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4-09-13 12:03
| “영아들은 어떤 존재일까? 드러나는 것과 같이 영아는 배움의 권리와 자율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그저 그런 존재인가? 이번 칼럼을 통해 배움의 존재인 영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 보도록 하자!” (본문 발췌) |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미래사회로의 변화와 당면하고 있는 유보통합 이슈는 우리에게 영유아교육이 지향해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지에 대해 깊은 사유와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그동안 서양 철학을 근간으로 하는 구조주의 사조와 발달주의적 이론은 영유아교육 분야의 지배담론으로 오랫동안 군림해 왔다. 이와 함께 영유아교육계 전반에서는 어린아이인 영아에 대한 어른들의 우월적 지위가 향유되어 왔다.
영아를 향한 ‘어린애 같은’, ‘부족함’, ‘미성숙’과 같은 표현은 그들을 어른에 비해 ‘부족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어 왔다(황옥경, 2024). 최근 들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주린이’, ‘등린이’, ‘헬린이’1 등의 신조어 역시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 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어린아이는 늘 부족하고 서툰 존재라는 편견이 반영된 것으로, 어린아이를 (전지전능한) 어른들의 가르침을 그저 따르는 ‘가르침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영아를 비롯한 어린아이의 존재 가치를 낮추는 지극히 어른 중심적인 인식론에서 기인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영유아교육의 관점에서 영아는 유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해 왔다. 유보통합이라는 주요 이슈에 편승하여 그동안 소외되었던 영아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는 있으나, 영아는 유아에 비해 여전히 어른의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수동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른들은 영아와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하며 놀이하는 것을 교류와 배움의 순간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아를 향한 수혜적 행동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어른들이 영아들에게 자주 사용하는 ‘놀아 줄게’와 같은 표현은 수혜적 행동의 대표적인 언표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아들은 어떤 존재일까? Deleuze의 시선에서 영아는 어른과 이분법적으로 나눠진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온전한 세계이자 생성으로 다가온다. 영아는 실증주의에서 의미하는 성숙하고 완전한 성인으로 되어가는 과정에 놓인 존재가 아니라, 어른과 동일한 삶 속에서 되어가는 중인 존재로 성인과 다르지 않은 역동적인 행위자이자 ‘나’ 자체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라은정, 2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유보통합 추진 과정을 통해 영아는 여전히 돌봄과 보호의 대상이자 소외된 자로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영아는 돌봄’, ‘유아는 교육’이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영유아교육을 철저히 분리하고 있으며, 영아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어른의 보호와 돌봄만이 필요한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로 기능하고 있어 보인다. 드러나는 것과 같이 영아는 배움의 권리와 자율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그저 그런 존재인가? 이번 칼럼을 통해 배움의 존재인 영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 보도록 하자!
영아기 교육의 현주소
초기의 발달심리학자들은 영아를 비롯한 아동을 불완전하고 수동적이며 순응적인 존재로 바라보았다. 특히 영아는 연령별 발달단계로 나눈 아동기에서도 가장 아래 단계에 속해 있는 미성숙한 대상으로 타자화되었다. 영아에 대한 인식은 불완전함과 무능함으로 고착되었으며, 이와 같은 인식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여전히 불합리하게 작동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뇌과학을 통해 영아는 배움의 준비가 되어 있고, 태어나면서부터 배울 수 있는 존재임이 속속 증명되고 있다. 최근에는 영아를 ‘어린학습자(early learner)’로 지칭하며 영아를 대상으로 한 체계적이고 적절한 교육적 지원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와 함께 세계적으로도 영아를 포함한 생애 초기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UN에서는 아동권리협약을 통해 생애 초기부터 모든 영아에 대한 동등한 교육적 지원의 중요성을 표명하였고, OECD 등에서는 ECEC(Early Childhood Education and Care)2 명명을 통해 영아기 교육과 돌봄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아기 교육은 뇌와 신경, 사회적 기술, 기초 학습 능력, 정서적 안정, 긍정적 행동 등 생애 초기 성장에 있어 중요한 기초를 형성하게 한다. 이 시기 영아는 주변과 끊임없이 내부작용3하며 배워가는 시기이다. 그중 놀이는 영아의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복적인 과정이자 세상을 배우는 의미 있는 경험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그동안 영아들의 놀이는 유아들의 놀이에 비해 의미 해석의 어려움으로 인해 대부분 발달 연구로 수행되어 왔고(곽승주, 이승숙, 김혜숙, 2016), 낮은 수준의 놀이로 이해되었다(장새별, 2020). 이에 영아 놀이는 보편적이고 예측 가능한 활동으로 간주되었고(MacNaughton, 2005), 감각적이고 물질적이며 독특성 있는 놀이 방식과 고유한 소통 방식은 철저히 무시되어 왔다(동풀잎, 2024).
