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학의 현실, 네 번째 이야기 : 관념의 유희

by gyobasaNPO | 2024-01-1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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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교육학의 현실에 관한 네 번째 이야기로, 교육학이 교육 현실을 떠나 관념의 유희에 그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글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1. 논리와 사실의 이분법
2. 교육의 신비화
3. 『교육의 진실』에 담긴 관념성
4. 마무리하며

 

 

지난번 글에서 나는 이홍우 교수의 보수성이 현실을 초월한 형이상학적 개념을 전제하고 그로부터 논리적 추론을 통해 결론을 끌어내는 연역적 사고방식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지적했었다. 이번 글에서는 구체적 현실을 외면한 관념적 논의가 현실의 문제 해결에 대해 얼마나 무능·무력한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1. 사실과 논리의 이분법

 

이홍우 교수(2019)의 글 ‘제도의 아름다움’에는 “제도는 개인에 비하여 시간상으로는 우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논리상으로 우선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어떤 제도가 형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서 분명 시간상으로는 개인이 앞서지만, 현시점에서 볼 때 개인이 일일이 결정해야 할 사항들이 제도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제도가 앞선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제도를 ‘개인의 집단생활 속에 붙박혀 있는 논리적 가정’이라고 규정한다(p.216-7).

 

‘논리적으로 우선’한다는 말은 이홍우 교수가 가장 즐겨 쓰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보기에 논리와 사실, 이론과 실제는 서로 섞일 수 없는 별개의 세계이다. 그리고 교육에 관한 의미 있는 명제는 오로지 전자(논리와 이론)의 세계 안에서만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후자(실제와 사실)의 세계는 우연이나 감정과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관심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논리 세계에 구축해 놓은 교육의 개념이나 목적 등은 실제나 사실을 근거로 해서는 누구도 흔들거나 침범할 수 없는 개념적 요새(要塞)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이홍우 교수는, 지난번 글에서 보았듯이, 실제로 이미 낡을 대로 낡은 제도라 하더라도 비판해서는 안 되며 단지 순응하면서 사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실(실제)과 논리(이론)는 분명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과 악처럼 양자가 배타적이거나 대립적인 관계는 아니다. 발생론적으로 보면 논리는 사실의 세계를 좀 더 정확하게 헤아리려는 인간의 사고 작용에서 나온 산물에 불과하다. 동일률이나 모순율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논리조차도 그저 논리적 사고의 규칙일 뿐, 사실의 세계를 규율하는 선험적인 장치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제도를 ‘개인의 집단생활 속에 붙박혀 있는 논리적 가정’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논리적 가정’이 제도에 대한 개인의 실제 행위를 규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1

 

그런데도 논리의 우선성을 고집하여 이로써 실제의 움직임을 제어하고자 한다면 바로 독단이나 궤변이 되기 쉽다. 전형적인 예가 제논의 ‘아킬레스의 역설’이다. 아킬레스는 앞서가는 거북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거북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둘 사이의 중간지점을 통과해야 하는데, 거기에 이르는 동안 거북은 이미 앞으로 나가 있기 때문이다. 제논은 이 논법을 반복하면서 아킬레스가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함정은 중간지점을 통과해야 한다는 전제(논리)에 숨어 있다. 그것은 ‘시간’(=실제)이라는 차원을 무시하고 논리 안에 갇힘으로써 어불성설의 결론으로 인도한다.

 

복잡다단한 실제의 세계를 명석한 논리로 분석해 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의 생명력은 실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빛날 수 있다. 현실의 절박한 필요와 요구를 외면한 채 논리의 차원에서만 머무는 경우 그것은 당사자에게는 유유자적하는 관념의 유희일 수 있겠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공허한 독백이거나 독단이 될 수밖에 없다.

 

 

2. 교육의 신비화

 

교육학자에게 있어서 교육 현상이란 영원한 수수께끼다. 무지의 가장 큰 기쁨은 호기심과 질문하는 즐거움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학도들이 이 질문을 코앞에 걸어놓고 생활해야 한다. 현재로서 교육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 교육 현상은 교육학자에게 있어서 알아가면 갈수록 더욱더 불투명해지는 심연과 같다(장상호, 2022:148).

