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국가교육위원회의 2년 ‘성과’에 실망하며 우리 교육의 앞날을 걱정한다

by gyobasaNPO | 2024-10-04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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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교육위원회가 2주년을 맞아 내놓은 보고를 비판한다. 발표 내용을 짚어보며, 내년 3월에 나올 ‘중장기 국가교육발전계획’에 기대할 게 없으리라 예견한다.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향 모색이 안이하고 형식적일 뿐 아니라 계획의 구상 자체가 미래를 향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 9월 25일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가 “출범 2주년 기념 대토론회”를 열었다. 두 개의 ‘발제’가 주축이었다. 첫 발제에서 국교위 위원장이 ‘2주년 성과 보고 및 미래 방향과 기본가치’를 이야기했고, 이어진 발제에서 「국가교육발전연구센터」 센터장이 ‘중장기 교육발전계획 주요 방향(안)’을 내놓았다.1

 

발제는 두 개 모두 실망스러웠다. 공허한 수사와 유행하는 ‘밈’들로 가득 채워졌고, 내용은 대체로 진부하고 임의적이었다. 논리나 근거가 부박하고, 특정한 ‘뜻’을 세워내는 체계 자체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만큼 ‘토론회’는 형식에 그쳤다. 내년 3월까지 확정해 내놓겠다는 국가교육 발전계획에 대해서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필(隨筆)’의 교육론으로 정당화한 교육 발전 방향

 

위원장 발제의 중요한 부분을 보자. 배포된 자료를 보면, ‘미래 교육의 방향’을 제안하기에 앞서, 짐작건대 그 제안을 위한 근거로, 네 가지를 정리하고 있다. 먼저 ‘미래 사회에 대한 예측과 전망’을 하면서 ‘제4차 산업혁명’, ‘기후 변화’, ‘저출생 고령화’를 나열하고, 두 번째로 ‘미래 교육의 인재상’이라며 ‘조화로운 삶’, ‘진취적인 삶’, ‘글로벌 리더십’을 제시한다. 세 번째로는 ‘중장기 교육계획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학령인구 감소와 교육 환경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을 기르도록 교육 내용 설계”, “학습자들이 각자가 지닌 개성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 “따뜻한 교실, 안전한 교실, 흥미가 넘치고 깨어있는 교실” 등이 그것이다. 마지막에는 ‘교육의 기본가치’를 언명하는데, ‘인성의 회복’, ‘도전정신의 함양’, ‘희망 사회 실현’을 꼽고 있다.

 

발제를 통해 교육 발전의 방향을 설정하는 논리와 근거를 제시할 요량이었을 듯한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수긍하게 되기보다 의문만 잔뜩 품게 된다. 이를테면, 교육을 조금 근본적으로 논의할라치면 으레 거론되는, 이른바 ‘인재상’을 어떻게 그렸는지 보자. 상(像)으로 열거한 세 항목을 이어보면, 글로벌 리더십을 갖추고 조화롭게 그리고 진취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그리는 듯하다. 왜 이런 사람이 미래 교육의 산물이어야 하는지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 인재상을 정당화하는 교육론 또는 철학이 어떤 것인지 헤아려 볼 길도 없다. 헤아려 보려 하면 바로 많은 의문에 부딪게 된다.

 

우선, 왜 ‘인간상’이 아닌 ‘인재상’인가? 교육은 ‘인간 됨’보다 ‘인재’에 관한 것인가? 교육에서 사람은 ‘재목(材木)’으로만 보아야 하는가? 재목으로서의 가치가 ‘사람 됨’의 전부인가? 인재상이란 언표에 대해 눈감는다 하더라도 의문은 이어진다. 인재상의 요소로 꼽은 세 항목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들은 ‘상’을 묘사하는 것들도 아니다. 모종의 ‘삶’과 ‘리더십’을 형용하고 있다. 이런 서술의 어색함은 그 바탕인 사고 자체가 어설프단 방증이겠지만, 이 점을 일단 접어두고 위원장이 열거한 세 항목을 더 들여다보자. 먼저 삶의 조건에 대해서, ‘조화로운 삶’은 어떤 삶이며 ‘진취적인 삶’은 또 어떤 삶인가? 개념으로 읽을 때, ‘조화’와 ‘진취’는 그것에 어떤 맥락을 부여하지 않으면 특정한 가치를 함축하지 못한다. 무조건의 조화, 무조건의 진취는, 그것이 삶의 양상을 기술한다면, 심지(心志) 없는 삶의 행로를 가리킬 뿐이다. 게다가 ‘글로벌 리더십’은 또 어떤가? 어떤 ‘리딩(leading)’이 전제된 리더십인가? 그것은 ‘로컬’ 리더십’과 다른 덕목인 듯한데, 어떻게 특별한가?

