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3-03-16 10:51
| 사건이 불거져야 정부는 움직인다. 논란 중인 학폭에서도 그 행태는 여전하다. 이번에도 ‘근절’을 역설하고 있지만, 사회 문화적인 ‘속병’을 ‘피부 트러블’ 다루듯 하고 있다. 대책은 곧 나오겠지만 정부 면피용이기 십상일 테고, 실제에서 희생자인 학교를 해결사로 내세워 막을 것이다. 학교가 막는 데 실패할 것은 번연하고, 거듭 욕먹어야 할 것이다. 잊을 만하면 사건은 다시 터질 것이다. 학폭이 학교에 책임을 미뤄 해결될 문제인지, 근원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사회 문제를 ‘교육화’하는 정책 시늉으로는 학교와 교육만 말리고 비틀게 된다. |
거듭되는 ‘학폭’ 사건
‘학교 폭력’에 세간의 이목이 다시 쏠렸다. 다른 문제들도 대체로 그렇지만, 특히 교육 문제는 분노하거나 개탄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서야 정책 의제로 떠오른다. 학교 폭력 문제를 두고 보면, 1990년대 비로소 정책적인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폭력에 시달리던 학생들의 자살이 그런 변화의 결정적인 계기였다.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 같은 움직임을 기억한다면, 그때 일이다. 1995년 정부는 ‘근절대책’을 발표했으며, 때마침 일어난 ‘교육개혁’의 흐름을 타서 2004년에는 ‘학교 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학폭법)도 제정되었다.
그렇게 해서 법석은 이내 잦아들었지만, 2011년 말,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다시 일어났다. 새로운 문제를 만난 듯 놀라며, 정부는 얼른 다시 움직였다. ‘학교 폭력 불관용 원칙’을 역설하며 몇 달 안에 학교 폭력 ‘근절대책’을 내놓았다(2012년 2월). 16개 시도교육감도 ‘학교 폭력 근절을 위한 결의문’으로 동조했다.
정부와 교육 지도자들의 대응은 결기 어렸지만, 사건 재발은 막지 못했다. 지난 2월 말, ‘학폭’ 사건은 다시 불거졌다. 학생의 생명까지 앗아가진 않았지만,1 이번에는 교육의 ‘공정성’ 코드를 건드렸다.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심금을 건드렸다. 폭력의 악행을 저지르고도 가해 학생은 버젓이 ‘서울대’에 입학했고, 피해 학생은 대학 진학조차 하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그렇게 일이 돌아가는 과정에서 ‘권력’이 작용했다는 의혹도 따랐다.
가해 학생의 아버지는 정의를 수호한다는 ‘검사’(당시 서울중앙지검 ‘인권감독관’)였지만, 자녀의 반성을 돕기보다 처벌에서 벗어나게 할 방도를 찾는 데 몰두했다고 한다. 연수원 동기이며 판사 출신인 변호사를 고용해가면서, 아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집요하게 소송을 활용했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전학’이란 무거운 처벌을 피하지 못했을 만큼, 폭력은 명백했던 듯하다. 그런데 또 엄중하게 다뤄져야 마땅했을 폭력 기록은 학생부에서 석연찮게 삭제되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공분을 살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이 불거지지 않으면 정부 정책은 자찬할 만?
이번 사건이 불거지기 두 달 전(2022년 12월 28일), 교육부는 학교 폭력에 대한 정부 정책의 성과를 자랑하려는 행사를 열었다. ‘학교폭력예방 및 대응 정책: 10년의 성과와 과제’라는 제목을 내건 ‘학교폭력 포럼’을 주최했다.2 2012년의 ‘근절대책’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여겼던 듯하다.3 포럼은 2012년 대책에 따라 생겨난 학교폭력예방연구소가 주관했다. 이 기관은 교육부 지정 ‘정책중점연구소’로 출발해 지난 10여 년 정부 정책을 뒷바라지해왔다.
