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3-03-02 10:09

| ‘기획칼럼 – 2028 대입제도’의 연재를 매듭짓는다. 2028학년도 적용을 겨냥해 예정되어 있는 대입제도 개편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는 데서 글을 시작했고, 개편을 둘러싼 이제까지 논란이나 교육부의 움직임 모두 실망스럽다고 개탄해 왔다. ‘미래형’ 개편이라 광고하며 정부도 별렀던 만큼, 근본적인 변화를 혹시나 하고 바랐지만 결국 기대를 접어야 하리라고 예견했다. 연재를 마치면서, 현재 대입제도의 해악을 다시 확인했다. ‘교육의 흡혈귀’라고까지 비유했다. 엄청난 해악이 어떻게 우리 교육 이야기와 정책에서 간과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면, 우리가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
대입제도, 교육의 얼을 빼
한국에서 대입제도는 학교 교육의 ‘흡혈귀’이다. 거칠고 모진 비유이지만, 교육 현실을 이야기하는 데 여러모로 알맞다. 대입제도는 학교 교육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 피 빨린 학교 교육은 제정신이 아니다. 얼이 빠져 있다. 교육 본연의 가치가 온통 대입제도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학교 교육의 ‘존재 이유’는 오직 대입에 기대며, 그 존립의 성과는 대입전형이 산출하는 ‘종합 점수’로 간추려진다. 학교 교육은 결국 그 점수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되었다.
교육의 영혼을 앗기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고) 한국 사회는 흡혈귀의 횡포와 그로 말미암은 희생에 오히려 열광한다. 수능 결과에 대해선 ‘만점자’부터 찾아 탄복하고 우러르며, ‘입결’에 대한 관심은 오직 서울대로 모은다. 교육 ‘시즌’은 고등학교 ‘랭킹’ 이야기로 매듭짓는다. 어쩌면 수능 만점자는 가장 큰 희생을 치렀을지 모르며, 학교 랭킹은 흡혈귀에게 ‘헌혈’한 순서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정부도 나서서 그런 열광을 조장한다. 정부가 만드는 ‘게임’의 규칙(대입제도)이 그렇다. 학교 학습과 활동의 피(의미)가 모두 대입제도로 빨려들도록 ‘빨대’를 꽂고 있다.
게임에 휘말린 학생들은 수능 겨냥 문제 풀이와 학생부 기록을 꾸미는 데 ‘올인’한다. 학교나 가정도 헤어날 길 없다.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학생(자녀)을 지원하고 응원해야 할 뿐이다. 미래의 구원(합격)에 대한 염원은 절실하다. 학교 교육은 비유컨대 그런 염원과 ‘봉헌’이 모이는 ‘올림픽’이고 제사이다. 때로 ‘신’이라고도 불리는 ‘일타강사’나 ‘컨설턴트’들의 현혹도 그 제단에서 한몫한다.
문제 심각해도 흔들리지 않는 대입제도
비유로 풀어보면 선연해 보이지만, 대입제도라는 탈을 쓴 흡혈귀의 정체는 쉬이 벗겨지지 않는다. 대입제도는 완강하게 굳어진 습관이다. 그 기본 얼개는 3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다. 부모가 자기 경험에 비추어 자녀 대입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묵었다. 학교와 대학의 현직 교원들도 반 이상이 현재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입시’를 거쳤을 듯하다. 대입제도는 이제 규칙이 아니라 학교 교육을 이야기하는 ‘개념 틀’(패러다임)이 되었다. 그렇게 인식에 녹아든 제도의 이면에서 숨은 악덕의 흡혈귀를 잡아내기는 쉽지 않을 터다. 누군가 잡아내더라도, 혼 잃은 사회가 과연 그 사실을 수긍할지도 의문이다. 대입제도에 흡혈귀의 악질(惡質)이 스며있다고 말하면 주변에서 요설이라고 핀잔할지 모른다.
