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톺아보기② – ‘과외’에서 ‘사교육’ 이야기로, 결국 ‘돈’ 이야기로

by gyobasaNPO | 2024-04-04 10:08

사교육 이야기 둘째 토막이다. 2000년을 전후해 과외/사교육 이야기가 뒤집히는 과정을 정리한다. 문제 현상을 ‘과외’로 지칭하다 ‘사교육’이란 말로 바꾸어 가리키게 되는 경위와, 문제의 핵심이 과외의 ‘성질’에 있지 않고 ‘비용 부담’이 과중한 데 있다고 초점을 바꾸게 되는 경위를 살펴본다.

 

 

둘째 이야기를 시작하며

 

지난 첫 글(‘사교육은 어떤 교육인가?’)에서 사교육(과외)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의 역사 속에서 왜 ‘사교육’이 문제인지 규정하는 논점 자체가 뒤집혔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사교육이라고 일컬어지는 문제 현상은 당초 ‘과외’라고 지칭됐다. 과외는 일제 식민지기에도 일었고,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심각한 교육 문제로 여겨졌다. 이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의 역사가 줄곧 이어져 온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이다. 그런데 이 역사에서 다뤄진 이른바 사교육 문제는 줄곧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정책이 겨냥한 문제 자체에 혼선이 있었다. 이 점을 제기한 것이 첫 번째 글의 요점이었다.

 

과외는 1980년대까지도 바람직하지 못한 교습행태라 비판됐다. 1980년 ‘7.30 교육개혁’에서 ‘과외 근절’의 기치를 들었던 사실이 그런 인식을 잘 드러낸다. 과외는 ‘망국병’이었고, 척결되어야 할 ‘교육의 악’이었다. 이와 같은 강경 입장이 내내 유지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강경하게 과외를 금지했던 대책들이 효력을 보지 못하면서, 1970년대에는 ‘현실론’이 부상하기도 했다. 과외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어 보이니 어느 정도 용인해 주면서 제어하자는 제안들이 힘을 얻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추세는 7.30 개혁으로 단숨에 제압되었고, 전통적인 ‘과외 망국론’(금지론)은 1980년대를 관통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정리하면서, 첫째 글은 반전을 예시했다. 이전까지 온당치 않다고 규정했던 과외를 이제는 학교가 나서서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신문 기사 하나를 글 끄트머리에 덧붙였었다. 이전에 과외는 학교 안팎 어디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게 막아야 할 비교육적 행태로 여겨졌었지만, 이제는 학교가 적극적으로 충족시켜 주어야 할 ‘교육적 수요’로 둔갑했다고 시사했다.

 

여기 두 번째 글에서는, 과외에 대한 정책적 인식이 그렇게 뒤집히게 되는 경위를 살핀다. 이 작업은, 그렇게 뒤집힌 결과로, ‘사교육 대책’이 학교 교육을 어디로 몰아가게 되는지 이야기하기 위한 전조가 될 것이다.

 

 

‘과외 망국론’의 이완

 

첫째 글에서 인용한 신문 기사가 보여주었듯이, 이제는 학교가 과외(입시 준비 교육)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며, 정부나 사회에서도 학교가 그렇게 변해 가도록 종용하고 지원한다. 거듭 말하건대, 과외를 해선 안 될 짓으로 규정하며 망국병이라고까지 일컫던 1980년대까지의 사회 인식이나 정책 담론은 오늘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생각의 전도(顚倒)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넘어가며 일어난 새로운 ‘이야기’에 관련되어 있으며, 이 이야기 생성 과정에서 ‘사교육’이라는 정책 용어도 생겨나 ‘과외’라는 말을 대체하게 됐다.

