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yobasaNPO | 2023-03-15 11:00
| “사랑이 아닌 추앙이란 말을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 드라마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추앙을 현실에서도 실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 “너의 추앙이 너의 잘못이 아니듯, 나의 두려움도 아마 나의 잘못이 아닐 수 있다” (본문 발췌) |
1. 추앙
사랑이 아닌 추앙이란 말을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는 추앙을 받는 사람보다 추앙을 하는 사람이 멋있어서 장안에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그런 추앙을 현실에서도 실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파랑새에서 보았던 추앙도 한 교차점의 불꽃으로 시작되었다. 교차점의 한 축에는 월드컵을 보고 난 후 갑자기 축구를 깊이 사랑하게 된 남자아이들 몇이 있었다. 교차점의 다른 축에는 노는 일이라면 안 빠지고, 공부라면 절대 피하고 보는 6학년 형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파랑새의 6학년 형도 드라마 속의 매력적인 배우와 닮은 점이 있다. 형도 그 드라마 속 배우처럼 늘 허름하고 추레한 차림새일 때가 많았다. 사시사철을 슬리퍼 하나로 살아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차림새에는 거의 마음을 두지 않아 보였다. 약간 껄렁한 태도에 언뜻 불량스러운 모습도 비슷하다. 하지만 아마 그뿐이었을 것이다.
추앙은 정말 작은 불씨에서 비롯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이 처음부터 한두 학년 아래 어린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기에 하는 말이다. 형은 오히려 자주 원망과 원성의 대상이었다. 특히 툭하면 비아냥거리며 남을 별로 봐주는 법이 없는 형의 태도에 사람들은 자주 화가 났었다.
그래서 형은 외롭고 심심해하는 편이었다. 형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누군가와 자신에게 아량을 베풀어 줄 집을 찾아 떠돌았다. 형은 그런 아이를 찾는 데 오랜 수고를 기울였다.
형은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길 마다하지 않았다. 형을 자기 집에서 만난 남자아이들 대부분은 온종일 집에도 안 가고 함께 게임을 하며 같이 있어 주는 형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형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은 늘 교사와 부모들이었다. 부모들은 “같이 노는 건 괜찮지만,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저녁이 되어도 집에도 안 가고, 또 게임을 하면서 욕도 너무 많이 해서 좀 그렇다”면서 형이 싫다는 눈치를 주곤 하였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들은 교사들은 남의 집에 가서 폐를 끼치지 말라며 형에게 성화를 부리곤 하였다. 그렇게 형은 한 집, 한 집을 힘겹게 거쳐 가며 방황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런 형에게도 마침내 안식처가 생겼다. 차림새도 그렇고, 잘 씻지도 않는 편이지만 형은 미학적 기준이 높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볼 수 없기에 또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형은 거침없이 타인의 외모와 취향을 판단하는 데만 골몰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그렇고 그런 점을 잡아채 한마디씩 신랄하게 갈기는 데 힘을 쏟기도 하였다. 그것이 형의 입장에서는 복수가 되기도 하고, 조롱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심심풀이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형의 그런 태도를 유난히 못 견디는 사람들은 바로 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소수의 아이들은 그런 태도를 재미있어 하며 낄낄거리기도 하였다. 그런 동조의 웃음이 형에게는 큰 자극과 동기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형이 선택한 아이는 그런 동조의 웃음을 짓던 아이들 중 하나다. 아이는 형과 마찬가지로 랩과 음악을 좋아하고, 유튜브 보기와 게임에 골몰하는 비슷한 취향을 가졌다. 거기에 나쁘지 않은 외모도 갖춘 데다 무엇보다 아이의 부모님께서 형과 아이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 전폭 환영을 해주시는 점에서 더할 나위가 없는 조건을 갖춘 아이였다. 아이도 형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점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두 아이는 마치 형제처럼 서로를 챙기기 시작하였다. 두 아이는 모든 차이를 넘어서 서로 함께 하고자 했다. 형이 특히 그랬다.
형의 축구는 어쩌면 그런 둘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둘의 축구가 셋이 되고, 넷, 다섯, 여섯이 되면서 아이들의 축구는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추운 줄도 모르고 겨울날에도 밖에서 공을 차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어느 겨울날부터는 저녁을 먹고 공을 차기 시작하였다. 토요일 프로그램이 끝난 순간부터, 아니 토요일 프로그램을 빼먹고 축구에 공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일요일을 빼먹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때부터다. 아이들이 형을 추앙하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아이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축구와 함께 해주는 형의 곁을 맴돌기 시작하였다. 형이 원치 않아도 음료수를 사다 주고, 먹을 것을 챙기곤 하였다. 함께 밥을 먹거나 프로그램을 할 때면 서로 형의 곁을 차지하려고 다투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형이 오기를 기다리고, 센터에 오면 형이 있는지부터 챙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형의 인생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형이 아이들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형을 기다리고, 주말이면 형을 자신의 집으로 다투어 초대하였다. 그렇게 마침내 형의 날이 온 것만 같았다.
2. 이별
그러나 드라마처럼 좋은 일은 늘 금세 종말을 맞는다. 형이 파랑새를 졸업하게 된 것이다. 형은 은근슬쩍 중학생이 되어서도 파랑새에 남기를 시도해 보았으나 교사들은 힘들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마침내 추앙이 시작되었으나 추앙은 큰 아쉬움으로만 남을 듯 하였다.