 

이런 기초적인 질문을 덮고 넘어간다 해도 우리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에 부닥뜨리게 된다. 위원장이 제시한 ‘그림’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조화로운 삶, 진취적인 삶, 글로벌 리더십이라는 세 항목은 함께 어우러져 어떤 ‘인재상’을 구성하는가? 그런 인재상은 어떤 바탕에서 무슨 근거로 도출했는가? 교육이 그런 상을 추구해야 할 당위는 무엇인가? 하다못해 그런 인재가 어떤 쓸모를 지닌다는 실증적인 증거라도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다 보면, 위원장의 주장은 임의적이라고밖에 달리 이해할 길이 없게 된다. 국가교육의 방향을 ‘수필(隨筆)’의 논리로 제시했다고밖에 달리 볼 길이 없는데, 그렇게 끌어낸 ‘방향’을 어떻게 수긍할 수 있겠는가.

 

 

공허한 수사와 유행의 ‘밈’들로 가득한 발제

 

이와 같은 문제는 인재상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미래 사회에 대해서 예측하고 전망한 부분에서부터 인재상을 설정하고, 중장기 교육계획이 왜 필요하고 중요한지 이유를 들며 교육의 기본가치를 제안한 데 이르기까지, 어느 한 부분 이의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데가 없다.

 

‘미래 교육의 방향’을 잡기 위해 출발점으로 삼은 논지, 즉 ‘미래 사회에 대한 예측과 전망’에 대해서 좀 더 보자. 무엇보다도 먼저, 왜 미래에 대해 예측하고 전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지부터 물어야 할 터이다. 교육 개혁이니 계획이니 하는 정책 논의에서 ‘미래 예측과 전망’을 앞세우는 형식이 이제는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 틀거지가 자명하거나 보편타당하냐고 묻는 것이다. 그저 해오던 대로 안이하게 방향을 찾는 위원장의 행태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교육의 방향을 사회의 미래 예측과 전망에 조응시켜야 한다는 ‘상식’은, 사실, 시류를 타고 있는 특정 교육관을 무턱대고 좇는 타성의 산물에 불과하다. 발제에 함축된, 위원장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타성적인 교육관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교육을 옹색하게 규정한다. 첫째, 교육을 전적으로 ‘적응’에 대한 것으로 좁혀 버린다. 교육은 말하자면 ‘예측과 전망’에 꿰맞춰야 하는 것일 뿐인 게 된다. 둘째, 교육받는 사람을 암암리에 ‘쓸모’의 요소로만 본다. 교육받는 사람을 예측과 전망의 결과에 대처할 수단이거나 재료(‘인재’)로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교육관으로는 미래 예측과 전망에 ‘관계없는’ 교육을 상상하지 못한다. 교육이 사회에 대한 예측과 전망을 초월하는(그것에 구애되지 않는) 가치를 지닐 가능성을 몰각하는 것이다. 과연 ‘적응’과 ‘쓸모’를 넘어 더 보편적이고 근원적으로 추구할 가치가 교육에 없는가? 그럴 리가 없다. 국교위에 그 가치를 볼 안목이 없을 뿐이다. 국가교육 발전계획의 방향을 찾으면서, 국교위는 과연 ‘시쳇말’(‘밈’)을 옮겨와 문서를 꾸미는 것 외에 달리 무슨 일을 했는지 의구하지 않을 수 없다.

 

미래 사회를 예측하고 전망한 결과라 정리하며 국교위 위원장이 열거한 밈들을 보자. ‘제4차 산업혁명’, ‘기후 변화’, ‘저출생 고령화’ 등 세 개다. ‘미래 교육’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으레 듣게 되는 유행어들이다. 인기가 인격을 보장하지 못하듯, 유행이 타당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제4차 산업혁명, 기후 변화, 저출생 고령화 등을 교육에 연루시켜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교육은 미래에 효력을 보이는 일이고, 미래로 가는 과정인 ‘현재’에서 산업혁명이니 기후와 인구 변화니 하는 사회 문제가 부각해 있으므로, 교육이 곧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들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연상은 먼 옛날 신화로 세계를 이해했던 역사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순진하고 미개하다.