 

이야기는 다시 1980년의 ‘7.30 교육개혁’에서 시작해야 하겠다. 이때의 ‘과열 과외 해소’ 대책은 매우 드센 것이었다. 정부가 밀어붙이는 일에 시민들이 반기를 들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전제적 상황에서나 시도될 수 있었던 정책이었다. 당시 내걸었던 ‘과외 근절’이란 구호나 ‘과외 전면 금지’라는 대책은 그 표방 자체의 극단성만큼이나 ‘절대적으로’ 실현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정책의 합리적 실효보다는 ‘으름장’ 효과에 기대는 것이었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당시 포고에 따라 과외는 삼엄하게 단속됐고, 적발되었을 때 처벌도 엄했다. 단속을 관장했던 ‘사회정화위원회’는 “과외 학생에 대해서 … 입학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하고] …[대학에 진학했다면 사후에라도] 합격 취소 또는 제적 처분”한다고까지 지침을 내렸다. 그렇지만 위압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과외의 ‘뿌리’는 질기게 버틸 마련이었다. ‘고액 비밀과외’니 ‘몰래바이트’니 하는 변종 과외들이 움텄다. 자녀를 잘 키우려는 소명감에서 학부모들은 고액을 들여서라도 비밀과외를 구매하는 위험을 무릅썼으며, 아르바이트에 생존이 걸린 대학생들도 몰래라도 할 수밖에 없는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길 외에 달리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과외 전면 금지 정책의 구속력은 결국 이완되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은 대학생의 ‘입주 과외교사’를 허용하고, 이어서 중고 학생들의 방학 중 학원 수강을 허용하는 등, 1980년대 후반부터 과외 금지 정책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과외에 대해 이전까지와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했을 테다. 과외를 무작정 막아야 할 작태라고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과외도 쓸 만한 데가 있고 그래서 허용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이야기해 가야 했을 터이다.

 

이런 말 바꿈의 빌미는 7.30 개혁으로 새롭게 파생된 고액 비밀과외가 제공했다. 과외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자 그만큼 큰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과외는 지하로 숨어들면서 ‘천문학적’ 고가의 상품이 되었다. 극단의 고가 상품이어도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자’들은 당연히 ‘부유층’이었고, 상품이 비싸고 희귀했던 만큼 그것의 효력은 상대적으로 매우 크리라고 인식되었다. 과외 금지 대책이 가진 자에게는 기회를 주면서 없는 사람들에게서만 기회를 빼앗아 간 꼴이 되었다. 자연히 ‘형평’ 문제가 제기됐다. 요즘 같았으면 ‘공정’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결국, 대책의 형평을 회복하기 위한 땜질이 필요해지자, 정부는 학원을 우군에 편입시켰다. 고액 비밀과외가 아닌, 비용이 그다지 크게 들어가지 않는 학원 수강 정도는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땜질했다. 학원을 포용하면서, 과외에 대한 날 선 비판의 이야기도 두루뭉술해지기 시작했다.

 

 

‘5.31 교육개혁’의 ‘수요자 중심’ 턴

 

과외 금지 대책이 1980년대의 전제적 위세를 잃어가고 또 과외 이야기가 바뀌어 가는 데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 진전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은 군부정권을 정리해 내며 1993년에는 ‘문민’이라는 이름의 정부가 들어설 수 있게 길을 냈다. 이 시기 우리 사회가 충분히 민주적이었다고 평가할 수는 물론 없겠지만, 정부 정책의 일방적이고도 위압적인 경향은 뚜렷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런 ‘민주화’ 추세는 정부가 내거는 정책 구호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3년에 출범하며, 문민정부는 교육개혁을 최우선의 국정과제로 삼았다. 1994년 2월에는 ‘교육개혁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하고, 이후 4년에 걸쳐, 유아교육에서 대학교육과 성인교육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교육과정에서 교육법과 재정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 개혁을 터뜨렸다. 이때의 일을 두고 흔히 역사상 전무후무했다고들 평가하는데, 그런 얘기가 나올 만큼 이례적이었다. ‘5.31 교육개혁’으로 불리는 이때 개혁의 간판 슬로건은 “‘열린교육사회, 평생학습사회’ 건설”이었지만, 개혁안들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은 그 추상적인 ‘비전’보다는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는 실천적인 구호였다.1

