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배우기를 배우도록 돕는 일, 교육

by gyobasaNPO | 2023-12-21 10:28

“배움이 먼저고 그 다음으로 가르침이 이어질 때 가르침도 비로소 힘을 발휘하게 되는 거다.”  /  “배운다는 것은 내 인생을 위해 진정 즐겁고 유효하고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챈 사람이 배우는 걸 거부할 수 있을까.” (본문 발췌)                                                                      

 

 

1년의 전환교육과정, 배우기를 배우는 시간

 

1999년부터 시작한 작은 대안교육공간은 올해로 25년이다. 그 사이 학교 교육에 의문을 품은 청소년들의 아지트에서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가진 교육공간으로 진화했다. 처음 1년제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10년 정도 지나 서울교육청과의 협업으로 오디세이 학교라는 전환교육과정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2015년의 일이다. 이 또한 벌써 9년을 넘어 2024년 10년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듯 꾸준히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질문을 놓치지 않았던 덕분이 아닐까 한다.

 

민들레의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실행하면서 또 오디세이민들레의 교육과정으로 나아가는 와중에도 우리가 놓치지 않은 질문으로는 “교육이란 무엇일까”에서 출발해 “1년이란 시간 동안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 있었다. 교육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역량을 집중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기존의 학교 교육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고, 대안적 교육을 해온 국내외 많은 학교나 사람들의 사례는 물론 20년 가까운 우리들의 경험도 다시 검토했다. 그 결과 우리는 ‘1년이라는 시간을 배우기를 배우는 시간’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이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스레 알게 된 덕분이었다. 뭐든 스스로 하고자 할 때 교육이라는 것은 비로소 작동되기 시작하고 그러므로 교육은 가르침보다 배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사자가 찾고자 하고 배우고자 할 때 모든 활동과 가르침은 영향력을 갖게 되는 법이다. 배움이 먼저고 그 다음으로 가르침이 이어질 때 가르침도 비로소 힘을 발휘하게 되는 거다. 물론 그렇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가르침은 또 다른 배움을 견인해 내기도 한다. 이 아름다운 교육의 선순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1년은 배우기를 배우는 시간으로 가져가야만 했다. 1년의 전환교육은 배움의 주체로 전환되는 과정이어야 했다.

 

누구나 배우려고 해야 배우고, 그가 배울 때 배운다. 배움의 타이밍도 내용도 방식도 모두 학습자 스스로에게 그 결정권이 있다는 말이다. 배움에서의 자기결정권이 관철될 때 배움이 일어난다는 배움의 원리는 교사 중심의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교육의 원리이기도 하다. ‘스스로 배우기를 돕는 교육활동’은 프로젝트 활동, 인턴십, 기획여행, 자치회의, 선택수업….등 그 이름도 다양하다. 하지만 더 많은 ‘스스로 배우기’는 활동명이나 수업명이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원리나 태도, 또는 시선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활동명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의 깊게 챙겨야 할 것들을 언제나 떠올린다.

 

 

교사나 어른의 역할

 

먼저 교사나 어른의 역할이 있다. 흔히 학생의 자기결정권을 말하면, ‘그럼 아이들이 뭘 하든 그냥 내버려 둔다는 거냐’, 또는 ‘뭐든 제멋대로 해도 된단 말이냐’라고 묻는다. 이어서 ‘교사는 뭐 하는 거냐’는 말도 따라온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일본의 키노쿠니 학교 설립자인 호리 선생의 다음과 말을 소개한다.

 

“교육에서 자기결정의 원칙을 생각할 때, 교사는 그저 방관자거나 지켜보는 이가 아니다. 아이 자신의 선택, 발상, 판단 등을 존중한다고 해서 교사가 자신의 ‘지도성’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교사는 아이의 현재 모습(발달 단계, 성장 정도, 학습력, 기호, 적성 등)을 잘 이해한 후, 그 아이의 지적 흥미를 자극하고, 열중해서 몰두하게 하고, 그 결과 확실한 힘을 기를 수 있는 활동이나 환경을 풍부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교사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아이들을 직접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 활동이나 환경이다.”

 

교사는 학생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맘껏 시도하고 도전하고 그 과정에서 배우고 자랄 수 있도록 판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저 강제하지 않는 것으로 자유나 자기결정권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지적 흥미나 의욕을 자극하는 활동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환경에서 “무엇이든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도 된다”라는 말을 들은 학생은 오히려 부자유를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스스로 배우도록 돕는 배움터는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 매력 있는 활동이 풍성한 곳이어야 한다. 학생이 얼마나 자기결정권을 발휘하는지는 그것을 발휘할 장면과 내용을 만들기 위해 쓰이는 교사의 시간이나 정성에 비례한다. 다만 민들레오디세이에서 만나는 열일곱 인생들은 지금까지 자기결정권을 발휘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보니, 교사들을 종종 힘들게 한다. 교사들이 시간이나 공을 들여 준비한 것들이 기대만큼 학생들의 환대를 받지 못하기도 한다.