포럼의 기조 강연은 정책을 호평했다. 당시 대응의 결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가 주도해서 [학교 폭력 실태] 전수조사를 시행”하게 되었으며, ‘학교전담경찰관’ 제도도 생겨났다고 열거했다. 대책 시행 후 10년간, ‘인성교육 중심 학교폭력 예방 강화’, ‘학교폭력 대응 안전 인프라 확충’, ‘피해 학생 보호 및 치유, 가해 학생 선도’, ‘학교의 교육적 해결 역량 제고’, ‘전 사회적 학교 폭력 예방 및 대응 생태계 구축’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꼽기도 했다.
이번 사건이 아니었다면, 정부 정책에 대한 ‘대학’ 연구소의 평가는 적절했다고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폭 문제도 정부가 더 이상 건드릴 이유 없는 사안으로 흘러갔을 것이고, 정책 담론의 저변을 이루는 우리의 관념 역시 되돌아볼 이유 없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사건은, 행사를 주최하고 주관한 교육부나 연구소도 그렇고, 포럼의 이야기들까지도 무색하게 만들었다. 지금 논란되고 있는 사건은 말하자면 포럼에서 나열했던 ‘성과’가 거두어지는 가운데 일어난 셈이다. 사건은 포럼이 내세운 성과를 부인하고 있다. “피해 학생의 보호와 가해 학생의 선도”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 같지 않으며, “학교의 ‘교육적 해결 역량” 역시 제대로 발휘된 것 같지도 않다. 가해자 부모가 보였다는 소송 행태는 “전 사회적 학교 폭력 예방 및 대응 생태계”가 구축됐다는 평가도 어색하게 만든다.
사건이 ‘영혼 없는’ 정부를 움찔거리게는 하지만
10여 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교육부장관은 이번에도 다급히 ‘현장 전문가 간담회’도 가졌고 “대책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정부는 곧 다시 ‘학교 폭력 근절대책’을 내놓을 것이다. 이번에는 대책이 전과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러리라고 기대하면 순진한 짓이 될 터이다. 역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논란 법석은 곧 가라앉을 것이다. 대책을 찾는 부산한 움직임도 곧 잦아들 것이다. 어쩌면 정부도 이미 이런 사실을 감안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두 번 경험하는 게 아니니 말이다. 곧 소나기가 지나가리라고, 당분간 열심히 일한다는 외양만 갖추자며 버틸지 모른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다급하게 끄듯 이루어지는 정책 행위가 깊이 있게 이루어지긴 어렵다. 더욱이 여론 뭇매의 순간만 모면하려는 계산까지 끼어든다면, 정부 정책은 주기적인 의식(儀式)처럼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악의 없이, 일련의 작업을 ‘정치적으로’ 꾸미기에 치중할 공산이 크다. 이런 짐작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다. 학교 폭력에 대한 이제까지 정책 논의는 늘 터진 것을 황급히 봉합하는 데로 모였다. 대학에 ‘정책중점연구소’까지 설치해 ‘기초 연구’와 ‘실질적인 정책 대응’을 도모했다지만, 담론과 정책의 부박함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앞에서 얘기한 포럼이 보여주듯, 정책에 참여하는 학자나 전문가들도 정부의 ‘프레임’(의전)을 따라 행사 치르듯 동조하는 데 그쳤다.
정부가 정책으로 다루게 되는 ‘문제’(‘국정과제’)는 보통 여론을 흔드는 사건이나 정당(후보자)이 득표용으로 마련했던 ‘공약’에서 온다. 그 문제란 것에는 다중의 호응이 필요한 만큼, 문제의 정의(定義)는 ‘상식선’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여론과 정치에서 문제 지적은 심오하고 복잡하면 안 된다. 그렇게 문제는 통념에 따라 규정되고, 정부는 그렇게 규정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혼 없는 조직’답게 움직인다. 문제(정책 의제)가 피상적이고도 범박하게 규정되어 들어오지만, 정부는 더 깊고 명료하게 재고하며 근본적인 대책을 모색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여론을 빨리 잠재우고 ‘국정과제 이행 실적’을 늘리는 데 주력한다. 늘 다급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인상이 박히도록만 움직이는 모양새이다.