 

교육개혁위원회는 “교육적 종합처방”으로 “신교육체제를 구상”했으며, “신교육체제의 기본 특징”으로 가장 먼저 “학습자 중심 교육”을 꼽았다. 이때 학습자 중심 교육이란 “교육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을 우위에 두는 것을 뜻했다. “교육공급자인 학교 및 교원과 교육행정기관의 편의중심 교육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구호였다. 이런 표방은 세계적으로 번지던 ‘신자유주의’의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당시 과외(사교육비) 문제를 둘러싼 개혁 논의는 “국민의 고통”(즉, 수요자의 고통)을 줄이는 데로 초점을 모았다. “학교 교육이 부실화되어… 학부모[가] 사교육비 고통을 받고 있다”는 믿음에서, “사교육비 대책은… 모든 교육적 요구가 학교 내에서 충족”될 때 비로소 완결된다고 판단했다.

 

 

‘과외’ 내러티브에서 ‘비용’ 내러티브로

 

과외 이야기는 5.31 개혁에 와서 완전히 뒤집힌 것을 볼 수 있다. 7.30 교육개혁을 정당화했던 과외 내러티브는 근원적으로 폐기되었다. 거듭 얘기해 왔듯이, 1980년 7.30 개혁에서는 과외를 ‘근절해야 할 교육의 악’으로 규정했다. 과외는 ‘인격 형성’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학교 교육을 훼방하며 ‘입시 위주 주입식’으로 흐르게 하고, 학생들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심성도 이기적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15년이 흘러 5.31 개혁에 이르러 과외는 학교가 적극적으로 떠맡아야 할 책임이 되었다. 과외 수요도 ‘교육적 요구’인 만큼 학교가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 되었다.

 

5.31 교육개혁에서 과외 문제에 접근한 논리는 세 개의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① 교육은 ‘수요자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바, 학교는 학부모와 학생(국민)이 원하는 ‘교육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 ② 현재 교육은 ‘국민의 고통’이며 그 고통의 핵심은 ‘사교육비 부담’에 있다. ③ 사교육은 학부모의 교육 수요가 공교육에서 충족되지 않아 생기는 것으로, 학교는 ‘국민의 고통’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과외 문제에 관한 한, 5.31 개혁은 이전까지 정책과 담론을 지배했던 논리를 뿌리째 뽑아 버렸다. 5.31 개혁에 와서, 우선, 과외는 학교 과정(課程)과 대등한 ‘시장의 상품’이 되었다. 그것들의 가치는 오직 ‘수요자 중심’으로 결정되도록, 둘 다 똑같이 시장에 맡겨져서 마땅한 것이 되었다. 나아가서, 과외 수요가 있다면 그것은 학교가 나서서 충족시켜야 할 과제가 되었다. 과거에 전면 금지되어야 할 행태로 규정됐던 과외는 학교의 정규 과정과 동질적인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학교의 사명은 입시 위주의 과외를 포함해서 “모든 교육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으로 새롭게 규정되었다.

 

이와 더불어, 5.31 개혁에서는 정부가 해결을 도모해야 할 교육 문제의 우선순위도 뒤바꾸었다. 앞에서 정리했듯이, 5.31 교육개혁에서는 과외 문제의 핵심이 ‘비용 부담’이 과중한 데 있다고 보았다. 이 점을 ‘사교육비 부담’이란 용어로 공식화했고, 그 부담을 우리 사회를 찌르고 있는 ‘교육 고통’의 원천으로 규정했다. 이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 교육 정책의 우선 과제로 부상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주지하다시피, ‘사교육비 경감’은 2000년대 교육 정책을 관통하는 구호가 되었다. 그리고 비용 부담을 줄이는 데 주력하는 대책들로 말미암아 학교 교육의 성질이 어떻게 변질되는지는 크게 신경 쓸 사안에 들지 못했다. 입시 위주 과외가 전인교육을 해친다고 지적하던 이전의 기억들도 사라져 갔다. 지금 학교에서는 과거에 과외라는 범주로 분류됐던(그래서 금지했던) 프로그램들이 정규 과정인 양 돌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가 학교 교육의 성질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짚어보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사교육’은 ‘사교육비’의 원인이어서 문제라고