영아기 놀이와 배움
이제 우리는 영아가 그저 어린 존재가 아니라, 늘 배우는 존재이자 앎과 해방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존재임에 주목해야 한다. 영아의 배움 또한 그들의 삶에 있어 중요한 의미이자 생명력 있는 배움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아는 삶의 매 순간 즐거움과 배움을 경험한다. 일상과 놀이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측면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돌봄의 비중이 높은 영아의 등·하원, 낮잠, 기저귀 갈기나 화장실 가기, 손 씻기, 간식이나 식사와 같은 일상적인 순간에 즐거움과 배움이 담겨있다(동풀잎, 2024).
영아는 어른보다 민감함을 발휘해 타자들과의 마주침을 준비하고 있다. 당연한 일은 존재하지 않으며 매 순간이 배움의 순간으로 연결된다. 한 돌이 되었기 때문에 걷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학습자인 영아 스스로 발생한 동기에 의해 많은 시도와 계속되는 반복에서 차이를 깨달으며, 그리고 주변의 모든 타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걷기에 성공하는 것이다. 스스로 밥을 먹게 되었을 때도, 뛰게 되었을 때도, 이는 해야 될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게끔 만드는 동기와 욕망에 의해 시도하고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라은정, 2020). 따라서 영아들마다 걷는 시기가 같을 수 없고 뛰는 방법이 같을 수 없다.
영아의 놀이와 배움은 어른의 예측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연한 마주침에서 시작한다. 영아의 놀이와 배움 역시 차이를 가지면서 반복되고 끊임없이 생성된다. 영아의 놀이와 배움은 다층적이고 그 안에서 운동과 실험이 회절4적으로 일어난다. 영아들이 발달에 적합한 놀이와 학습만 수행할까? 부모와 교사가 제시한 물질로 예상한 놀이와 배움만 수행할까?
영아는 차이에 열려 있다. 특히 본인과 타자 사이의 매 순간마다 나타나는 다양성의 차이에 열려 있으며, 이로 인한 마주침을 통해 감응되는 존재이다. 하지만 여전히 다수의 영아들은 그들의 삶에서 어린 학습자가 아니라 어른의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수동적인 존재로 남아 있는 듯하다.
관계론적 존재로서 어린 학습자 되기
영아에게 있어 배움은 삶 속에서 만나는 무수히 많은 타자들과 함께 얽히는 과정에서 차이를 만들고 또 새로운 것이 생성되는 순간일 것이다. 영아들은 우연한 마주침에서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험과 운동을 끊임없이 이어갈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또다시 차이를 발견하고 새로운 배움에 감응할 것이다.
“모든 현실적 삶은 만남이다. 그리고 각 만남은 중요하다” (Barad, 2007).
Barad(2007)의 주장과 같이 영아와 물질의 만남은 개체보다 앞서며, 관계는 주체보다 앞선다. 우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오직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고 생성된다. 현실의 기본 단위는 독립된 사물이 아니라 현상과 관계들이고, ‘내부작용’ 하는 다양한 행위성들의 얽힘이다. 영아의 행위성 역시 ‘따라하기’가 아니라 ‘관계하기’에 있다. 관계적 존재론에서 ‘타인’이 없는 ‘나’의 존재는 없으며, ‘우리’가 없는 ‘나’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배움의 존재로서 영아는 물질과 관계 맺고 응답하고 있으며 세계의 역동성에 참여하는 존재다.
다시 유보통합 이슈로 돌아가 보자. ‘돌봄’과 ‘교육’을 이분화하고 있는 논점에서는 여전히 ‘돌보고’,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영유아를 나누고 있다. 영아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 유아는 교육이 필요한 존재로 구분한다는 것에는 교사가 영아를 돌보고 유아를 가르쳐야 한다는 의식이 분명하게 내재되어 있다(정선아, 박보영, 2023). 수많은 배움과 마주치게 될 아이들, 돌봄과 교육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봐야 할 것인가? 영아의 돌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돌봄과 일상은 배움과 분리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횡단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참고문헌
• 곽승주, 이승숙, 김혜숙 (2016). 학술지 논문 분석을 통한 영유아 놀이의 최근 연구동향분석. 유아교육학논집, 20(3), 349-374.
• 동풀잎 (2024). 영아의 놀이와 배움 새롭게 보기: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중심으로. 한국영유아교육과정학회 춘계학술대회 자료집. p.43-55.
• 라은정 (2020). 영아의 삶 속에서 배움 바라보기.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장새별 (2020). Deleuze의 ‘감응’을 통해 본 영아의 놀이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정선아, 박보영 (2023). 0세 영아반 교사의 ‘돌봄행위(caring)에서 돌봄통합교육과정 수행성 보기. 생태유아교육연구, 22(2), 1-30.
• 황옥경 (2024). 아동권리 관점에서 본 어린사람 영아 중심 배움 교육 과정의 의미. 한국영유아교육과정학회 춘계학술대회 자료집. p.3-14.
• Barad, K. (2007).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Quantum Physics and the Entanglement of Matter and Meaning.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 MacNaughton, G. (2005). Doing Foucault in early childhood studies: Applying post-structural ideas. New York: Routledge.
• OECD. (2006). Starting strong II: Early childhood education and care.
Source URL: http://21erick.org/column/1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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