경악할 사건이 터진 후에 참회 의식을 치르듯 만들어져 온 학교 폭력 정책은, 그렇게 임기응변의 속성을 벗어나 보지 못했다. 어설펐던 본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로, 정책은 30년 가까이 미봉으로 버텨온 셈이다. 이제까지 정부가 손을 놓고 있지도 않았고, 대책에 들인 예산도 작지 않았지만, 정부 정책의 역학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문제의 뿌리를 찾으며 ‘근절’에 점근하려는 대책을 강구하는 데 요구되는 동력이 정부에는 없다.
정부 정책은 이제까지 ‘학폭법’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법률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그 틀은 예방과 대책의 구조로 짜여 있다. 조금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예방’에서는 폭력에 대한 인지와 대응 그리고 ‘인성교육’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대책’에서는 사건처리의 절차 규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폭력에 대해 (학생 학부모 교원) 모두 경각심을 갖도록 하고, 사건이 터졌을 때 어떻게 처리할지 ‘가이드’하려는 것이 이제까지 정책의 요체이다. 불거지는 ‘사건’을 규제하는 데 몰두하는 틀이다. 예방의 측면도 있다고 하겠지만, 그 부분 역시 사건이 불거지지(커지지) 않게 막아보려는 데 치중하고 있다. 이를테면, 관련 당사자들이 사건이 터질(터진) 낌새를 알아챌 수 있게 하려는 조치가 핵심이다.
지금 다시 뜨겁게 논란하고 있지만, 빈궁한 학교 폭력 정책이 이번 계기로 크게 나아지지는 못할 것이다. 기존 틀 안에서 폭력을 좀 더 ‘엄하게 다스리는’ 방향으로 살짝 움직이는 데 그칠 것이다. 그럴 기미는 이미 보인다. 논란은 현재 사건처리 과정과 가해자 처벌에 집중하고 있다. 부모 권력이나 소송의 꼼수 같은 게 개입해서 사건처리가 부패하고 불공정해지는 데 대해 분개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고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 버젓이 활개 칠 수 있게 된 데 대해 더욱 분개하고 있다. 논의 쟁점이 이렇게 모일 때 정책이 갈 방향은 뻔하다. 사건처리 절차의 ‘구멍’을 때우고, 처벌을 더 두렵게 여기도록 보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처가 효과 없지는 않을 것이다.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높이고, 학생이나 학부모도 조금 더 신경 쓰게 될 터여서 사건이 당분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정도의 ‘반짝’ 효과는 이전 ‘근절대책’들도 낼 수 있었던 것이고, 역시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머지않아 사건의 소란과 함께 잦아들고 말 것이다. 그리고 학교 폭력은 물론 여전하게(더 고질적으로) 지속될 것이다.
폭력을 학교의 법제로 다스릴 수 없어
학교 폭력 문제를 깊게 논의하고 대책을 근본적으로 모색한다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학교 폭력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고쳐 잡아야 할 것이다.
지금 학교 폭력 이야기와 정책을 지배하고 있는 관념은 법제에 박힌 대로 굳어진 것이다. 학폭법이 정의하는 바(제2조)에 따라 학교 폭력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며,4 그 법과 관련 제도들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규정한다. 지금의 관념으로는 학교 폭력을 오직 ‘법대로’ 논의하고 처리하면 되는 ‘형사’ 사안으로 간주한다. 폭력 행위에 윤리적(교육적)이고 문화적인 함의가 전혀 없는 것처럼 취급한다. 일반 사회 범죄를 형법으로 다스리듯, 학교 폭력은 학폭법으로 다스리면 될 것이란 본새이다.
이제까지 학교 폭력을 다뤄온 법제나 담론은 세 개의 핵심어로 집약할 수 있다. 개인, 행동 그리고 안전이다. 즉, 학교 폭력은 가해자나 피해자 등으로 지칭되는 ‘개인’에 관련된 문제이며, 그것이 ‘행동’(밖)으로 드러났을 때 비로소 문제가 되고, 그런 개인행동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자녀들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이란, 바꾸어 말하면, ‘인성’이 안 좋은 ‘나쁜 아이’가 ‘선량한 우리 아이’를 해코지하는 사태를 가리킨다. 학교 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그래서, ‘인성교육’을 하고 나쁜 행동을 단속하는 게 상책이 된다. 그러나 이런 접근으로는 ‘속병’을 ‘피부 트러블’로 진단하여 처방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태만 반복하게 될 것이다.