 

교육이 사회 문제 해결책이라 여기는 ‘순진 미개’한 생각은 즉흥적이고 피상적이다. 교육을, ‘사회 문제 해결책’이 아니라, ‘인격 함양의 과업’이라 가정하고 생각해 보자. 그런 교육이 진정(眞正)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문제’들도 적게 또는 완화되어 나타날 것이다. 제대로 된 교육이 대대로 학생의 인격을 바르게 함양한다면, 그런 사회에서 구성원의 행동거지는 순하고 사회적 응집도 견고할 테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는 으레 다른 사회보다 선진적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을 겉만 보면, 교육과 사회 발전이 나란히 가는 듯 보인다. 자칫 교육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보게 된다. 표면의 상관(相關)을 성급히 인과관계로 단정해 버리기 쉽다. 이런 오류의 인식이 교육을 사회 문제 해결 수단으로 삼는 정책들을 낳고 있다.

 

위에서 ‘선진적’이라 상정한 사회에서 이루어진 교육, 이를테면 ‘인격 함양 교육’은 어떤 교육일까? ‘사회 문제 해결’이나 ‘미래’의 쓸모를 겨냥하여 내용과 방법을 선정해 ‘공학적으로’ 조직 운영하는, 그런 ‘프로그램’과 같은 것일까? 지금 국교위는 바로 그런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지만, 적어도 인류 역사에서 교육의 정형(正形)을 찾아본다면, 그런 모습은 아니다. 교육은 대체로 전통에 따라 이루어져 왔다. 역사적이며 사회적으로 축적된 교육 지혜가 사회 복리(福利)에도 바탕이 되었을 뿐이다. 교육이 모든 것을 다 했다는 뜻이 아니다. 무수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복된 사회를 이루는 데 교육도 한몫했으리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역사 사회적 현상을 두고, 국교위는 말하자면 무모하게 ‘교육→국가 발전’이란 인과관계를 긋고 그것에 근거한 정책 공정까지 지어보려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미래 사회를 예측하고 전망해서 교육을 특정한 공법으로 조작한다면, ‘계획’의 그림대로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다. 교육의 힘을 과대평가하여, 교육만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있기까지 하다. 교육으로 개인의 역량을 키워 국가를 발전시킨다는 이야기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런 경제적 또는 발전론적 논변들은 사실 매우 엉성하다. 그렇지만 그 엉성함이 상식적인 수긍을 낳고 있기에 정치적(대중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를테면 국교위 위원장도 “중장기교육 계획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열거하면서,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을 기르도록 교육 내용 설계”라는 항목을 삽입하고 있다. 미래 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파악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키우는 데 적합한 교육 내용까지 밝혀내서 유효한 ‘교육 공정’을 설계할 수 있으리라 전제하고 있다. 근거 없는 전제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교육과 사회의 관련을 ‘순진 미개’하게 인식한 까닭으로 무심코 내걸게 되는 전제일 뿐이다. 이런 상식적인(그러나 지각없는) 행태는 물론 국교위만 범하고 있는 게 아니다. 국교위는 ‘세계적인 추세’를 좇고 있을 따름이다. OECD 같은 세계 기구에서 쏟아내는 언설이나 그런 기구의 관념을 지배하는 ‘경제학적’ 시각을 추종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국교위 작업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교육 전문연구자들의 뒷받침도 허술

 

‘교육 전문연구자’들이 모여 계획의 방향과 대안을 다듬는다는 ‘국가교육발전연구센터’(연구센터)의 작업 결과도 의구심을 줄여주지 못한다. 센터장의 발제도 위원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문제들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의 발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Ⅰ)에서 ‘주요 방향(안) 도출의 배경’을 정리하고, 뒤(Ⅱ)에서 ‘중장기 국가교육발전계획 주요 방향(안)’을 제시한다. 목차만 보면 ‘배경’이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도록 이끄는지 보여주려는 구도인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런 설계는 실제 발표에서 구현되지 않았다.

