’하고 ‘디지털화’했다는 신식 학교를 선전할 때도 이 말을 쓴다. 2000년대라는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그리고 2001년 OECD에서 학교 교육이 미래에 어떻게 변할지 예견하는 시나리오를 내놓으면서, 우리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미래 학교를 그리는 작업이 유행했다. 많은 시나리오는 공통되게 미래에는 학교가 사라지리라 예견한다. 학교 다니지 않아도 학습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자기주도’ 학습을 도울 수 있는, 다양한 기술이 생겨나기 때문이라는 근거에서이다. 기술이 마치 교육과 학습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끌 것처럼 말한다. 인류의 역사를 기술이 전부 결정해 왔다는 듯이 안이하게 예언하는데, 기술이 있다고 모든 기술이 쓰이는 건 아니란 사실은 그런 ‘기술주의’ 언사를 믿기 어렵게 만든다.

 

 

‘사고’

 

학생을 ‘사고’하게 만드는 일은 교육 행위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어사전에서 제시한 ‘사고’의 첫 번째 뜻은 ‘생각하고 궁리함’이다.
한국의 교육 현실은 사고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라, ‘계산( 計算)’하도록 훈련시킨다. 이 계산은 수학이나 과학에서 요구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예상하거나 고려하고’, 그 기준은 대부분 ‘값(이득)’인 계산이다. 한국 사회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점수를 받을지 ‘계산’하게 만들고, 입시에서 어떤 전략을 짜면 유리할지 계산하도록, 심지어 어떤 친구를 사귀고 가까이해야 이득이 될지를 계산하게 한다. 오늘의 나를 계산해서, 내일의 더 나은(이때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는 따져보아야 할 테지만) 내가 되도록 기획하고 계산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나도 값이 매겨진다. 지금과 내일의 내가 되는데 이득이었는지, 손해를 끼쳤는지를 따진다. 학교생활의 순간과 일상에서 이 같은 계산과 멀리 떨어진 친구들도 있을 테다. 하지만 12년의 학교생활을 마무리할 때 이 ‘계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학생은 없으리라.
아이들이 처음부터 스스로 계산했을 리는 없다. 사고 혹은 생각을 ‘계산’으로 착각하는 어른들의 세상에 물들었을 테다. 학교부터 사고(思考)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baram 님의 풀이

 

 

‘수포자’

 

‘수학을 포기한 자’의 준말이다. 흔히 수학 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작정한 학생을 가리킨다. 그러나 학생들은 수학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포기하기도 하지만, 수험 과목으로 수학을 선택하지 않기로 입시 전략을 세우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포기한다’고 해서 수학의 능력이나 흥미가 없다는 뜻이 되지는 않는다. 입시 제도와 문제 풀이 위주 수학 교육 때문에 생겨나는 ‘포기자’인 셈이다. 따라서 ‘잘못된 수학 교육으로 생기는 부수적인 희생자’(‘수부자’)라고 해야 더 적확할 것이다. 수능에서 수학을 선택해 만점 받는 수준의 학생도 수학을 싫어해 더 이상 공부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학생들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수포자’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능력자’ 취급한다. 기묘한 일이다.

 

 

‘입시’

 

본디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치는 시험을 일컬었지만, 학생 선발에 이제는 시험 외에 다른 여러 방법이 사용되므로 그 모든 과정이나 절차를 뜻하기도 한다. 진학 경쟁이 사실상 대학으로 올라가는 단계에 몰린 현실에서는 종종 대학입시와 같은 말인 듯이 쓰인다. 입시 논란이 주로 ‘인서울’ 또는 ‘스카이’ 수준에서 일어나므로, 그 개혁은 사실상 ‘상위권’ 진학 희망자들만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 특성화고등학교 학생이나 일반계 고등학교의 하위권 학생들은 입시 이야기에서 대체로 ‘투명 인간’ 취급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대학 입학 전형의 정시 전형에서 주로 사용되도록 정부가 시행하는 시험이다. 수시 전형의 ‘최저 기준’으로도 쓰이며, 대학생 사회에서 ‘실력의 층’을 구분하는 근거로도 쓰인다. 이런 쓰임새를 보면, 이름 그대로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을 갖췄는지 가늠하는 시험인 듯하다. 한편, 대학에서의 성취가 이 시험 성적과 거의 무관하다는 연구 결과도 많고, 이 시험 성적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자율적인 공부보다는 모의고사 훈련이라는 경험적 증거들도 많다. 이런 점을 보면 대학 수학 능력을 잰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기도 하다. 30년 이상 쓰여온 용어인데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아직도 고유명사인지 보통명사인지 모호한 채 남아 있다.

 

 

‘학교 폭력(학폭)’

 

낱말의 뜻으로만 보면 학교가 행사하는 폭력을 가리키는 용어인 듯하지만, 정책 용어로서는 학교 안팎에서 학생들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만을 가리킨다. 학교 자체가 폭력적인 현실이나 교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가리키는 용어는 따로 없다.

※ pphl님의 지적에 따른 수정

 

 

‘학점’

 

일반적으로는 대학에서 받는 점수를 일컬었었는데 ‘고교학점제’라는 제도가 들어오면서 고등학교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뜻은 다르다. 대학생에게는 이수한 과목에서 얻은 성적을 나타내지만, 고등학생에게는 이수한 과목의 주당 시간 수를 가리킨다. 졸업하기 위해 정해진 수준 이상으로 채워야 한다는 점에서나, 창의적이기보다 순종적이어야 탈 없이 나온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실력의 척도로서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어디에서도 크게 인정받지 못한다.

Source URL: https://21erick.org/column/147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