폭력은 ‘학교’라는 경계를 긋는다고 해서 학교 안에 국한되는 문제일 수 없고, 개인이 표출한다고 해서 인성과 가정교육 문제만일 수 없다. 폭력은 인간 사회를 넘어 모든 생물의 존립 질서에 잠재해 있기 마련인 요소이다. 그것은 생존의 일상에서 늘 꿈틀댄다. ‘자연’의 폭력성은 우리 모두 타고날 터이고, 그 외현은 각자가 놓이는 ‘사회’를 무척 닮을 것이다. 사회는 구성원 사이에 있는 어떤 ‘차이’를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는 규준으로 삼고 또 ‘우열’의 잣대로 삼을지 안내한다. 학생들은 학교 안팎 하루하루 상호작용에서 그런 규준과 잣대를 익히고 또 나름대로 만들면서, 학교에서만 아니라 어디에서건 그 ‘사회화’ 결과를 자연스럽게 적용한다. 폭력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온다. 학폭의 사태에서 종종 가해 아동이나 학생이 바로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개인 안에서 분출되어 나오는 외양을 띠지만, 근원적으로 사회 문화적인 데서 비롯된다. 개인 탓보다 사회 탓인 데가 크며, 드러난 데서보다 가려진 데서 더 심각하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안전의 사안이 아니다. 몸보다 마음을 더 깊이 할퀸다. 이제까지 정책에서처럼, 법으로 범인 다스리듯 학교 폭력을 해결하려 든다면, 그것은 그저 정책 시늉이 될 뿐이다. 법으로 사회 질서를 그런대로 유지하듯, 학교 질서도 견디고 지낼 만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학교는 일상의 마찰만 막으면 그만인 속세가 아니다. 학교에선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은 ‘법’으로 다스리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다스리도록 ‘얼’을 일깨워야 하는 과업이다.
학교와 교육을 염두에 두고 폭력을 다룬다면, 개인이나 학교 안보다 우리 사회를 우선 살펴야 마땅하다. 우리가 살면서 개인 간 차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고르지 않은 권력과 권위 그리고 재산을 어떤 관념으로 정당화하는지 살펴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외모나 종교 그리고 장애나 학력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되돌아보자. 외모 차이를 우열로 치환하는 행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대학 입학 전에, 특히 여학생들이, 성형과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것은 왜일까? 한국의(‘K’) 화장과 성형이 ‘세계 최고’라는 속설은 무엇을 뜻할까? 그 이면에 폭력(‘외모 비하’)은 없는가? 이슬람 사원이 ‘우리’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어떻고,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학교 또한 ‘우리’ 동네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또 어떤가? 기독교회는 놔두면서 이슬람 사원은 안 된다는 ‘구분’은 폭력적이지 않은가? 일반 학교는 ‘인프라’라면서 특수학교는 ‘혐오시설’로 취급하는 행태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지역의 대학을 ‘지잡대’라 부르고, 같은 대학 구성원이지만 다른 전형 트랙이나 지방 캠퍼스로 입학했다고 해서 ‘벌레’(蟲) 취급하는 ‘엘리트’들의 행태는 어떤가? 모두 우리 사회가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행태들이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으로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폭력은 자연스러운 생활이 되고 심지어 ‘도덕적인’ 것이 되기까지 한다.
이번 사건의 이야기들도 기존 정책의 한계 시사해
폭력을 학교와 개인이라는 범주로 제한하고 또 밖으로 드러난 행위에 불과하다고 처리하고 말면, 그런 정책이 얼마나 무력한 것이 될지는 현재 논란이 되는 사건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많이 보도된 두 개 이야기만 보자.