대입제도 문제에 대해 방어적이기까지 한 데는, 우리 사회가 젖어있는 교육관(묵은 ‘패러다임’) 탓만 있는 게 아니다. 제도가 굳어져 오는 동안 구축된 기득권의 체계가 제도의 흔들림에 완강하게 저항할 토대가 된다. 이때 저항은 선동이 필요 없다. 그것은 사회 문화적 관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대입제도 변화는 그때그때의 누수를 막듯 야금야금 이루어져 왔지만, 그것이 지속되어(특히, 잘못 흘러서) 관성의 분수령을 넘자 완강하게 고착(‘lock-in’)되었다. 이제 그것을 고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긴 시간의 정치(精緻)한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대입제도가 흔들릴 때 어떤 저항이 일지 상상해보자. 사교육 시장은 우리나라에서 작지 않은 노동 시장이다. 그 시장이 위축된다면 적잖은 실업자(특히 청년 실업자)가 생길 것이며, 경제 통계에 작지 않은 타격을 줄 것이다. PISA와 같은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우리나라 순위가 떨어질 수도 있다. 정부가 기꺼이 감수할 변화들이 아니다. 정부가 제도 개혁에 미온적일 만하다. 자금력을 갖춘 사교육업자들의 로비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들을 옹호해 줄 국회의원이나 관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일부 업자들은 ‘대입 전문가’로 탈바꿈하여 정책 결정에서 직접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기 이익에 반하는 제도 변화를 그냥 넘길 리 없다. EBS라는 공영방송도 떠올려보자. 거의 동시에 ‘수능’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대입제도는 EBS에게 중대한 재원이자 일감이다. 그런 제도가 움직일 때 중립적으로 보도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대입제도의 흔들림을 반기지 않을 이유는 학부모에게도 있다. 제도가 바뀌면 자녀를 키우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커진다. ‘골치 아픈’ 일이다. 왜 하필 내 아이 때에 ‘이 난리냐’는 원성을 내놓기 마련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입제도와 그것에 딸린 시험의 전통은 (공식적인 국가 교육과정이 어떻게 바뀌건 상관없이) 학교 교육과정을 실지로 규정한다. 학교 수업은 오랫동안 그 전통에 맞춰져 왔다. 제도가 바뀐다면 ‘루틴’을 깨는 성가신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변화를 학교에서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학교와 ‘학원’은 어느덧 공생관계를 이루었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학원에서 배운다는 전제 아래 수업한다는(때로는, 그렇게 ‘수업해야’ 한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학부모에게 자녀를 학원에 보내도록 조언한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이런 관성들이 무너지지 않으려고 맞설 것이다. ‘근본적인’ 대입제도 개편에 ‘사회’가 합의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제도 개편 예정해 놓고 여전한 논란, 여전한 교육부
대입제도를 개편할 정책 일정은 이미 잡혀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2028학년도부터 적용할 대입제도가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학교 교육과정이 달라지고, 고등학교에서는 과정을 이수하는 제도도 ‘학점제’로 바뀐다. 대입제도는 최소한 이런 변화에라도 맞춰 조율되어야 한다. 교육부도 개편을 꾸준히 예고해 왔다. 그것도 ‘미래형 대입제도’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꽤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광고해왔다.
교육부 광고는 여전히 빈말이 되고 있다. 대입제도가 근본적으로 방향을 틀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접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선 앞선 글들에서 많이 얘기했다.1 이 글 앞에서도 더 부연했다. 근본적인 개편을 위해서는 문제부터 볼 수 있어야 하지만, 교육부 주변에서 그런 기미는 찾아볼 수 없다. 최근 돌아가는 논란에서만 봐도, 언론 매체는 두말할 것 없고, 개편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교육부가 여전한 정책 관성을 드러내고 있다. 여론 눈치를 보면서 방어와 모면의 계책만 찾고 있다. 제도를 ‘안정시킬’ 생각에 차서, 교육 걱정을 떠올려보지도 못하는 듯하다.