 

먼저, ‘방향 도출의 배경’에 대해서, 네 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다. ‘미래 사회의 전망’, ‘우리 교육의 성과와 한계’, ‘교육의 변화와 국제사회의 대응’, ‘교육 개혁의 방향’이 그것들이다. 당장 드는 의문은 ‘왜 이 네 항목인가’이다. 교육 발전계획의 방향을 ‘도출’하기 위하여 살펴야 할 사항으로 이 네 항목은 필수적인가? 또, 네 항목은 모아져서 어떤 도출의 바탕을 이루는가? 논리적으로 또는 실증적으로, 네 개의 항목에서 정리한 ‘배경 요인’은 뒤에 제안하는 ‘방향’으로 당연하게 귀결되는가? 이런 일차적인 질문에 대해, 센터장의 발표를 옹호하는 대답을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만큼 발표는 논리와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고, 그런 발표로 요약된 연구센터의 작업도 부실하리라 짐작하게 된다.

 

센터장의 발표를 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고, 더 근본적으로 연구센터의 작업 자체가 부실하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조금 확인해 보자. 먼저, 미래 사회를 전망하는 데서는 위원장의 발표와 다를 바 없다. 이미 지적한 대로, 위원장의 발표에서 확인했던 편협한(‘적응’과 ‘쓸모’를 근간으로 하는) 교육관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다른 세 항목에 대해서는, 대부분, 나름의 ‘조사 분석 결과’를 토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정당화 논리를 태연하게 채택한 것 자체가 사실 무척 놀랍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센터장은 ‘주요 방향’이 도출된 된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해, 미래 사회를 전망하는 항목 외에, ‘우리 교육의 성과와 한계’, ‘교육의 변화와 국제사회의 대응’, ‘교육 개혁의 방향’ 등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이때 정리는 대부분 의견조사 결과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조사란, ‘대국민 교육현안 인식조사’라는 이름으로, 연구센터 주관 아래 ‘여론조사 전문기관’에 맡겨 이루어진 것이다. ‘성인 국민’ 5,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조사였다고 한다. 이런 조사 결과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서 중장기 국가교육 발전계획의 주요 방향을 결정해도 무방한가? 조사 결과 집약된 의견은 과연 ‘백년대계’의 지침이 될 만한가?

 

거듭 이야기하건대, 미래 사회의 전망이니 우리 교육의 성과와 한계니 하는 등의 네 개 항목을 논급하는 것으로 ‘주요 방향’을 ‘도출’하는 작업이 충분하다고 여긴, 센터장의 발제 논리는 허술할 뿐 아니라 그 내용들도 다분히 임의적이다. 더 나아가서, 그 네 항목에 대한 분석 또는 탐색을 사실상 ‘대국민 인식 조사’ 결과를 편집해 나열하는 것으로 가름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 경악하게 될 뿐이다. ‘전문적인’ 연구로 교육 발전의 계획 작업을 지원하기로 된 연구센터에서, 계획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가장 애쓴 작업이 ‘성인 국민’의 의견을 묻는 조사였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 조사 자체도 자의적으로 이루어졌다고밖에 볼 수 없을 만큼 허술하다는 사실에 놀람은 배가한다.2

 

‘우리 교육의 성과와 한계’라고 이름한 항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범위와 표준을 설정해야 할 터이다. 무턱대고 성과와 한계를 논의할 수는 없다. 교육의 성과와 한계를 어떤 측면에서 어떤 기준을 적용해 가늠할지, 사전에 틀을 잡아야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발표 내용을 보자. 예컨대, 첫 조사 항목인 “우리나라 교육이 이룩한 성과”를 보면, 의견을 묻기 위해 일곱 개의 선택지를 주었다. “의무교육 보장을 통한 균등한 교육 기회 제공, 교육의 양적 확대와 대중화로 국가경쟁력 향상, 국제적 수준의 우수한 학업 성취도, 정치•경제•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되는 인재 양성, 국가 책임하에 공교육 체제 정비 및 질 제고, 시민의식을 함양한 민주시민의 양성, 계층간 격차 완화 및 사회 이동에 기여” 등이다. 왜 이런 선택지인가? 우리 교육의 성과와 한계를 알아보려고 할 때 이런 선택지로 의견을 물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짐작할 길이 없다.

 

선택지 하나하나가 과연 타당한 진술인지부터 의심스럽다. ‘의무교육 보장’은 이루어지기는 했는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정말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했는가? ‘균등한 교육 기회’란 어떤 상태인가? 뒤에 이어지는 “우리나라 교육이 직면한 한계”라는 조사 항목에는 “지역•소득간 교육격차 심화”라는 선택지가 있는데, 여기에서의 ‘격차’는 균등과 관계없는가? ‘교육의 양적 확대와 대중화’는 ‘국가경쟁력 향상’을 낳기 마련인가? 이때 국가경쟁력은 어떤 것인가? 교육력인가, 국방력인가, 경제력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그 모두인가? 이해하려고 들수록 미궁으로 빠져들기만 한다.