우선, 이미 얘기했지만, 학교에서 사건이 불거졌을 때 가해자 부모는 자녀를 옹호하고 징계를 막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학생이 덩달아 뉘우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는 놀랍지도 않다. 이런 양상을 그 가정에 국한된(‘가정의 잘못된 인성교육’) 문제라고 치부하고 말면 될까? 자녀가 고등학생이고 오직 대학 진학 문제에 골몰하는 국면에서, 학교생활기록부의 기록이 어떻게 될지부터 타산하지 않을 학생과 부모는 과연 얼마나 될까? 오해는 말기 바란다. 논란되는 부모와 학생을 비호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들의 행위는 모두가 혀를 내두를 몰지각한 작태가 틀림없다. 다만 더 나은 정책을 위해서, 앞으로 다시 생겨날 게 뻔해 보이는, 그런 행위에 우리 사회의 묵인이 깔려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하리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의 에피소드는 사건이 일어난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이야기이다. 국회에서 일어난 일이라는데, 특정한 신문을 읽는다고 해서 급우를 ‘빨갱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폭력이잖느냐는 한 의원의 질문에, 그는 그렇게까지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고 여긴다고 답했다 한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이고 “그런 용어들을 쓸 수 있는 건 아이들의 자유”라고 덧붙였다고도 한다.5 여기에서 교장 선생님의 인식이나 안목을 다시 성토하려는 건 아니다. 그의 발언 밑에 똬리 틀고 있는(어쩌면 그의 것만은 아니라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있을) ‘폭력’이나 ‘자유’에 대한 ‘상식’을 들여다보자는 뜻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는 ‘너무나 일상적인’ 용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일상적이라고 해서(익숙해졌다고 하더라도) 그런 표현의 폭력성이 ‘효력 정지’되지는 않는다. 그런 말은 여전히 ‘차이’를 손가락질하는 것이고, ‘우리’가 아닌 ‘너희’를 구분하고 배척하는 언어이다. 차이를 존중하지 않으며, ‘우리’ 패거리에서 내쫓는 속성을 여전히 담고 있다. 아무리 유행하더라도 그런 말을 ‘자유롭게’ 내뱉는 것은 폭력이다.
다른 한편, 교장 선생님의 발언은 학생이 어떻게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양심에 가책 없이) 쓰게 되는지 알려준다. 학생들은 일상에서 듣고 체득한다. 교장 선생님(교육자!)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정도인데, 학생이면 더욱 쉽게 그런 말의 폭력성에 둔감해질 터다. 말하자면, 그런 폭력의 언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데에, 학생의 나쁜 인성과 그 가정의 뒤틀린 교육만 작용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익숙한 일상’이 그런 행위를 용인하고, 심지어 조장하고 있다. 폭력은 학교의 울타리로 가두어 구획하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범법’ 학생들의 인성이나 가정만 탓해서 넘길 일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이제까지 정책이 그래왔듯이, 학교 안의 폭력을 법대로 단속하며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게 되면 다행한 일이 될 것이다. 학교가 더 나은 교육의 장이 되고, 그래서 사회가 더 살 만해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은 접어야 할 것이다.
‘공정한’ 평가와 변별이 폭력을 부추기는데
폭력 문제를 깊고 넓게 보아야 한다며 개인(가정)과 학교에 면죄부를 주면서 ‘사회’만 탓하고 있다고 비난할지 모르겠다. 그런 있을 수 있는 오해에 답하고, 또 학교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는 만큼, 글을 맺기 전에 학교와 정책에 대해서도 짚어야 하겠다.
오래전부터 지적되어왔듯이, 학교는 본디 폭력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종종 수용소나 교도소로 비유되는 학교에 학생들은 다분히 비자발적으로 수용되며, 그 안에서의 삶은 누리기보다는 견디는 양상을 띤다. 따돌림(‘이지메’)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일본에서는 학교의 폭력성을 흔히 압력밥솥에 비유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상황에 차이는 없다. 학생들은 압력(폭력)에 눌려 터지기 직전인 상태에 있지만, 학교는 ‘총체적 규율기관’(total institution)으로서 억압을 그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학교 폭력은 어쩌면 학폭법의 망 밖에서(또는 그것에 저촉될 수면 바로 아래에서) 일상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학교에서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흔한 이야기를 짚어보자. 치열한 경쟁이 폭력을 낳는다는 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서로 돕게 하기보다 경쟁 상대로 적대시하도록 학교 문화가 부추길 때, 그 안에 속박된 학생들의 폭력성은 필시 커질 것이다. 좀 더 미시적으로 그런 증폭이 어떻게 일어날지 살펴볼 때, ‘상대평가’와 ‘변별’의 기제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학교 교육에서 상대평가와 변별은 거의 절대적인 원칙이다. 심지어 교육의 정의(正義, ‘공정성’)를 지탱하는 원칙으로도 거론된다. 그러나 그런 원칙의 기제는 학생 사이에 ‘차이’를 작위적으로 만들어 내며, 그런 차이를 근거로 사회적 위계를 짓고, 위계에서 ‘낮은’ 구성원들을 손가락질하며 배척하도록 이끈다.