 

교육이나 정책의 이야기가 물구나무서듯 바뀌는 과정에서는 ‘과외’라는 말이 퇴색하고 ‘사교육’이라는 조어가 공식화되었는데, 이 변화 역시 정부가 유행에 따르듯 ‘생각 없이’ 초래한 것이다. 정부 정책 문서에서 사교육이란 말은 1990년대 들어 빈번하게 쓰이기 시작했는데, 그 경위에는 개념적인 혼선이 있다. 과외를 대체할 만한 뜻으로 일상에서 사교육이란 단어를 쓰던 예는 1990년대 이전에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학문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사교육이란 말은 ‘사교육비’라는 말에서 ‘비’를 떼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단서는 1991년에 있었던 사교육비 논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91년 3월 24일, 주요 일간지들은 ‘사교육비’ 문제를 일제히 다뤘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의 연구 결과를 보도하는 것이었는데, 기사의 기조는 사교육비가 꾸준히 증가해 왔으며 학부모 부담이 과중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연구는 사교육비가 절대액에서 공교육비를 능가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사교육비가 계속 증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담이 지나치다는 인상을 깊이 심을 만한 내용이었다. ‘과열 과외’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해 있던 시기에 그런 연구 결과는 언론에 더없이 좋은 기삿거리였다. 중앙 일간지들이 대부분 “사교육비 큰 부담, 과외비 등 9조 4천억”과 같은 제목으로 굵직하게 다뤄,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때 기사 제목에 박힌 ‘사교육비’라는 용어는 과외와 같은(사적인) 교육 서비스를 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라고 이해될 여지가 컸다. 즉, 사교육비는 ‘사교육+비’로 조합된 용어로 읽힐 만했고, 이때 ‘사교육’은 그 ‘비’ 지출의 대상품인 과외와 같은 교육 서비스를 가리킨다고 지레짐작할 만했다.

 

그렇게 사교육비라는 모호한 용어가 사교육이라는 역시 모호한 용어를 배태하던 즈음에는, 과외라는 용어 또한 실체적 충실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입시제도와 경쟁 판도 등이 바뀌는 데 따라 학교 밖 교육 서비스 상품들도 진화해서, 과외라는 말로 더 이상 그 모두를 포괄하기가 어려워져 가고 있었다. 학습지나 방송 그리고 인터넷 등 서비스 미디어가 다양해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비스 양태도 전통적인 교습에 국한되지 않고 ‘컨설팅’이나 ‘스펙’ 활동 주선과 같은 신상품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과외 대책’이라면 마땅히 이런 진화를 따라잡으며 부응해야 했을 텐데, 과외라는 용어는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확장성을 갖추지 못했다. 이런 점도 사교육이라는 조어가 ‘과외’를 대체하는 용어로 부상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1991년의 사교육비 논란과 같은 사건들로 부각된 ‘사교육비’라는 용어는 교육 재정(財政)을 논의할 때 이전부터 써오던 것이다. 그러나 본디 그것은 ‘사교육을 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란 뜻으로(‘사교육+비’의 조합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것은 ‘학교(대학) 교육을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가운데 사적으로 부담하게 되는 비용’이란 뜻으로(‘사+교육비’의 조합으로), 특히 전문적인 맥락에서 쓰이고 있었다. 과거의 용례에서 ‘사교육비’에는 이를테면 교복비, 교통비, 하숙비 등도 포함됐다. 과외비도 하나의 하위 항목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교육비라는 말은, 말하자면, ‘점수를 높이거나 진학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한 서비스를 사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을 가리킨다. 이렇게 뜻이 와전되는 데 위에서 본 사교육비 보도 같은 사례들이 영향을 미쳤다.

