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4-12-18 11:57
| 계엄 사태를 계기로 나오고 있는 교육 걱정 또는 충고 이야기들을 살핀다. ‘교육적인’ 취지의 이야기들이지만 교육을 해치기 십상이라 비판한다. 정부가 온갖 사회 문제를 학교 문제로 와전시켜 그 해결을 닦달하는 꼴과 다르지 않다고 분석한다. 교육은 본연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교육 위하는 이야기라지만 사실은 교육 망쳐
큰 사건을 두고 교육 이야기가 빠질 리 없다. 어처구니없는 이번 계엄 사태에도 교육은 으레 엮여 구설에 오르고 있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장군 등 이른바 ‘교육 잘 받은’ 엘리트가 어떻게 그렇게 무도하고 비겁할 수 있는지 개탄하며 교육의 ‘실패’를 탄식하는가 하면, 그른 명령에 저항한 일반 병사나 맨몸으로 계엄을 막고 나선 시민들의 민주 의식을 높이 사며 교육의 성과를 인정하기도 한다. 교육이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디로 발전해 가야 할지 훈수하는 이도 많다.
많은 이야기에 일리가 없지 않다. 사람의 행위가 마음에서 나오고 교육이 마음을 만드는 일이라면, 바른길을 벗어난 행위이건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행위이건, 교육은 그것들의 원인으로 지목될 법하다. 사회의 온갖 사태에서 교육이 비판받거나 칭송받을 소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교육을 그렇게 보편한 사회 인자로 취급하는 우리 습관은 교육을 망치기 십상이다. 겉으로 보아 교육에 관심을 두고 중시하는 듯한 이야기이지만, 결국 그것들은 교육을 희생양으로 삼거나 만병통치약으로 남용하게 만들며, 문제 된 사태를 제대로 해결하는 데도 큰 장애가 된다.
‘문제 제기’와 ‘해결 주문’의 이야기가 비대칭이고 흐리멍덩해
교육을 위한다는 이야기가 결국 교육을 구기게 되는 사태는 여러 이유에서 비롯된다. 왜곡되거나 편협한 교육관으로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며 교육의 병을 악화시키는 사례도 있고, 과장되거나 잘못된 인과 판단으로 ‘생교육 잡는’ 사례도 있다. 교육을 탓하며 교육을 사회 문제 해결에 동원하는 이야기들이 품는 결함은 다양하고 많은데, 대체로 그 기저에는 흐리멍덩한 교육 관념이 있다. 특정한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교육을 탓할 때는 ‘교육’을 매우 포괄적으로(그래서 모호하게) 인식하면서, 그 탓을 땜질하기 위한 대책을 주문하면서는 교육을 ‘학교 교육’으로 좁혀 상정한다.
이번 사태에서 이른바 엘리트들을 지탄하는 이야기를 보자. 일상적으로 그들은 모두 ‘교육 잘 받은 이’라고 선망되는데, 그들의 이번 행태가 도대체 무슨 꼴이냐고 한탄한다. 그들은 타인의 입장에 공감하고 협력할 수 있는 정서 기반을 갖추지도 못했으며, 민주 정치의 기본인 협의와 타협의 도량도 없고, 공동선을 추구하려는 윤리의식도 결핍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잘못된 교육을 받은 게 틀림없고, 민주시민을 양성해야 하는 교육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공감하고 협력하는 행위’는 물론 교육의 결과로 일어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때 ‘교육’은 상당 부분 암암리에 벌어지는 현상일 것이며, 어쩌면 거의 생득적인 요인이 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학교 교육의 맥락에서 보면, 교과 수업으로 눈에 띄는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인지(認知) 영역과 달리, 정의(情意) 영역에서는 ‘교육과 행동 변화’의 인과를 명료하게 추적하며 교육 활동을 진척시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의 영역에서는 ‘숨겨진 교육과정’이 더 결정적이라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더 원초적으로 보면, 인간의 공감 성향은 거의 본능에 가깝고, 바로 이 점이 다른 동물과 사람을 구분하는 경계가 된다는 학설도 유력하다.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엄마와 눈을 맞추고 시선과 의도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실험 결과로 밝혀져 있다. 소통의 상황에서 아기의 시선이 엄마의 시선을 따라가고, 아기에게 공을 굴리면 같이 놀자는 뜻을 감지하고 공을 되돌려 굴려 보내는 데 반하여, 동물들에게서는 그런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 소통의 결정적인 매체인 언어도 인간의 이런 잠재성을 바탕으로 학습되는 것이리라 짐작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사회정서 역량’은 어쩌면 제도적인 교육이 가닿을 수 없는 요인들로 결정되는 것일지 모른다.