상대평가는 이른바 정상분포를 전제한다. 변별은 그 분포에서의 위치를 ‘낙인’하는 작업이다. 정상분포의 오른쪽(+) 꼬리는 ‘엘리트’의 자리이며, 가운데는 딱히 관심 둘 이유 없는 ‘일반학생’의 자리이고, 왼쪽 꼬리는 멸시되어 마땅할 ‘느린 학생’이거나 ‘특수학생’의 자리이다. 이렇게 ‘좌표 찍는’ 평가와 변별은 모든 학생이 고르게 우수한 ‘좋은’ 학교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많은 학생이 학업 적응에 고군분투하는 ‘나쁜’ 학교에서도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 돼 있다.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은(교원들까지도) ‘분포상의 좌표’와 ‘변별의 낙인’을 따라 우열을 규정하고, 존중과 멸시의 대상을 ‘객관화’한다. 그렇게 ‘객관적’이 된 표지를 경계로 학생들은 뭉치고 배척하면서 싸우기 마련이다. 드러나게 싸우지 않더라도, 경원이나 경멸의 마음을 품지 않고는 배겨날 도리가 없게 된다. 상대평가와 변별이란 원칙은 이런 현실을 오랫동안 용인하며 부추겨왔다. 학생 사이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일상으로 둔갑시켜 왔다. 그렇지만 그런 원칙을 문제 삼고, 그런 원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들여다볼 기미는 전혀 없다.
‘경제주의’와 ‘교육화’로 학교 교육의 본연은 퇴색
더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할 문제는, 학교 교육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경제주의’ 통념에 있다. 1990년대를 넘어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학교 교육을 상품으로 규정하는 생각이 굳어졌고, 학부모(학생)는 그런 상품의 소비자로 규정되었다. ‘다양화’니 ‘자율화’니 ‘선택권’ 확대니 하는 이름으로, 사실 공허하지만 말 자체로는 지당하게 여겨지는 슬로건들로 포장하며, 정부가 나서서 그런 경향을 심고 키워왔다. 이제는 ‘소비자 만족’이 교육 정책의 지상 목표가 됐다.
학교(교사)와 학부모가 공급자와 소비자로 갈리면서, 학생의 심성 함양을 위해 학교와 가정이 협의하고 힘을 합칠 ‘교육적’ 이유는 증발했다. 심성 함양이란 ‘상품’은 소비자가 바라는 상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1등급’을 만드는(또는, 취업에 문제없을 ‘인적자원’을 만드는) 서비스이다. 그런 서비스 상품이 공급되지 않는 경우 학교라는 공급자를 기꺼이 버릴 의사도 있다. 여건만 되면, ‘일타강사’가 포진한 학원으로 자녀의 적을 옮길 것이다. 이제 학교는 사사로운 업체이고 교사는 종업원이거나 노예(敎僕)인 형편이 됐다. 학교와 교사의 과제는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일이고, 피할 수 없이, 그것은 학생의 등급을 올리는 데 주력하는 일이다. 학생들의 심성은 학교(교사)가 걱정할 일이 더 이상 아니다. 학교 폭력실태 조사에서 대부분 교사가 ‘가정의 인성교육’을 탓하는 걸 보는 일은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정부는 꽤 오랜 기간의 정책을 통해 이런 문화와 제도의 환경을 구축해 놓았다. 그래 놓고 정부는 툭하면 폭력 예방을 위한 ‘인성교육’을 학교에 요구한다. 자가당착이면서 무책임한 노릇이다. 그런 프로그램(상품)을 ‘어울림’이니 ‘Wee’(‘We + education’와 ‘We + emotion’의 합성어)니 하는 낯간지러운 조어로 포장한다고 해서 잘 팔릴 리 없다. 교육의 장(場)이어야 할 학교는 그런 상품을 팔아야 할 시장(市場)이 되면서 더욱 황폐해져 왔다. 정부 정책에 딸린 이른바 인성교육 프로그램들은 먹혀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성 함양의 과업 자체를 사회가 냉소하도록 만들었다. 대중의 코드에 맞춘다고 그 과업에 ‘인성교육’이란 궁색한 명패를 다는 데서부터 사달은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심성 함양은 학교 교육의 원초적 이념(ideal)이며, 공동선(公同善)을 추구하는 전제이다. 경제주의 정책은 시장과 효율의 이름으로 그 이념과 전제에 고답적이란 낙인만 찍었다. ‘인성’을 외치는 정책으로도 그랬다.
