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너, 하나뿐인 배움의 꼴

by gyobasaNPO | 2023-07-18 14:55

“비슷한 듯한 아이들의 배움과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게 되면서. 장애가 있고 없음을 구분하는 경계, 하나의 뚜렷한 선이 있을 거라 생각한 그곳엔 그저 수많은 독특한 점들이 춤을 추고 있을 따름이었다.” (본문 발췌)                           

 

 

작은 시도만으로

 

‘아기 가오리를 보아요.’라는 문장을 보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으며 쿡쿡 웃던 준서(가명. 6학년)가 활동지 한 장을 마무리 짓고 이렇게 말했다.

 

“생각보다 재밌어요. 하나 더 해요.”

 

준서는 여태껏 모든 글자를 다닥다닥 붙여 써왔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그랬던 준서가, 아빠가 받아쓰기 문제를 다 맞히면 게임기를 선물로 주시기로 했다며 쓰기에 부쩍 의욕을 보이길래, 냉큼 띄어쓰기를 공부해 보자고 제안했더랬다. 그러고 맞이한 띄어쓰기 공부를 위한 첫 시간. 기초적인 내용을 다룬 터라, 준서는 관련 예문을 몇 가지 익히곤 띄어 써야 할 자리를 적절히 짚어낼 수 있었고 의기양양해졌다. 나 또한 아이에게 오늘 알려 주려고 계획한 내용을 잘 전달했다는 생각에 만족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마지막 문제의 답을 딱 맞힌 준서가 살짝 들뜬 목소리로 더 하자고 한 것. 와우! 이건 정말 성공이다.

 

준서를 처음 만난 건 작년, 준서가 5학년 때였다. 준서에겐 읽는다는 행위가 쉽지 않았다. 준서의 담임 선생님은 준서가 무엇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궁금했고, 이를 계기로 나는 준서를 만나게 되었다. 준서는 나와 만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전 글씨를 완벽하게 배우진 못했어요. 뒤틀린 나무처럼 말해요.”라고 말했다. 실제 읽기 검사1 진행 중에 준서는 ‘비단 장수가 어깨에’라는 구절을 “바다 수정가 깨어에”라고 읽었다. 그 뒤로도 앞뒤 글자를 바꾸어 읽거나 잘못 읽기 일쑤였다. 준서 정도 나이엔 분당 300자 정도를 바르게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데, 아이는 평균 100자 남짓을 읽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읽어준 글을 이해하는 수준은 또래와 비슷했지만 글자를 읽어내는 것 자체를 어려워했다. 어떤 아이에겐 시나브로 완성되었을 ‘읽기’라는 과제가 준서에겐 더없는 난관이었다.

 

그로부터 8개월 정도가 지난 지금, 준서의 읽기 속도는 여전히 더디지만 글자를 뒤집어 읽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또 잘못 읽더라도 스스로 고쳐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마음이 바쁠 땐 조사나 어미를 다르게 읽는 일이 많지만 스스로 읽어낸 글에 대한 문제는 별다른 오류 없이 풀어낸다. 글에 대한 집중력도 작년보다 좋아졌다. 아이 스스로 애쓴 덕분이다.

 

아이가 무언가를 성취할 때면 나도 덩달아 기쁘다. 하지만 동시에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솟아오르는 순간들도 있다. ‘이렇게 작은 시도만으로도 익힐 수 있었는데······. 좀 더 일찍 이 아이에게 맞는 배움의 과정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마음 한편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경계‘선’은 없다

 

나는 전라남도 장흥교육지원청 학습종합클리닉센터2에서 준서처럼 또래보다 천천히 학습 과정을 밟아가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 몇몇 검사를 매개로 아이의 인지 특성·학습에 영향을 미치는 정서적 특성·학습 능력 등을 알아보기도 하고, 그에 따라서 아이를 지원하기도 하며, 아이와 함께 할 선생님을 일대일로 연결해 주기도 한다. 이 일을 하다 보니 ‘학습부진’이라고 통칭되는 현상을 겪고 있는, 아주 다양한 아이들과 연을 맺게 되었다. 정말 놀랍도록 모두 다 다른 그 아이들을. 경계이되 경계가 아니고, 구분점이되 구분이 모호한 지점에 서 있는 많은 아이들을.