 

위 인용문은 읽는 사람에게 공감보다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교육학자라 하더라도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 답이 여러 갈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육 현상을 ‘수수께끼’라든가 ‘불투명해지는 심연’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 인용문은 장상호 교수가 기존의 교육학이 ‘교육 아닌 것’을 교육이라고 왜곡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진짜 교육을 찾아 그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 속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지난 30년간 오로지 이 문제와 씨름하면서 방대한 저서들을 냈고, 최근 그 작업의 결실로서 『교육학의 재건』(2022)과 『교육의 진실』(2023)을 잇따라 출간하였다. 이는 실로 경이로운 대장정이며,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큰 업적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위의 표현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교육학, 그것도 기존의 교육학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난 이후의 새로운 교육학을 세우고자 한다면, 교육 현상을 ‘수수께끼’가 아니라 좀 더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교육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신비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육을 알기 어려운 어떤 것으로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홍우 교수도 교육의 신비화론자라고 할 만하다. 그는 『교육의 목적과 난점』(2019) 중 ‘삶과 공부’라는 글에서 우화를 통해 교육이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우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옛날에 상제(上帝)가 인간을 창조하고, 백 명의 하제(下帝)를 내려보내 인간에게 백 가지 일을 가르쳐 주고자 했다. 99명의 하제들은 소임을 다 했는데, 교육을 맡은 하제는 그러지 못했다. 다른 일들은 그것을 하기 전에 이미 그것이 어떤 일인지, 왜 필요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교육은 받아 본 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라서 사전에 이해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제는 고민 끝에 하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육을 받지 않으면 개인의 사회적 지위도 집단의 물질적 번영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라.’(25-26)

 

교육을 받아 보아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사전에 굳이 거짓말로 설득하기보다 그냥 교육받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어느 시점에 이르러 ‘아하! 그래서 나에게 이렇게 교육을 받도록 했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홍우 교수가 다소 억지스러운 우화를 제시한 이유는 아마도 ‘교육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즉 교육 자체의 정당화를 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화 뒤에 ‘지구의 자전을 왜 배우는가?’라는 질문을 꺼낸 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홍우 교수는 지구 자전을 배우는 이유가 흔히 생각하듯이 ‘달나라에 로켓을 쏘아 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천문학적 현상’을 보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역설한다(32-35). 이것은 비단 지구 자전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교과 지식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이홍우 교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의 지론, 즉 교육이란 실용적인 수단이나 세속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안목)을 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위 두 원로 교수는 똑같이 교육의 내재적 목적(또는 가치)과 외재적 목적을 구분한다. 그리고 교육이 전자에 주력해야 하는데 오히려 후자에 경도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나 역시 공감한다. 오늘날 교육의 난맥상은 주로 정치나 경제 또는 입시와 같은 교육 외적인 힘들이 지나치게 교육을 좌지우지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교육의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이 언제나 확연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며, 현실적으로 교육이 국가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외재적 목적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2

 

이렇게 보면, 위 두 원로가 교육을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거나 신비적인 존재라고 말한 이유는 그것이 그렇게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해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을 신비화한다고 해서 상식의 편에 서 있는 압도적 다수가 설득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들은 상식 세계 안에 안주하려 들 것이다. 이 점에서 교육의 신비화는 교육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한 전략의 실패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전략적 실패 원인은 바로 교육을 보는 두 원로 교수의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논리와 사실,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은 교육을 이해하는 서로 다른 차원일 뿐이다. 따라서 이 둘은 교육을 이해하기 위한 상호 보완적 개념이지 상호 배타적이거나 대립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이 점에서 교육의 신비화는 이러한 사실을 간과 또는 외면한 데서 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교육의 진실』에 담긴 관념성3

 

『교육의 진실』은 1996년부터 시작된 장상호 교수의 교육학 비판과 교육학 재건 작업의 총결산이자 축약판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이전의 저서들에 비해 얇지만, 교육(학)에 대한 장상호 교수의 핵심적인 생각들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

 

장상호 교수는 ‘지금의 교육학은 오히려 교육을 왜곡하고 은폐’하며, ‘그릇된 교육관이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는 상황 인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새로운 교육학은 이러한 그릇된 교육학과 교육관의 청산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p.17). 새로운 교육학은 기존의 상식이나 그릇된 교육 개념 또는 인접 학문과의 의존 관계를 끊고 철저한 ‘교육 본위론’에 입각해야 한다. 여기서 “교육은 품위를 수단으로 삼아 더 나은 나와 더 나은 네가 점진적으로 되어 가는 고유한 과정”(p.43)으로 정의된다. 품위가 교육의 수단이라는 말은 ‘어떤 것’의 품위를 점차 높여가는 과정을 교육으로 본다는 의미로, 장상호 교수는 그 ‘어떤 것’을 통칭하는 말로 ‘X계’(이전 저서들에서는 ‘수도계’)라는 말을 쓰고 그것을 ‘교육의 소재’라고 칭한다.