지금 대입제도를 둘러싼 논란은 이른바 문과 침공이라는 ‘문제’를 두고 뜨겁다. 예상했던 일이다. ‘공정성’이라는 예민한 논점을 자극할 사안이어서, 필경 뜨거운 이슈로 부상할 수 있다고 이미 얘기했었다. 중요한 것은, 이때를 계기로 대입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논의를 시작하는 데 있다고 얘기했었다.2 그러나 교육부부터 지금 주어진 계기의 가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문과 침공 문제에 대해 드디어 교육부가 첫 제도적 반응을 보였다. 이른바 ‘고교교육 기여대학 지원사업’의 계획을 통해서다. ‘교육부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그 계획에서 “필수 응시과목 폐지 등을 유도해 문과생의 불리함을 해소하려는 취지”의 요구를 대학들에 했다.3 이를테면, 미적분이나 기하 그리고 과학탐구에 응시하지 않은 ‘문과생’이라 하더라도, 의대를 포함해서 ‘이과생’ 영역에 지원할 수 있게 대입전형 요강을 바꾸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실망스럽게도, 이런 대책은 없느니만 못할 뿐만 아니라, 교육부 스스로 추진해 온 정책의 흐름에서 보더라도 자가당착이다.4
문과 침공 논란을 빚고 있는 이른바 통합형 수능은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통합’은 학생들이 교육과정을 융합적으로 이수하도록 유도하려는 시도였다. 국가 교육과정은 오랫동안 문·이과 분리를 지양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분리가 여전한 현실을, 수능의 구도를 틀어 바꾸려고 했다. 수능이 시행되고 논란이 일고 있다는 사실은 정책에 결함이 있다는 방증일 테다. 이 지점에서 우선 필요한 작업은 이전 정책 과정 어디에 과오가 있었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부는 이전에 통합을 시도했던 사실조차 기억 못 하는 듯한 행태를 내보이고 있다. 통합 얘기 한 적도 없다는 듯이, 돌연 문·이과 분리를 굳혀 전형하도록 대학을 비틀고 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전히 편협하고 밭은 안목으로 자체모순을 불사하고 있다.
시각을 넓혀 보면, 문과 침공의 논란은 학교 교육과정과 대입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논의할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고등학교 단계에서 문·이과의 경계를 넘어서는 융합적인 교육과정이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학교에서 문·이과 분리가 고질적인 현실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미 시도했던 것처럼 수능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지, 아니면 달리 더 바람직한 대안이 있는지 등등 재고하고 성찰할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대입제도에 관련해서도, 누가 유리하고 누가 불리한지 옥신각신하기 이전에, 대학에(특정한 모집 단위에) 입학하려면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마땅한지 우선 논의해야 한다. 그런데도 대학들은 자격을 구체화하기 위한 연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입학전형 정책에서도 기회주의적이고 두루뭉술한 전략으로 일관해왔다. 대학들은 왜 이런지, 어떤 변혁이 필요한지 역시 통렬하게 짚어보아야 할 문제이다. 교육부 움직임에서 이런 문제의식의 기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번 대입제도 개편의 기회에 근본적인 논의를 시작하자는 말에, 교육부도 그렇고 심지어 학자나 ‘대입 전문가’들도, 순진한 얘기 또 나왔다고 피식거릴 듯하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있는데, 멀리 바라보며 고담준론이나 하자는 얘기냐고 비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는 말 그대로 고담준론이 필요하다.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제까지 대입제도를 포함하여 대부분 교육정책은, 입안되는 대로 바로 ‘현장’에 요동을 가져올, 실무적인 대안들로 꾸며져 왔다. 그야말로 당면과제에 집중해 왔다. 정책들은 ‘묘책’이라고 고안된 것이었지만,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실효를 보장할 만한 근거는 늘 허약했다. 정책 결정자나 그들을 돕는 ‘전문가’들의 간단한 ‘사고(思考) 실험’ 또는 ‘경험치’의 소산일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 ‘문제’ 해결에 급급했다. 그런 정책들이 현실에 유효하며 길게 살아남을 리 만무하다. 조금만 성찰한다면 정책 실패는 불 보듯 뻔하게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책 막음은 거듭되었고, 조령모개나 조삼모사라 비웃음 당해 왔다. 이제 대입제도 개편도 그 길을 갈 참이다.