형도 형이지만 아이들 역시도 형을 보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아이들은 형이 졸업을 하더라도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해줄 것이라는 걸 굳게 믿는 눈치였다. 그리고 실제 형이 졸업을 한 후에는 센터가 끝나고 형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가장 달가워하지 않은 사람은 물론 교사였다. 교사들이 마련한 시간을 마다하고 아이들이 형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순간에는 특히 그러하였다.
교사는 물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 밥은 어떻게 할 거니?” 아이들은 안 먹어도 된다고 하였으나 교사는 코웃음을 쳤다. 교사는 형이 아닌 아이들이 음식값을 댈 가능성이 크고, 또 아이들 중 누군가의 집에서 식사를 해결하려 들 가능성이 크다는 것에 우려를 나타냈다. “너희들 중 형 집에 가 본 사람 있니?” 형이 자기 집에는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고 남의 집에서만 신세를 질 것이란 점을 확신이라도 한다는 듯 교사가 물었다. “네, 저도 한 번 가봤어요.” 그러나 교사의 생각과 달리 아이들 몇몇은 형의 집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답을 하였다. 교사의 예상과는 달리 형은 그리 도리가 없거나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은 은연중 항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사는 계속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형을 배제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 교묘한 언사를 잘 살펴보면 결국 형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되고 만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말을 하진 않지만 무언가를 염려하며 형을 만나지 말길 은밀히 종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런 자신의 태도에 갈등을 느끼는 눈치다. 그러다 보니 결국 만나라고도 만나지 말라고도 말하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태도가 되어버리고 만다. 아이들은 그런 틈을 비집고 “그럼 매일 센터가 끝나고 또 일요일에는 형을 계속 만나도 되는 거죠?”하고 기쁨에 들떠 묻는다. 사실 아이들이 계속 추앙을 하겠다면 그것을 뉘라서 막을 수 있겠는가?
3. 추앙의 힘
이런 우여곡절을 아이들만 겪어낸 것은 아니다. 형은 자신이 파랑새를 떠나더라도 언제든 정든 이곳을 찾아와 마음껏 회포를 풀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기에 사실 떠날 때도 그리 아쉬운 마음 없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형이 생각하기에는 공부라는 되지도 않을 일에 시간을 쓰기보다는 아버지 일을 돕고 있다가 아이들이 시간이 되면 함께 만나서 축구도 하고 그렇게 지내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니 졸업이 아쉽긴 하지만, 썩 그리 나쁘진 않은 일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별 후에 이처럼 큰 벽을 만나게 될지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제 막 중학교를 입학한 터라 아직은 아무도 함께 놀 사람도 없는 처진데, 센터 교사가 눈치를 주면서 파랑새에 오지 말았음하고 은근슬쩍 압력을 가할 줄은 차마 생각도 못 했다.
형은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였다. “놀 사람이 없는데 그럼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에요?” 형은 울면서 따져 물었다. 하지만 교사는 ‘네가 놀 사람이 없다고 파랑새 아이를 붙잡아두는 건 옳지 않은 것 같다’고 염장을 지르는 소리만 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뒤에 두고 왔는데, 그런 줄 뻔히 아는 교사가 돌아보지 못하게 장벽을 세우고 있으니 기가 찰 뿐이다. “내가 뭘 어쨌다고 저러는 건가?”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또 억울하다.
추앙을 바라긴 했지만 형이 직접 추앙을 하라고 시킨 적은 결코 없다. 자신은 시간 내서, 마음 내서 그냥 함께 열심히 놀았을 뿐이다. 그 결과로 아이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따르게 된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내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형의 결론이다. 그런데도 왜 내가 억울한 눈총을 받아야 하는지 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억울함과 서글픔이 조금씩 형의 열정을 갉아먹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형은 차츰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이 주일 만에 형은 아이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형은 기회가 된다면 교사에게 묻고 싶을 것이다. “나의 무엇이 당신에게 두려움을 주었는가?”하고 말이다. “아이들이 나를 추앙하는 것이 나의 죄는 아니지 않는가?”하고 묻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형의 말은 그르지 않다.
그러나 늘 자신의 말을 준비하는 교사는 “너의 추앙이 너의 잘못이 아니듯, 나의 두려움도 아마 나의 잘못이 아닐 수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네가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보며 함께 깔깔거릴 때, 네가 좋다는 이유로 네가 원하는 것을 갖다주고 싶어 할 때, 네 곁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고 난리를 부리며 너와 함께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다고 할 때, 그런 추앙의 모습은 나를 두렵게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사랑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 사랑의 힘은 때론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형의 그런 점들을 사랑하는 것은 형의 잘못이 아니라 사랑을 시작한 아이들의 잘못이지만, 너를 우선 막아서고 보는 나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말까지 더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파랑새의 추앙은 드라마처럼 멋지고 명확하게 끝나지 못했다. 사실 그 드라마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나는 그런 결론을 비교하는 것이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형에 대한 추앙이 조금은 사그라든 듯도 보이는 지금은 형이 중학교에 가서 더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더 좋은 날들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에게도 이야기했듯이 형 또래들과의 보다 나은 관계들 속에서 형이 조금 더 성장하기를 빌어 본다. 그리고 그런 만남과 성장 후에 변화된 모습으로 동생들을 만나러 와주길 고대해 본다. 형에 대한 추앙을 아이들이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그리고 그런 추앙을 두려움 없이 지켜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추앙의 언저리를 되짚어 본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Source URL: http://21erick.org/column/10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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