 

교육은 X계의 품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배움을 청하는 데서 시작되는데 이를 상구(上求), 품위가 높은 사람이 이 청을 받아들여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하화(下化)라고 명명한다. 이 점에서 교육은 상구와 하화가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상호 교수는 “교육은 품위라는 소재를 가지고 진행하는 일종의 놀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놀이가 그렇듯이 교육 역시 스스로 그렇게 되는 고유한 내재율을 가지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교육의 가치와 목적, 교육활동, 교육적 인간관계, 교육의 환경 등이 규정된다.”(p.53) 이러한 교육을 수행하는 사람을 ‘교육적 주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주체란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 내재율을 따르는 존재라고 한다. 즉, “교육의 주인은 교육이며, 그 안에 진입하거나 거주하려면 그 내재율을 따라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교육적 주체는 교육을 모시는 하인이다.”(p.56)

 

그런데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장상호 교수의 논지를 따라가기가 버거워진다. 위 인용문을 ‘어떤 행위가 교육적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개념적 기준을 충족시키는가를 보아야 한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장상호 교수는 그 이상의 의미, 즉 마치 추상적인 존재인 교육이 독립적 주체가 되어 개인을 통제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적 기준을 이처럼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경우 모든 교육 행위나 실천을 획일화하는 독단으로 흐를 수 있다. 말하자면, 실제의 인간 행위를 바탕으로 하여 개념과 이론을 형성하는 학문의 일반적 특성과 달리, 교육(학)이 선험적으로 ‘교육’이라는 기준을 상정하고 모든 행위를 획일적으로 재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이홍우 교수의 ‘천문학적 현상’을 보는 눈 이야기를 상기해 보자. 이홍우 교수는 지구 자전을 배움으로써 저절로 천문학적 현상을 보게 되지 않으며, 교사가 그런 안목을 갖도록 가르쳐야 비로소 그렇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어떻게 지구 자전을 알게 되었을까? 다양한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점차 알게 되었을 것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지구 자전을 가르치면서 지구가 자전하는 증거들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학생들은 우주 공간에서 지구가 움직이는 것을 상상하게 되어 나중에는 일상적으로 해가 뜨고 별이 지는 현상도 이전과는 다르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지구에서 달나라에 로켓을 보내는 방법에 대한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즉, 이홍우 교수의 구분과 달리 지구 자전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달에 로켓을 쏘는 실용적인 목적과 천문학적 현상을 보는 안목이 배타적이거나 대립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는 장상호 교수나 이홍우 교수 모두 교육(학)에 관한 관심이 교육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개념이나 논리와 같은 추상적인 논의에만 지나치게 몰두함으로써 결국 현실에 대해 무력한 관념주의에 빠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인용문 역시 이러한 관념성을 잘 보여준다.

 

X계에서는 모두 품위의 높낮이를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삼지만, 교육은 그 수준에 제약받음이 없이 반복한다. 예를 들어 학문의 영광은 그 첨단의 천재에게 주어진다. 이와 달리 교육은 소재의 수준과는 별개로 매 단계에서 같은 정도의 몰입, 보람, 흥취, 만족, 행복을 보장한다. 이처럼 교육은 평등하며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보장한다(p.129).

 

위 인용문의 의미는 이러하다. 예를 들어 갑과 을 두 사람이 똑같은 조건에서 어떤 천문 현상을 연구했다고 하자. 그런데 갑은 원하는 연구 결과를 얻어 한 등급 올라가고 을은 실패하여 제 자리에 머물렀다고 하자. 위 인용문은 이 경우 X계에서는 갑과 을을 다르게 평가하고 대우하지만, 교육에서는 어떤 차별도 없이 평등하여 행복을 보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혹 논리 차원에서는 통할지 모르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어불성설이다. 즉, 갑과 을이 교육의 결과인 X계의 품위 차이를 받아들이면서 교육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행복하게 여길 거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은 그야말로 현실을 떠난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관념성은 ‘교육’과 ‘교육의 양태’의 구분에서도 나타난다. 장상호 교수는 ‘교육은 동서고금의 변화가 없고 다만 그 여건에 따라 양태가 다양할 뿐이다’(p.139)라고 말한다. ‘동서고금의 변화가 없는 교육’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마도 장상호 교수의 말로 표현하자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상구와 하화’가 늘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언제나 배움과 가르침은 있었다’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시대나 삶의 방식 변화에 따라 상구와 하화의 여건과 방식(=양태)은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교육학의 탐구 대상은 교육인가, 교육의 양태인가? 늘 변하지 않는 교육을 구태여 탐구 대상으로 삼을 이유가 없다고 보면,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장상호 교수는 분리할 필요가 없는 대상을 애써 분리하고 있는 셈이다.4

 