 

교사들이 강조하는 ‘자기결정권’이나 ‘네 자신의 생각이 중요해’ 같은 메시지를 처음 접한 학생들은 ‘이걸 믿어도 돼?’ 하는 표정을 자주 짓는다. 1년의 시간 동안 첫 두 달은 ‘믿어도 돼?’에서 ‘믿어도 돼!’가 되어 가는 시간이다. 오디세이 9년의 경험에 비춰보면, 해가 가면 갈수록 ‘믿어도 돼?’에서 ‘믿어도 돼!’로 되어가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두 달이 세 달이 되어가는 느낌도 있다. 아주 드물지만 가을이 되어도 계속 긴가민가 하는 상태의 학생도 있어서, 교사들의 고민이 깊어지기도 한다. 교사들은 해마다 겨울방학이면, ‘믿어도 돼?’에서 ‘믿어도 돼!’를 지금의 아이들과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어 갈 수 있을지 토론하고 공부하고 연구하며 방법을 찾는다.

 

 

배우기를 배우도록 돕는 평가

 

교사의 역할과 함께 평가에 대한 시각도 중요하다. 자기결정을 원칙으로 하는 배움이나 활동에서는 학생이 자발적으로(종종 교사의 조언을 듣고) 활동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발적으로 선택할 때는 학생 자신에게 활동이 끝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에 대한 확실한 전망이 있어야 한다. 말로 제대로 설명을 못해도 뭔가 확신 같은 게 있어야 한다. 일종의 달리기 출발선에서 저 멀리 있는 골인 지점에 눈길이 갔다가 다시 운동화 끈을 조이며 다리에 힘을 주는 상황과 닮았다.

 

같은 활동이나 수업에 참가해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목표가 다를 때도 많다. 한 명 한 명 배움의 속도도 가고자 하는 곳도 다른 셈이다. 평가가 달라져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당연히 1등에서 꼴등까지 줄을 세우기 위한 평가는 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뭐가 달라졌는지, 어떻게 달라졌는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기 위한 평가가 모든 활동에서 일관되게 이뤄진다. 이때 해당 활동이나 학습에 대한 평가는 학생 스스로가 해야 한다. 교사의 조언이나 지적을 받기도 하고 친구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지만, 이 모든 도움말을 반영하고 자신의 생각을 더해 자신이 자신을 평가해야 한다. 학생 자신과 교사나 친구들의 평가가 달라도 누구의 의견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런 불일치는 다음 배움으로 이어지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교사는 ‘잘했어, 성공이야’라고 평가하는데도 학생들은 ‘아직 멀었어요’라며 오히려 학생이 서둘러 다음 진도를 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교사는 마음속으로 ‘앗싸’를 외친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

 

학생이 스스로 배우려 하는 데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중요하다. 우리는 교사를 길잡이라 부른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움의 길로 안내하거나 자극을 주는 사람을 뜻한다. 길잡이에게도 권위는 존재한다. 오히려 권위는 더욱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란 ‘사람을 따르게 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억지로 따르게 하는 게 아니라 절로 따르게 하는 힘이 진정한 권위일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교사를 지향한다.

 

학생들은 교사의 말을 따르는 게 아니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말하자면 말뿐 아니라 모든 걸 보고 따른다. 교사의 역량(교육력)은 그래서 교수력이나 활동력 등으로 분리해 판단할 수 없다. 그의 인격과 삶의 태도, 무엇보다 실행하는 모습 등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학생들로 하여금 배움의 길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특히 스스로 배우도록 돕는 사람으로서의 교사는 교사 자신이 여전히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일 때 학생들이 가장 잘 따른다. 많은 걸 잘 알아서 잘 가르쳐도 존경받을 수 있지만, 알고 싶은 걸 즐겁게 배워가는 모습이야말로 학생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텍스트가 된다. 그래서 교사의 전공이 무엇이었는지, 무슨 과목을 가르쳤는지보다 지금 무엇을 더 알고 싶어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교사가 알고 싶어 하거나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테마로 수업이나 프로젝트 활동을 구성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이들은 상대가 교사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교사를 넘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들어 가려 노력하고 있고, 학생들도 그렇게 해낼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가 하는 최소한의 요구나 조언이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런 관계에서는 서로의 지위 관계를 확인시키는 호칭은 필요 없다. 학생들이 교사에게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아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라’, ‘은빛’ 같은 별명을 부르는 편이 서로 친밀해지고, 실제 활동이나 배움도 순탄하게 진행되도록 돕는다.

 

배운다는 것은 내 인생을 위해 진정 즐겁고 유효하고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챈 사람이 배우는 걸 거부할 수 있을까. 지금 학생들이 배우려 들지 않는다면, 공부는 힘들고 별 쓰임새가 없으며 좋은 대학 가서 폼 잡는 것 말고는 크게 좋은 일이라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일찌감치 내면화한 탓이리라. 배우기를 배우도록 돕는 일은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공부나 배움에 대한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또는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고하면 강고할수록 그 과정은 더디고 고단할 것이다. 본인은 물론 곁에서 돕는 교사나 어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질러가는 길은 없다. 고단하고 더딘 걸음이지만 시나브로 시나브로 인간에 대한 신뢰와 진심의 힘을 믿으며 하루하루 나아갈 수밖에 없다.

 

12월 이맘때면 그래도 변화의 발걸음을 내디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지곤 한다. 이렇듯 자유로운 교실에서 무엇이든 시도하고 도전해 볼 수 있었던 건 함께한 동료들과 아이들 덕분이다. 새해에도 우리의 발걸음이 이어지길 바란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Source URL: https://21erick.org/column/11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