 

‘각기 다른 아이, 다른 교육과정’의 필요성을 인지한 건 특수교육을 전공하면서부터이다. 그전까지 나 자신은 공교육 맞춤형 인간이어서 일방적인 공통교육과정에 대한 문제를 피부로 느끼진 못했다. 고등학생 때까지 극히 내향적이었고 다른 사람에 대해 무지했던 터라 성적은 노력의 차이라고만 이해했다. 국어 시간 중 주어진 5분 스피치 시간에 ‘밥을 먹는 데에는 이러이러한 행동 절차가 여러 가지 필요하지만 공부하는 데에는 책을 눈으로 보기만 하면 된다’는 한심한 소리를 진심을 담아 했던, 인간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쥐똥만큼도 없던 사람이었다.

 

특수교육을 공부하면서 개별화 교육3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지만, 지금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이 ‘개별화 교육’이란 것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건 ‘특수교육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장애가 아니라 아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자며 다르지 않음을 설파하는 내 입술은 ‘사실은 다르다’라고 하는 내 무의식과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애’와 ‘비장애’를 가르는 경계가 분명 거기 있었다.

 

특수교사로 2년, 대안학교 교사로 12년을 살고 나이를 먹으면서 여러 사람을 겪은 만큼 보이는 세상이 달라졌다. 그간 장애 영역에서는 ‘스펙트럼4’이라는 용어, ‘신경다양성5’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인식의 틀이 이전과는 달라지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인간을 이루는 많은 요소와 특성·능력들의 개인차가 뚝뚝 끊어지는 절대적 차이가 아니라는 걸, 현재 일을 하면서 보다 명징하게 볼 수 있었다. 비슷한 듯한 아이들의 배움과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게 되면서. 장애가 있고 없음을 구분하는 경계, 하나의 뚜렷한 선이 있을 거라 생각한 그곳엔 그저 수많은 독특한 점들이 춤을 추고 있을 따름이었다.

 

 

네 아이 이야기

 

희원이(가명)는 여러 오빠를 둔, 씩씩하고 자기표현이 분명한 아이였다. 처음 만나는 데도 그다지 어색해하지 않고 조잘거려준 덕분에 첫날부터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희원이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이른 아침부터 늦게까지 식당 일을 하셨고 아이의 교육에 별 관심이 없으셨다. 같은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아침에 집 앞에 버스가 도착했는데도 희원이가 나오질 않아 자기가 들어가서 챙겨 나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방학 때면 아이는 타지에 사는 친척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곤 했다. 희원이의 구어 능력이나 단순한 어휘 지식은 또래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시지각 구성 능력이나 공간 지각 능력, 시각-운동 통합 능력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기호인 글자와 음성을 연결해서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정민이(가명)는 키가 크고 포동포동해서 3학년은 됨직한 체격의 아이였다. 담임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편식이 심했고 좋아하는 것을 지나치게 많이 먹곤 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였는데 가정의 경제 형편이 좋지 못해 같은 옷을 며칠 동안 입고 다니기도 했다. 정민이는 2학년 때 다른 가정으로 위탁되었는데, 오히려 그때부터 더 깔끔한 차림으로 학교를 다녔고 아침밥도 잘 챙겨 먹을 수 있었다. 아이는 언어 능력 중에서도 상위 개념을 형성하거나 범주화하는 능력이 서서히 발달하고 있었다. 또 시각적인 것에 비해 청각적인 정보를 기억해서 처리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수현이(가명)는 춤과 노래를 즐기며 아이돌을 꿈꾸는 아이였다. 일단 시작한 것에는 욕심이 있어서 잘 해내려는 마음이 컸다. 해야 할 것이 어렵게 느껴지면 순간 울음이 터지기도 하는데 “그럼 다른 거 할까?” 물으면 “그래도 해야죠.” 하며 포기하지 않는 뚝심의 소유자다. 수현이의 소근육 능력, 기호 학습 능력은 또래 평균 수준을 웃돌았다. 하지만 표현 어휘 능력 발달 속도가 1년 반 정도 더뎠다. 수현이의 지능검사 점수는 언어가 개입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간에 편차가 컸다.

 

지수(가명)는 장흥군 안에서 가장 외곽에 있는 바닷가 마을의 작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였다. 지수네 반은 지수와 다른 친구 하나, 이렇게 둘이었다. 지수는 엄마 없이 아버지와 동생과 살았지만 구김살이 없고 밝았다. 게임 형식의 활동을 할 때면 지지 않으려고 승부욕을 드러냈지만 평소엔 감정의 폭이 크지 않고 순한 편이었다. 지수는 시각적 주사6·변별 능력에 비해 시지각적 상징과의 운동 연합 기술이나 쓰기 근육 운동 능력이 느리게 발달한 상태였다.