민주시민 의식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한 분노는 ‘의외로’ 10~20대에서 강하게 분출되고 있고 그들의 ‘저항’ 참여도 한층 두드러지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공교육의 성과’로 여기며 고무되는 교육자들도 볼 수 있는데, 이런 해석은 과도해 보인다. 젊은 세대들에게 민주 사회는 생득 환경이었다. 앞선 세대의 투쟁과 희생 덕분에, 말하자면, 후세대 뇌리에는 민주적 생활 양식이라는 ‘사회-문화적 유전자’가 박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민주적 사고와 행동 양식을 교과 지식으로 익히지 않고 일상에서 체득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시민의식은, 학교 교육의 영향과 관계없이, ‘어른’ 세대들이 전제적 사회에서 자라며 민주주의를 추상적 개념으로만(그것도 다분히 왜곡되게) 익힌 경우와 사뭇 다를 게 틀림없다.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반응하는 강도나 양식이 세대 간에 다르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젊은 학생과 청년들이 발랄하고도 뜻깊게 시위하는 모습이나 무도한 명령을 따르지 않은 젊은 장병들의 용기를 공교육의 성공 사례로 읽는 것은 교육자들의 견강부회일 수 있다. 그런 현상을 해석하는 말로는 ‘교육 효과’보다 ‘문화적 진화’가 더 적절할 듯하다.
그런데도 사회정서 역량이 개인별로 달리 발휘되는 현상이나 젊은 세대의 민주시민다운 행동이 교육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을 테다. 그런 행동이나 현상이 생겨나는 메커니즘을 ‘교육’이라고 이름할 수도 있을 테다. 원인을 콕 짚어낼 수 없더라도, 행동과 사고의 성장 또는 변화를 일으키는 ‘어떤 것’을 교육이라 부르는 게 어색하지는 않다. 그러나 교육을 그렇게 운위할 때 그 의미는 매우 모호하고 경계 없다. 이번 계엄 사태와 관련해서 교육의 잘잘못을 짚고 있는 이야기에서는 대체로 ‘교육’을 그렇게 과대하고 혼탁한 의미로 쓰고 있다.
한편, ‘교육’을 그렇게 느슨하고 흐리게 연상하며 ‘문제’를 제기해 놓고, 정작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할 때는 ‘문제 된’ 교육의 범위를(즉, 책임져야 할 교육 주체를) 매우 분명하게 규정한다. 공식-비공식, 형식-비형식 영역을 망라해 교육을 문제 삼아놓고, 그 문제에 대해 책임져야 할 ‘교육’을 적시할 때는 다루기 만만한 주체로 한정해 뒤집어씌우고 마는 것이다. 학교 교육이 바로 그렇게 주체로 지목되고 결국 희생양이 된다.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들은, 이를테면, 융통성 없는 ‘정답주의’ 교육 관성을 극복해야 한다느니, 민주시민 교육을 보강해야 한다느니, 공동체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느니 하는 것들이다. 이런 ‘학교 중심’ 대안들이 복잡하고 깊숙한 ‘사회 구조’ 문제에 먹힐 리 만무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지목되는 문제들은 학교 교육을 초월해 있거나, 학교 교육으로 어쩔 도리 없이 다른(학교 교육을 포함하여) 수많은 요인과 엉켜있다. 공감 정서나 민주 시민의식 등을 함양하는 데 학교가 독립적으로 의미 있게 작용할 수 있는 여지는 사실 거의 없다.
정부의 정책 행태도 마찬가지로 교육 자해(自害) 초래
이번 계엄 사태를 계기로 교육에 모종의 책임을 묻는 이야기들은 결국 학교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학교를 동원해 해결하자는 모순적인 주장들과 다름없다. 그런 이야기들은 정부가 교육 문제를 규정하고 대책을 내놓는 행태에도 만연하다. 이를테면 지금 교육부는 ‘교육개혁 9대 과제’를 내걸어 놓고1 “교육의 힘으로 사회 난제를 해결하겠습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사회 난제’를 푸는 데 교육을(특히 학교를) 동원하는 게 당연하다는 교육 관념이 선연하다. 그러나 이런 정책 관성 역시 교육의 자해(自害)를 초래한다.
사회 난제란 것들은 요컨대 사회 구성원의 잘못된 사고와 행위로 빚어질 터이다. 그런 문제라면 해결 수단으로 쉽게 교육을 떠올릴 법하다. 교육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관여하는 활동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셈법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제 해결을 위해 동원하게 되는 도구는 ‘학교’이지만, 학교가 해결해야 한다고 부과되는 ‘교육 문제’는 교육 문제가 아니라 ‘사회’ 난제이다. 거듭 이야기하면, ‘교육 문제’라 지목하면서 하는 이야기에서의 ‘교육’과 그것을 이리저리 해결하자면서 하는 이야기에서의 ‘교육’이 현격한 비대칭을 이룬다. 공감 역량이나 민주시민 의식 등과 마찬가지로, 학교 교육이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교육 문제’(사실은 사회 난제)를 ‘교육’ 주체라면서 학교에 안기는 것이다. ‘사회 난제’ 가운데 물론 순수하게 ‘교육 문제’가 없지 않지만, 그렇게 분리해 건져 올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한, 교육(학교)을 동원해 해결하려는 시도는 교육도 해치고 문제 해결도 꼬이게 만든다.