 

낱낱 선택지의 의미만 문제가 아니다. 일곱 개 선택지를 서로 비교해 보자. 어느 하나 서로 겹치지 않는 게 없다. ‘균등한 교육 기회’는 ‘국가경쟁력’과 무관할 리 없고, 국가경쟁력은 또 ‘우수한 학업 성취도’와 무관할 리 없다. ‘인재 양성’이란 성과는 또 어떤가? 앞의 모두와 중첩되지 않겠는가? 원칙상, 의견조사의 선택지는 서로 중복되지 않으면서 그 총체는 응답자가 의견을 표시할 전집을 이루도록 만들어야 한다. 응답자가 하나의 선택지를 고름으로써 다른 선택지를 배제한 의미가 분명하게 살도록 해야 할 테고, 선택지들의 조합은 조사 질문에 대한 의견 표시가 충분하도록 포괄적이어야 한다. 센터장의 발표는 이런 기초적인 요건마저 무시한 조사 결과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문제는, 이미 지적했듯이, 그렇게 검토한 ‘배경’이 어떤 논리로 뒤에 제안한 ‘방향’을 정당화하는지 밝혀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배경에 대해 앞에 이야기하고, 그 배경에 근거해 방향을 잡았다는 듯한 목차만 구성해 언어를 뿌렸을 뿐, 앞뒤의 관계에 대해서는 뚜렷이 입증하는 바가 없다. 발제 전체를 임의적이고 형식적이라고 혹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는 건 교육의 앞날에 대한 걱정뿐

 

‘대토론회’의 주축인 두 개의 발제 모두 형식적이고 임의적이라 평가될 만한데도, 교육 발전계획의 ‘주요 방향(안)’은 꽤 상세하게 제안하였다. 심지어 방향에 따른 과제들까지(‘12+1’ 개나) 제법 구체적으로 내놓았다. 방향이나 과제를 구체화할 근거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듯한데 그것들이 구체화되어 나왔으니, 말하자면 기이한 일이다.

 

짐작이 가는 바는 하나뿐이다. 국교위는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작업을 순전하고 깊이 있게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계획에 집어넣을 ‘과제’들을 논의했던 듯하다. 위원장이 이야기한 ‘미래 교육의 방향과 기본가치’나 연구센터장이 이야기한 ‘방향 도출의 배경’은 형식을 갖추기 위해 개인적으로 수필 쓰듯 구성하여 앞부분에 붙였을 뿐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이번 발표를 앞두고 잡음이 여러 번 일었다. 국교위가 이런저런 ‘개혁안’을 채택하리라는 기사들이 종종 삐져나왔고, 그때마다 국교위는 발뺌했다. 전문위원회 같은 밑 단위에서 검토하고 있을 뿐 국교위 자체가 논의하거나 결정한 사항이 아니라는 얘기만 반복했다. 국교위 해명대로 기사 하나하나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사에 실린 대안들을 국교위 어디에선가 검토했던 건 사실이다. 그 가운데 일부가 유출되어 보도됐다. 유출되었다는 사실은 국교위도 시인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첫째, 국교위는 정연한 절차를 따라 계획을 세워 오지 않았다. 교육 발전계획의 방향을 먼저 신중하게 모색하고, 그렇게 찾은 방향을 지향해 계획을 구체화해 오지 않았다. 국교위는 당장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논란이나 쟁점들에 눈이 팔려있고, 그 와중에서 나름의 해결책을 찾는 데 바쁜 게 틀림없다. 이 작업은 아직 밖으로 발표해도 될 만큼 진척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논의 내용들 가운데 일부가 간간이 언론에 유출되었다. 그렇게 보도된 내용들이 확정된 것은 아니므로, ‘최종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국교위 해명은 거짓말이 아니긴 하다. 그렇다 해도, 그런 구체적인 대안 논의가 ‘방향’에 대한 숙의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위원장과 연구센터장의 발표를 곧이 믿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들은 심도 있는 연구와 검토를 거쳐 방향을 설정하였으며, 그 방향에 맞춘 계획 구체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듯이 발표했지만, 믿기 어렵다는 뜻이다. 위원장과 센터장의 발제는 그저 형식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여겨진다.

