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교육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일까

by gyobasaNPO | 2025-01-22 12:10

“안다는 것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연결 지점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 앎에 이르는 길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이 기억이다. 기억을 스마트폰이나 구글 검색 엔진에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본문 중에서]

 

 

‘학습하기’와 ‘기억하기’는 다르다지만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은 전화번호를 거의 기억하지 않을뿐더러 메모하거나 기억해 둘 것이 있으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기억력도 근육처럼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디지털 세대의 기억력이 감퇴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영츠하이머’ 같은 신조어도 생겨났다.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도 기억력이 줄어드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때 암기교육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면서 스트레스 받았던 세대의 한풀이 같은 것이기도 했다. 열등생과 우등생의 차이가 시험 보기 전에 잊어버리느냐 보고 나서 잊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도 많은 것들이 기억에 남아 있는 덕분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는 게 사실이다.

 

암기교육을 비판하는 이들 중에는 기억이 곧 학습은 아니라면서 ‘친숙해지기(familiarize)’야말로 학습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말한다.1 새 차를 사면 판매인이 고객에게 “이 차의 매뉴얼과 친숙해지십시오”라고 말하지 “이 차의 매뉴얼을 외우십시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학교는 아이들에게 매뉴얼을 외우도록 강요한다고 비판한다. 운전은 몸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고, 차의 여러 기능들은 실제로 버튼을 눌러 작동시켜보면서 점점 익숙(친숙)해진다. 교과서 내용을 배우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보면서 배우는’ 과정을 거쳐 자동차의 작동법이 장기기억에 저장된다. 전형적인 ‘learning by doing’ 방식의 학습이다.

 

하지만 모든 학습을 ‘해보면서 배우는’ 방식으로 배우기는 어렵다. 키노쿠니학교에서 하듯이 집을 지어보면서 수학의 기초 원리를 배울 수도 있지만 체계적인 수학 학습은 쉽지 않다. 경험 중심의 학습과 체계적인 학습을 적절히 병행하는 것이 성공적인 학습 방법일 것이다. 체계적인 학습은 기억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 미적분을 배우려면 집합과 함수 등 수학의 기본 개념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역사도 기본적인 사실(史實)을 기억하고 있으면 역사의 흐름을 알기가 수월하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왕들의 연대기만 기억하고 있어도 조선시대 역사 공부에 꽤 도움이 되듯이.

 

또한 ‘친숙해지기’ 학습법에서도 기억은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매뉴얼을 암기할 필요는 없지만, 자동차의 다양한 기능을 기억해 둘 필요는 있다.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이것은 엑셀인가 브레이크인가’ 그러면 곤란한 노릇이다. 핸들 히터처럼 자주 쓰지 않는 기능은 기억을 뒤지느라 잠시 머뭇거릴 때가 있지만 매뉴얼을 찾아보는 건 더 번거로운 일이다. 매뉴얼과 친숙해진다는 것은 매뉴얼을 더 이상 들춰보지 않아도 될 만큼 기능을 숙지(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억력은 학습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요소이며 살아가는 데도 매우 요긴한 능력이다.

 

기억상실은 영화의 단골 소재인데, 우리의 자아 정체성이 기억에 의존하고 있고 관계 또한 기억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첫 키스만 50번째> 영화는 기억이 하루밖에 지속되지 않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성과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가 놀라지 않도록 자신이 누구와 결혼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본 정보를 담은 비디오를 만들어 아침마다 ‘학습’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침마다 관계의 시동을 다시 걸어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간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미래를 어떻게 열어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다.

 

이렇듯 우리는 기억에 의존해 살아간다. 기억을 잃은 덕분에 키스할 때마다 첫 키스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장점일지 모르지만, 새로운 관계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우리 뇌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들여 최대의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데, 기억은 뇌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데 필요한 기능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음으로써 그 사람에 대해 일일이 판단하는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는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될뿐더러 시간도 걸린다. 한 인지과학자는 “우리의 뇌가 생각하는 용도로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강요하는 학교와 교사를 아이들이 좋아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2

 

생각은 무작정 한다고 되는 게 아니며, 생각하는 일에도 도구가 필요하다. 삼단논법도 그런 도구의 일종이다. 그리고 추론을 할 수 있으려면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집을 짓는 데 건축자재가 필요하듯이 장기기억에 저장된 사실적 지식이 풍부할수록 사고의 빌드업이 수월하다. 역사적 사실들을 풍부하게 알고 있으면 역사의 맥락을 이해하기가 수월한 것처럼. 사실적 지식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도 있지만 장기기억에 저장되어 있으면 더 쉽게 활용할 수 있다. 사실적 지식이 축적되어 있으면 그것들이 다양한 맥락으로 연결되면서 통찰이 일어나고 새로운 지식이 만들어진다. 인터넷에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다 해도 저절로 맥락이 연결되어 내 지식이 되진 않는다.