개혁을 근본적으로 도모해야 한다는 말은 제도를 급진적으로 뒤집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개혁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교육정책이 백년대계이어야 한다는 말은 100년 유지될 실행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100년을 견지해도 올곧게 남을 정신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정신 역시 한번 논의로 완비되는 게 아닐 터이다. 진솔한 담론이 꾸준히 사회에 축적되어야 한다. 대입제도와 그것을 둘러싼 논란은 이제까지 교육의 본연(정신)을 지탱하기보다 오히려 황폐시켜 왔다. 다시 들먹이건대, 대입제도는 교육의 흡혈귀이다.
망각된 교육의 본연부터 찾아야
새롭게 시작한다면 이야기를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5 이 문제에서부터 의견은 분분할 것이다.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거쳐야 할 과정이다. 우리는 그 떠들썩하고 뒤숭숭한 과정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쌓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학교 교육이 어떤 과업인지 새삼스럽게 논의해야 한다. 이전에 우리는 ‘전인교육’이니 인격 도야니 하는 화두를 걸고 학교 교육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험 점수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 연장에서는 학교가 ‘학원’에 대해 부차적이다. 교육은 학원에서 더 잘 이루어질 과업이 된다. 학교가 문을 닫으면 자녀 교육을 위해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코로나 사태’에서 나왔다. 학교에 가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학원(또는 집)에서 학습하는 것이 득점 전략으로써 낫다는 말이다. 지금 대입제도 맥락에서 교육은 득점 전략과 다르지 않다. 학교 교육은 학생부 기록과 수능 점수로 요약되고, 그것들은 모두 대입에 코 꿰여 있다. 학교에서의 학습과 활동 일체가 대입에 비추어서만 의미를 지니도록 제도로 고삐 매 놓았다. 학교 교육이 이렇게 취급되어도 되는가? 많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성찰해야 할 현실이다.
대입제도의 질곡과 학교 교육의 가치를 새롭게 논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공정성’에 대해서도 재고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흔히 대입제도의 최선은 공정성을 견지하는 데 있다고 여겨지고, 이때 공정성은 두 조건으로 갖춰질 수 있다고 여겨진다. 곧, 게임(대입전형)의 규칙을 누구에게나 똑같게(획일적으로) 적용하고, 당락 판가름은 논란의 여지 없이(‘객관적으로’) 내려야 공정한 제도이다. 몇 해 전에는 이 두 조건에 빗대어 수능이 학생부보다 더 공정하다는 항의가 일었고, 결국 제도가 수능 전형을 늘리는 쪽으로 개편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공정성 논란에서 게임의 규칙 자체에 대한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규칙이 어디에서 왔는지, 과연 합당한지 묻지 않는다. 수능 전형이든 학생부 전형이든, 그 규칙이 교육과 사회의 정의에 정합하는지 묻지 않는다.
만약, 지금의 게임 규칙이 (학교 교육의 혼을 휘발시켜 버림으로써) 점수는 높고 인성은 개차반인 사회 구성원들을 늘리고 있다면, 그래도 여전히 그런 규칙으로 대학 신입생을 선발해야 하는가? 또, 그 규칙이 ‘주요 대학’을 노리는 소수의 학생만 염두에 두는 것이어서, 나머지 다수가 들러리로 휘둘리며 교육다운 교육을 못 받게 만들고 있다면 어떤가? 그래도 규칙이 획일적이고 객관적이기만 하면 공정한가? 대입제도의 공정성은 제도 자체의 교육적 성질과 관계없이 확보될 수 없다. 공정성을 논란하려면, 제도에 함축된 ‘교육’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작업을 앞세워야 한다.
대입제도가 학교 교육의 가치(정의<正義>)를 구현하는 데 복속해야 마땅하다면, 학교 학습과 활동이 대입제도로 좌우되는 현실은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다. 이 상황을 바로잡는 일도 시급한 과제가 된다. 거듭 얘기하거니와, 고등학교 교육은 수능 점수와 학생부 기록을 위한 장치가 되었다. 대입에 사활을 거는 우리 문화로 말미암은 현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이전에, 정부가 ‘정책으로’ 그렇게 묶어 놓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대입 정책이 그 족쇄를 채우고 또 점차 조여 왔다. 이제 고등학교의 핵심 책무는 대입전형 자료를 생산하는 일이 되었다. 학교의 본연이 훼손되다 못해 아예 잊혔다. 학교 교육이 무엇이며 대입제도가 그것을 어떻게 뒤틀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되짚지 않을 수 없다. 이어서, 학교 교육을 대입에 묶은 제도적 족쇄를 어떻게 풀어갈지도 궁리해야 한다.