이를테면 교육부가 해결에 나섰다는 저출생이니 정치 경제 양극화니 하는 ‘난제’에 교육이 전혀 관계없지는 않을 테다. 그러나 그 관계는 교육이 독자적으로 그 문제들과 작용하는 구도도 아니며, 교육으로 인해 그 문제들이 증감할 독립-종속의 관계도 아니다. 서로 엉켜있을 뿐만 아니라, 문제들과 학교 사이의 인과나 상호작용의 앞뒤마저도 가려내기 어려운, 말 그대로 복합적인 관계이다. 이런 형국에서 교육을 동원하여 그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장담하는 것은 정치적인 시늉이며, 면피의 획책일 수밖에 없다. 정부는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 있다 떠벌릴 수 있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육(학교)에 그 탓을 돌리면 될 터이다. 정책의 취지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비난하면 되는 것이다. 학교를 희생양 또는 동네북 삼으면 그만이다.
교육 논란과 교육 정책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것이 끊임없이 교육을 한탄하고 학교와 교사 그리고 때로는 학부모까지 ‘개혁 대상’으로 몰아붙여 온 역사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정책으로 문제가 해결된 바가 거의 없었다는 것도 오늘날 문제가 과거 문제와 다름없다는 사실에서 확인하게 된다. 학교와 교육 주체들이 스스로 자정해 온 부분 외에, 순수한 정책 효과를 찾아보기 어렵다.
학교 밖 사회 문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문제를 다룰 수 없는 학교에 책임을 전가해 해결 시늉에 그쳤던 만큼 그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 이런 정책 관성대로라면 앞으로 사회 문제가 정곡으로 다뤄질 전망도 없다. 계속 학교만 닦달하고 문제를 방관하는 셈이 될 테기 때문이다. 정책이 거듭 바뀌고 돈과 노력도 투입되겠지만 문제는 더 악화하며 고질(痼疾)로 깊어질 뿐이다. 학교는 욕만 먹게 되고 말이다.
흔하디흔한 ‘경쟁’ 이야기를 잠깐 보자. 교육열이니 일류병이니 학벌 의식이니 문제를 지목하는 표현이 달라지고 대책도 따라 변이했을 뿐, 문제의 증상은 더욱 중해져만 왔다. ‘대학 평준화’와 같은 과격한 대안도 나와 있지만, 그런 대책으로도 상황에 변화는 없을 것이다. 경쟁이 ‘사회 난제’이기 때문이다. 증세가 교육이란 ‘피부’에서 두드러지지만, 그 근본 원인은 ‘몸 자체’(사회)에 있다. 그것을 ‘교육 문제’라며 조삼모사 꼴의 피상적인 처치만 거듭해 온 결과가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번의 황당한 계엄 사태에 교육 이야기를 갖고 달려드는 버릇도 이런 현실에 우리 사회가 무감해지는 데 한몫하고 있다.
본연을 유지할 때 교육은 비로소 힘을 지녀
교육이, 학교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이 아니다. 사회 문제 해결에 교육이 공헌하지 못한다는 말도 아니다. 교육은 막대한 힘을 지닌다. 우리나라가 교육을 토대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는 ‘신화’는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교육이 그렇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문제 해결이란 ‘실용 목표’에 교육을 겨냥시켜 활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교육을 본연대로 흘러갈 수 있게 허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정신 함양이니 실업교육 진흥이니 하며 과거에도 교육을 수단시한 정책들은 적지 않았다. 그렇게 정책들이 교육을 오도한 구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이 성과를 이룬 데가 있다면, 그것은 교육을 수단시했던 정책들의 효과가 아니라, 수단시에도 불구하고 본연을 유지했던 ‘현장’(정책과는 거릴 두었던) 교육 실천의 성과라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 문제가 교육으로 해결되는 현상은 말하자면 교육이 의도하지 않은 ‘부수적인’ 효과이다. 본연을 지킨 교육이 사람을 제대로 키웠기에 ‘부수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것이다. 인공지능 개발에 종사할 사람을 키운다는 목표 아래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수학의 아름다움에 혹할 수 있게 가르쳐야 인공지능의 미래 대비도 ‘저절로’ 되는 것이다. 계엄 사태에서 돌아다니는 이야기에서처럼 교육을 사회 문제 해결 수단으로 동원하면 이런 부수적 효과마저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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