 

 

앎과 기억은 연결되어 있다

 

기초지식 없이 추상적 지식이나 비판적 지식을 얻기는 힘들다. 기초학력이 중요한 이유다. 기억력은 기초학습에 무엇보다 필요한 역량이다. 기억하고 있는 데이터가 많을수록 새로운 맥락이 생겨나면서 재미가 붙고, 학습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아는 것이 적으면 재미를 느끼기도 어렵고 학습 가속도가 붙지 않아 쉽게 지친다. 학습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이유다. 눈덩이를 굴리면 점점 커지는 것처럼 기초적인 지식이 눈뭉치의 핵 역할을 하여 눈덩이를 점점 키운다. 기초지식이 있으면 한번 시동을 걸어 계속 달릴 수 있지만,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는 매번 시동부터 다시 걸어야 한다. 연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학습에서도 에너지의 효율성이 중요하다. 기억은 학습의 연비를 높여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기억에는 단기기억과 작업기억, 장기기억이 있다. 작업기억은 정보를 일시적으로(15~30초) 유지하면서 이해나 판단 같은 각종 인지작업을 수행하는 작업장 기능을 하는 인지 시스템으로3 ‘뇌 속의 메모지’라고도 불린다. 정보를 잠시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어서 단기기억의 일종이긴 하지만, 정보를 가공 없이 그대로 기억·유지하는 다른 단기기억과 달리 정보의 조작(작업)이 수반되는 기억이라는 점이 다르다. 작업기억의 용량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그다지 용량이 크지 않으므로 인지과부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학습의 요령이기도 하다.

 

암기에도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 오늘날 인지과학,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적 학습법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학교는 여전히 공부 방법은 알려주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든다. 부모들도 자녀에게 공부하라고만 다그친다. 공부 방법을 일러주는 책들 중 고전에 속하는 『공부의 비결』을 쓴 저자 역시 이런 문제의식에서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4 방법이 나쁘면 아무리 공부를 해도 체에 물 빠지듯 다 빠져나간다면서. 저자는 암기가 필요한 공부에 ‘카드 활용’을 적극 권하는데, 외국어 학습에 특히 효과적이지만 수학이나 역사 같은 분야에도 활용할 수 있다. 핵심 내용을 카드에 정리해서 적절한 간격을 두고 반복하는 것이 비결 아닌 비결이다. 인지과학에 근거해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전환될 수 있게 하는 매우 효율적인 복습 요령인 셈이다.

 

암기(暗記)와 기억(記憶)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5 우리는 영어 단어를 ‘암기’하지만 미국 아이들은 그냥 일상에서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 쓰임새를 ‘기억’한다. 애써 기억하기보다 저절로 기억되는 단어가 더 많을 것이다. 암기는 의도적으로 머릿속에 집어넣는 작업인 반면 기억은 자신도 모르게 뇌리 속에 각인되는 현상에 가깝다. 물론 잊지 않기 위해 애써 기억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도 암기한다기보다 기억을 되새기는 정도의 노력이다. 뭔가를 암기하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 단기기억을 반복함으로써 장기기억에 저장하는 수고를 애써 해야 한다. 구구단을 외울 때처럼.

 

구구단은 암기하는 것이 효율적이지만 피타고라스 정리 같은 것은 먼저 이해 과정이 필요하다. ‘직각삼각형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 제곱의 합과 같다’, 이 정리는 암기만 해서는 별 소용이 없는 지식이다. 증명 과정을 충분히 숙지하면 애써 암기하지 않아도 쉽게 기억되고, 수학의 다른 정리와도 연결된다. 역사적 사건 같은 것들도 이야기 형식을 띠고 있어 맥락을 이해하면 쉽게 기억된다. 맥락이 있는 것일수록, 흥미진진할수록 쉽게 기억된다. 단편적이고 분절된 정보는 다른 것들과 엮여 있지 않기 때문에 쉽게 잊혀진다. 전화번호처럼 맥락이 없는 단순 정보는 기억하기 어렵지만 숫자에 이야기를 덧입히면 기억하기가 수월해진다. 8255를 ‘빨리오오’로 기억하는 식이다. 이야기는 곧 맥락이다.

 

옛날 서당에서 천자문을 외우게 한 것은 꽤 좋은 학습법이었다. 4.4조 운율에 맞춰 몸을 흔들면서 외우다 보면 쉽게 기억되는 까닭은 운율이 맥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음악가들이 한 번 들은 곡을 채보할 수 있는 것도 멜로디가 곧 맥락이기 때문이다. 프로 바둑기사가 대국이 끝난 뒤 첫 수부터 마지막 수까지 수백 개의 바둑돌을 복기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음과 음, 돌과 돌이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맞물려 움직이는 한 점(축)이 나아가는 방향을 알면 저절로 다음 음, 다음 수가 떠오른다.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고수는 맞물려 움직이는 한 점의 움직임을 추적함으로써 전체를 안다.

 

안다는 것은 이처럼 이것과 저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연결 지점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아는 것이다. 역사를 아는 것,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앎에 이르면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를 통해 열을 깨우칠 수 있게 된다. 이 앎에 이르는 길 구비구비에서 등불 또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이 기억이다. 기억을 스마트폰이나 구글 검색 엔진에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1. 젠틀윈드, 학습과 기억은 어떻게 다른가, 《민들레》 통권 6호.
  2. 데니얼 T·윌링햄, 『왜 학생들은 학교를 좋아하지 않을까』, 문희경 옮김, 부키, 2011.
  3. 단기기억은 정보가 유지되는 시간의 관점, 작업기억은 수행되는 과제의 목표 달성 관점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4. 세바스티안 라이트너의 『공부의 비결』(들녘, 2016)은 4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도 유효한 학습법을 담고 있다.
  5. 암기(暗記)라는 한자어에는 ‘어두울 暗’ 자가 들어간다. 밝을 명(明)자를 쓴 ‘명기(明記)하다’라는 말은 ‘분명하게 기록해둔다’는 뜻으로, 종이 등 눈에 보이는 것에 잘 기록해두는 것이다. 반면, 암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머릿속에 기록해두는 것으로, 잊어버리면 확인할 길이 없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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