한편, 거듭 얘기하거니와, 폭력은 사회의 악이다. 그것은 학교 울타리를 거침없이 투과하는 사회의 일상에서 비롯되며, 그것의 악성은 학교 울타리 안팎에서 다르지 않다. 학교와 사회의 폭력은 떨어져 있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폭력은 사회에서건 학교에서건 우리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에서 다스려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폭력 문제의 책임을 계속 학교에 떠넘겨 왔다. 이런 행태는 사실 다른 많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반복되어 온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유행이어서 이제는 이름까지 생겨났다. ‘교육화’(educationalization) 풍조이다. 학교가(교육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 문제인데도 학교가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교육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뒤집어씌우는 경향을 비판하는 말이다. 학교 폭력에 대한 정책 행위는 늘 전형적인 교육화 행태였다.
정부의 교육화 습성은 학교와 교육을 더욱 곤경에 몰아넣는다. 사회 통념은 종종 사회 문제의 인과(因果)를 가리는 데 실패한다. 이런 현실을 기화로, 정부는 사회 문제가 학교(교육)에 접점만 있으면 그걸 해결할 책임이 학교에 있는 것처럼 떠넘기곤 한다. 사회 불평등에서부터 ‘국제 경쟁력 제고’까지, 그리고 사교육비 과다에서부터 ‘방과 후 돌봄’까지, 학교에는 해결 과제가 나날이 쌓여가지만, 대체로 그것들은 학교의 기능과 역량 밖의 것들이다. 학교에 미뤄놓고 정부는 면피하지만, 학교는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며 지탄받게 된다. 나태하거나 무능하다고 평가되고, ‘동네북’이 되고 ‘개혁 대상’이 된다. 학교와 교육에 대한 사회의 신뢰는 바닥 모르고 추락한다. 학교와 교육에 대한 사회의 지지도 갈수록 인색해진다.
우리의 신화적인 교육열과 투자는 ‘교육 이득’을 사적으로 손에 넣게 되는(privatization) 한에서만 일어난다. 그런 사익을 보장하겠다는 정책 공약은 종종 경제주의에 근거하고, 교육화의 문법으로 작성되어 왔다. 위에서 얘기했듯 그런 공약은 깨지기 마련이었고, 때마다 학교는 욕을 먹어야 했다. 학교는 ‘존재 이유’에 없는 일들, 해낼 수도 없는 일들을 제 일로 떠맡아야 했고, 그래서 실패하곤 정부를 대신해 무능하단 책망을 받아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신뢰를 잃으며 학교는 갈수록 곤궁해져 왔다. 학교의 교육적 본연과 공동선의 이념을 정부가 ‘정책으로’ 훼손해 온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학교 폭력의 논란 속에서도 정부는 여전히 그런 정책 기조를 붙들고 있다.
정부는 다시 사회적 난제의 해결사로 학교를 정책 무대에 올릴 참이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무대로 호명될 때마다, 적어도 사회 장치로서 학교의 존립 정당성은 더욱 확고해질 터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질겨질 생존력은 본디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며 얻게 된다. 교육이 참으로 암담해질 일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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