끝으로, 모든 정책 담론을 중앙정부(교육부)가 좌지우지하는 구조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될 수 없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거듭 확인해왔듯이, 현재 학교 교육과 대입제도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심각성은 지난 수십 년의 대책으로 누그러지기는커녕 오히려 깊어져 왔다. 교육부의 완고한 인식 틀로는 악화되는 사태가 문제로 감지될 수도 없었다. 시시각각 흔들리는 여론에 영합하며 ‘당면문제’의 소란을 가라앉히는 데 급급하기 마련인 형국에서, 교육부가 스스로 인식(‘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내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구조적으로 박힌 편협한 근시안은 벗겨지기 어렵다. 교육부 안목으로는 부지중에도 참신한 대안 담론을 배제하게 된다. 정책 담론의 고삐를 정부가 틀어쥐고 있는 한, 교육의 본연을 추구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날 수 없다. 조령모개의 정책 전철은 그렇게 만들어져 온 자국이다.
다른 관료조직에서와 마찬가지로, 교육부로부터 통정성(integrity)과 일관성을 갖춘 정책 행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정부 부처 자체가 정권마다 들여오는 여론받이 정책 의제들을 뒷바라지하는 데서 헤어나기 어렵다.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지 않는가. 부처 안에서도 부서 사이의 연계(협력)보다 단절(경쟁)이 일반적이다. 국가 교육과정과 대입제도가 어그러진 상태로 수십 년 방치되었고, 최근 그 문제에 접근한 ‘통합형 수능’ 시도가 민망할 정도로 실패했다. 이런 사실은 교육부에서 두 범주의 업무가 ‘실’(室)을 달리해 나뉘어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구조적인 한계와 거듭된 정책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책 기조를 규정하는 교육부의 힘은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왔다. 이런 중앙집권성은 어쩌면 일제 식민지기부터 굳어져 온 것일지 모른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여겨지겠지만, 관성을 깰 때는 이미 지나쳤다. 다원적인 숙의와 포용이 정책 결정의 합당한 문법이다. 담론(정책) 독점은 정부가 스스로 벗어야 할 전제적 허물이다.
교육 담론의 확장과 다원주의적 통합을 위해서는 다양한 주체들의 참여와 자율이 전제되어야 한다. 학교와 대학 그리고 지방자치체들의 자율이 용인되고, ‘풀뿌리’ 수준에서 교육 고심이 만연해져야 한다. 교육을 위한 ‘현지(local)’의 사정과 현지의 지혜가 존중되어야 한다. ‘변방’의 목소리가 ‘잡음’으로 처리되지 말아야 한다. 대입제도에 대해서는, 우선 ‘내신 평가’(학생부 기록)와 전형에 대한 획일적 ‘지침’을 폐기해 갈 길을 찾아야 한다. 교사가 학생부 기록과 수능에 굴종하던 버릇을 버리고 전문적 창의를 발휘해야 하도록, 그리고 대학이 입학전형을 위한 나름의 철학과 제도를 궁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가 보지 않은’ 길을 터주어야 한다.
그런 정책이 가당하기나 한가? 교육부에서는 물론 일반 여론도 의구할 것이다. 다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지 모른다. 전문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검증되지 않은 개인이나 기관들을 어떻게 신뢰할 것이며, 그래서 빚어질 혼란은 어떻게 감당할 테냐고 물을지 모른다. 당연한 걱정이고 물론 일리 있는 걱정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정부의 정책 독점을 유지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 교육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수십 년에 걸친 정부의 ‘문제 해결’ 이야기를 따라 걸어온 길이다. 여전히 그런 이야기에 의존해서는 잘못 든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른길을 찾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모르는 길에 대한 불안은 자연스럽다. 불안으로 물러서기보다 그것을 나아갈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새 길을 이야기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게 근본적인 개혁의 출발일 터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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