 

보도됐던 연구보고서를 들여다보면, 이를테면, 중학교와 ‘인문고교’ 단계에서 발생한 ‘사교육비’ 총액 가운데, ‘과외 교육비’라는 하위 항목의 규모는 각각 17.10%와 16.13%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문 기사들은 마치 사교육비 전액이 과외를 위해 지출된 것으로 오인하게 내용을 취급했다. 즉, 과외비 규모가 사회적으로 과대하게(‘사교육비’나 다름없는 것으로) 인식되도록 만들면서, ‘사교육비’와 ‘과외비’란 용어도 서로 대체되어 쓰여도 무방하게 이끌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사교육비 조사’가 무수하게 이루어졌다. 학자 개인들이 한 편의 논문을 위해 조사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관이나 단체들이 조사에 끼어들었다. 통계청이나 한국은행, 한국소비자보호원 등 관청들도 조사 결과를 내놓았고, YMCA, 녹색소비자연대, 주부교실, 한국무역협회 등과 같은 단체들, 그리고 기업들의 ‘경제연구소’까지 각양각색의 조사 결과들을 내놓았다. 이 조사들은 한결같이 ‘사교육비 조사’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실제 조사는 ‘과외비’에 국한했다. 그리고 그나마 비용 항목들이 세세하게는 서로 달랐지만(즉, 조사들에 채택한 각각의 ‘사교육비’ 정의도 서로 달랐지만), 언론에서 ‘사교육비 부담이 지나치다’라고 일괄하여 특필할 재료가 됐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았다.

 

일련의 이런 사태를 겪으면서, ‘사교육’은(사교육비라는 말에서 ‘비’를 빼는 맥락으로) 이전의 ‘과외’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대체해 갔다. ‘과외 문제’는 ‘사교육 문제’로 탈을 바꾸어 쓰게 되었다. 이울러 그 문제의 핵심은 서비스(과외)의 성질에 있지 않고 비용 부담이 과중한 데 있다는 통념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게 되었다. ‘사교육비’에서 ‘사교육’이 파생되어 나오게 된 맥락은 사교육 문제의 속성까지 구속했다. 사교육비 문제가 ‘비용’ 문제인 만큼, 그것의 원인은 비용을 유발하는 상품(즉, 사교육)에 있는 셈이 된다. ‘사교육비’에서 ‘비(費)’를 수식하고 있는 ‘사교육’이 궁극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사교육 문제는 사교육비 문제와 다름없게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사교육 이야기가 뒤집히는 과정에서 사교육 대책 역시 물구나무섰다. ‘과외 대책’은 과외가 학교에 들어서지 못하도록(학교 밖에서도 하지 말도록) 하는 데 주력했었지만, 2000년대 이후 ‘사교육 대책’은 학교가 적극적으로 사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사실상 강제하고 있다. 다만 학교가 그런 서비스를 할 때, 그것은 사교육이 아니라고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런 변화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들추려고 한다.

 

아울러, ‘사교육비’에서 ‘비’자를 빼는 논리로 ‘사교육’이란 정책 용어를 만들면서 학교에 어떤 변고가 일어났는지도 고찰하려고 한다. 과외는 과외대로 그리고 사교육은 사교육대로, 별도로 엄밀하게 문제 삼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뒷전으로 밀렸고, 이제는 문제 지평에서 아예 사라진 상태이다. 과외 문제를 명료하게 논의할 기회들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사교육(private education) 문제도 제대로 다뤄야 할 텐데 흐릿해져 버렸다. 시류를 따라 표류하면서 정부 정책은 문제 자체를 뒤섞고, 또 다루려 한 문제마저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정작 중요한 교육 문제들이 간과되고, 정부가 매달린 정책들은 우발 요인(특히 정치적인 요인)에 좌지우지되며 중심을 잃었다. 이런 점들도 이어서 짚어볼 것이다.

 

각주

  1. 이런 분석에 이의가 없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과외(당시 용어로는 ‘사교육비’) 이슈에 국한해 본다면, 이 해석의 일리를 인정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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