실제, 즉 교육 현실에 대한 천착 없이 단지 관념 차원에서 구상하는 새로운 교육학이란 무력함을 넘어 공허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하 벌어지고 있는 교육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상호 교수는 개념적 혼란의 극복이 현실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개념 구성 자체가 구체적 현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 장상호 교수가 4대 성인의 삶을 모델로 하여 구안해 낸 상구와 하화의 개념은 오늘날의 교육 현실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고답적이다. 이를 축으로 하여 구성한 “교육의 수레바퀴”(p.54)와 그 안의 7가지 차원의 요소들 역시 지나치게 고답적이어서 마치 조선 시대 선비들의 스승과 제자 관계에 관한 설명으로 여겨질 정도여서 그것을 장상호 교수가 기본적으로 상정하는 교육의 편재성과 연결 짓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교육학에 접근하는 장상호 교수의 접근 방식을 그가 이미 정립된 학문의 하나라고 보는 경제학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는 ‘경제인’(homo economicus)이다. 경제인은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람, 즉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용을 추구하는 사람을 뜻하며, 경제학은 이러한 인간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이론 체계가 구성된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 이처럼 완벽하게 경제적 합리성만이 지켜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치나 감정 또는 주변 사람이나 환경의 영향에 의해 비합리적인 경제행위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경제행위가 아니라고 배제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원초적 경제 개념에 어긋나는 다양한 현상들까지도 경제 현상의 범주로 묶어 분석하고,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 제시한다. 말하자면, 경제의 ‘논리’와 ‘실제’를 분리하기보다 그 양자 관계를 탐구하여 ‘실제’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고자 한다.5

 

오늘날의 교육학이 안고 있는 개념적 실천적 혼란은 분명히 극복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교육 현실을 외면한 채 단지 구름 위에서 신선놀음하듯이 관념과 논리만으로 새로운 교육학이나 그 규범을 만들 수는 없다. 혹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학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우리 교육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어려운 작업이기는 하지만, 사실과 논리, 실제와 이론 간의 관계를 통합적인 관점에서 부단히 탐구할 때 우리는 좀 더 현실 적합한 교육학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4. 마무리하며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두 분의 대 원로 은사님께 너무나 불경스러운 글을 쓰게 되어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더구나 학문적인 깊이와 열정에서 나는 그분들의 먼발치에서나마 얼씬거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감히 이런 글을 쓴 이유는 오래전부터 이분들의 생각이 한국 교육(학)의 미래에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우려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분들과 내가 교육을 통해 지향하는 바는 천양지차이고, 그분들이나 우리 사회의 교육학 주류에서 보면 나는 존재감 없는 이단아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이나 기존의 교육학 주류가 구체적인 교육 현실에서 너무 멀어져 있고, 그것이 우리 교육(학)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요인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아무튼, 이런 거친 이야기를 쏟아내게 된 바탕에는 그런 절박한 마음이 있었음을 밝히며, 감히 머리를 조아려 두 은사님께 미천한 후학의 무례함을 너그러이 보아주시기를 구할 뿐이다.

 

우리 교육학은 이 글에서 다룬 지나친 관념주의와 정반대로 지나친 현실주의라는 문제도 안고 있다. 이것은 두 원로 학자께서 우려해 온 지나친 실용주의나 비본질적인 교육 태도라고 할 수도 있다. 다음 글에서는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참고문헌

 

• 이홍우(2019). 교육의 목적과 난점(제7판). 교육과학사
• 장상호(2023). 교육의 진실. 교육과학사
• 장상호(2022). 교육학의 재건. 교육과학사

 

각주

  1. 이것은 일종의 ‘역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사실에서 당위를 도출할 수 없듯이, 당위가 사실을 규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 논리와 사실이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듯이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 역시 배타적이지 않다. 자연 현상에 대한 탐구를 통한 과학적 안목은 오래지 않아 다양한 실용 기술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달나라 가는 기술’ 역시 ‘천문학적 안목’을 기반으로 한다. 오늘날에는 국가나 자본의 실용적인 목적이 AI나 생명기술과 같은 첨단 과학의 발전을 이끈다. 이홍우 교수는 그러한 첨단 과학의 발전 자체에 관심이 없다고 하겠지만, 핵심은 양자의 분리가 관념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3. 장상호 교수의 ‘새로운 교육학’에 대해서는 후에 한 번 더 본격적으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교육(학) 개념의 추상성에만 초점을 두고 논의하고자 한다.
  4. 장상호 교수가 말하는 ‘교육’을 개념적 기준, ‘교육의 양태’를 교육의 실제로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 경우라면 굳이 ‘교육은 동서고금의 변화가 없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5. 이에 대해 경제학은 본래 실용을 추구하는 학문이고 교육학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교육(학)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Source URL: https://21erick.org/column/12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