 

둘째, 내년 3월에 발표된다는 계획에는 필경 현재 국교위 내부에서 논의하고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일부가 채택되어 포함될 것이다. 전문위원회에서건 특별위원회에서건, 아니면 연구센터에서건, 현재 어떤 내용을 검토하고 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렇지만 현재 검토되고 있는 내용이 앞으로 확정될 계획의 범위와 수준을 결정하리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거듭 말하건대, 국교위는 멀리 보며 방향을 잡아 계획을 마련하고 있지 않다. 결국 국교위는 눈앞의 교육 논란에서 출발해, 여기의 이견들을 절충해 낸 계획을 반년 후에 내놓을 것이다. 그런 계획은 조삼모사나 조령모개라 비아냥거려졌던 과거 계획 또는 개혁과 다를 데가 없을 터이다. 앞으로 의견 수렴을 거쳐 다듬는다지만, 그 과정이 최종으로 나올 계획의 성질을 크게 바꾸지 못할 것이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정쟁이나 즉효 대책에 매달리는 교육정책의 한계를 극복하라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번 발표는 국교위가 여전히 관성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동안 유출되었던 대안들에서 일단을 볼 수 있듯이, 눈앞의 싸움에 매몰해 있다.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껍데기 ‘브랜드’ 경쟁과 흡사한 모습이다. 대안의 ‘품질’은 개량함 없이, 오직 브랜드의 선명성을 부각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젠 진부해진 ‘진보’와 ‘보수’의 간판 대안을 그대로 고집한 채, 오직 ‘시장 점유율’(‘아스팔트 지지’)만 노리며 다투는 형색이다.

 

근시안적인 편협함이나 파당적인 갈등을 해소하도록 만든 국가교육위원회가 여전히 근시의 다툼 소용돌이에 무심히 ‘안주’하고 있다. ‘백년대계’를 지으려고 했다면 고질적인 싸움 자체를 해소할 근원적이며 범사회적인 숙의를 시도했어야 할 것이다. ‘대국민 교육현안 인식조사’ 같이 임의로 구성한 의견 수렴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관과 학교관을 정립하기 위한 진정한 민주적 숙의가 필요했다. 이런 당위에 대한 감지는 이번 발표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앞으로 어떤 일을 더 꾸민대도,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어 보인다. 남는 건 걱정뿐이다.

 

각주

  1. ‘국가교육발전연구센터’는 한국교육개발원에 설치된 연구조직으로, 국교위의 ‘계획’ 작업을 전문적으로 지원하도록 지정되어 있다.
  2. 교육정책의 방향을 잡거나 대안을 결정할 때 흔히 ‘국민 의견’을 수렴한다. 적어도 민주적이라는 점에서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수렴’의 내막을 보면, 그 과정은 결코 민주적이지도 않고 타당하게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우선, 의견을 듣는다면서 의견을 표시할 선택지는 조사 주체(정부나 정부를 대행하는 정책연구자)가 결정해서 내민다. 국민은 주어진 선택지의 얼개와 범위 안에서만 의견을 낼 수 있다. 말하자면 사전에 구획된 틀 안에서만 이야기하도록 국민은 갇혀있게 된다. 이런 조사에서 국민 의견이 총체적으로 수렴될 리 만무하다. 더 나아가서, 흔히 이루어지는 의견 수렴은 이중적인 취약점을 안고 있다. 일차적으로, 조사를 시행하는 정부나 연구자들의 안목이 미흡해서 조사의 내용과 질을 제약한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그 안목은 선택지 구성으로 드러나는데, 저열한 안목으로(또는 특정한 의도를 담고) 만든 선택지 자체가 충실한 의견 수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더 근본적인 약점은, 국민 의견이 정책에 대한 궁극적인 근거가 되지 못하리라는 데 있다. 우선, 의견을 내는 국민이 모두 의견을 낼 사안에 대해 합당한 양식(良識)을 갖추기는 어렵다. 그래서 정책 과정에는 ‘전문적인’ 연구와 논의 절차를 둔다. 이 절차를 이용해서 범국민적인 의견의 한계를 보완해야 하지만, 그 일은 종종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정책 과정은 이해 충돌로 헝클어지고, 국민 의견 수렴은 다수 집단의 이기적인 결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타락한다. 의견 수렴 과정이 형식에 그치는 것이다.

Source URL: https://21erick.org/column/13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