 

희원이, 정민이, 수현이, 지수를 만난 연도는 다르지만, 만난 당시의 네 아이는 모두 1학년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한글 해독에 어려움을 갖고 있었고 한국웩슬러아동지능검사7 결과 전체 IQ 점수가 80 안팎이었다. 학교 현장에서 얼핏 보면 비슷한 학습력을 보이고 지적 능력도 비슷하다고 평가될 아이들인 것이다. 요즘은 많이 알려진 ‘경계선 지능8’을 가진 아이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다르다. 이 아이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빛깔을 품고 서로 다른 삶의 맥락을 걸어가고 있다.

 

 

한 아이를 위한 교육과정

 

한 아이의 능력과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목표를 세우고 교육과정을 펼치고 평가하는 과정은 특정한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어야 한다. 모든 아이들은 배우고자 하는 것 또는 배울 필요가 있는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수준에서부터 배울 수 있는 속도로 배울 수 있는 정도의 단계를 두어 배워 나갈 권리가 있다. 진단명이 필요한 곳이 있고 공통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정책을 펼쳐야 할 때도 있지만, 배움을 일구어내는 현장의 방향성은 궁극적으로 한 개인에 맞추어져야 하고 아이에게 어떤 집단적 정체성을 덧씌우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어떤 분들은 내게 한 곳에서 같은 일을 오랫동안 해서 지루하지 않느냐고 물으신다. 하지만 난 내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때면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올해 4-5월에도 나는 열한 명의 아이들을 새로이 만나게 되었다. 열한 가지 이야기, 열한 가지 신비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열한 가지의 교육과정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1. 기초학습능력검사(NISE-B·ACT) 중 읽기 검사는 5개의 하위 소검사(음운처리, 글자·단어 인지, 유창성, 어휘, 읽기 이해)로 구성된다. 그중 유창성 검사는 1분당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글을 읽는지를 측정한다.
  2. 학습종합클리닉센터는 기초학력보장정책의 일환으로 2012년 ‘서울, 대전, 대구, 경북, 전남’ 5개 교육청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여 점차 확대되었다. 중앙센터형, 중앙+지역거점센터형 등 각 지역 특성에 따라 다른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데, 전남은 현재 22개 시·군 각 지역청에 학습종합클리닉센터를 두고 있으며 ‘학습심리상담사’라는 명칭의 담당자 1명이 실무를 맡아 꾸리고 있다.
  3. 특수교육 대상자 개인의 능력을 계발하기 위하여 장애 유형 및 장애 특성에 적합한 교육목표, 교육방법, 교육내용, 특수교육 관련 서비스 등이 포함된 계획을 수립하여 실시하는 교육 (특수교육학용어사전)
  4. 자폐 스펙트럼 장애: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 지연을 특징으로 하는 전반적인 발달장애를 일컫는 용어. 과거엔 ‘유아자폐증, 발달장애, 아스퍼거 증후군’ 등의 용어가 혼용되었는데, 2013년부터 자폐스펙트럼장애로 통일됐다. 문제가 되는 행동이나 언어가 광범위하고 복잡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5. 1998년 9월 <디애틀랜틱 the Atlantic)>에 실린 하비 블룸의 기사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 ‘인간의 뇌는 기계가 아니라 생태계처럼 작동한다.’ ‘인간과 인간의 두뇌는 역량의 연속선 위에 존재한다.’ 등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개념. (토머스 암스트롱(2019). 『부모와 교사를 위한 신경다양한 안내서: 증상이 아니라 독특함입니다』. 새로온 봄. p.34~39)
  6. 환경의 중요한 정보를 정확하고 빠르게 적극적으로 찾는 능력
  7. 한국웩슬러아동지능검사 5판(K-WISC-V): 만 6세 0개월부터 만 16세 11개월까지 아동의 인지적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개인 지능검사도구. 지적 영역의 능력 수준·인지적 강점과 약점 등을 포함하는 전반적인 기능에 대해 포괄적으로 진단한다. 전체 IQ뿐만 아니라 언어이해, 시공간, 유동추론, 작업기억, 처리속도 IQ 점수를 제공한다. 다양한 임상 장면에서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도구이다.
  8. ‘경계선 지적 기능’, ‘경계선급 지능’ 등으로 표현되며 일반적으로 웩슬러지능검사 결과 전체 IQ가 70-84에 해당할 때를 의미한다. 경계선 지능을 가진 아이들은 ‘느린 학습자’, ‘천천히 배우는 학생(2016년 제정된 [전라남도교육청 천천히 배우는 학생 교육 지원 조례]에 표기됨)’으로도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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